방과 후 고전 중
주자가 『본의(本義)』를 지은 까닭은 주역 공부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한다. 하지만 주역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주자가 쓴 『근사록(近思錄)』을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2017년 처음 근사록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근사록』의 1편 「도체(道體)」를 보면 괘에 대한 문장이 많은데, 거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었다. 『주역』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다음 편인 「위학(爲學)」편의 글들과 많이 다르게 느껴져 생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도체」에 나온 글들이 주역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훨씬 후에 알았고, 그 글들이 왜 『근사록』의 첫머리가 되어야 했는지는 그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다. 역, 주역, 주역전의, 주역본의 … 고전 공부를 하다 보면 처음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사람 이름이다. 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본명도 있고, 호(號)도 있고, 자(字)도 있고, 관직명을 같이 부르기도 하고, 죽고 난 뒤에 시호(諡號)도 있고. 이걸 다 섞어서 쓰니까, 읽으면서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떨 때는 따로 적어 두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책 이름도 비슷한 예가 있다. 인명처럼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책을 다르게 부르면 처음 공부하는 입장에선 매번 새로운 책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예를 들자면 서경(書經)을 서(書), 상서(尙書) 등으로 부르는데 경전의 의미를 밝히면 서경으로, 존귀한 책의 의미로는 상서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주역(周易)도 역(易), 역경(易經), 등으로 부른다. 그런데 우리가 ‘이문서당’에서 공부한 주역 책에는 단순히 ‘주역’, 혹은 ‘역’이라고 되어...
주자가 『본의(本義)』를 지은 까닭은 주역 공부를 해야겠다고 늘 생각한다. 하지만 주역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주자가 쓴 『근사록(近思錄)』을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2017년 처음 근사록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근사록』의 1편 「도체(道體)」를 보면 괘에 대한 문장이 많은데, 거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었다. 『주역』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다음 편인 「위학(爲學)」편의 글들과 많이 다르게 느껴져 생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도체」에 나온 글들이 주역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훨씬 후에 알았고, 그 글들이 왜 『근사록』의 첫머리가 되어야 했는지는 그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다. 역, 주역, 주역전의, 주역본의 … 고전 공부를 하다 보면 처음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사람 이름이다. 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본명도 있고, 호(號)도 있고, 자(字)도 있고, 관직명을 같이 부르기도 하고, 죽고 난 뒤에 시호(諡號)도 있고. 이걸 다 섞어서 쓰니까, 읽으면서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떨 때는 따로 적어 두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책 이름도 비슷한 예가 있다. 인명처럼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책을 다르게 부르면 처음 공부하는 입장에선 매번 새로운 책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예를 들자면 서경(書經)을 서(書), 상서(尙書) 등으로 부르는데 경전의 의미를 밝히면 서경으로, 존귀한 책의 의미로는 상서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주역(周易)도 역(易), 역경(易經), 등으로 부른다. 그런데 우리가 ‘이문서당’에서 공부한 주역 책에는 단순히 ‘주역’, 혹은 ‘역’이라고 되어...
방과 후 고전 중
올해 고전학교에서 읽고 있는 『주역철학사』에서 ‘횡거철피橫渠撤皮’라는 고사성어를 보았다. 주희朱熹의 이정어록二程語錄의 설명에 따르면, “장재는 학문이 높고 강의도 잘해 그의 집은 가르침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어느 날 정호·정이 형제가 그를 찾아 주역에 관한 가르침을 청하면서 도道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장재는 사람들을 향해 ‘지금까지 나의 강의는 잘못되었으니 모두 잊어버려라. 대신 정씨 형제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호피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고향인 섬서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후대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장재(張載,1020~1077)의 자字는 자후子厚이고 대대로 대량大樑에 거주해온 벼슬집안 출신으로, 오랫동안 섬서성陝西省 미현堳縣 횡거진橫渠鎭에 머물면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횡거선생’이라 불렸다. 송명 리학의 기초를 닦은 한 사람으로 리학 4대 학파 가운데 관학파關學派의 개창자이다. 이정二程과 장재, 셋은 1056년, 북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만난다. 36세의 장재가 12~13세의 외종질(外從姪: 외사촌의 아들)인 정호(程顥, 1032-1085)ㆍ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만나 주역에 대하여 논論하고 나서 그 들의 도道에 대하여 밝고 깊다고 칭찬하며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는 것인데, 나이 차이와 관계(조카)에서 오는 ‘정말 그랬을까? 후배 리학자들의 과도한 설정이지 않을까?’하는 미심쩍은 의혹부터 든다. 동시에 호기심이 뒤따라온다. 철피撤皮했다, 낙향落鄕했다는 것을 빼고 나면, ‘그의 도가 밝다’고 칭찬한 점이 남기 때문이다. 장재가 공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중국 고전이 존재론(본체론·우주론·생성론), 인성론(심성론), 지식론(인식론), 윤리학 등의 주제가 뒤섞여 있지만, 마지막 윤리학으로 가는 출발점은 존재론이므로 이에 대한 그들의 의견들을 정리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정二程의 존재론 형인 정호는 천리天理는...
올해 고전학교에서 읽고 있는 『주역철학사』에서 ‘횡거철피橫渠撤皮’라는 고사성어를 보았다. 주희朱熹의 이정어록二程語錄의 설명에 따르면, “장재는 학문이 높고 강의도 잘해 그의 집은 가르침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어느 날 정호·정이 형제가 그를 찾아 주역에 관한 가르침을 청하면서 도道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장재는 사람들을 향해 ‘지금까지 나의 강의는 잘못되었으니 모두 잊어버려라. 대신 정씨 형제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호피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고향인 섬서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후대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장재(張載,1020~1077)의 자字는 자후子厚이고 대대로 대량大樑에 거주해온 벼슬집안 출신으로, 오랫동안 섬서성陝西省 미현堳縣 횡거진橫渠鎭에 머물면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횡거선생’이라 불렸다. 송명 리학의 기초를 닦은 한 사람으로 리학 4대 학파 가운데 관학파關學派의 개창자이다. 이정二程과 장재, 셋은 1056년, 북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만난다. 36세의 장재가 12~13세의 외종질(外從姪: 외사촌의 아들)인 정호(程顥, 1032-1085)ㆍ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만나 주역에 대하여 논論하고 나서 그 들의 도道에 대하여 밝고 깊다고 칭찬하며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는 것인데, 나이 차이와 관계(조카)에서 오는 ‘정말 그랬을까? 후배 리학자들의 과도한 설정이지 않을까?’하는 미심쩍은 의혹부터 든다. 동시에 호기심이 뒤따라온다. 철피撤皮했다, 낙향落鄕했다는 것을 빼고 나면, ‘그의 도가 밝다’고 칭찬한 점이 남기 때문이다. 장재가 공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중국 고전이 존재론(본체론·우주론·생성론), 인성론(심성론), 지식론(인식론), 윤리학 등의 주제가 뒤섞여 있지만, 마지막 윤리학으로 가는 출발점은 존재론이므로 이에 대한 그들의 의견들을 정리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정二程의 존재론 형인 정호는 천리天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