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학잡담
보편학문으로서의 ‘기학’   혜강 최한기(1803~1877)는 19세기 조선에 살았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인한 폐해가 극심했다. 소수의 권력독점에 정치가 문란해지고 가혹한 수탈로 농민은 몰락해갔다. 가난한 나라, 비참한 백성, 거기에 외세의 압력까지 최한기가 목도한 조선의 현실은 암울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양반이었지만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그는 읽고, 쓰고, 공부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독립연구자였다. 그는 가진 재산을 책을 사는데 다 써버렸다. 오죽하면 책 사다 망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을까. 사대문 안에 살았지만 결국 도성 밖으로 셋집을 얻어 이사 갔을 정도였다. 그가 산 책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학문과 관련된 책이었다. 특히 천문학과 서양의 자연과학 및 기술에 관련된 책은 그의 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방대한 저술들을 읽고 공부한 최한기는 무려 1000여권의 책을 썼다. 대부분 철학과 과학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데,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 최한기가 55세 때 쓴 『기학』은 그의 기철학에 대한 사유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최한기는 자신의 학문을 ‘기학’이라 명명했다. 그가 말하는 기는 운화유형(運化有形)의 기이다. 그것은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본성을 가진 것으로서 우주 안에 가득차서 조금의 빈틈도 없다. 이 기는 우주의 궁극적 본원으로서 스스로 그러한 원리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고 순환하고 변화시킨다. 기화(氣化)에 의해 생성된 만물에는 각각의 고유한 작동원리가 있다. 이것이 리다. 리는 기의 내재적 조리, 속성, 법칙일 뿐이다. ‘기학’에서의 리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물리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기학’은...
보편학문으로서의 ‘기학’   혜강 최한기(1803~1877)는 19세기 조선에 살았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인한 폐해가 극심했다. 소수의 권력독점에 정치가 문란해지고 가혹한 수탈로 농민은 몰락해갔다. 가난한 나라, 비참한 백성, 거기에 외세의 압력까지 최한기가 목도한 조선의 현실은 암울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양반이었지만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그는 읽고, 쓰고, 공부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독립연구자였다. 그는 가진 재산을 책을 사는데 다 써버렸다. 오죽하면 책 사다 망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을까. 사대문 안에 살았지만 결국 도성 밖으로 셋집을 얻어 이사 갔을 정도였다. 그가 산 책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학문과 관련된 책이었다. 특히 천문학과 서양의 자연과학 및 기술에 관련된 책은 그의 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방대한 저술들을 읽고 공부한 최한기는 무려 1000여권의 책을 썼다. 대부분 철학과 과학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데,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 최한기가 55세 때 쓴 『기학』은 그의 기철학에 대한 사유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최한기는 자신의 학문을 ‘기학’이라 명명했다. 그가 말하는 기는 운화유형(運化有形)의 기이다. 그것은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본성을 가진 것으로서 우주 안에 가득차서 조금의 빈틈도 없다. 이 기는 우주의 궁극적 본원으로서 스스로 그러한 원리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고 순환하고 변화시킨다. 기화(氣化)에 의해 생성된 만물에는 각각의 고유한 작동원리가 있다. 이것이 리다. 리는 기의 내재적 조리, 속성, 법칙일 뿐이다. ‘기학’에서의 리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물리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기학’은...
토용
2025.11.24 | 조회 189
기학잡담
서울사람 최한기   대학에서 연애할 때, 상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고, 나는 초, 중, 고를 모두 지방에서 나온 촌뜨기였다. 인(in)서울 대학에 다녔어도, 나는 꽤 오랜 시간 서울에만 가면 동서남북도 가늠하기 어려워 주눅이 들었다. 그때 연애상대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서울지리를 가르쳐주겠다”며 은근히 장기연애의 속내를 비쳤지만, 바로 그 말이 시골 촌뜨기의 자존심을 긁었다는 것을 그는 지금도 모를 것이다. 나는 여전히, 태생이 서울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타산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의 서울 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 이면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그 문화의 혜택에 대한 시샘도 있을 것이다. 혜강 최한기는 조선조의 서울 사람이었다. 도올은 혜강 최한기가 기학(氣學)이라는 사상체계를 확립한 배경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울시내의 상식’이었다고 말한다. 상식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알게 되는 지식이나 가치판단 같은 것이니까, 최한기가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지 않았다면 기학이라는 사유는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아래 오른쪽 이미지는 한양 도성전도) 혜강 최한기에 대한 수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평생 공부만 하며 살 수 있었던 양반이었고, 서양의 최신 학문 서적을 사서 볼 수 있는 부자였고, 생전에 천 권에 이르는 저술을 해낸 빼어난 지식인이었다. 구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전망이 들끓는 19세기 조선, 물산과 기술과 정치가 집중되는 서울, 옛날의 경학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새로운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대학자의 호기심과 경탄이 뒤섞인 사회문화적 에토스 속에서, 그의 말대로...
서울사람 최한기   대학에서 연애할 때, 상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고, 나는 초, 중, 고를 모두 지방에서 나온 촌뜨기였다. 인(in)서울 대학에 다녔어도, 나는 꽤 오랜 시간 서울에만 가면 동서남북도 가늠하기 어려워 주눅이 들었다. 그때 연애상대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서울지리를 가르쳐주겠다”며 은근히 장기연애의 속내를 비쳤지만, 바로 그 말이 시골 촌뜨기의 자존심을 긁었다는 것을 그는 지금도 모를 것이다. 나는 여전히, 태생이 서울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타산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의 서울 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 이면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그 문화의 혜택에 대한 시샘도 있을 것이다. 혜강 최한기는 조선조의 서울 사람이었다. 도올은 혜강 최한기가 기학(氣學)이라는 사상체계를 확립한 배경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울시내의 상식’이었다고 말한다. 상식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알게 되는 지식이나 가치판단 같은 것이니까, 최한기가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지 않았다면 기학이라는 사유는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아래 오른쪽 이미지는 한양 도성전도) 혜강 최한기에 대한 수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평생 공부만 하며 살 수 있었던 양반이었고, 서양의 최신 학문 서적을 사서 볼 수 있는 부자였고, 생전에 천 권에 이르는 저술을 해낸 빼어난 지식인이었다. 구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전망이 들끓는 19세기 조선, 물산과 기술과 정치가 집중되는 서울, 옛날의 경학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새로운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대학자의 호기심과 경탄이 뒤섞인 사회문화적 에토스 속에서, 그의 말대로...
봄날
2025.10.16 | 조회 257
기학잡담
리(理) 말고 기(氣)로 생각하기   올해 내가 공부하고 있는 개념탐구학교에서는 새로운 존재론을 탐색하기 위해 동양과 서양의 책을 번갈아가며 읽고 있다. 서양 쪽은 신유물론 관련 책을, 동양 쪽은 기학(氣學)에 대한 책을 읽는다. 지난 번 『주역』 「계사전」에 이어 이번 텍스트는 장재의 『정몽』이다. 장재는 북송시대 유학자이다. 정호, 정이, 주돈이, 소옹 등과 함께 북송오자로 거명될 정도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학자이다. 정호는 그를 맹자에 비견했고,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도 장재의 사상에 많은 빚을 졌다.   북송시대는 사상적으로 활발한 시대였다. 이 시기 유학자들이 급선무로 생각했던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불교와 도교에 빼앗긴 사상적 주도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정치·제도적 차원에서는 유가적인 시스템이 작동했지만, 사상적·종교적 차원에서는 불교와 도교가 사람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특히 불교는 심오한 사상과 수양법으로 지식인들 사이에도 깊이 침투되었다. 유학자들은 모든 것이 허(虛)라던가 공(空)이라고 하는 도교와 불교의 사상이 유교적 사회질서를 해치는 심각한 병폐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유학자들은 저마다의 학설을 피력하며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 시기 유학자들이 『주역』 연구에 몰두했던 것도 이런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유교적 사회질서가 우주자연의 질서에 상응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유교도 불교, 도교에 맞먹는 우주론과 존재론이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장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주역』 해설서인 『횡거역설』을 지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만년의 저서 『정몽』에 담았다. 장재는 젊은 시절 여러 해 동안 불교와 도교를 깊이 공부했으나 결국 유학으로 돌아왔다. 이 때문이었을까? 장재는 자신의 학설에 도교적인 것을...
리(理) 말고 기(氣)로 생각하기   올해 내가 공부하고 있는 개념탐구학교에서는 새로운 존재론을 탐색하기 위해 동양과 서양의 책을 번갈아가며 읽고 있다. 서양 쪽은 신유물론 관련 책을, 동양 쪽은 기학(氣學)에 대한 책을 읽는다. 지난 번 『주역』 「계사전」에 이어 이번 텍스트는 장재의 『정몽』이다. 장재는 북송시대 유학자이다. 정호, 정이, 주돈이, 소옹 등과 함께 북송오자로 거명될 정도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학자이다. 정호는 그를 맹자에 비견했고,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도 장재의 사상에 많은 빚을 졌다.   북송시대는 사상적으로 활발한 시대였다. 이 시기 유학자들이 급선무로 생각했던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불교와 도교에 빼앗긴 사상적 주도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정치·제도적 차원에서는 유가적인 시스템이 작동했지만, 사상적·종교적 차원에서는 불교와 도교가 사람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특히 불교는 심오한 사상과 수양법으로 지식인들 사이에도 깊이 침투되었다. 유학자들은 모든 것이 허(虛)라던가 공(空)이라고 하는 도교와 불교의 사상이 유교적 사회질서를 해치는 심각한 병폐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유학자들은 저마다의 학설을 피력하며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 시기 유학자들이 『주역』 연구에 몰두했던 것도 이런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유교적 사회질서가 우주자연의 질서에 상응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유교도 불교, 도교에 맞먹는 우주론과 존재론이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장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주역』 해설서인 『횡거역설』을 지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만년의 저서 『정몽』에 담았다. 장재는 젊은 시절 여러 해 동안 불교와 도교를 깊이 공부했으나 결국 유학으로 돌아왔다. 이 때문이었을까? 장재는 자신의 학설에 도교적인 것을...
토용
2025.09.01 | 조회 371
기학잡담
장재에게 계사전이란 주역공부를 시작한 이래 여러 학자들이 해석한 버전의 <계사전>을 읽어왔다. 왕필 같은 의리역학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대부분의 유학자들에게 계사전은 주역의 철학적 가치, 주역의 자연관, 세계관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텍스트로 여겨졌다. 그동안 정이천과 주희의 『주역전의(周易傳義』를 비롯해서 소식의 『동파역전(東坡易傳)』, 의리역의 왕필을 계승한 한강백의 계사주석, 왕부지의 『주역내전(周易內傳)』등을 읽었다. 올해초 개념탐구학교에서는 도올의 『도올 주역 계사전』강해를 공부했다. 여기에서 도올은 왕부지의 기학적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천지코스몰로지’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주역의 우주론을 펼쳤다. 이같은 과정에서 장재의 『횡거역설(橫渠易設)』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장재는 왕부지가 소위 ‘건곤병건설’, 즉 기론(氣論)에 입각한 그의 주역관을 세우는데 스승 역할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의리파 학자이면서도 그 계열 안에서 기(氣)를 중심으로 주역의 말들을 해석하면서 기학파(氣學派)라는 새로운 학문의 줄기를 세운 장재. 이번에 나는 횡거역설 중에서 계사전을 우선 읽기로 했다. 장재철학의 뿌리는 주역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만큼 장재는 주역연구에 집중했다. 그의 최대 역작이라 할만한 『정몽(正蒙)』도 그의 주역서인 횡거역설과 많은 부분 겹칠 정도로 장재철학의 바탕에는 주역의 사유가 짙게 배어있다. 왕부지는 “장재의 학문은 역학(易學)이 아님이 없고 장재의 말 또한 역학이 아님이 없다”고 말해 장재의 철학이 역학적 세계관의 기초 위에 세워졌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장재의 철학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역학관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장재는 <계사전>을 매우 중시했다고 한다. 장재는 그 이유에 대해 “<계사전>이 역도(易道)를 논하였고, 역도를 알면 역상(易象)은 그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장재의 관심은 역도를 탐구하는 것이었고 계사전이야말로...
장재에게 계사전이란 주역공부를 시작한 이래 여러 학자들이 해석한 버전의 <계사전>을 읽어왔다. 왕필 같은 의리역학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대부분의 유학자들에게 계사전은 주역의 철학적 가치, 주역의 자연관, 세계관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텍스트로 여겨졌다. 그동안 정이천과 주희의 『주역전의(周易傳義』를 비롯해서 소식의 『동파역전(東坡易傳)』, 의리역의 왕필을 계승한 한강백의 계사주석, 왕부지의 『주역내전(周易內傳)』등을 읽었다. 올해초 개념탐구학교에서는 도올의 『도올 주역 계사전』강해를 공부했다. 여기에서 도올은 왕부지의 기학적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천지코스몰로지’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주역의 우주론을 펼쳤다. 이같은 과정에서 장재의 『횡거역설(橫渠易設)』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장재는 왕부지가 소위 ‘건곤병건설’, 즉 기론(氣論)에 입각한 그의 주역관을 세우는데 스승 역할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의리파 학자이면서도 그 계열 안에서 기(氣)를 중심으로 주역의 말들을 해석하면서 기학파(氣學派)라는 새로운 학문의 줄기를 세운 장재. 이번에 나는 횡거역설 중에서 계사전을 우선 읽기로 했다. 장재철학의 뿌리는 주역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만큼 장재는 주역연구에 집중했다. 그의 최대 역작이라 할만한 『정몽(正蒙)』도 그의 주역서인 횡거역설과 많은 부분 겹칠 정도로 장재철학의 바탕에는 주역의 사유가 짙게 배어있다. 왕부지는 “장재의 학문은 역학(易學)이 아님이 없고 장재의 말 또한 역학이 아님이 없다”고 말해 장재의 철학이 역학적 세계관의 기초 위에 세워졌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장재의 철학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역학관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장재는 <계사전>을 매우 중시했다고 한다. 장재는 그 이유에 대해 “<계사전>이 역도(易道)를 논하였고, 역도를 알면 역상(易象)은 그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장재의 관심은 역도를 탐구하는 것이었고 계사전이야말로...
봄날
2025.07.31 | 조회 484
기학잡담
나는 어떻게 주자파가 되었나   문탁에서 공부하다보니 사서(四書)를 다 읽게 되었다. 그것도 원문강독으로 말이다. 보통 처음에 원문으로 사서를 읽는다고 하면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읽는다. 사서집주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사서에 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주석을 붙인 책이다. 주희는 사서의 주석 집필 작업에 40년 동안 몰두했고, 죽기 사흘 전까지도 『대학』의 주석을 다듬었다. 처음 사서를 읽을 땐 주희의 주석이 굉장히 유용하다. 원문만 읽어서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어떤 맥락에서 하는 말인지, 어디서 보충설명을 찾아봐야 하는지 난감한데 주희의 주석이 그런 의문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기 때문이다. 물론 주희의 주석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사서의 주석은 주희의 성리학 사상을 펼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희의 사상을 알려면 우선 사서의 주석을 꼼꼼히 잘 읽어야 한다. 난 주희의 사상에 관한 그 어떤 해설서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만 말해도 내가 왜 주자파인지 감이 올 것이다. 그렇다. 난 사서를 주자의 주석을 통해 읽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주희의 말빨에 빠져들었다. 주자의 논리는 굉장히 치밀하다. 나 같은 사람은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뿐 딱히 반박의 여지가 없다.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는 것을 어쩌란 말이냐.   내가 이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유학이 윤리적인 실천문제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하는 『대학』에서 평천하의 시작은 수신이다. 수신은 우리가 어떤 존재로 태어나 어떻게 해야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으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려준다.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을 유가에서는 군자라고 한다. 『논어』에는 군자란 누구이며 어떤...
나는 어떻게 주자파가 되었나   문탁에서 공부하다보니 사서(四書)를 다 읽게 되었다. 그것도 원문강독으로 말이다. 보통 처음에 원문으로 사서를 읽는다고 하면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읽는다. 사서집주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사서에 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주석을 붙인 책이다. 주희는 사서의 주석 집필 작업에 40년 동안 몰두했고, 죽기 사흘 전까지도 『대학』의 주석을 다듬었다. 처음 사서를 읽을 땐 주희의 주석이 굉장히 유용하다. 원문만 읽어서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어떤 맥락에서 하는 말인지, 어디서 보충설명을 찾아봐야 하는지 난감한데 주희의 주석이 그런 의문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기 때문이다. 물론 주희의 주석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사서의 주석은 주희의 성리학 사상을 펼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희의 사상을 알려면 우선 사서의 주석을 꼼꼼히 잘 읽어야 한다. 난 주희의 사상에 관한 그 어떤 해설서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만 말해도 내가 왜 주자파인지 감이 올 것이다. 그렇다. 난 사서를 주자의 주석을 통해 읽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주희의 말빨에 빠져들었다. 주자의 논리는 굉장히 치밀하다. 나 같은 사람은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뿐 딱히 반박의 여지가 없다.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는 것을 어쩌란 말이냐.   내가 이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유학이 윤리적인 실천문제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하는 『대학』에서 평천하의 시작은 수신이다. 수신은 우리가 어떤 존재로 태어나 어떻게 해야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으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려준다.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을 유가에서는 군자라고 한다. 『논어』에는 군자란 누구이며 어떤...
토용
2025.06.03 | 조회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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