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걷다보면
1. 걷기의 장면들     5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걷기로 먹은 마음을 접기는 싫었다. 어디로 걸을까 하다 성남에 사는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에게 전해 줄 물건을 담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가늘게 내리는 비는 죽전을 지나 성남으로 이어지는 탄천으로 접어들었을 때도 멈추지 않았다. 친구의 집을 절반 쯤 남긴 이매교를 지나서부터는 점점 더 굵어졌다. 모란을 지날 때는 비옷 안으로 물이 들이쳐 옷이 젖고 넘치는 탄천의 물로 신발은 물로 가득 찼다. 더 이상 비가 그치기를 바라는 기대도 사라졌다. 그저 물길을 첨벙첨벙 걸어서 친구 집 앞에 도착해 전화를 했다. 친구는 집에 없었다. 미리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놀라는 친구에게 괜찮다고 대답했다. 빗속을 네 시간, 2만 8천보를 넘긴 걸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버스 창밖으로 보니 비는 그쳐 있었다. 매주 일요일 걷기를 이어갔던 2021년 봄의 한 장면이다. 일요일마다 집을 나서서 걸었던 몸이 자꾸 부추겨서 집안에 있는 것이 갑갑했던 시절, 그 날의 고행은 잊을 수 없는 걷기의 추억이 되었다.                                                                <빗 속을 걷는 고행을 기억하며>     이 해의 걷기는 네이버 까페에도 매주 기록을 했었다. 까페를 열어보니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거의...
1. 걷기의 장면들     5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걷기로 먹은 마음을 접기는 싫었다. 어디로 걸을까 하다 성남에 사는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에게 전해 줄 물건을 담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가늘게 내리는 비는 죽전을 지나 성남으로 이어지는 탄천으로 접어들었을 때도 멈추지 않았다. 친구의 집을 절반 쯤 남긴 이매교를 지나서부터는 점점 더 굵어졌다. 모란을 지날 때는 비옷 안으로 물이 들이쳐 옷이 젖고 넘치는 탄천의 물로 신발은 물로 가득 찼다. 더 이상 비가 그치기를 바라는 기대도 사라졌다. 그저 물길을 첨벙첨벙 걸어서 친구 집 앞에 도착해 전화를 했다. 친구는 집에 없었다. 미리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놀라는 친구에게 괜찮다고 대답했다. 빗속을 네 시간, 2만 8천보를 넘긴 걸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버스 창밖으로 보니 비는 그쳐 있었다. 매주 일요일 걷기를 이어갔던 2021년 봄의 한 장면이다. 일요일마다 집을 나서서 걸었던 몸이 자꾸 부추겨서 집안에 있는 것이 갑갑했던 시절, 그 날의 고행은 잊을 수 없는 걷기의 추억이 되었다.                                                                <빗 속을 걷는 고행을 기억하며>     이 해의 걷기는 네이버 까페에도 매주 기록을 했었다. 까페를 열어보니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거의...
기린
2024.12.08 | 조회 457
기린의 걷다보면
4.반야심경을 독송하다   순례 넷째 날은 마쓰야마에 위치한 53번 절 원명사에서 시작했다. 절의 산문을 들어서면 우선 미즈야(水屋)라는 곳에서 손과 입을 헹군다. 졸졸 흐르는 물이 넘치는 통(돌이나 나무로 만든)위에 자루가 긴 바가지가 걸쳐져 있다. 처음에는 식수인 줄 알고 마셨다가 나중에야 산문에 들어선 순례자가 입을 헹구고 손을 닦는 정화 의례를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종을 치는 찰소로 가서 종을 치면서 자신의 방문을 고한다. 이것도 순례자들이 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본당 앞에 비치된 장소에 양초와 향을 올리고 참배를 한 후, 본당을 참배하고 불경을 낭송한다. 이어서 홍법대사를 모셔둔 대사당을 참배하고 나서, 납경소로 가서 납경을 받으면 절에서의 하는 순례 의례가 끝난다. 눈으로 보기만 하다가 직접 해 보니 점점 자세가 경건해졌다.                              <산문을 들어서서 정화의례로 손을 씻고 입을 헹구는 의례중>   본당에서 참배를 할 때는 <반야심경>을 읊어보기로 했다. 작년에 불교 강좌를 들으며 <반야심경>을 암송했던 기억을 복기했지만 원문 없이 읽기는 어려웠다. 휴대폰에 다운받아 보면서 원문을 읽기 시작했다. 조용한 경내에 경을 읊자니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계속 읊으니 점점 마음이 차분해졌다. 독송을 끝내고 합장을 했다. 이후 순례했던 모든 절에서 이 의례를 치르면서 통과했다. 절과 절을 잇는 마을 길옆으로 펼쳐지는 논뷰에 한적한 분위기까지 어우러져 햇빛이 내리쬐는 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은 점점 순해지는 것 같았다....
4.반야심경을 독송하다   순례 넷째 날은 마쓰야마에 위치한 53번 절 원명사에서 시작했다. 절의 산문을 들어서면 우선 미즈야(水屋)라는 곳에서 손과 입을 헹군다. 졸졸 흐르는 물이 넘치는 통(돌이나 나무로 만든)위에 자루가 긴 바가지가 걸쳐져 있다. 처음에는 식수인 줄 알고 마셨다가 나중에야 산문에 들어선 순례자가 입을 헹구고 손을 닦는 정화 의례를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종을 치는 찰소로 가서 종을 치면서 자신의 방문을 고한다. 이것도 순례자들이 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본당 앞에 비치된 장소에 양초와 향을 올리고 참배를 한 후, 본당을 참배하고 불경을 낭송한다. 이어서 홍법대사를 모셔둔 대사당을 참배하고 나서, 납경소로 가서 납경을 받으면 절에서의 하는 순례 의례가 끝난다. 눈으로 보기만 하다가 직접 해 보니 점점 자세가 경건해졌다.                              <산문을 들어서서 정화의례로 손을 씻고 입을 헹구는 의례중>   본당에서 참배를 할 때는 <반야심경>을 읊어보기로 했다. 작년에 불교 강좌를 들으며 <반야심경>을 암송했던 기억을 복기했지만 원문 없이 읽기는 어려웠다. 휴대폰에 다운받아 보면서 원문을 읽기 시작했다. 조용한 경내에 경을 읊자니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계속 읊으니 점점 마음이 차분해졌다. 독송을 끝내고 합장을 했다. 이후 순례했던 모든 절에서 이 의례를 치르면서 통과했다. 절과 절을 잇는 마을 길옆으로 펼쳐지는 논뷰에 한적한 분위기까지 어우러져 햇빛이 내리쬐는 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은 점점 순해지는 것 같았다....
기린
2024.11.07 | 조회 404
기린의 걷다보면
1.  진짜 가는구나     일본의 시코쿠 순례길 걷기, 오랫동안 해 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삼십 대 중반부터 한번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만 했었다. 공동체에 온 후 같은 바람을 품은 친구를 만났고, 다른 친구까지 뭉쳐서 한 달에 5만원씩 여행경비를 모았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여행 일정은 마냥 미루어졌다. 올해는 꼭 가자고 9월 출발을 계획하고, 5월에 일본 마쓰야마행 비행기티켓을 예약했다. 각자 일정에 치여 별다른 준비도 못했다. 그 사이 8월 태풍이 일본 열도를 휩쓸고 갔다고 하고, 지진도 잦을 예정이라는 기사를 흘려들으며 가야 가는구나 했다. 9월인데 연일 34~5도를 찍는 온도계를 볼 때는 못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예정대로 9월 13일 마쓰야마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제야 실감이 되었다. 진짜 가는구나.        시코쿠는 일본을 이루는 주요한 4개의 섬(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큐슈)중 하나로, 도쿠시마(德島)·고치(高知)·에히메(愛媛)·카가와(香川)의 네 현으로 나뉘어 있다. 네 개의 현에는 각각 발심의 도량(1-23번절, 도쿠시마), 수행의 도량(24-39번절, 고치), 보리의 도량(40번-65번절,에히메), 열반의 도량(66-88번절, 카가와)으로 알려진 88개의 절을 잇는 순례길이 조성되어 있다. 시코쿠 섬을 일주하는 길로 총 1200키로 정도 되고, 걸어서 순례를 하면 40-50일 정도 소요되는 길이다. 우리의 일정은 에히메현의 현청 마쓰야마공항으로 입국해서 그 주변의 절을 순례하는 것으로 정했다. 5월에 일정을 짤 때 마쓰야마공항 티켓이 조금 더 저렴했기 때문에 이쪽에서 시작하기로 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다.             걷기는...
1.  진짜 가는구나     일본의 시코쿠 순례길 걷기, 오랫동안 해 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삼십 대 중반부터 한번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만 했었다. 공동체에 온 후 같은 바람을 품은 친구를 만났고, 다른 친구까지 뭉쳐서 한 달에 5만원씩 여행경비를 모았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여행 일정은 마냥 미루어졌다. 올해는 꼭 가자고 9월 출발을 계획하고, 5월에 일본 마쓰야마행 비행기티켓을 예약했다. 각자 일정에 치여 별다른 준비도 못했다. 그 사이 8월 태풍이 일본 열도를 휩쓸고 갔다고 하고, 지진도 잦을 예정이라는 기사를 흘려들으며 가야 가는구나 했다. 9월인데 연일 34~5도를 찍는 온도계를 볼 때는 못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예정대로 9월 13일 마쓰야마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제야 실감이 되었다. 진짜 가는구나.        시코쿠는 일본을 이루는 주요한 4개의 섬(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큐슈)중 하나로, 도쿠시마(德島)·고치(高知)·에히메(愛媛)·카가와(香川)의 네 현으로 나뉘어 있다. 네 개의 현에는 각각 발심의 도량(1-23번절, 도쿠시마), 수행의 도량(24-39번절, 고치), 보리의 도량(40번-65번절,에히메), 열반의 도량(66-88번절, 카가와)으로 알려진 88개의 절을 잇는 순례길이 조성되어 있다. 시코쿠 섬을 일주하는 길로 총 1200키로 정도 되고, 걸어서 순례를 하면 40-50일 정도 소요되는 길이다. 우리의 일정은 에히메현의 현청 마쓰야마공항으로 입국해서 그 주변의 절을 순례하는 것으로 정했다. 5월에 일정을 짤 때 마쓰야마공항 티켓이 조금 더 저렴했기 때문에 이쪽에서 시작하기로 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다.             걷기는...
기린
2024.10.07 | 조회 552
기린의 걷다보면
1.‘걷⸱친⸱초’ 를 시작하다     친구들과 함께 걷기를 시작했다. <‘기린의 걷다보면’에서 한 달에 한 번 친구를 초대 합니다>(이하 걷친초) 라는 긴 이름의 프로그램으로. 그동안 걸었던 둘레길 중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걸으면 좋겠다는 길을 골라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렸다. 4월에 시작하여 첫 길을 양평 물소리길 4코스로 정하고 친구들을 모았다. 그러고 나면 그 길을 미리 사전 답사를 했다. 알고 있던 길이지만 다시 걸으면서 어느 지점에서 쉬어야 할지, 도시락을 먹으면서 수다도 펼칠 장소 등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혼자서 걸을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새록새록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을 친구들과 함께 걸을 상상을 하면 지루할 틈이 없었던 답사였다.       걸을 날짜가 다가오면서 수시로 일기예보를 검색하며 날씨를 체크했다. 첫 걷기가 예정된 날은 하루 종일 비예보가 떴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내게 비오면 그것도 좋겠다는 한 친구의 말에 용기를 냈다. 양평역에 집결했을 즈음 내리기 시작한 비는 걷는 내내 그치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고 나선 길 위에 하얀 벚꽃잎들이 떠다녔다. 신발로 들어차는 물기를 비오는 강가의 물안개의 풍경으로 잊어가며 걸었다. 비가 와서 아무도 걷지 않는 탓에 호젓하게 걸을 수 있어 좋다고들 해서 미안한 내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렇게 첫 걷기를 무사히 끝냈고, 5월에는 우이령길, 6월에는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7월의 장마철을 보내고 8월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인월-금계 구간을 걷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걸을 수 있는 길을 소개하는...
1.‘걷⸱친⸱초’ 를 시작하다     친구들과 함께 걷기를 시작했다. <‘기린의 걷다보면’에서 한 달에 한 번 친구를 초대 합니다>(이하 걷친초) 라는 긴 이름의 프로그램으로. 그동안 걸었던 둘레길 중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걸으면 좋겠다는 길을 골라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렸다. 4월에 시작하여 첫 길을 양평 물소리길 4코스로 정하고 친구들을 모았다. 그러고 나면 그 길을 미리 사전 답사를 했다. 알고 있던 길이지만 다시 걸으면서 어느 지점에서 쉬어야 할지, 도시락을 먹으면서 수다도 펼칠 장소 등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혼자서 걸을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새록새록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을 친구들과 함께 걸을 상상을 하면 지루할 틈이 없었던 답사였다.       걸을 날짜가 다가오면서 수시로 일기예보를 검색하며 날씨를 체크했다. 첫 걷기가 예정된 날은 하루 종일 비예보가 떴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내게 비오면 그것도 좋겠다는 한 친구의 말에 용기를 냈다. 양평역에 집결했을 즈음 내리기 시작한 비는 걷는 내내 그치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고 나선 길 위에 하얀 벚꽃잎들이 떠다녔다. 신발로 들어차는 물기를 비오는 강가의 물안개의 풍경으로 잊어가며 걸었다. 비가 와서 아무도 걷지 않는 탓에 호젓하게 걸을 수 있어 좋다고들 해서 미안한 내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렇게 첫 걷기를 무사히 끝냈고, 5월에는 우이령길, 6월에는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7월의 장마철을 보내고 8월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인월-금계 구간을 걷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걸을 수 있는 길을 소개하는...
기린
2024.09.06 | 조회 594
기린의 걷다보면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았다. 노년의 주인공은 도쿄 시내 중심가에 있는 공중 화장실 청소부다. 영화가 시작되면 새벽녘 이웃집 할머니의 빗질 소리에 잠자리에서 눈을 뜨는 주인공이 나온다. 이부자리를 개키고 세수를 하고 수염을 다듬고 윗방에 키우는 식물들에게 물을 준다. 그러고는 작업복을 입고 문 앞에 정리해둔 소지품을 챙기고는 문밖으로 나선다.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아 차에 오른다. 차 안에 보관해둔 낡은 테이프들 중에서 하나를 택해 틀어 놓고 캔커피를 마신다. 시동을 걸고 집을 나서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자신이 맡은 구역을 돌며 화장실 청소를 하는 동안 같이 일하는 젊은 동료의 수다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저 빙그레 웃을 뿐. 변기를 닦고 세면대의 물기를 털어내고 휴지통을 처리하는 작업을 한결같은 진지함으로 임한다. 점심을 먹는 장소도 한결같다. 편의점에서 사온 샌드위치를 먹으며, 공원에 오래된 나무들의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며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필름카메라로 찍는다. 퇴근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끔 들르는 단골 선술집으로 향한다. 술 한 잔을 하면서 술집에 온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서는 어제 보다 접어둔 소설을 읽는다. 그러다 스르르 눈이 감기면 책을 내려놓고 잠을 청한다.      영화는 대사가 별로 없는 주인공이 하루의 루틴을 어김없이 실행하는 이 과정을 꽤 오랫동안 보여준다. 그 사이 어느 순간에서 주인공의 미소어린 표정을 클로즈업 하면 저 삶의 평안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해졌다. 영화의 중간에 다른 인물들의 등장으로 주인공의 일상이 흩트려...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았다. 노년의 주인공은 도쿄 시내 중심가에 있는 공중 화장실 청소부다. 영화가 시작되면 새벽녘 이웃집 할머니의 빗질 소리에 잠자리에서 눈을 뜨는 주인공이 나온다. 이부자리를 개키고 세수를 하고 수염을 다듬고 윗방에 키우는 식물들에게 물을 준다. 그러고는 작업복을 입고 문 앞에 정리해둔 소지품을 챙기고는 문밖으로 나선다.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아 차에 오른다. 차 안에 보관해둔 낡은 테이프들 중에서 하나를 택해 틀어 놓고 캔커피를 마신다. 시동을 걸고 집을 나서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자신이 맡은 구역을 돌며 화장실 청소를 하는 동안 같이 일하는 젊은 동료의 수다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저 빙그레 웃을 뿐. 변기를 닦고 세면대의 물기를 털어내고 휴지통을 처리하는 작업을 한결같은 진지함으로 임한다. 점심을 먹는 장소도 한결같다. 편의점에서 사온 샌드위치를 먹으며, 공원에 오래된 나무들의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며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필름카메라로 찍는다. 퇴근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끔 들르는 단골 선술집으로 향한다. 술 한 잔을 하면서 술집에 온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서는 어제 보다 접어둔 소설을 읽는다. 그러다 스르르 눈이 감기면 책을 내려놓고 잠을 청한다.      영화는 대사가 별로 없는 주인공이 하루의 루틴을 어김없이 실행하는 이 과정을 꽤 오랫동안 보여준다. 그 사이 어느 순간에서 주인공의 미소어린 표정을 클로즈업 하면 저 삶의 평안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해졌다. 영화의 중간에 다른 인물들의 등장으로 주인공의 일상이 흩트려...
기린
2024.08.06 | 조회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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