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헤이 유교걸 6회] 선생님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

고은
2021-04-12 09:44
538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선생님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

 

 

 

 

 

 

 

선생님과 잘 지내기는 어려워

 

   내가 공부하는 인문학 공동체 문탁 네트워크에는 또래가 거의 없다. 처음에 나는 몇십 명의 선생님들의 공동체에 들어온 이방인, 그것도 낯선 젊은 이방인이었다. 문화의 차이, 어법의 차이, 공부의 차이가 두드러질 때마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대항했다. 다수의 어른에게 아부를 떨거나 순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들에게 마냥 반기를 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래가 없는 이곳에서 선생님들은 나의 친구였고, 나 역시 공동체에서 제 몫을 해야 하는 제자이자 후배, 동료였다.

 

   언젠가부터 매일 선생님들 얼굴을 보면서 이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론 함께 일하는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어리고 말을 잘 못하는 나를 일방적으로 대하는 같았다. 때문에 나는 『논어』에 공자와 제자의 대담이 나오면 눈여겨 보게 되었다. 『논어』는 내게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자료집이었다.

 

   『논어』엔 공자가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잘 보인다. 나는 이점이 좋기도 했지만, 제자들의 입장이 궁금했으므로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공부를 좀 더 하다 보니 『논어』의 문장과 『논어』 밖의 자료를 통해 제자들의 생각을 유추해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제자 중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건 공자를 대하는 자공의 모습이었다.

 

 

▲ 모바일게임 <크래시피버> 속 자공의 모습

 

 

 

 

 

성공한 제자와 실패한 선생

 

   한대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열전』의 한 편인 「중니제자열전」에는 공자의 제자들이 등장한다. 그중 자공은 그의 국제적인 명망 때문인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어느 날 공자는 자신이 태어난 노나라가 위험에 처하자 다른 제자들이 나서려는 걸 만류하고 자공을 기다렸다고 한다. 자공은 공자의 부탁에 가까운 부름에 응답했고 다섯 나라를 돌며 국제 판세를 뒤흔들었다. 흐름을 파악하고 물자를 활용해 여러 나라를 횡단하는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둬서 진짜 부자들의 이름이 실린 「화식열전」*에 등장하기도 했다.

 

   명망 있는 정치가이자 대단한 부자인 자공과 공자의 관계는 성립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승승장구하던 제자와 달리 선생님은 그토록 바랬음에도 높은 관직에 등용된 적이 없었다. 권력자들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긴 했지만, 그의 위상을 부담스럽게 느꼈고 주장을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다. 공자가 살아있을 때 이 비대칭성은 크게 부각 되지 않았으나, 공자 사후엔 권력자들이 공자보다 자공을 더 추켜세웠던 것을 『논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화 <공자와 논어> 속 자공의 모습

 

   처음엔 왜 자공이 공자 옆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논어』 안에서 공자는 자공의 능력에 대해 칭찬한 적은 없지만, 그것을 가지고 나무란 적은 있었다. 자공이 후배들을 어떻게 밀어주면 좋을지 고민할 때 공자는 사람들을 너무 비교한다며 혼냈고, 자공이 큰 규모의 살림을 꾸릴 때 공자는 억측으로 돈을 쉽게 불린다고 혼냈다. 심지어 최고 모범생 제자인 안회와 대놓고 비교까지 했는데, 내가 자공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진작에 공자에게 화를 내며 학단을 뛰쳐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공은 나와 달랐다. 공자를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 사마천이 이렇게 평가할 정도였다.

 

夫使孔子名布揚於天下者, 子貢先後之也.
무릇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골고루 알려지게 된 것은, 자공이 그를 앞뒤로 모시고 도왔기 때문이다. (『사기열전』, 「화식열전」)

 

   자공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공자의 든든한 뒷배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사마천의 평가는 물질적인 혜택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

 

 

* ‘화식’이란 단어 자체가 『논어』에서 공자가 자공을 가리키며 했던 말이기도 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회는 거의 도를 터득했지만 자주 쌀독이 비었다. 사는 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산을 불렸으나, 그의 예측이 자주 적중했다.””(子曰, “回也其庶乎, 屢空. 賜不受命, 而貨殖焉, 億則屢中.”, 11:18)

 

 

 

 

 

자공이 공자 옆에서 배운 것

 

   자공은 본래 물자를 활용하여 상황을 중재하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좋은 언변과 처세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자공을 간파하고 주의를 줬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척척 해내던 자공에게 지적은 낯선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학창시절 내내 모범생이라 칭찬만 받다 문탁 네트워크에 와선 온갖 꾸지람을 다 들었는데, 혼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만 해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자공도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자공은 공자에게 계속 면박 받으면서도 뭔가 시도해보려는 노력을, 그 시도가 맞는 방향인지 확인받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논어』에는 공자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세 번 나오는데, 그중 화자가 밝혀진 건 자공이 한 말뿐이다. 어쩌면 자공은 공자가 자신과 달리 말로 상황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게 아니었을까? 자공은 공자를 두고 본성(性)이나 하늘의 도(天道)와 같이 중요한 개념을 말은 하지 않고, 그것을 일상에서 드러내는 것만 볼 수 있었다고 묘사했다.* 공자는 처세에 가까운 언변이나 추상적인 논변을 펼치는 대신, 주위를 살피고 마음을 쓰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 EBS 다큐프라임 <절망을 이기는 철학: 제자백가>의 자공과 공자의 모습

 

  어느 날 노나라의 시조인 노주공의 묘소에 들어가게 된 공자는 묘나 예식에 대해 열심히 물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은 공자가 예로 유명한 것은 거짓이라며 비아냥거렸다. 주자는 공자가 처음 벼슬을 할 때 있었던 일이라고 봤는데, 만약 공자가 그 기회를 틈타 이익을 얻고자 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능수능란하게 풀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에겐 말로 좋은 위치를 선점하는 것보다 세심하게 살피고 질문함으로써 묘소에 마음 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뿐만 아니라 공자는 평소에도 주변에 상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고기를 좋아하면서도 음식을 적게 먹었고 음악을 사랑하면서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자공은 공자에게서 상황을 잘 살피고 그에 적절하게 마음 씀의 중요성에 대해, 그러니까 돌봄의 중요성에 대해 배운 게 아니었을까? 말이 앞선다고 혼나던 자공은 언젠가부터 앞뒤로 공자의 상황을 살피며 마음을 쏟았던 것 같다.

 

 

*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의 문장은 들을 수 있으나 선생님께서 성과 천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었다.”(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5:12)

 

 

 

 

 

선생님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

 

   자공이 얼마나 공자를 잘 돌봤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논어』에 몇 번 나온다. 공자는 생전에 손자뻘인 어린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받았고, 공자는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온후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아들뻘, 친구뻘인 제자들과 공자는 서로 서운한 티도 내고 싸우기도 하며 감정적인 교류를 주고받았다. 그중에서도 자공 앞에서 공자는 뜻을 펼치지 못한 자신의 운명에 대해 한탄했다. 공자의 한탄을 들은 자공은 공자에게 애정과 존경이 담긴 대답을 했고, 공자는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쓸쓸한 속내를 다 드러냈다.

 

子曰: “莫我知也夫!”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자공이 말했다. “어찌 선생님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아래에서 배워서 위로 통달하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일 것이다!” (14:37)

 

 

애니메이션 <공자전>에서 공자의 뒤를 지키는 자공의 모습

 

   또 다른 날엔 자공이 공자를 은근하게 아름다운 옥에 비유하고는 이를 보관할 것인지, 팔 것인지를 물었다. 공자는 이번에도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은 쓰이고 싶은 사람이라고 두 번이나 반복하여 대답한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자공은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말로 공자의 마음을 건드렸고, 공자는 속을 털어놓을 사람으로 자공을 꼽았다. 섣부르게 말로 앞서기보다 마음을 쓰며 주위를 살피는 돌봄의 능력은 자공의 정치·경제 활동에도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자공을 보고 있으면 자공과 대조되는 나의 모습이 보여 웃기기도 하고, 자공의 진득한 마음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선생님은 나이가 들고, 아픈 곳이 늘어가고, 재빠르게 적응하기 어려워지는 신체가 된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떠안고 살아가고, 그 문제들과 잘살아보려 노력하고, 때때로 실패하고 절망한다. 내가 선생님을 아부할 혹은 대항할 상대라고 본 것은 선생님에게 절대적인 권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때로는 제자가 앞서고 선생님이 뒤서니, 누구에게도 권력자라는 별칭은 어울리지 않는다. 선생님이 제자에게 베푸는 돌봄만큼이나, 선생님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 선생과 제자는 서로를 돌보는 사이다.

 

 

 

 

 

선생님을 돌보는 건 어려워

 

   선생님과 서로 돌보고 의지하는 관계, 배움을 일깨워주는 관계가 아니라 권위적인 관계로 만든 것은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땐 항의하고, 꾸지람을 들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당시 선생님의 상황과 마음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늘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논어』 속 자공을 어설프게 흉내 내보기로 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열린 회의에서 우리의 안부를 묻고 걱정하는 선생님 말끝에 “선생님은요?”하고 꼬리를 붙여봤다. 바쁜 일정을 토로하는 선생님의 말 중간엔 “별거 아닌 것 같은 일이 시간과 에너지를 꽤 잡아먹죠…”하며 말장구를 쳐봤다.

 

   기다렸다는 듯이 긴긴 이야기를 풀어놓는 선생님을 보며 내가 자공이라도 된 것 같아 들떴지만, 그 기분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바로 직전 회의에선 “글쎄요… 선생님과 저는 성향이 좀 다른 것 같은데요”라며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글을 썼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내가 자공과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나는 자공을 만나며 내가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지 반복해서 상기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댓글 7
  • 2021-04-12 20:39

    자공은 정말 다 가졌네. 언변, 재산, 거기다 인물도 좋아(만화지만 너무 잘생김. 그 옆 재아는? 아! 지못미!)그런 자공이 공자 옆을 오래도록 지켰다는게 더 대단한듯. 앞으로의 관전포인트는 고은이의 자공되기?

    화이팅!

  • 2021-04-13 07:24

    '돌봄' 이라는 표현이 기원전 5세기 스승과 제자 사이에 놓이면 이렇게 해석해볼 수도 있군요^^

    " 섣부르게 말로 앞서기보다 마음을 쓰며 주위를 살피는 돌봄의 능력은 자공의 정치·경제 활동에도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고은은 말보다는 마음을 쓰며 주위를 살피는 능력을 돌봄으로 해석한 것으로 읽히네요. 전 자공이 스승의 마음을 '어떤' 측면에서 살펴보았을까.... 스승이 주위의 상황을  파악하는 방식을 이해했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서 요즘 <논어>를 다시 곱씹고 있는데요^^   올해 페미니즘에서 해러웨이를 읽으면서 '상황적 인식(맥락적 인식)'에 대한 해러웨이의 질문에서 헤매고 있는 것과도 연동되어서요... 고은의 글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더 깊어지네요^^ 

  • 2021-04-13 21:40

    고은이 글을 읽어 보니 자공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인 것 같네요.

    그러니까 외교와 경제에서 성공 할 수 있었겠지요.

    자공을 그런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고은도 베리 굿!! 이예요

  • 2021-04-16 12:19

    자공을 배려의 아이콘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새롭네요. 

    그게  돌봄이라는 단어로 연결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요즘 <열자>를 쬐금 보고 있는데 말귀 못 알아듣는 자공이 나와요. 

    도가라인에서 자공은 그런 쪽 이야기는 도통 못 알아듣는 거만한 친구로 주로 나온다는 군요. 

    자공을 좋아하는 입장에선 좀 기분이 그렇더군요^^

     

  • 2021-04-21 16:18

    고은이, 응원해요 !!!!!

  • 2021-04-22 22:35

    으음.. 아부를 떨거나 순응을 한다고... 혹은 반기를 들지 않으면 선생님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선생님이 혼을 내는 이유가 뭘까? 어리다고 일방적으로 혼나는 것 같은 억울함을 이 글에서는 여전히 풀고 있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고, 고은이에게 문탁 선생님들과의 관계가 여전히 어렵고 피상적인 것 같아서 안타깝네... 사실.. 요즘 어른들은 자식에게조차 돌봄을 기대하지 않거든... 관계에 부담갖지마. 그냥 훨훨 날아다녀. 욕먹을 거 무서워서 날개를 펼치지 못하면 과연 그 관계가 즐거울까? 행복할까? 

  • 2021-04-26 10:47

    선생님을 돌보기란 쉽지 않지만 그렇기에 필요한 일일 수 있겠네요! 자고(은)공 되기 응원합니당!

지난 연재 읽기 고은의 걸헤이 유고걸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선생님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               선생님과 잘 지내기는 어려워      내가 공부하는 인문학 공동체 문탁 네트워크에는 또래가 거의 없다. 처음에 나는 몇십 명의 선생님들의 공동체에 들어온 이방인, 그것도 낯선 젊은 이방인이었다. 문화의 차이, 어법의 차이, 공부의 차이가 두드러질 때마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대항했다. 다수의 어른에게 아부를 떨거나 순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들에게 마냥 반기를 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래가 없는 이곳에서 선생님들은 나의 친구였고, 나 역시 공동체에서 제 몫을 해야 하는 제자이자 후배, 동료였다.      언젠가부터 매일 선생님들 얼굴을 보면서 이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론 함께 일하는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어리고 말을 잘 못하는 나를 일방적으로 대하는 같았다. 때문에 나는 『논어』에 공자와 제자의 대담이 나오면 눈여겨 보게 되었다. 『논어』는 내게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자료집이었다.      『논어』엔 공자가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잘 보인다. 나는 이점이 좋기도 했지만, 제자들의 입장이 궁금했으므로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공부를 좀 더 하다 보니 『논어』의 문장과 『논어』 밖의 자료를 통해 제자들의 생각을 유추해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제자 중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건 공자를...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선생님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               선생님과 잘 지내기는 어려워      내가 공부하는 인문학 공동체 문탁 네트워크에는 또래가 거의 없다. 처음에 나는 몇십 명의 선생님들의 공동체에 들어온 이방인, 그것도 낯선 젊은 이방인이었다. 문화의 차이, 어법의 차이, 공부의 차이가 두드러질 때마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대항했다. 다수의 어른에게 아부를 떨거나 순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들에게 마냥 반기를 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래가 없는 이곳에서 선생님들은 나의 친구였고, 나 역시 공동체에서 제 몫을 해야 하는 제자이자 후배, 동료였다.      언젠가부터 매일 선생님들 얼굴을 보면서 이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론 함께 일하는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어리고 말을 잘 못하는 나를 일방적으로 대하는 같았다. 때문에 나는 『논어』에 공자와 제자의 대담이 나오면 눈여겨 보게 되었다. 『논어』는 내게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자료집이었다.      『논어』엔 공자가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잘 보인다. 나는 이점이 좋기도 했지만, 제자들의 입장이 궁금했으므로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공부를 좀 더 하다 보니 『논어』의 문장과 『논어』 밖의 자료를 통해 제자들의 생각을 유추해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제자 중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건 공자를...
고은
2021.04.12 | 조회 538
지난 연재 읽기 고은의 걸헤이 유고걸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연애의   딜레마에   빠지다               연애의 딜레마      거의 6년 만에 솔로가 되었다. 간만에 솔로가 되니 ‘이제 연애 그만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 전 애인과는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연애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한 명과의 관계에 몰두하는 일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연애할 때면 애인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에 휩싸이고, 연인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생긴다. 다른 이와 깊은 관계를 맺을 시 그 상대가 나의 성적 지향성에 부합한다면 바람피우는 일이 된다. (나의 경우엔 내 애인의 성별에 크게 개의치 않으니 사랑하는 내 동성 친구들과의 관계까지 애매해진다) 물론 다른 관계를 열심히 배타적으로 만들어도 애인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다투거나 같은 일에 의견이 갈릴 때면 상대와 합일될 수 없음을 체감하면서 외로움이 급격하게 밀려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연애는 대개 낯선 존재들 사이에서 안정감을 줄 내 편을 찾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혼자라는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 시작된다. 외롭지 않기 위해 시작한 연애가 외로움을 만들고,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별을 했다가도 다시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연애를 한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연애의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연애의   딜레마에   빠지다               연애의 딜레마      거의 6년 만에 솔로가 되었다. 간만에 솔로가 되니 ‘이제 연애 그만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 전 애인과는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연애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한 명과의 관계에 몰두하는 일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연애할 때면 애인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에 휩싸이고, 연인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생긴다. 다른 이와 깊은 관계를 맺을 시 그 상대가 나의 성적 지향성에 부합한다면 바람피우는 일이 된다. (나의 경우엔 내 애인의 성별에 크게 개의치 않으니 사랑하는 내 동성 친구들과의 관계까지 애매해진다) 물론 다른 관계를 열심히 배타적으로 만들어도 애인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다투거나 같은 일에 의견이 갈릴 때면 상대와 합일될 수 없음을 체감하면서 외로움이 급격하게 밀려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연애는 대개 낯선 존재들 사이에서 안정감을 줄 내 편을 찾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혼자라는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 시작된다. 외롭지 않기 위해 시작한 연애가 외로움을 만들고,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별을 했다가도 다시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연애를 한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연애의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고은
2021.03.03 | 조회 670
지난 연재 읽기 고은의 걸헤이 유고걸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공자님은 자기계발이 좋다고 하셨어               전공에 대한 거부감      2017년 겨울, 4명의 청년과 문탁 네트워크의 선생님들이 평창에 모였다. 인문학 공동체에서 오래 공부한 청년들이 가진 욕망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길드다가 탄생했으니, 길드다는 시작부터 많은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특출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내가 잘 모르는 세계의 사람들과 함께 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2017년 평창에 모인 4명의 청년과 문탁 네트워크의 선생님들      길드다가 시작된 뒤로는 길드다 일에 허덕였다. 퀴어나 장애인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내게 길드다의 멤버들은 그들만큼이나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한 멤버는 쓰고 싶은 글이 명확했다. 그가 글 쓸 시간을 확보하길 바라며 내가 길드다 운영 일을 좀 더 맡았고,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주제의 책과 이슈를 백업했다. 다른 멤버는 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있는 술자리에 끼거나, 술 먹기를 썩 즐기지 않는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며 술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길드다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중요하게 여겨진 건 전공에 대한 개개인의 역량이었다.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보면 내 전공은 동양고전이나 다름없었으나, 나는 전공을 전면에 잘 내세우지 않았다. 전공, 그러니까 나의 일을 앞세우는 건...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공자님은 자기계발이 좋다고 하셨어               전공에 대한 거부감      2017년 겨울, 4명의 청년과 문탁 네트워크의 선생님들이 평창에 모였다. 인문학 공동체에서 오래 공부한 청년들이 가진 욕망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길드다가 탄생했으니, 길드다는 시작부터 많은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특출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내가 잘 모르는 세계의 사람들과 함께 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2017년 평창에 모인 4명의 청년과 문탁 네트워크의 선생님들      길드다가 시작된 뒤로는 길드다 일에 허덕였다. 퀴어나 장애인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내게 길드다의 멤버들은 그들만큼이나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한 멤버는 쓰고 싶은 글이 명확했다. 그가 글 쓸 시간을 확보하길 바라며 내가 길드다 운영 일을 좀 더 맡았고,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주제의 책과 이슈를 백업했다. 다른 멤버는 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있는 술자리에 끼거나, 술 먹기를 썩 즐기지 않는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며 술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길드다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중요하게 여겨진 건 전공에 대한 개개인의 역량이었다.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보면 내 전공은 동양고전이나 다름없었으나, 나는 전공을 전면에 잘 내세우지 않았다. 전공, 그러니까 나의 일을 앞세우는 건...
고은
2020.12.26 | 조회 583
지난 연재 읽기 고은의 걸헤이 유고걸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자의식 부풀리지 않고 SNS 사용하기                     십 년차 SNS 유저      처음에 SNS는 지인과 일상·관심사를 공유하는 장이었지만, 요즘엔 그보다 더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피드가 스타일리시해보이면 그 계정을 팔로우하거나 DM(Direct Massage)을 보낸다. 잘나가는 식당이나 카페에 가려면 SNS에서 영업시간을 확인해야 한다. 예술가의 컨텐츠와 SNS에서 보여지는 라이프 스타일이 잘 어우러지면 SNS는 소비자들의 자발적 클릭을 불러일으키는 홍보 매체가 된다.      우리 또래에게 SNS에서 나를 드러내는 문제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조건이 됐다. SNS를 하지 않는 것조차 SNS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유저는 셀럽이 아니더라도 셀럽 못지않게 피드를 신경 쓴다. 피드에 뜨는 사진의 색감과 구도, 글의 내용과 길이, 게시물이 올라오는 주기가 그 사람의 얼굴이다. 어떤 이들은 개인 계정을 비즈니스 계정으로 등록하고 관리 서비스를 이용한다. 한 사람의 일상이 브랜드인 셈이다.      생활 전반에 들어온 SNS는 나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약 10년간 SNS를 사용해왔지만, 여전히 ‘좋아요’는 무언의 압박으로 작동했다. 게시글을 올릴 때 말투와 분위기를 검열하고, 게시글이 올라간 직후에는 반응이 얼마나 오는지 체크했다. 친하지 않은 이가 친구 신청을 걸면 내가 불특정 다수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자의식 부풀리지 않고 SNS 사용하기                     십 년차 SNS 유저      처음에 SNS는 지인과 일상·관심사를 공유하는 장이었지만, 요즘엔 그보다 더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피드가 스타일리시해보이면 그 계정을 팔로우하거나 DM(Direct Massage)을 보낸다. 잘나가는 식당이나 카페에 가려면 SNS에서 영업시간을 확인해야 한다. 예술가의 컨텐츠와 SNS에서 보여지는 라이프 스타일이 잘 어우러지면 SNS는 소비자들의 자발적 클릭을 불러일으키는 홍보 매체가 된다.      우리 또래에게 SNS에서 나를 드러내는 문제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조건이 됐다. SNS를 하지 않는 것조차 SNS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유저는 셀럽이 아니더라도 셀럽 못지않게 피드를 신경 쓴다. 피드에 뜨는 사진의 색감과 구도, 글의 내용과 길이, 게시물이 올라오는 주기가 그 사람의 얼굴이다. 어떤 이들은 개인 계정을 비즈니스 계정으로 등록하고 관리 서비스를 이용한다. 한 사람의 일상이 브랜드인 셈이다.      생활 전반에 들어온 SNS는 나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약 10년간 SNS를 사용해왔지만, 여전히 ‘좋아요’는 무언의 압박으로 작동했다. 게시글을 올릴 때 말투와 분위기를 검열하고, 게시글이 올라간 직후에는 반응이 얼마나 오는지 체크했다. 친하지 않은 이가 친구 신청을 걸면 내가 불특정 다수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고은
2020.12.11 | 조회 563
지난 연재 읽기 고은의 걸헤이 유고걸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말해지지 않은 것까지도 살펴보기                   말은 잘해도 못해도 문제      내 친구 중 나와 가장 이질적인 감각을 가진 이는 중학교 동창 A다. A를 만나면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다. 우리는 구겨진 병뚜껑을 가지고도 10분을 웃는다. 물론 웃음기 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종종 A에게 벽을 느꼈다. 그는 내 친구 중에서 유일하게 공무원을 준비하고, 값이 나가는 작고 귀여운 가방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질척거리는 공동체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사회문제에 감정이입 할 때면 A는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속초 영랑정에서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나와 A        한편으로 내 말이 A에게 전달되지 않는 건 내가 말을 잘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 같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던 때였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가지고 있는 감각이 다를수록 나의 말은 상대를 빗겨 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다 말을 잘한 날이면 나는 종종 집에서 샤워를 하며 후회했다. 정말 내가 그걸 다 알고 있는 걸까? 진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겉치레뿐이지 않았나? 말에 인플레이션이 생긴 것 같았다.    ...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말해지지 않은 것까지도 살펴보기                   말은 잘해도 못해도 문제      내 친구 중 나와 가장 이질적인 감각을 가진 이는 중학교 동창 A다. A를 만나면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다. 우리는 구겨진 병뚜껑을 가지고도 10분을 웃는다. 물론 웃음기 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종종 A에게 벽을 느꼈다. 그는 내 친구 중에서 유일하게 공무원을 준비하고, 값이 나가는 작고 귀여운 가방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질척거리는 공동체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사회문제에 감정이입 할 때면 A는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속초 영랑정에서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나와 A        한편으로 내 말이 A에게 전달되지 않는 건 내가 말을 잘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 같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던 때였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가지고 있는 감각이 다를수록 나의 말은 상대를 빗겨 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다 말을 잘한 날이면 나는 종종 집에서 샤워를 하며 후회했다. 정말 내가 그걸 다 알고 있는 걸까? 진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겉치레뿐이지 않았나? 말에 인플레이션이 생긴 것 같았다.    ...
고은
2020.09.21 | 조회 465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