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코너 한문이예술 요요와 불교산책 논어 카메오 열전 봄날의 주역이야기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영화대로 42길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토용의 서경리뷰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지난 연재 읽기 전체 소설을 읽읍시다 아젠다 사장칼럼 길드다 아젠다 한뼘 양생 고은의 걸헤이 유고걸 지원의 만드는 사람입니다 해완이의 쿠바통신 뚜벅뚜벅 마을경제학 둥글레의 인문약방 플라톤이 돌아왔다 사기-인생극장 루쉰과 청년 차명식의 책읽습니다 다른 20대의 탄생 문탁이 사랑한 책들 남어진의 밀양통신 감자전의 만화展 공유지의 사상가 맹자 연재코너 전체 한문이예술 요요와 불교산책 논어 카메오 열전 봄날의 주역이야기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영화대로 42길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토용의 서경리뷰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지난 연재 읽기 전체 소설을 읽읍시다 아젠다 사장칼럼 길드다 아젠다 한뼘 양생 고은의 걸헤이 유고걸 지원의 만드는 사람입니다 해완이의 쿠바통신 뚜벅뚜벅 마을경제학 둥글레의 인문약방 플라톤이 돌아왔다 사기-인생극장 루쉰과 청년 차명식의 책읽습니다 다른 20대의 탄생 문탁이 사랑한 책들 남어진의 밀양통신 감자전의 만화展 공유지의 사상가 맹자 문탁웹진 2.0 문탁웹진 1.0 지난 연재 읽기 소설을 읽읍시다 [소설을읽읍시다 1회] 칼비노, 『존재하지 않는 기사』 - 허무와 의미의 변증법? (5) '인생'이란 '허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째서 '허무'가 문제가 되는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난 후에는, 흙과 먼지가 되고 만다. 죽음은 생(生)에 대한 모든 감각을 유지시켜 주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별개로 죽은 자 자신에게 그의 삶은 완벽한 '무의미'가 되고 만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허무'는 생生의 옷을 입고 나타난 '죽음'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갈망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안간힘을 쓰면서 생의 기록을 남기는 이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의 이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허무', 존재가 흩어져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다루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시작부터 역설이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갑옷 속에는 정작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갑옷이 말하고, 갑옷이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갑옷'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아질울포의 '정체'는 그 자신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순결을 잃을 뻔 한 귀족 처녀를 구해내고 받은 기사작위, 기사로서 걸치고 있는 갑옷, 기사로서 얻은 전쟁에서의 공훈만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질울포가 진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지는 말자. 차라리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인생'이란 '허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째서 '허무'가 문제가 되는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난 후에는, 흙과 먼지가 되고 만다. 죽음은 생(生)에 대한 모든 감각을 유지시켜 주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별개로 죽은 자 자신에게 그의 삶은 완벽한 '무의미'가 되고 만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허무'는 생生의 옷을 입고 나타난 '죽음'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갈망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안간힘을 쓰면서 생의 기록을 남기는 이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의 이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허무', 존재가 흩어져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다루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시작부터 역설이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갑옷 속에는 정작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갑옷이 말하고, 갑옷이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갑옷'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아질울포의 '정체'는 그 자신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순결을 잃을 뻔 한 귀족 처녀를 구해내고 받은 기사작위, 기사로서 걸치고 있는 갑옷, 기사로서 얻은 전쟁에서의 공훈만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질울포가 진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지는 말자. 차라리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정군 2023.05.16 | 조회 428 전체 제목 내용 작성자 검색 기간 검색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