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 읽기
한뼘 양생
평소 내가 좋아하는 산책코스는 집 근처에 있는 백운호수였다. 그런데 지난 5월부터는 이 코스가 청계산으로 바뀌었다. 청계산은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 가야 해서, 백운호수보다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래서일까? 청계산은 주말에 등산객들이 몰려올 때 빼고는, 어느 시간대에 가도 사람이 적고 한적했다. 아니 사람이 적다기보다는 산자락이 넉넉해 아파트 평수나 따지는 우리의 눈에는 언제나 널찍하고 텅 비어 보였다. 나 하나쯤 왔단 간 흔적조차 남지 않을 만큼 청계산은 ‘쏘쿨’했다. 올해 초, 나는 만성 신부전 진단을 받고 식이요법과 운동요법을 병행하고 있었다. 소금이 덜 들어간 식단은 입에 맞지 않았고, 하루 일과 가운데 1만보씩 걷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넣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낮에 바빠서 걷지 못한 날에는 하는 수 없이 달밤에 산책을 했다. 이런 강박이 스트레스가 되고 피로가 되었는지, 4월과 5월 검사결과가 좋지 못했다. 한다고 하는데도 검사결과가 나쁘게 나오니 실망이 컸다. ‘한 번 나빠진 신장은 돌이킬 수 없다더니, 진짜구나!’, ‘이제는 더 나빠지는 일만 남은 건가?’. 다시 식단조절을 하고 운동을 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름만 들어봤던 청계산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을 때, 나는 의욕부진과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뭔가 일이 안 풀릴 때 산에 가는 일에 대해 나는 TV프로그램 ‘자연인’을 떠올리며 썩 내켜하지 않았다. ‘아재’나 ‘루저’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큰둥한 마음과 달리, 청계산에 도착했을 때 내 발걸음은 빨라졌다. 코는 벌렁거리며 산 냄새를 맡고, 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머릿속은 단박에...
평소 내가 좋아하는 산책코스는 집 근처에 있는 백운호수였다. 그런데 지난 5월부터는 이 코스가 청계산으로 바뀌었다. 청계산은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 가야 해서, 백운호수보다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래서일까? 청계산은 주말에 등산객들이 몰려올 때 빼고는, 어느 시간대에 가도 사람이 적고 한적했다. 아니 사람이 적다기보다는 산자락이 넉넉해 아파트 평수나 따지는 우리의 눈에는 언제나 널찍하고 텅 비어 보였다. 나 하나쯤 왔단 간 흔적조차 남지 않을 만큼 청계산은 ‘쏘쿨’했다. 올해 초, 나는 만성 신부전 진단을 받고 식이요법과 운동요법을 병행하고 있었다. 소금이 덜 들어간 식단은 입에 맞지 않았고, 하루 일과 가운데 1만보씩 걷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넣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낮에 바빠서 걷지 못한 날에는 하는 수 없이 달밤에 산책을 했다. 이런 강박이 스트레스가 되고 피로가 되었는지, 4월과 5월 검사결과가 좋지 못했다. 한다고 하는데도 검사결과가 나쁘게 나오니 실망이 컸다. ‘한 번 나빠진 신장은 돌이킬 수 없다더니, 진짜구나!’, ‘이제는 더 나빠지는 일만 남은 건가?’. 다시 식단조절을 하고 운동을 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름만 들어봤던 청계산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을 때, 나는 의욕부진과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뭔가 일이 안 풀릴 때 산에 가는 일에 대해 나는 TV프로그램 ‘자연인’을 떠올리며 썩 내켜하지 않았다. ‘아재’나 ‘루저’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큰둥한 마음과 달리, 청계산에 도착했을 때 내 발걸음은 빨라졌다. 코는 벌렁거리며 산 냄새를 맡고, 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머릿속은 단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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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젠다 사장칼럼
나까지 보탤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준석’에 대해. <아젠다>가 뭐 정론지도 아니고 내가 뭐 오피니언 리더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보니 <아젠다>가 시사저널도 아니고 내가 시사평론가도 아니니 기껏해야 50명 좀 넘게 구독하는 <아젠다>의 친구들에게 이준석 현상에 대해 혹은 이준석으로 촉발된 몇 가지 개인적 단상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할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금의 요란한 이준석 현상에 대한 나의 태도는 뭐랄까, 한편으로는 쏠쏠한 재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그만 봐도 상관없는 TV 연예프로그램이나 운동 경기를 관람하는 것 같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의미 있는 쟁점도 있다. 얼마 전 읽은 「능력주의 비판을 비판한다」 (이범, 2021.06.10. 경향신문) 같은 과감한(?) 칼럼, 이에 대해 “조만간 24만자 정도의 글로 이런 무지한 소리들을 비판”하겠다는 박권일의 코멘트 같은 것. 그러나 이 밖에는 대체로 “세대교체의 바람과 변화에 대한 바람을 담아” 따위의 식상한 멘트, 혹은 “헌정 사상 처음”이라거나 “이준석발(發) 정치혁명” 같은 호들갑, 혹은 배 들어왔을 때 노 젓겠다는 식의 청년동원 이벤트들의 소란스러움뿐이다. 바람 같은 것,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식혜 위에 동동 뜬 밥풀”^^ 같은 것, 이게 작금의 이준석 현상에 대한 나의 인상평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현타가 온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이준석의 현충원 방명록 글씨를 두고 민 아무개라는 국회의원이 “신언서판” 어쩌고, “어색한 문장” 어쩌고 하면서 훈수를 두었을 때였다. 왜냐하면 나 역시 포털에서 그의 글씨체를 본 순간 ‘헉’ 싶은 마음이 들었고, 문장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네 글자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민 아무개라는, 4.15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여 자신의 당에서조차 ‘수구꼴통’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는 그런 사람과 내가 정확하게 같은 정서반응을 보이고 똑같은 사자성어를 떠올린 것이었다. 헐, 내 안에 민 아무개 있었어?...
나까지 보탤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준석’에 대해. <아젠다>가 뭐 정론지도 아니고 내가 뭐 오피니언 리더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보니 <아젠다>가 시사저널도 아니고 내가 시사평론가도 아니니 기껏해야 50명 좀 넘게 구독하는 <아젠다>의 친구들에게 이준석 현상에 대해 혹은 이준석으로 촉발된 몇 가지 개인적 단상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할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금의 요란한 이준석 현상에 대한 나의 태도는 뭐랄까, 한편으로는 쏠쏠한 재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그만 봐도 상관없는 TV 연예프로그램이나 운동 경기를 관람하는 것 같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의미 있는 쟁점도 있다. 얼마 전 읽은 「능력주의 비판을 비판한다」 (이범, 2021.06.10. 경향신문) 같은 과감한(?) 칼럼, 이에 대해 “조만간 24만자 정도의 글로 이런 무지한 소리들을 비판”하겠다는 박권일의 코멘트 같은 것. 그러나 이 밖에는 대체로 “세대교체의 바람과 변화에 대한 바람을 담아” 따위의 식상한 멘트, 혹은 “헌정 사상 처음”이라거나 “이준석발(發) 정치혁명” 같은 호들갑, 혹은 배 들어왔을 때 노 젓겠다는 식의 청년동원 이벤트들의 소란스러움뿐이다. 바람 같은 것,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식혜 위에 동동 뜬 밥풀”^^ 같은 것, 이게 작금의 이준석 현상에 대한 나의 인상평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현타가 온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이준석의 현충원 방명록 글씨를 두고 민 아무개라는 국회의원이 “신언서판” 어쩌고, “어색한 문장” 어쩌고 하면서 훈수를 두었을 때였다. 왜냐하면 나 역시 포털에서 그의 글씨체를 본 순간 ‘헉’ 싶은 마음이 들었고, 문장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네 글자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민 아무개라는, 4.15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여 자신의 당에서조차 ‘수구꼴통’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는 그런 사람과 내가 정확하게 같은 정서반응을 보이고 똑같은 사자성어를 떠올린 것이었다. 헐, 내 안에 민 아무개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