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진달래 2024.02.08 |
조회 271
논어 카메오 열전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진달래 2023.12.05 |
조회 280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진달래 2023.10.01 |
조회 403
논어 카메오 열전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달래 2023.07.11 |
조회 291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진달래 2023.04.26 |
조회 352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진달래 2023.02.02 |
조회 323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