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파르마콘 : 나누어 갖는 ‘앎’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정군
2023-11-26 13:47
341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가령 노트에 수기로 옮긴 기록, 기보된 악보, 사진 찍힌 풍경 등도 ‘3차 파지’의 형태들이다. 그러한 텍스트, 악보, 이미지, 사운드 등은 ‘디지털화’를 거치면서 보편적 형식으로 ‘외부화’된다. 문제는 이와 같은 ‘외부화’가 가진 이중성이다. 한편으로 ‘문자’와 같은 ‘외부화된 기록’은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이것은 기억에 대한 연습을 게을리 하게 함으로써 배운 사람들의 혼에 망각을 제공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기억’을 손상시키는 ‘독-파르마콘’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반대로, ‘외부화’되지 않고서는 ‘지식’은 성립할 수 없다. 또 ‘지식’은 배우는 자에게 숙련된 판단력과 동시에 전에 없던 창발적 사고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를 ‘프롤레타리아화’하는 동시에 ‘탈脫 프롤레타리아화’ 한다. 이때 ‘외부화-지식’은 ‘약’이면서 또한 ‘독’이 된다.
파르마콘은 언제 독이 되는가 : 프롤레타리아화
말한 것처럼 외부화된 것으로서 ‘지식’은 배우는 자로 하여금, 그가 수행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인지적 토대를 제공한다. 요컨대, ‘지식은 작업을 자동화’한다. ‘디지털적 외부화’는 이러한 자동화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는데, 이는 전통적인 의미의 작업(work) 영역을 넘어선다. 가령 AI를 이용한 문서작업, 이미지 작업 사례를 보면 ‘인간-작업자’가 하는 일은 어딘가에서 주어진(물론 이것도 디지털 코드5)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키워드들을 프롬프트로 전환해서 입력하는 일이다. 이 경우, 인간 작업자는 사실상 하나의 자동화 절차에서 다음 자동화 절차로 낱말을 옮기는 일을 할 뿐이다. 이와 같은 일은 자동화된 공장에서 더 극단적으로 일어난다. 거기서 일하는 인간은 ‘작업 과정’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과정이 진행되면 될수록, 인간 작업자에 대한 고용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20세기 초, 테일러주의가 일반적 생산양식으로 자리 잡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노동자의 작업과정을 동작 단위로 분할하여 특정 동작에 최적화된 시간을 할당하는 ‘계산’이 이미 하나의 ‘자동화’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절을 더욱 미세하게 쪼갤수록, 자동화의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그러한 ‘미세한 분할’을 극한까지 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화’이다.
그렇게 초미세단위까지 분절된 작업 과정 속에서 작업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고용은 끝’난다. 더불어, 이와 같은 ‘자동화’는 명시적인 ‘작업과정’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마케팅 방법론은 현대인의 일상 전체를 데이터화 하려고 한다. 어디를 얼만큼 잦은 빈도로, 어떤 시간대에 주로 방문 하는지, 선호하는 브랜드는 어떻게 변동되는지, 음악은 주로 무엇을 듣는지 등등, 삶-데이터-자본화가 사실상 한 몸이 되는 체제다. 이게 다만, ‘마케팅 방법론’에만 국한되는 문제일까? ‘마케팅’으로부터 시작된 이 흐름은 이미 정치 영역으로 옮겨간 상태다. 정치가 마케팅화 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극단적인 디지털화는 전에 없는 통치성의 도래를 예고한다. ‘자동화’가 포괄하는 범위가 커질수록, 자동장치의 일부를 이루는 구성요소로서 각 개체들 역시 자동화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 이 조건에서 개인은 특정한 정당, 정책, 사회적 유행 등에 대해 ‘좋아요/싫어요’ 같은 형태로 반응하는 반응기계가 된다. 게다가 이 회로는 개인의 심층적 취향(이라고 믿는 것)을 기반으로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은 그것이 자신의 ‘주체적 선택’이라는 것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궁핍’은 ‘앎의 결여’, ‘앎의 파괴’로 재정의 된다.
테일러주의가 제조업의 기본 문법이었던 시절만 하더라도, 작업자는 ‘자동화’를 초월하는 ‘비자동화’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이른바 ‘숙련공’이라고 불렸던 산업시대의 장인적 노동자들이 바로 그러한 가능성의 담지자들이었다. 이들은 공장에서 가장 많이 자동화된 작업자였는데, 그와 동시에 그러한 자동화의 압력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집단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실험실의 측량만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아날로그’ 특유의 현장성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작업’의 최종적인 최적화는 결코 실험실에서 일어날 수 없었고, 언제나 ‘작업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컨베이어벨트 작업의 앞뒤에 어느 정도 숙련도를 가진 작업자가 있는지, 그래서 속도를 어느 정도로 해야 가장 효율이 오르는지, 하다못해 작업 도구들의 마모도가 어떤지 하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작업자과 유기적으로 결합 된 ‘숙련공’들이 가장 잘 통제할 수 있는 변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언제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장의 작업자는 자본에 대한 일정 정도의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혁명 모델이 의존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스티글레르는 ‘독’으로서의 ‘디지털-파르마콘’이 궁극적으로는 ‘고용’을 삭제함으로써 이러한 모델의 가동 조건을 없앤다고 주장한다. 이는 21세기의 ‘노동운동’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지리멸렬해졌는지를 설명한다.
세계를 치료하는 파르마콘 : ‘일’을 되살리기
‘파르마콘’은 항상 이중의 의미 속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독일 수도, 언제나 약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디지털화’는 어떤 조건에서 ‘약’이 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일단, 문제를 최대한 단순하게 보자면 ‘생산의 자동화’는 우리를 ‘고용’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는 스티글레르를 가속주의자들과 구분시키는 점인데, 이를테면 대부분의 가속주의자들은 산업의 자동화에 따라 우리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티글레르가 ‘고용’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행하는 여타의 생산적 작업 일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에 의해 조직된 기술적 환경 안에서, 작업자가 가진 특유의 창발성을 제약하면서 거대한 생산 기계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것, 그것을 통해 임금노동 관계 속에 묶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러한 자동화, 프롤레타리아화로부터 해방된다(완전히는 아니다). 그런데 가속주의자들의 경우에는 극단적으로 말해 ‘생산 활동’ 일체를 더는 하지 않아도 되는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 보인다. 그러한 시대에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그러나,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에서 베나바브가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순간에도 무언가 할 일을 만들어 내는 우리 종種 특유의 습성을 고려할 때, 가속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 스티글레르는 그렇게, 가속주의자들의 주장이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분명한 입장을 드러낸다. 파르마콘으로서 ‘디지털화’는 우리를 고용에서 해방시키고, 우리를 다시금 ‘일’하게 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고용’과 ‘일’을 구분한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그가 주요한 예로 드는 것은 ‘프리웨어 운동’이다.
“프리웨어 분야에서 사람들은 일을 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봉급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개발자들과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앎의 양분을 취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앎에도 양분을 제공합니다. (중략) 결과적으로 프리웨어 모델은 특허권에 기반을 둔 산업소유권 너머에 자리를 잡고 공용commons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아리엘 키루, 권오룡 옮김,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문학과지성사, 44-45쪽.7)
이러한 ‘일’은 무엇보다 개인의 ‘창발’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몰개성’, ‘탈개인’의 경향을 갖는 ‘고용’과 구분된다. 그러면, ‘일-시스템’하에서는 ‘개인성’이 강화된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역량을 자발적으로 발휘해서 ‘기여’를 한다는 점에서 그는 ‘공동적’이지만, 이를 통해 다시금 자신의 기술적, 사회적 역량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스티글레르는 이와 같은 ‘개인화’의 구조를 시몽동의 개념을 빌려 ‘통개체화’ 또는 ‘포월개체화’라고 부른다.
. 요컨대 이것은 사회적 개인화이다. 이와는 반대로 ‘고용-시스템’ 하에서 ‘개인’은 ‘생산 시스템’으로부터 이탈하자마자(퇴근하자마자) 곧장 ‘개인’ 속으로 고립되려고 하는 경향을 띄는데, 그러한 ‘고립’은 파괴되어 가는 ‘앎’을, ‘궁핍’의 경향을 더욱 가속화한다. 요컨대 ‘디지털화’의 극단적 발달이 위험한 이유는 ‘개인’이 ‘개인’ 너머로 나올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스티글레르가 재정의 하는 ‘일’이란 ‘서로에게 양분이 되는 앎의 공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앎-공동화’가 궁핍한 존재로의 추락을 막는, ‘약-파르마콘’인 셈이다.
스티글레르는 ‘일-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실마리를 이와 같은 ‘통개인화’ 과정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기여’할 수 있는 조건, 이를 통해 개인적 만족감과 사회적 풍요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고용 체제’를 손상시키지 않는 ‘기본 소득’이 아니라, ‘기여 소득’을 주장하고, 디지털화에 대한 반대나 찬성이 아니라 ‘대안적 숙련’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우리 존재는 ‘제3차 파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헤러웨이의 말처럼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은 이미 우리 신체와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 조건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신체의 재발견이자, 우리 능력의 새로운 발명인 셈이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여전히 우리는 우리 신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잘 모른다. 아마 우리가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고 그럴 것이다. 따라서 매번 새롭게 ‘일’을 발명하는 수밖에 없다.(그런 점에서 ‘파지-사유’라는 이름은 우연이 아닐지도?)
스티글레르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몇가지 의문을 남긴다. 첫째, 그가 주장하는 전사회적 시스템 전환이 [과연 어떤 과정과 경로를 거쳐 진행될 수 있을까? 둘째, 그가 ‘앎’과 ‘궁핍’을 연관시킬 때, 이 도식은 아렌트가 오이코스와 폴리스를 대립시켰던 것과 같은 전통적 위계를 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지막으로, 두 번째 의문과 연관되어서, ‘앎의 공유’를 사회 시스템의 기반으로 삼을 때 ‘앎’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가질 수밖에 없을 수동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이다. 『자동화 사회』는 2권으로 기획된 시리즈인데 이번에 읽은 1권의 부제는 ‘알고리즘 인문학과 노동의 미래’이다. ‘앎의 미래’라는 부제가 붙은 2권의 내용이 궁금해지는 이유는 이와 같은 의문들 때문이다.
[각주]
1) 오레이튀이아와 보레아스 : 보레아스는 북풍의 신으로 아테네 왕의 딸 오레이튀이아를 납치해 결혼한다. 이후 칼키스인들이 아테네에 쳐들어 왔을 때, 북풍이 불어와 그들의 함대를 침몰시켰는데, 이는 북풍의 신 보레아스가 아테네의 사위로서 역할을 했던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베르나르 스티글러, 조형준外 옮김, 『자동화 사회I』, 새물결, 127-128쪽.
2) 플라톤, 김주일 옮김, 『파이드로스』, 275a, 이제이북스.
3) 이에 대해 스티클레르가 사용하는 용어는 여러 종류인데, ‘자동화’와 ‘비자동화’가 대표적이다. ‘프롤레타리아화’는 판단중지 상태, 요구된 것만 수행하는 상태라는 점에서 ‘자동화’에 상응한다. 그러한 ‘자동화-프롤레타리아’에 대응하는 반대 개념이 ‘비자동화-탈脫 프롤레타리아화’인데, ‘탈 프롤레타리아화’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내가 만든 말이다.
4) sns 트렌드를 반영한 마케팅 키워드 등.
5)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아리엘 키루, 권오룡 옮김,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문학과지성사, 36쪽.
6)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아리엘 키루, 권오룡 옮김,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문학과지성사, 44-45쪽.
7) 권오룡의 경우 ‘통개체화’로, 조형준의 경우 ‘포월개체화’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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