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과 장자 5회> 양생, 삶과 죽음의 변화를 향한 끝없는 정진

기린
2023-12-11 11:24
382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되려 했던 왕들의 일화가 심심찮게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장자』에 나오는 진인은 “분별심으로 도를 손상시키지 않고 인위를 자연에 덧붙이지 않는” 태도로 삶과 죽음이라는 분별을 넘어서 다만 자연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죽음과 관련해서 「양생주」4장은 친구의 장례식에 조문한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양생의 도는 어떤 것일까?

 

 

 

2. 죽음, 인간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변화

 

노담이 죽자 진일이 문상을 가서 세 번 곡을 하고 나와 버렸습니다.

(....)

“처음에는 나도 저들처럼 하는 것이 죽은 노담을 기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까 문상할 때 보니 노인들은 자식을 잃은 것처럼 통곡을 하고, 젊은이들은 부모를 여윈 것처럼 통곡을 하고 있더구나. 저들은 노담이 바라지도 않은 칭송을 하기 위해, 노담이 원하지도 않는 통곡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처럼 보이더구나. 이 모두 자연의 순리에서 벗어나 진실을 거역하고 인간이 부여받은 운명을 잊고 있는 짓이지. 옛사람들은 이를 일러 ‘자연의 순리를 어기는 죄’라고 불렀다. 마침 세상에 온 것도 때를 얻은 것이요, 마침 세상에서 떠나는 것도 때를 따를 뿐이다. 생사를 편안히 때의 추이에 맡기면 슬픔과 기쁨이 끼어 들 여지가 없다. 옛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늘이 내린 형벌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였다. 「양생주」 『낭송장자』

 

 

  친구의 장례식에 간 진일이 형식적으로 조문을 해서 제자가 그 까닭을 물었다. 그는 노담은 죽음을 맞아 지극한 슬픔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이 일화에 나오는 노담은 『노자』를 썼다고 전해지는 노자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노자와 장자는 중국의 제자백가 중에서 도가(道家)로 분류된다. 유가가 제례, 장례 등에서 예법을 중요시하는데 비해 도가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인위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노담의 시선으로 보면 마치 부모나 자식을 잃은 것처럼 곡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태어남의 기쁨이나 죽음의 슬픔에서 얽매이지 않고 무심히 왔다가 무심히 가는 것이 순리였다. 오히려 인간 세상의 예법에 묶여 있다가 죽음을 맞는 사태를 ‘현해(懸解)’라 하여,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일컬었다.

 

  ‘현해’는 「대종사」편에서 자사가 자여의 병문안을 갔을 때, 자여의 몸이 곱사등이로 변하는 것을 보며 나누는 대화에도 나온다. 자사는 그렇게 변하는 모습이 싫으냐고 묻는다. 자여는 만약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목청껏 울어 새벽을 알리겠다고 응답한다. 태어남과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변화를 그저 편안하게 받아들일 뿐, 좋거나 싫다는 감정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리를 거슬러 좋고 싫음에 연연하여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얽매이게 된다. 도가에게 죽음이라는 사태는, 자연이 준 생명을 옭아맸던 여러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때였다. 그래서 유난한 곡소리는 죽음이라는 변화를 방해하는 행위였으니 망설임 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3. 노래 부르는 장례식

 

  장자는 장례식에서 곡을 하지 않음은 물론 노래를 부른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것도 아내의 장례식에서 말이다. 「지락」편에서 장자의 친구 혜시는 울음이 안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노래까지 부르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나무랐다. 장자도 아내가 죽자마자 슬픔이 밀려왔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런 형체가 없던 것이 저절로 혼합되어 생명에 이르렀다가 죽음으로 변화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아내가 이제 “천지라는 큰집에서 편안히 쉬게” 되는 변화의 때를 맞았는데 그것을 슬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장자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다시 「대종사」편에서 살펴보면, 자상호의 장례식장에 간 공자의 제자 자공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공은 자상호의 장례식장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자공은 시신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예법에 맞느냐고 물었다. 유가인 자공이 보기에 이들은 장례식의 예법을 어긴 자들이었다. 자상호의 친구들은 자공에게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면서 저 사람이 어떻게 예를 알겠는가 되물었을 뿐이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서로의 예법 차이를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으니 웃음으로 응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자의 노래도 마찬가지 아닐까. 삶을 주어 살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하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곡을 그치고, 천지에 몸을 맡기는 변화를 노래함으로써 중도의 도를 지켰던 것이다. 자상호의 장례식에서 친구들은 이렇게 노래 불렀다.

 

 

“아, 상호여! 아, 상호여! 그대는 이미 참된 세계로 돌아갔는데 우리는 아직도 사람이구나!” 「대종사」 『낭송장자』

 

 

 

4. 삶과 죽음이 공동체에 들어오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노환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돌보는 친구들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그들의 돌봄 현실과 부모님의 죽음을 겪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우리가 함께 공부하면서 나이 드는 만큼 부모님들도 함께 늙어가셨다. 가벼운 시술이 있는가 하면 심각한 질병진단까지 여러 경우가 있었다. 친구가 병원과 집을 오가며 부모님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내어 공동체에 나오기라도 하면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한 친구는 어머님의 죽음을 맞아 깨달은 바를 글로 써서 우리와 함께 나누기도 했다. 그러면서 양생으로서의 삶과 죽음이 공동체 일상에 또 다른 관심사로 떠올랐다. 함께 공부한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겪게 된 변화 중의 하나였다.

 

  「양생주」에서 죽음은 인간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진인은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고 그 변화에 순응했다. 진인의 그런 경지는 우리에겐 너무나 멀었지만, 어쨌거나 공동체에서 늙음과 죽음에 관한 여러 경우를 보게 되었다. 병세가 좀 나아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쁘고, 점점 더 악화된다는 소식에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다 결국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장례까지 치르게 되면, 그것이 곧 나에게도 닥칠 일이라는 실감이 되곤 했다. 실제로 한 친구의 어머님이 가벼운 증세로 알고 입원을 하셨는데, 점점 상태가 심각해져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친구는 너무나 황망했던 와중에도 그동안 공동체에서 들었던 죽음의 이야기들이 의지가 되었다고 했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공동체 일상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변화는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고향에서 홀로 사시며 날로 연로해지는 어머니의 변화에 대해 형제들이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이 노여웠다. 하지만 친구들의 경험을 들으면서 그런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살피는 일을 좀 더 의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라면 나라고 피해갈 수 없을 테니까, 형제들보다 좀 더 일찍 겪게 될 따름이었다. 어머니의 상태가 지금만큼 감당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보내다가, 이보다 더 심각해지면 그때 형제들과 함께 감당하기 시작해도 될 것이다. 삶과 죽음을 가까이서 나누는 공동체의 일상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변화다. 이렇게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삶도 죽음도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양생은 그 변화를 향한 끝없는 정진이다.

 

 

댓글 3
  • 2023-12-11 12:47

    좋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23-12-11 13:32

    삶과 죽음도 자연으러운 변화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제게도 필요하고, 또 찾아오겠네요.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23-12-12 00:19

    잘 읽었어요~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 양생에 대한 오해       양생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즉 양생은 오래 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양생과 관련한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건강 챙기는 것도 공부해야 하느냐고 반문한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양생(養生)의 출전으로 알려진 「양생주」에서는 병이라거나 건강, 장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다만 첫 장에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또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생이 장수를 뜻하게 된 데는 진시황의 일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본기」에는 불로장생에 꽂힌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룬 후 천하를 순행하기 시작했는데, 제나라에 들렀을 때 서불 등의 방사들을 만나 신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로 진시황은 방사들을 가까이 하며 죽지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는 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비용을 댔다. 그 중의 노생이라는 방사는 진인(眞人)을 소개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라고 했다. 「대종사」편에 나오는 진인을 가리키는 내용과 같다. 하지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순행 도중에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무제 역시 말년에 불로장생에 몰두하였다는 등 진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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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3.12.11 | 조회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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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기린
2023.10.25 | 조회 378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기린
2023.08.17 | 조회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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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다 배운 연독이위경   기린     연독이위경, 중도를 지키는 삶   좋은 일을 해서 명성이 나는 것도, 나쁜 일을 해서 형벌을 받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爲善無近名,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可以保身,可以全生,可以養親,可以盡年._낭송장자 78쪽)     위 문장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좇는 위험을 밝힌 「양생주」 1장의 후반부 내용이다. 내편에서 선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첫 문장인데, 장자는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삶에서 양생의 가능성을 본다. 좋은 일이 드러나서 명성을 얻게 되면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나쁜 일로 형벌을 받게 되면 몸을 상하게 된다. 온전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 양생에서 선도 악도 해로울 뿐이라는 것이 장자의 입장이다. 그래서 중도의 삶을 통해 시비선악을 넘을 수 있을 때, 자신과 주변까지 보살피면서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원문을 살펴보면 중도의 삶은 연독이위경(緣督以爲經)이다. 직역하면 살피는 선으로써 날실로 삼는다 는 의미인데, 이때 날실은 아래 위로 지난다. 위진시대 곽상은 연독이위경을 “순중이위상(順中以爲常)”으로 주석하였다. 중심을 따름으로써 법도로 삼는다는 것이다. 살핀다는 의미의 독(督)을 가운데(中)로 주석을 달았다. 이러한 주석은 『황제내경』 「영추」편에서 사람에게는 여덟 개의 맥(脈)이 있는데, 그 중에서 독맥(督脈)은 중앙(中)을 흐르는 맥이라는 설명에 따른 영향이라고 한다. 독맥은 꼬리뼈 부근에서 등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가 정수리를 지나 인중에 이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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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3.06.13 | 조회 371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양생을 위한 지식 기린         양생(養生)을 탐구하는 기획 세미나를 4년째 하고 있다. 그간 양생과 관련해서 동서양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읽었다. 구체적으로 양생을 정의하는 텍스트도 있었고, 현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담론을 통해 내 삶과의 연관성을 탐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양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여전히 막연하다. 양생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언어를 찾아보고 싶었다.     양생(養生)의 원출전은 『장자』 내편 중 「양생주」편이다. 직역을 하면 삶을 기른다, 가꾼다 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태어난 생명을 둘러싼 모든 보살핌을 포함하여 삶을 지속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영양도 섭취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알아가는 지식활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양생주」 첫 장에서는 지식의 위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양생과 지식의 관계에 어떤 위험이 있을까? 나아가 양생을 위한 지식은 어떻게 터득하는 것일까?     삶을 위태롭게 하는 지식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지식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는 일은 위험합니다. 그러니 지식을 좇는다면 삶이 위태로워질 뿐입니다.(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以有涯隨無涯,殆已.已而爲知者,殆而已矣.「양생주」 1장_낭송장자)       삶을 잘 가꾸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 유한한 삶을 이해하고 그 삶에서도 살아가야 할 가치를 찾기 위해서다. 곧 삶을 위한 지식이다. 하지만 지식은 삶만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차츰차츰 자신이 속한 세계를 파악해나간다. 그 세계에 대해 지식이 쌓일수록 삶을 잘...
양생을 위한 지식 기린         양생(養生)을 탐구하는 기획 세미나를 4년째 하고 있다. 그간 양생과 관련해서 동서양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읽었다. 구체적으로 양생을 정의하는 텍스트도 있었고, 현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담론을 통해 내 삶과의 연관성을 탐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양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여전히 막연하다. 양생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언어를 찾아보고 싶었다.     양생(養生)의 원출전은 『장자』 내편 중 「양생주」편이다. 직역을 하면 삶을 기른다, 가꾼다 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태어난 생명을 둘러싼 모든 보살핌을 포함하여 삶을 지속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영양도 섭취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알아가는 지식활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양생주」 첫 장에서는 지식의 위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양생과 지식의 관계에 어떤 위험이 있을까? 나아가 양생을 위한 지식은 어떻게 터득하는 것일까?     삶을 위태롭게 하는 지식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지식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는 일은 위험합니다. 그러니 지식을 좇는다면 삶이 위태로워질 뿐입니다.(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以有涯隨無涯,殆已.已而爲知者,殆而已矣.「양생주」 1장_낭송장자)       삶을 잘 가꾸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 유한한 삶을 이해하고 그 삶에서도 살아가야 할 가치를 찾기 위해서다. 곧 삶을 위한 지식이다. 하지만 지식은 삶만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차츰차츰 자신이 속한 세계를 파악해나간다. 그 세계에 대해 지식이 쌓일수록 삶을 잘...
기린
2023.04.11 | 조회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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