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삼샘 새 책 소식
요요
2016-02-17 11:26
780
어제 문탁으로 이계삼샘이 꾸러미 하나를 보내셨어요.
뭘까? 포장을 풀었더니 따끈따끈한 새책이었습니다.
"그리운 문탁네트워크 식구들께.. 우정을 담아.."라는 글을 읽는 순간
코끝이 시큰해지는 이 느낌은 뭘까요?
아! 우리를 잊지않고 그리워하시는구나..
지지난주 스마일리의 광화문 탈핵 목요집회 후기에서도
이계삼샘 얼굴을 만났을 때 정말 반가웠는데
나도 이 사람과 밀양어르신들을 늘 그리워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을까요?
누군가 그리워할 사람이 있다는 축복, 우리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고마운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책 제목이 참 좋습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
반성장, 부엔비비르!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요?
새롭게 단장한 파지사유 서가 틈에 곱게 꽂아두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펼치고 읽으며 손때를 묻혀주세요.
이 책에서 이계삼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몸으로 직접 살아내는 사람으로 비약하고자 했다.
그러나 5년이 되도록 나는 그 꿈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학교를 그만둔 2012년부터 밀양송전탑 투쟁에 뛰어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우연과 거부할 수 없는 필연이 겹쳤다.
필연은 밀양송전탑 투쟁이 담고 있는 중요한 가치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싸움에서 만난, 이 책 곳곳에서 내가 수없이 드러내는 어르신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분들이 내게 베풀어 준 우정, 그리하여 형성된 어떤 ‘의리’일 것이다.
그것은 나를 포함하여 밀양송전탑 투쟁을 통해서 삶의 방향이 바뀐 많은 이들이 한결같이 고백하듯,
그 ‘고운 얼굴들’이 나를 지난 4년간 이 자리에 서 있게 했다.
그들은 의로움에 주리고, 지금 핍박받고 있으며,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나는 지난 4년간 열심히 살았다.
풍찬노숙으로 점철된, 때로는 어이없는 폭력과 선동에, 때로는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하였으나,
끝내 넘어서고 말았던, 패배하였으나 이미 승리한 이 싸움의 정신은 이 어르신들의 의로움,
가난한 마음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싸움을 지나오면서 나는 결국 정치의 문턱을 넘게 되었다.
선거에 나설 것을 청하는 존경하는 벗들의 제안을 거부해 오면서
나는 문득 ‘내 삶과 내 사회적 체모’만을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 세상이 아주 가파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고 그것은 상당 부분 ‘정치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지난 밀양송전탑 투쟁 4년 동안 나는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치만은 내 몫이 아니라며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은 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이계삼샘이 녹색당 비례대표로 나가는 어려운 결정을 하셨나봅니다.
이계삼샘을 응원하는 우리의 의리와 우정을 담아 책 공동구매 하는 건 어떨까요?
우리 북콘서트 한 번 할까요?^^
아님.. 새로 나온 밀양기록영화 <즐거운 나의집 101>을 같이 볼까요?
더불어 이계삼샘이 다른 분들과 함께 펴낸 책,
<숨통이 트인다>도 함께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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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선생님 칼럼집 나왔군요.
이계삼샘께는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전....당근 살래요.
근데 요즘 우리 트랜드가 인터넷서점 이용하지 않고 동네책방에 (단체)주문하는 거지요?
아예 우주소년 파지분점을 만들어야 하는게 아닐지...서가 한 귀퉁이에^^
어쨌든 '소장학자'로서 저는 이계삼책 '소장'하고 싶습니다.
하하 전.. 한티재에서 책 내셨으니 한티재에 연락드려서 공동구매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아무튼 공동구매를 원하는 분들이 계시면요. 그러니 일단 사지말고 기다려 주세요~
이계삼샘이 보내주신 메일 공유합니다.^^
곧 파지사유에서 책판매를 하려고 합니다.
한티재에 책 주문했어요~
문탁친구말고 가까운 친구와 친지들에게도 선물하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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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계삼입니다.
밀양송전탑 싸움을 하면서 어려운 부탁을 드릴 일이 있을 때 저는 ‘안녕하세요 이계삼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제가 존경하는 선배, 후배, 친구들에게 보냈습니다.
저는 이 이메일을 통해 밀양을 도와달라는 부탁도 하고, 제가 겪은 어려운 사정을 풀어놓곤 했었지요. 제 친구는 “안녕하세요 이계삼입니다~ ” 이 제목의 메일이 뜨면 ‘심호흡을 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미안하고, 죄송하고, 또 고맙습니다.
먼저 안부를 여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그 사이 제 신상에 생겨난 변화는 대략 아실 것 같습니다.
저는 작년 10월 27일, 20대 총선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 출마 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12월 5일, 녹색당원들의 총투표로 비례대표 후보 2번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하십니다. 그러나, 선거 활동은 밀양송전탑 싸움보다는 좀 낫습니다. 한전, 경찰들과 부딪치고 싸우는 아슬아슬한 현장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던 시절을 생각하면 선거 활동은 아직 그 때에 비할 바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부담이 큽니다. 식욕이 좀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체중도 제법 빠졌습니다. 걱정했던 대로, 전국을 상대해야 하는 비례대표 후보의 선거활동은 여전히 막연하여 바쁘기는 한데, 국자로 바닷물을 퍼내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저는 참 많이 변했습니다. 많이 뻔뻔해진 것 같습니다. 마이크 잡고 연설하는 일도, 사진 찍는 일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움도 없어졌습니다. ‘과잉 주체화’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저는 적극적으로 선거활동에 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선거에서 녹색당이 꼭 1석이라도 얻어서 원내 진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 10만표 남짓 득표한 녹색당이 원내 진입을 하기위해서는 정당투표에서 60~70만표를 받아야 합니다. 녹색당은 소수정당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인 제도 속에서 그저 당원들의 헌신적인 활동만으로 한걸음 한걸음 두꺼비처럼 느리게 전진해왔습니다.
이야기가 역시 길었습니다. 제가 이번 선거를 앞두고 칼럼집을 냈습니다. 한겨레신문 칼럼 연재를 5년 2개월 가량 이어왔는데, 이번 선거 출마를 계기로 중단하게 되기도 하였고, 녹색당 후보자 워크샵 첫날, 공직선거법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나서 저는 곧장 칼럼집을 내기로 결정했습니다.^^(무슨 뜻인지는 아실 겁니다. 비례대표 후보는 허용된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겨레 책소개 기사)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30026.html
역시,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 사설이 또한 길었습니다.
1. 3월 한달 동안, “<고르게 가난한 사회> 저자 초청 강연회”에 저를 “불러” 주십시오.
이 대목을 쓰면서 유명한 트로트가요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강연회는 ‘낮에도 좋고, 밤에도 좋’습니다. 지금 탈핵과 교육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면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불러만 주신다면 달려갈’ 생각입니다.
(강연회 주관 단체 혹은 모임이 ‘녹색당’만 아니면 됩니다. 단돈 얼마라도 강사료를 지급하고, 지지발언이나 연호 등 선거법 저촉 활동만 아니라면 강연회는 3월30일 전까지는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습니다.)
강연 섭외 문의 : 010 3223 9132
2.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널리 소개해 주십시오. (10권 이상 주문시 30% 할인, 배송비 무료)
이 책은 시종일관 ‘밀양송전탑’과 ‘교육’과 ‘탈핵’과 ‘녹색정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펴낸 <한티재 출판사>에 직접 연락하셔서 10권 이상 주문하시면 1만5천원인 이 책을 30% 할인된 가격에 배송비도 받지 않고 보내드립니다.^^
연락처: 도서출판 한티재 010 3545 0178 / 053 743 8368 / hantijaebook@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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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 이제 막나가는구나 싶은 맘이 드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첨엔 꽤 수줍어하는 것도 같더니, 이제는 겁도 없이‘불러 달라’고 하고, ‘자기 책 팔아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많이 뻔뻔해졌네요.
거기에는 저 자신의 책임감 말고도, 정치의 문턱을 넘고 난 뒤 갈수록 짙어지는 세상사의 희망에 대한 어떤 절박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정치의 책임이었습니다. 정치가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아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입니다.
녹색당이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끔찍한 시절에 무언가 땅을 짚고 일어설 수 있는, 아주 작지만 구체적인 희망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밀양에서 이계삼 올림
* 서문 일부를 올립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위하여>
“지금 세계를 파고하고 있는 악마적인 과정을 중단시키기 위한 유일한 대안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주의 사회이며, 그것은 고르게 가난한 사회이다.” - 카말 줌블라트 (1970년대 레바논 진보사회당 지도자)
1.
인생을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닌데, 기억의 시침은 자주 유년기의 고향 마을로 향한다. 밀양 시내에 살고 있지만, 자전거를 탈 만한 시간이 나면 어김없이 나는 그곳으로 간다. 남포리, 밀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가곡동에서도 제일 못사는 마을로 손꼽히던 강변 마을. 까닭 없이 그리워서, 익숙한 걸음에서라도 나는 그곳으로 향한다.
그러나 남포리는 지금 형편없다. 뒷산은 국도 확장공사로 터널이 뚫렸고, 강 건너편 벌판으로는 고속도로가 거대한 금을 그어놓았다. 그 맑고 풍요롭던 강은 상류의 운문댐, 밀양댐과 하류의 낙동강 하구둑과 4대강 공사로 그저 물만 가두어놓은 수로가 되어버렸다. 늙고 퇴락한 마을은 갈수록 쪼그라들어 100가구 가깝던 마을은 이제 10여 가구 남짓 남았다.
나는 거기서 태어나 만 12년을 살았다. 내가 왜 그곳을 잊지 못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가끔 묻곤 한다. 가난한 동네가 늘 그러하듯 밤이면 취한 아저씨들의 주정과 쌈박질이 있었다.
민정당 일을 봐주던 마을지도자가 있었고, 일거리 없는 동네 아재들이 날품팔이를 위해 새벽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나가던 길목에 우리집이 있었다. 농사일과 술심부름과 주낙과 그물 손질 뒷수습까지 어린아이가 감당해야 할 노동의 목록은 주렁주렁 널러 있었으나 내가 누릴 아무런 인생의 권리가 없다고 여겼다. 텔레비전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에 나오는 또래 서울내기아이들의 삶은 신천지였고, 이런 곳에 사는 내 처지가 한심했다. 여름날 지겹고 지겹던 모기떼들과 기나긴 장마와 습기, 홍수로 쓸어져버릴 위험을 안고서도 놓지 못하던 들판의 농사들까지, 모두 그랬다.
그런데 나는 그 시절 그 마을을 그리워한다.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되돌아가고 싶다. 그 유년 시절, 남포리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 농민, 날품팔이 일꾼들에게서 무언가 일생토록 그리워할, ‘사람의 얼굴’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비천함 뒤에 감추어진 슬픔’을 ‘무지의 가면 속에 숨어 있는 눈물 젖은 얼굴’(톨스토이)을 말이다.
나는 지금 신작로에 늘어선 키 큰 미루나무들과 한겨울 강건너편 벌판에서 새카맣게 날아오르던 청둥오리떼들과 꽁꽁 언 강에서 종일토록 지치던 썰매놀이와 불콰한 얼굴로 드잡이질하던 동네 아재들의 막걸리마당을 그리워한다. 학살자의 역겨운 얼굴과 독재의 공기도 틈입할 수 없었던, 산업화와 착취의 기계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내 고향 남포리, 그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2.
사춘기시절로부터 시작된 정신적 방랑은 성장통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우리집은 남포리를 떠나 밀양 시내로 이주했고, ‘빈민 계층’에 편입되었다. 학교에서 내게 출신성분에 대한 열패감을 가르치는 동안, 어머니는 하루 14시간동안 좁은 식당에서 일했고 손등과 손가락 곳곳에 칼자국을 새겼다.
학교는 우리에게 ‘쪽팔리는’ 1차 산업 농업의 비중은 작으면 작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가르쳤고, 공장 노동자의 육체노동은 비록 2차 산업이나 고되고 비루하니 그대들은 돈을 벌어 3차 산업 나이키 대리점을 내라고 했다. 학교는 번쩍이는 도시의 풍요와 첨단의 고부가가치를 가르치면서 땀흘려 일하는 삶과 그들의 가난한 공동체에 대한 경멸을 가르쳤다.
나는 무언가 따뜻한 것, 의로운 것, 꺼칠하지만 인간적인 것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달리 다른 길이 없었다. 나는 이 불화를 그리움을 언어화할 지성도 없었고, 그 불화에 그리움에 불을 지르는 어떤 계기도 찾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어 운동의 세계를 만났으나, 금속성의 언어와 유물론적 사고방식, 남성주의적 힘의 논리에 적응하지 못했다.
일찍부터 교회를 다녔으나, 나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산상수훈을 아주 뒤늦게 이해했다. “가난한 자, 의로움에 주린 자, (그러므로) 슬퍼하는 자, 핍박받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것이 바로 지복(至福)이며, 그것은 현세에서 풍요와 기쁨과 의로운 혁명으로 뒤집히는 질서를 기약해주는 것도, 죽어서 찾아가는 세계에서 구현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복된 세계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들 안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