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4회] 백이숙제, 원망이 없었을까

진달래
2022-02-13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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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했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 「술이,14」 중

 

백이숙제 이야기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아들들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맏이인 백이가 아니라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숙제는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다. 이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나라 밖으로 도망을 갔다. 숙제도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도망을 가, 결국 고죽국 사람들은 중간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고죽국을 나온 두 사람은 서쪽의 서백창(西伯昌)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서백창은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막 은(殷)나라의 주(紂)왕을 치러 갈 참이었다. 백이와 숙제는 이에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효(孝)라 할 수 없습니다. 신하의 신분으로 군주를 치러 가는 것은 인(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무왕의 곁에 있던 신하들이 그 둘을 죽이려고 했다. 이 때 강태공이 말리며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義人)이다.”

전쟁에 나간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천하의 사람들이 주나라를 따랐지만 백이와 숙제만이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들은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살다 굶어 죽었다.『사기열전』「백이열전」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첫 번째 편인 「백이 열전」 속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이다. 자기들의 뜻을 지키기 위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은 이 두 사람의 행동은 이후 지조 있고 청렴한 선비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논어』에서는 이들을 일민(逸民/벼슬하지 않은 은자)으로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사람(不降其志 不辱其身)’「미자,8」이라고 칭했으며, 맹자는 이들을 ‘청렴한 성인(聖之淸者)’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사육신인 성삼문도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라는 시조로, 백이숙제를 빗대어 단종에 대한 지조와 충절을 노래한 바 있다.

 

원망하는 백이

 

한편 백이숙제는 ‘원망(怨)’과 관련해서도 유명한데 이는 공자가 백이숙제에 대해 “무엇을 원망했겠는가(又何怨)”라고 한 말에 사마천이 의문을 달았기 때문이다. 공자는 “백이와 숙제는 지나간 원한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子曰 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라고 했고, “인을 구하여 그것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하였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공자는 백이숙제가 원망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사마천은 “나는 백이의 심경이 슬펐을 것으로 본다.(余悲伯夷之意)”며 그들에게 원망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전거로는 당시 민간에서 돌고 있었던 채미가(採薇歌)를 들었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우·하나라 때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于嗟徂兮 命之衰矣) 『사기열전』 「백이열전」

 

사람들은 이러한 사마천의 질문이 그가 궁형(宮刑)을 당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사마천은 한창 『사기』를 집필 하던 중, 흉노 정벌에 패한 이릉장군의 편을 들어 한 마디 했다가 한(漢)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죽을 위기에 놓였었다. 당시 그는 세 가지 형벌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었는데 첫째 법에 따라 사형을 당하는 것, 둘째 돈 50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하는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귀족이 아니었던 그는 50만 전이라는 큰돈을 마련할 수 없고, 『사기』를 끝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었다. 죽음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궁형을 택했다.

그러니까 「백이 열전」을 통해 사마천이 이렇게 묻는 듯하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고 하였는데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은 왜 굶어죽고, 나는 또 왜 궁형을 당했을까? 정말 백이숙제에게 원망이 없었을까?

 

 

원망이 없는 백이

 

공자가 55세가 되던 해, 그는 제자들과 함께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에 갔다. 위 영공(靈公)을 만나 곧 등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영공은 그를 귀인으로 대접해 주기만하고 끝내 등용하지는 않았다. 노나라를 떠난 지 4년이 되던 해, 영공이 죽었다. 영공의 손자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니 출공(出公)이었다. 아마도 이때 공자와 제자들은 다시 한 번 위나라에서 등용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출공의 아버지, 그러니까 영공의 아들인 괴외, 그는 이전에 영공에 의해 쫓겨나 진(晉)나라에 가 있었다. 출공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공의 아들인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한다며 위나라로 돌아오려고 했다. 그러나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에게 죄를 짓고 쫓겨났기 때문에 군주의 자리에 올릴 수 없다고 여겼고, 아들인 출공 역시 아버지의 귀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런 위나라의 상황 속에서 제자 염유가 공자의 거취를 궁금해 했다.

 

염유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위나라 임금을 도우실까?”

자공이 말했다. “글쎄, 내가 이제 물어 볼께.”

자공이 들어가 공자께 물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현인이시다.”

“원망했을까요?”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했겠는가.”

자공이 나와서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돕지 않으실 것야.”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子貢曰 諾 吾將問之 入曰 伯夷叔齊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出曰 夫子不爲也.) 「술이,14」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

 

백이숙제에 대한 공자의 평은 이렇게 위나라의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백이는 아버지가 동생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아버지의 명’이라 하여 나라를 떠났다. 또 숙제는 형을 쫓아내고 동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천륜(天倫)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하여 나라를 떠난다. 이 두 사람의 행동은 효제(孝悌)를 따른 것으로, 공자는 이것을 “인(仁)을 얻고자하여 인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이를 위나라의 상황과 연결해 보자. 출공과 그의 아버지 괴외는 지금, 서로 왕이 되겠다고 권력다툼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자리를 빼앗으려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귀국을 막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않고, 아들은 아들답지 않다. 공자는 정치는 곧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正名)’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자공은 공자가 위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을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무슨 원망이 있었겠는가?”는 백이와 숙제가 서로 왕위를 양보했던 일이 인(仁)을 행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망이 있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주자는 주에서 원망(怨)을 후회(悔)로 풀었는데, 따라서 이들이 자기가 옳다고 여긴 가치관에 따라 행동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사마천은 왜 그들이 원망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을까? 이는 사마천이 공자와 달리 그들의 감정에 더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백이의 심경이 슬펐을 것”이라는 것, 이는 공자와 다른 맥락에서 백이숙제를 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고, 오히려 바르게 살았음에도 굻어 죽을 처지에 놓인 것에 대해 정말 한 번도 후회하지 않고, 누구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사마천은 백이숙제의 마음, 즉 슬픔(悲)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원망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원망이 없을 수야

 

‘지조 있고 청렴한 선비로서의 백이숙제’ 보다는 ‘원망하는 백이숙제’의 모습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아무리 자기의 신념에 따라 선택한 일이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곤궁한 처지에 놓인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슨 원망이 있겠느냐?”고 말한 공자보다 백이숙제에게 원망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마천의 말이 더 실감나게 느껴진다. 또 사마천의 물음 “백이숙제와 같이 착한 사람이 왜 굶어 죽어야 하는가?”를 보면 어떻게 원망이 없을 수가 있냐고 나도 묻고 싶었다.

그러나 공자가 백이숙제에 대해 한 말을 곱씹어 보니 한편으로 이 말도 이해가 가는 듯하다.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을 정말 열심히 하고 난 뒤, 그 일이 혹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후회 없어!”라고 말 할 때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어떤 일에 여지를 남기지 않았을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만족함을 느낄 때,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원망을 멀리해야 한다고 했는데 원망이 꼭 나쁘기만 할까? 어떻게 보면 사마천이 쓴 『사기』가 단순한 역사책 이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받은 궁형이 오히려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처럼 자식을 가슴에 묻고도 원망을 개인적인 원한으로 남기지 않고,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힘쓴 분들도 계시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중요한 것은 ‘원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사마천의 이야기에서도, 공자의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삶의 태도’인 것 같다. 자신들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일은 하지 않는 것, 혹은 옳다고 생각한 일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던 것. 원망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원망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댓글 3
  • 2022-02-14 08:55

    어떤 사태를 해석하는 입장에서 원망은 피해갈 수 없는 난제네요^^ 공자에게도 사마천에게도 그리고 우리도^^ ㅋ

  • 2022-02-14 13:11

    삶의 태도라.....? 다른 질문을 해보게 하는 글이네요

  • 2022-02-15 08:29

    백이숙제를 열전의 맨 앞에 배치한 사마천의 공감은 그렇다치고

    공자님의 진퇴를 가늠하기 위해 백이숙제에 대해 물어본 자공을 보건대 공자님도 백이숙제에게 공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듯해요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슨 원망이 있으랴!!!

     

논어 카메오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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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2.02.13 | 조회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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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4 | 조회 322
논어 카메오 열전
관중은 인한 사람입니까   자로가 말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죽었고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인하지 못한 것이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면서도 군사력으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논어』「헌문」17   관중(管仲)은 제(齊)나라의 정치가로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중(仲)은 자이다. 우리에게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운 시절, 친구인 포숙아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던 관중은 후에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말로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포숙아는 제나라의 공자 규와 소백이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규를 지지하던 관중과 달리 소백을 모시고 있었다. 후에 소백이 제 환공의 자리에 오르자 포숙아는 관중을 추천하여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에 관중은 제 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들고, 제나라를 제후국 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였다. 제 환공은 관중을 높여 중부(仲父)라 불렀다고 한다.     공자는 칭찬에 인색하다. 『논어』에 누가 인(仁)하냐고 물으면 대체로 “인한지 모르겠다.(不知其仁也)”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로가 관중은 인하지 못한 사람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공자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如其仁)”라고 대답한 것은 대단한 칭찬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관중과 제 환공이 쇠약해진 주(周)나라를 대신해, 제후들을 규합하여 주 왕실을 받들게 하고, 북쪽의 융족이 침략했을 때 그를 막아냄으로써 중원의 문화를 지킨 것을 높게 평가했다. 춘추전국시대를...
관중은 인한 사람입니까   자로가 말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죽었고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인하지 못한 것이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면서도 군사력으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논어』「헌문」17   관중(管仲)은 제(齊)나라의 정치가로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중(仲)은 자이다. 우리에게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운 시절, 친구인 포숙아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던 관중은 후에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말로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포숙아는 제나라의 공자 규와 소백이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규를 지지하던 관중과 달리 소백을 모시고 있었다. 후에 소백이 제 환공의 자리에 오르자 포숙아는 관중을 추천하여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에 관중은 제 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들고, 제나라를 제후국 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였다. 제 환공은 관중을 높여 중부(仲父)라 불렀다고 한다.     공자는 칭찬에 인색하다. 『논어』에 누가 인(仁)하냐고 물으면 대체로 “인한지 모르겠다.(不知其仁也)”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로가 관중은 인하지 못한 사람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공자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如其仁)”라고 대답한 것은 대단한 칭찬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관중과 제 환공이 쇠약해진 주(周)나라를 대신해, 제후들을 규합하여 주 왕실을 받들게 하고, 북쪽의 융족이 침략했을 때 그를 막아냄으로써 중원의 문화를 지킨 것을 높게 평가했다. 춘추전국시대를...
진달래
2021.09.22 | 조회 368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와 제자들이 아닌 『논어』 속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공자는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런 작은 궁금증으로 <논어 카메오 열전>을 시작합니다.      『논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 혹은 옛날 현인(賢人), 성왕(聖王) 등등이 있다. 공자는 이들에 대한 다양한 평을 논어에 남겼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물평은 대체로 제자들과의 강학(講學) 과정에서 남게 된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소회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사교성 좋은 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공야장」, 16   안평중은 우리가 흔히 안자(晏子)라고 알고 있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은 영(嬰)이고 자가 평중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그가 죽은 해는 기원전 500년으로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보다 50세 정도 많다. 『안자춘추』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안자가 쓴 것은 아니고, 안자의 언행을 모아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책이다.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 안자를 소개하면서 “만약 안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서 마부가 되어 채찍을 드는 일이라도 할 정도로 나는 안자를 흠모하고 있다.(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고 평했다. 흔히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이야기 할 때 관중과 제환공을 예로 드는데 안자와 제경공도 그에 못지않게 본다. 그러니까 안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명망이 높았던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논어』에는 안자에 대해 이렇게 단 한 줄의 평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평도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라니,...
공자와 제자들이 아닌 『논어』 속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공자는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런 작은 궁금증으로 <논어 카메오 열전>을 시작합니다.      『논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 혹은 옛날 현인(賢人), 성왕(聖王) 등등이 있다. 공자는 이들에 대한 다양한 평을 논어에 남겼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물평은 대체로 제자들과의 강학(講學) 과정에서 남게 된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소회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사교성 좋은 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공야장」, 16   안평중은 우리가 흔히 안자(晏子)라고 알고 있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은 영(嬰)이고 자가 평중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그가 죽은 해는 기원전 500년으로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보다 50세 정도 많다. 『안자춘추』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안자가 쓴 것은 아니고, 안자의 언행을 모아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책이다.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 안자를 소개하면서 “만약 안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서 마부가 되어 채찍을 드는 일이라도 할 정도로 나는 안자를 흠모하고 있다.(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고 평했다. 흔히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이야기 할 때 관중과 제환공을 예로 드는데 안자와 제경공도 그에 못지않게 본다. 그러니까 안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명망이 높았던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논어』에는 안자에 대해 이렇게 단 한 줄의 평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평도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라니,...
진달래
2021.07.23 | 조회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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