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3회] 자산, 지금 · 여기의 정치

진달래
2021-11-24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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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은 은혜로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자산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혜로운 사람이다.”(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논어』 「헌문」10

 

타이완 작가 탕누어의 『역사, 눈앞의 현실』은 『춘추좌전(春秋左傳)』의 리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탕누어는 잘 주목하지 않았던 ‘자산(子産/?~기원전522)’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자산은 춘추시대 정(鄭)나라 출신으로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재상 중에 하나였다. 『춘추좌전』을 읽어보면 실제 자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뭐 이렇게 보면 탕누어가 이 책에서 자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정나라는 작은 나라였고, 자산의 행적은 이후 『사기(史記)』에 그다지 많이 언급되지 않았다. 어쩌면 『춘추좌전』 이후에 서서히 잊혀 진 자산이 탕누어에 의해 다시 불려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자산이 했던 일 중, 가장 논란이 되었던 형서(刑書) 주조와 관련해 그가 변명 아닌 변명으로 남겼던 “저는 재능이 없어서 자손 대의 일까지 미칠 수 없고, 당대의 일만 구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僑不才 不能及子孫 吾以救世也)”라는 말을 전면에 내세우며 말이다.

자산을 흔히 정자산(鄭子産)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나라 자산이라는 뜻이다. 자산은 그의 자이다. 이름은 교(僑)이며 공손교(公孫僑)라 칭한다. 호칭으로 알 수 있듯이 그는 정나라 목공의 손자로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다. 정나라는 작은 나라였지만 주(周)나라와의 돈독한 관계로 춘추시대 초기에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나라와 사이가 멀어지고, 진(晉)이나 제(齊), 초(楚) 등의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국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여기에는 귀족들의 세력 다툼으로 내정이 불안정했던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행히 간공(簡公/?~기원전530)때에는 자산이 재상이 되어 제도를 개혁하고 법을 정비하는 등의 정치를 펴면서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다.

자산의 업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그의 외교적 능력이다. 당시 작은 나라의 제후들은 강대국들에 의해 여기 저기 불려 다니기 일쑤였다. 정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간공과 자산 혹은 행인(行人)들은 이리 저리 바쁘게 오가야 했다. 『사기』에는 자산이 다른 나라의 대부를 만나거나, 회맹의 자리에서 보여주는 외교적 능력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 『논어』에도 정나라의 행인들 즉 외교관들을 칭찬하는 문장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초고를 쓰거나 내용을 검토하고, 다시 윤색하는 일 등등, 각각 역할을 나누어 맡았다. 그리고 이 모두를 총괄한 사람이 자산이었다.

 

 

공자께서 자산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에게는 군자의 도가 네 가지 있었다. 몸가짐이 공손하며, 윗사람을 섬길 때는 공경하고, 백성을 기를 때는 은혜를 베풀었으며, 백성을 부릴 때는 의로웠다.”(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공야장」15

 

『논어』에 총 3번 등장하는 자산, 공자는 군자의 네 가지 도를 갖추었다고 높였고, 여기에도 자산이 백성을 기를 때 은혜로웠다고 말했다.

 

관대한 정치는 엄한 정치만 못하다

 

공자의 이러한 평가는 후대에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남았다. 이렇게 자산을 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면, 관대한 정치를 했을 것 같지만 자산이 재상을 맡고 얼마 되지 않아 세금, 토지 제도 등등을 고치자, 민간에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우리 의관을 빼앗아 모아두고 우리의 농토를 빼앗아 가서는 우리를 묶어 대오를 만들었네. 누가 자산을 죽여준다면 나는 그의 편을 들어 주겠네.(取我衣冠而褚之,取我田疇而伍之,孰殺子產,吾其與之)”

『좌전』에서 보이는 자산은 지략에 뛰어난 노련한 정치가이다. 그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때로 잘못된 일도 눈감아 주어야 한다고 하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쳐들어 왔을 때는 당장 초나라를 막는 것보다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가 화평을 맺는 것이 낫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귀족들이 나라 안에서 세력 다툼을 할 때도 중립적인 입장을 보이는 듯하지만, 때로는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 주는 듯싶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그를 역이용하기도 한다.

기원전 536년, 자산은 형서(刑書)를 주조한 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이는 법령을 큰 솥인 정(鼎)에 새긴 것으로 중국 역사에서 최초의 성문법(成文法)으로 기록되었다. 이 때 진(晉)나라 대부 숙향(叔向)은 이를 크게 나무라는 내용의 편지를 자산에게 보냈다. 당시 형벌은 군주 등 형을 내리는 사람의 덕(德)에 의존해 판결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법을 성문화한다는 것은 형의 집행을 판결 하는 사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법조항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는 귀족이나 평민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숙향은 법을 성문화하면 사람들이 법을 피해갈 생각만하고, 다툼이 생기면 모두 송사로 해결하려 들 것이고, 이를 위해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 성행하면 결국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앞당기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이 이면에는 기존의 귀족 세력이 몰락하고 사(士)계층과 같은 새로운 세력이 떠오르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자산은 숙향에게 짧은 답장을 보냈다.

 

“그대의 말씀과 같습니다. 저는 재능이 없어서 자손 대의 일까지 미칠 수 없고, 당대의 일만 구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말씀하신대로 받들지는 못하겠지만 감히 그 크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若吾子之言,僑不才,不能及子孫,吾以救世也,既不承命,敢忘大惠)『춘추좌전』 소공 6년

 

흔히 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예로 다스리는 것보다 백성들에게 가혹한 정치를 펴는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어 진(秦)나라가 통일 이후 단기간에 멸망한 이유를 엄한 법 적용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자산이 형서를 주조한 이유는 백성을 엄하게 다스리려는 것보다,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있었다. 대부 등 귀족들의 권력이 제후보다 컸던 것은 다른 나라와 별 차이가 없지만 정나라의 경우 유력 귀족들이 대부분 제후의 후손으로 따지고 보면 모두 한 집안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별일 아닌 일로도 자주 다투었고, 힘이 커진 귀족은 제후도 갈아치웠다. 때로는 스스로 군주가 되려고 하기도 했다. 자산의 아버지도 이런 귀족들의 다툼에서 목숨을 잃었다. 자산도 성문법이 가지고 올 부작용을 알았겠지만, 그는 이렇게 제멋대로인 귀족들에게 명문화된 법을 적용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당장,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자 한 의도가 더 컸다. 명확한 법의 엄격한 집행, 자산은 이러한 정치가 정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좋은 정치인가

 

“훌륭하도다! 저이가 너그러우면 백성이 거만해진다. 거만해지면 엄하게 다스려서 고쳐야 한다. 그러나 엄하게 하면 백성이 잔인해지고 잔인해지면 이를 다시 너그러움으로 베풀어야 한다. 관대함으로써 엄함을 늦추고 엄함을 가지고 너그러움을 죄어야 한다. 정치는 이처럼 조화로써 하는 것이다.”(仲尼曰,善哉,政寬則民慢,慢則糾之以猛,猛則民殘,殘則施之以寬,寬以濟猛,猛以濟寬,政是以和) 『춘추좌전』 소공20년

 

공자는 자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정치와 너그러운 정치는 서로 상반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정치는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되어야 한다. 공자는 자산의 정치가 이를 가장 잘 구현한 것으로 보았다.

자산이 백성들을 위해 했던 일 중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맹자』에 나온다. 백성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을 때 자산이 자신의 수레로 그들을 건너게 해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맹자는 자산의 이러한 행동을 은혜로운 행동이지만 다리를 놔주는 것만 못하다고 평했다. 『좌전』에는 정나라에 큰 불이 났을 때, 자산이 어떻게 했는지를 적고 있다. 그는 먼저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불이 꺼지고 난 후 불에 탄 집을 조사해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집을 다시 지을 자재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산의 이러한 행동들에 대해 한편에서는 민심을 얻기 위한 퍼포먼스로 평가하기도 한다.

자산이 백성들에게 해 준 일들을 보면 마치 요즘의 ‘재난구호정책’과 비슷해 보인다. 그렇게 보니 이런 일들은 늘 시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장 닥친 일을 해결하기 위한 한 때의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책은 노련한 정치가의 민심을 얻기 위한 쇼일 뿐일까? 그러나 자산이 강행한 제도 개혁은 시행 초에는 모두에게 원망을 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자산을 칭송했다. 앞서 자산을 비방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던 백성들은 3년이 지나자 다시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우리의 어린 자제들 자산이 훌륭하게 가르쳤다네. 우리의 논밭은 자산이 이렇게 불려 주었네. 자산이 죽으면 그 누가 뒤를 이어 이렇게 해 줄 수 있을까?(我有子弟 子產誨之 我有田疇 子產殖之 子產而死 誰其嗣之)”

『공자가어』에 자산이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의 뒤를 이을 자태숙에게 유언을 남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그는 백성들을 다스릴 때 너그럽게 하기보다 엄하게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너그러운 정치는 오직 덕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엄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덕이 있는 사람이란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산은 이런 사람이라야 관대하게도 엄하게도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백성들이 원하는 때,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혜안이 없이는 제대로 된 은혜를 베풀 수 없다. 그래서 공자는 자산을 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했고 주자(朱子)는 혜인(惠人)은 애인(愛人)과 같다고 했다.

 

사람을 살리는 정치

 

자산이 살았던 시대에, 자산은 제나라의 안자, 진(晉)나라의 숙향과 더불어 춘추시대 3대 명현(名賢)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후, 『사기』에는 「순리열전(循吏列傳)」의 한 부분에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아마도 시대가 달라지면서 자산의 정치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자산이 ‘정치하는 것을 모른다(不知爲政)’고까지 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자산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보면서 그가 어떤 정치를 했는가보다 공자가 자산의 어떤 면에 매료되었는가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산은 공자가 30세쯤에 죽었다. 한창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공자는 비슷한 처지의 정나라 자산을 자세히 연구한 듯하다. 그런데 공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산에 대해 많이 언급한 외교능력이나, 형서 주조, 혹은 제도 개혁에 대한 것보다 그가 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아마도 공자는 자산의 공적보다 그가 무엇을 위해 그런 일들을 했는가에 더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은혜로움(惠)’, 즉 백성에 대한 사랑이다.

 

 

자산이 외교에 힘을 쏟았던 것은 강대국의 이익에 휩쓸려 이런 저런 명분으로 전쟁에 끌려 나가는 일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또 과도한 조공물의 양을 줄여서 나라 사람들에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형서를 주조한 이유도 법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 이를 통해 잦은 귀족들의 다툼에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자산에게 있어서 정치는 사람들이 지금, 당장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자기 수레를 내주어 건네게 해주고, 불에 집이 탄 사람에게 당장 집 지을 목재를 나누어 주는 것이 정치인 것이다. 자산에게 정치를 하는 것은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거나 정치적인 입지를 다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들의 비난이나 칭찬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사람들에게 이로움이 되는 가였다. 이것이 공자가 그를 혜인(惠人)이라고 평한 이유일 것이며, 후에 주자가 이를 애인(愛人)이라고 주를 달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를 ‘사람을 살리는 정치’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장자』에 물이 말라가는 웅덩이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물고기의 이야기가 있다. 이 물고기를 보고 지나가던 이가 조금만 기다리면 큰 바닷물을 끌어다 주겠다고 하자, 물고기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한 바가지의 물일뿐이라고 대답했다. 좋은 제도를 마련하고 공정한 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서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정치를 하는 것의 기본이지 않을까. 요즘 같은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 바로 자산과 같은 사람이 아닐지.

댓글 6
  • 2021-11-25 00:49

    원조 법가로 불리는 자산에 대해서는 한비자도 연구를 많이 한 것 같았어요.

    한비자의 고국 한나라와 정나라는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던 약소국이었으니까요. 

    한비자가 신상필벌을 강조한 것도 자산이 형서를 주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성왕의 정치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공평하게 적용되는 법이 차라리 낫다고 봤겠죠.

    은혜로운 사람이라는 공자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산이 유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점은 안타깝네요. 

    대신 진달래샘이 이렇게 자~알 살려놓으셨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2021-11-25 08:12

    자산, 흥미로운 인물이군요.

    탕누어의 저 책, 사 놓고 읽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급 흥미가 땡기는군요.

    이러다가 좌전 세미나 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몰러....ㅎㅎㅎ

  • 2021-11-25 09:46

    지금 우리의 이 시대에 딱 걸맞는 적절한 주제, 같이 생각해봐야하는 내용이네요.

    중국의 성문법의 시작, 당 대의 일과 자손대의 일 .... 관대한 정치와 엄한 정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2021-11-25 13:08

    공자님이 자산을 그리 평가한 이유를 진달래샘이 확실하게 주석을 달아주셨네요^^

    요즘에 자산을 기대하는건 너무 무리가 아닐까싶어 씁쓸하기도 하군요 

  • 2021-11-25 14:35

    요즘 법의 역기능을 보고 있노라면 형서를 만든 자산을 나무라는 숙향의 말에도 공감이 가네요.

    자산처럼 애인하는 정치가들이 과연 있을까 싶고요.

    에휴…

  • 2021-11-25 16:09

    형서를 주조한 것에 대한 비판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이 저한테는 겸사로 읽히는데요 ㅋ

    주희가 공자님이 언명에 대해 즐겨 다는 주석으로 쓰는 겸손한 말, 겸사요.

    당대의 일을 구제하지 못하면 장차 자손대까지 살아남을 수나 있겠냐는 반문을 담은?

    그나저나 그 '당대'의 조건 또한 수시로 변하는 것이라...천하를 하나로 만드는 상상을 했던 전국시대,

    그런 시대에 맹자에게 정자산의 정치는 분명 한계가 있어 보일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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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3 | 조회 602
논어 카메오 열전
자산은 은혜로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자산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혜로운 사람이다.”(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논어』 「헌문」10   타이완 작가 탕누어의 『역사, 눈앞의 현실』은 『춘추좌전(春秋左傳)』의 리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탕누어는 잘 주목하지 않았던 ‘자산(子産/?~기원전522)’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자산은 춘추시대 정(鄭)나라 출신으로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재상 중에 하나였다. 『춘추좌전』을 읽어보면 실제 자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뭐 이렇게 보면 탕누어가 이 책에서 자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정나라는 작은 나라였고, 자산의 행적은 이후 『사기(史記)』에 그다지 많이 언급되지 않았다. 어쩌면 『춘추좌전』 이후에 서서히 잊혀 진 자산이 탕누어에 의해 다시 불려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자산이 했던 일 중, 가장 논란이 되었던 형서(刑書) 주조와 관련해 그가 변명 아닌 변명으로 남겼던 “저는 재능이 없어서 자손 대의 일까지 미칠 수 없고, 당대의 일만 구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僑不才 不能及子孫 吾以救世也)”라는 말을 전면에 내세우며 말이다. 자산을 흔히 정자산(鄭子産)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나라 자산이라는 뜻이다. 자산은 그의 자이다. 이름은 교(僑)이며 공손교(公孫僑)라 칭한다. 호칭으로 알 수 있듯이 그는 정나라 목공의 손자로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다. 정나라는 작은 나라였지만 주(周)나라와의 돈독한 관계로 춘추시대 초기에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나라와 사이가 멀어지고, 진(晉)이나 제(齊), 초(楚) 등의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국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여기에는 귀족들의 세력 다툼으로 내정이 불안정했던 것도 큰...
자산은 은혜로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자산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혜로운 사람이다.”(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논어』 「헌문」10   타이완 작가 탕누어의 『역사, 눈앞의 현실』은 『춘추좌전(春秋左傳)』의 리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탕누어는 잘 주목하지 않았던 ‘자산(子産/?~기원전522)’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자산은 춘추시대 정(鄭)나라 출신으로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재상 중에 하나였다. 『춘추좌전』을 읽어보면 실제 자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뭐 이렇게 보면 탕누어가 이 책에서 자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정나라는 작은 나라였고, 자산의 행적은 이후 『사기(史記)』에 그다지 많이 언급되지 않았다. 어쩌면 『춘추좌전』 이후에 서서히 잊혀 진 자산이 탕누어에 의해 다시 불려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자산이 했던 일 중, 가장 논란이 되었던 형서(刑書) 주조와 관련해 그가 변명 아닌 변명으로 남겼던 “저는 재능이 없어서 자손 대의 일까지 미칠 수 없고, 당대의 일만 구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僑不才 不能及子孫 吾以救世也)”라는 말을 전면에 내세우며 말이다. 자산을 흔히 정자산(鄭子産)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나라 자산이라는 뜻이다. 자산은 그의 자이다. 이름은 교(僑)이며 공손교(公孫僑)라 칭한다. 호칭으로 알 수 있듯이 그는 정나라 목공의 손자로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다. 정나라는 작은 나라였지만 주(周)나라와의 돈독한 관계로 춘추시대 초기에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나라와 사이가 멀어지고, 진(晉)이나 제(齊), 초(楚) 등의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국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여기에는 귀족들의 세력 다툼으로 내정이 불안정했던 것도 큰...
진달래
2021.11.24 | 조회 323
논어 카메오 열전
관중은 인한 사람입니까   자로가 말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죽었고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인하지 못한 것이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면서도 군사력으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논어』「헌문」17   관중(管仲)은 제(齊)나라의 정치가로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중(仲)은 자이다. 우리에게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운 시절, 친구인 포숙아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던 관중은 후에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말로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포숙아는 제나라의 공자 규와 소백이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규를 지지하던 관중과 달리 소백을 모시고 있었다. 후에 소백이 제 환공의 자리에 오르자 포숙아는 관중을 추천하여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에 관중은 제 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들고, 제나라를 제후국 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였다. 제 환공은 관중을 높여 중부(仲父)라 불렀다고 한다.     공자는 칭찬에 인색하다. 『논어』에 누가 인(仁)하냐고 물으면 대체로 “인한지 모르겠다.(不知其仁也)”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로가 관중은 인하지 못한 사람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공자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如其仁)”라고 대답한 것은 대단한 칭찬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관중과 제 환공이 쇠약해진 주(周)나라를 대신해, 제후들을 규합하여 주 왕실을 받들게 하고, 북쪽의 융족이 침략했을 때 그를 막아냄으로써 중원의 문화를 지킨 것을 높게 평가했다. 춘추전국시대를...
관중은 인한 사람입니까   자로가 말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죽었고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인하지 못한 것이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면서도 군사력으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논어』「헌문」17   관중(管仲)은 제(齊)나라의 정치가로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중(仲)은 자이다. 우리에게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운 시절, 친구인 포숙아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던 관중은 후에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말로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포숙아는 제나라의 공자 규와 소백이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규를 지지하던 관중과 달리 소백을 모시고 있었다. 후에 소백이 제 환공의 자리에 오르자 포숙아는 관중을 추천하여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에 관중은 제 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들고, 제나라를 제후국 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였다. 제 환공은 관중을 높여 중부(仲父)라 불렀다고 한다.     공자는 칭찬에 인색하다. 『논어』에 누가 인(仁)하냐고 물으면 대체로 “인한지 모르겠다.(不知其仁也)”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로가 관중은 인하지 못한 사람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공자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如其仁)”라고 대답한 것은 대단한 칭찬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관중과 제 환공이 쇠약해진 주(周)나라를 대신해, 제후들을 규합하여 주 왕실을 받들게 하고, 북쪽의 융족이 침략했을 때 그를 막아냄으로써 중원의 문화를 지킨 것을 높게 평가했다. 춘추전국시대를...
진달래
2021.09.22 | 조회 368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와 제자들이 아닌 『논어』 속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공자는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런 작은 궁금증으로 <논어 카메오 열전>을 시작합니다.      『논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 혹은 옛날 현인(賢人), 성왕(聖王) 등등이 있다. 공자는 이들에 대한 다양한 평을 논어에 남겼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물평은 대체로 제자들과의 강학(講學) 과정에서 남게 된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소회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사교성 좋은 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공야장」, 16   안평중은 우리가 흔히 안자(晏子)라고 알고 있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은 영(嬰)이고 자가 평중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그가 죽은 해는 기원전 500년으로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보다 50세 정도 많다. 『안자춘추』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안자가 쓴 것은 아니고, 안자의 언행을 모아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책이다.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 안자를 소개하면서 “만약 안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서 마부가 되어 채찍을 드는 일이라도 할 정도로 나는 안자를 흠모하고 있다.(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고 평했다. 흔히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이야기 할 때 관중과 제환공을 예로 드는데 안자와 제경공도 그에 못지않게 본다. 그러니까 안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명망이 높았던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논어』에는 안자에 대해 이렇게 단 한 줄의 평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평도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라니,...
공자와 제자들이 아닌 『논어』 속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공자는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런 작은 궁금증으로 <논어 카메오 열전>을 시작합니다.      『논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 혹은 옛날 현인(賢人), 성왕(聖王) 등등이 있다. 공자는 이들에 대한 다양한 평을 논어에 남겼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물평은 대체로 제자들과의 강학(講學) 과정에서 남게 된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소회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사교성 좋은 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공야장」, 16   안평중은 우리가 흔히 안자(晏子)라고 알고 있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은 영(嬰)이고 자가 평중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그가 죽은 해는 기원전 500년으로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보다 50세 정도 많다. 『안자춘추』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안자가 쓴 것은 아니고, 안자의 언행을 모아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책이다.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 안자를 소개하면서 “만약 안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서 마부가 되어 채찍을 드는 일이라도 할 정도로 나는 안자를 흠모하고 있다.(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고 평했다. 흔히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이야기 할 때 관중과 제환공을 예로 드는데 안자와 제경공도 그에 못지않게 본다. 그러니까 안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명망이 높았던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논어』에는 안자에 대해 이렇게 단 한 줄의 평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평도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라니,...
진달래
2021.07.23 | 조회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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