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1회] 안자, 사람을 잘 사귄다는 것

진달래
2021-07-23 23:33
546

공자와 제자들이 아닌 『논어』 속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공자는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런 작은 궁금증으로 <논어 카메오 열전>을 시작합니다. 

 

 

『논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 혹은 옛날 현인(賢人), 성왕(聖王) 등등이 있다. 공자는 이들에 대한 다양한 평을 논어에 남겼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물평은 대체로 제자들과의 강학(講學) 과정에서 남게 된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소회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사교성 좋은 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공야장」, 16

 

안평중은 우리가 흔히 안자(晏子)라고 알고 있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은 영(嬰)이고 자가 평중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그가 죽은 해는 기원전 500년으로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보다 50세 정도 많다. 『안자춘추』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안자가 쓴 것은 아니고, 안자의 언행을 모아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책이다.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 안자를 소개하면서 “만약 안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서 마부가 되어 채찍을 드는 일이라도 할 정도로 나는 안자를 흠모하고 있다.(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고 평했다. 흔히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이야기 할 때 관중과 제환공을 예로 드는데 안자와 제경공도 그에 못지않게 본다. 그러니까 안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명망이 높았던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논어』에는 안자에 대해 이렇게 단 한 줄의 평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평도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라니, 지금으로 치면 ‘사교성이 좋았다.’ 뭐 이런 뜻일까? 사마천과 비교하면 공자의 이 한 마디는 너무 박한 평가인 듯 보인다. 혹시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안자가 그의 등용을 막은 적이 있었다는데 그것이 서운했던 건 아닐까?

공자가 30대에 노나라 소공이 당시 권력자였던 세 가문과 맞서다, 쫓겨난 사건이 있었다. 소공이 쫓겨나 제나라로 갈 때 공자도 노나라의 이런 무도한 상황을 한탄하며 제나라로 갔다. 이 때 제나라 군주였던 경공을 만났는데 경공이 공자가 마음에 들어 바로 등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를 안자가 반대했다고 한다. 요지는 공자가 주장하는 예법은 너무 세세하여 다 배울 수도 없고, 제나라의 풍습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경공은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고,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자가 안자의 어떤 면을 보고 이런 평을 남겼는지가 궁금하다. 게다가 그냥 사람을 잘 사귄다가 아니라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지. 『논어집주』를 보면 주자는 정자(程子)의 말을 빌려 “사람은 사귀기를 오래하면 공경이 쇠해지니, 오래되어도 공경함은 사귀기를 잘함이 되는 것이다.(人交久則敬衰 久以能敬所以爲善)”라고 주를 달았다. 이렇게 보니 이 문장의 포인트는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久而敬之)’인 듯하다. 이 구절은 사람들이 안자를 공경했다고 볼 수도 있고 안자가 사람들을 공경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의미상 별 차이가 있진 않다. 중요한 것은 ‘오래된 관계 속에서 서로 공경한 태도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니 공자가 안자에게 한 이 말이 달리 보인다. 나는 사람을 잘 사귄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과 잘 지내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사람을 잘 사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키가 작고 생김새가 볼품없었다고 한다

 

대부들의 시대

 

안자와 공자가 살았던 춘추(春秋)시대 말기는 ‘하극상의 시대’라고 불릴 만한 때였다. 천자의 나라인 주(周)나라는 쇠퇴하고 제후국들이 서로 다투며 패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제후국 안에서는 귀족인 대부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실질적인 권력이 제후가 아닌 그들의 집안에서 나왔다. 당시 대부들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안자는 진(晉)나라 대부 숙향과 만났을 때 제나라의 앞날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제나라의 정권은 결국 전씨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전씨는 비록 천하에 큰 덕을 행하지는 못하였지만, 공공의 권력을 사사로이 행사하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그들을 좋아합니다.(齊政卒歸田氏。田氏雖無大德,以公權私,有德於民,民愛之)” 『사기』 「제태공세가」

 

제나라의 상황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숙향 역시 진나라가 얼마가지 않을 것으로 예견했다.

 

“진나라는 현재 쇠하는 시기입니다. 주군은 조세를 많이 거두어 누대나 연못을 만들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서 정사는 마침내 사가(私家)들의 문(門)에서 나오고 있으니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소?(晉,季世也。公厚賦為臺池而不恤政,政在私門,其可久乎!)” 『사기』 「진세가」

 

이런 사정은 제나라와 진나라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들이 비슷했다. 『논어』에도 ‘삼환’이라는 세 대부들이 노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나라는 안자의 예상대로 후에 군주의 자리가 강(姜)씨에서 전(田)씨로 바뀌게 되고, 진(晉)나라는 대부들의 다툼으로 나라가 망하고 조(趙), 위(魏), 한(韓)의 세 나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되었다.

안자는 영공, 장공, 경공의 세 군주를 모셨다. 이 중 장공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를 당했다. 장공이 최저의 집에서 죽었는데 신하들은 최저가 무서워 장공의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었다. 장공의 이복동생을 경공으로 옹립한 후, 최저는 신하들에게 “최씨와 경씨를 돕지 않는 자는 죽는다!(不與崔慶者死)”라고 맹세하도록 시켰다. 이런 일들은 당시 대부였던 최저의 세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준다. 그런 최저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최저는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경봉에게 죽임을 당하고 경봉도 그의 수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최저와 같은 세력이 사라졌다고 해서 군주의 힘이 세진 것이 아니다. 이미 여러 대부들의 힘이 군주를 넘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최저에게서 또 다른 최저로 넘어 간 것일 뿐이었다.

경공이 재위하던 시기에 제나라에는 고씨, 국씨, 포씨, 전씨와 같은 대부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고, 언제 또 최저가 장공을 시해한 일과 같은 사건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대부들은 이익 앞에서 서로 연합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하면서 힘을 겨루고 있었다. 경공의 재위 기간 중 제나라는 제환공의 시대를 넘볼 정도로 안정된 듯 보였지만 사실 경공의 자리는 늘 불안했다. 그럼에도 경공이 58년 동안 별 탈 없이 군주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안자가 그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되어도 공경한다

 

안자는 경공 즉위 후 48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경공은 당시 대다수 군주들이 그러했듯이 그다지 능력 있는 군주는 아니었다. 『안자춘추』에 보면 그는 사치스러웠고, 술 마시는 거 좋아하고, 사냥하는 것 좋아하는, 한 마디로 놀고먹는 거 좋아하는 군주였다. 그럼에도 제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안자의 간언에 귀를 기울이고 대체로 그의 의견을 잘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8년이나 경공의 최측근으로 있었던 안자의 권세가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고, 경공과의 관계도 각별하지 않았을까?

경공이 술을 마시다 밤중에 안자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안자는 경공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복(公服)으로 갈아입고 경공을 문에서 맞았다. 그리고는 이웃나라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나라 안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인지 물었다. 경공이 그저 좋은 술과 음악이 있어서 함께 즐기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안자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리를 깔고 술그릇을 마련해 드리는 일은 따로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감히 그런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夫布薦席,陳簠簋者,有人,臣不敢與焉)” 『안자춘추』

 

어느 날, 경공이 좀 추웠는지 곁에 있던 안자에게 옷을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 안자는 자기는 수발을 드는 신하가 아니라서 가져다 드릴 수 없다고 거절했다. 경공의 입장에서 보자면 군신관계를 떠나 자기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자기의 부탁을 이렇게 단칼에 거절하면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안자는 공적인 관계 외에 경공과의 자리를 피했다. 사람이 오래 함께 지내다보면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것을 친하다고 여기지만 안자는 경공과 오랫동안 함께 했음에 군신의 예를 넘지 않았다. 안자는 오래된 사람과의 사이에서 공경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자가 이렇듯 군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평소 생활에서 드러난다. 안자는 당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늘 가난했다. 그는 자기의 녹봉을 집안사람들과 나누어 썼고, 아내에게 비단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밥도 늘 모자란 듯이 먹었다고 한다. 이에 경공이 그의 녹봉을 올려 주려고 할 때 안자는 집안 식구들과 나누어 쓰기에 모자라지 않다며 거절했다. 안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기 지위에도 연연하지 않았는데 경공이 무리한 일을 시키면 바로 그만두겠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안자를 보통의 대부들은 대부분 불편해했다. 그러나 재물이나 지위와 같은 것으로 매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안자는 백성들에도 신망이 높았다. 안자가 저잣거리의 허름한 집에 사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 경공이 안자에게 새로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안자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경공은 안자가 사신으로 다른 나라에 가서 없는 틈을 타, 주변의 집을 헐고 큰 집을 지었다. 안자가 돌아와 이것을 보고 다시 그 큰 집을 헐어 땅을 원래 살던 사람들에게 돌려주었다.

이런 안자였기 때문에 최저는 장공을 시해 했을 때 그의 집에 찾아와 장공의 시신에 예를 다하고 간 안자를 죽이지 못했다. 제나라의 다른 대부들도 그를 탐탁히 여기지는 않았지만 내치지는 못했다. 경공도 안자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공경했다’는 것은 이런 안자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다.

 

 

사귀기를 잘한다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근래 세상이 천박하여 서로 즐기며 친압하는 것을 허여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규각이 없음을 서로 즐기고 사랑하는 것인 양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이 하면서 어찌 능히 관계를 오래 지속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 오래 지속시키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공경으로 해야 한다. 군신붕우의 관계가 모두 의당 경을 위주로 해야 하는 것이다.(伊川先生曰 近世淺薄 以相歡狎爲相與 以無圭角爲相歡愛 如此者安能久 若要久 須是恭敬 君臣朋友 皆當以敬爲主也)” 『소학』, 「광명륜」

 

이렇게 보니 공자가 안자에 대해 평한 “남과 잘 사귄다.”는 것이 단순히 여러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또 공자는 사람들과 사귐에 있어서 시간이 지나도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안자에 대한 평에 주를 달았던 송대의 정이천(程子)도 사람들과의 사귐에 있어서 공경함이 없다면 그 관계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거기에 ‘규각이 없다’는 것은 서로 두루뭉술하게 지내는 것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를 이른다. 당대의 사람들이 서로 즐겁게 지내는 것만을 좋아하여 허물없이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늘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을 잘 사귀는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과 조금이라고 불편한 일이 생기는 것을 꺼려해서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귐이 예의를 차리는 것이고, 이것이 ‘경(敬)’의 태도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시간이 지나도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을 수 있으려면 일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敬)’을 ‘집중’이라는 의미로 보면 그저 거리를 두는 것으로 ‘잘 사귄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상대방에 대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 주의를 집중한다는 것. 그것은 때로는 불편한 상황까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내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조심하고, 때로는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 하면서도 사귐의 깊이를 넘지 못하고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인 듯하다. 그러나 내가 상대방이 듣기 싫은 말까지 해가며 조언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귀는 것’인지 늘 헷갈린다.

한편, 안자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사람을 잘 사귀는 것은 내가 누구와 어떻게 사귀느냐 이전에 자기 삶에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인 것 같다. 공경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 자기를 낮추고 늘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자리가 올라가거나 돈이 많아지거나 하면 교만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반드시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만 그럴까? 평소에도 우리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가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남의 이야기에 무조건 수긍하는 것이 겸손한 태도일까? 자기 삶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나 일관된 태도를 잃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다른 사람과 사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안자에 대한 공자의 평이 너무 박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사마천의 칭송에 버금가는 문장인 듯하다. 그나저나 ‘남과 잘 사귄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댓글 7
  • 2021-07-24 07:35

    논어 글쓰기 출발을 경축합니다~~~~~짝짝짝

    '오래'의 내용인즉슨 敬의 효과다~~ 이 말씀^^?  敬의 태도는 집중에서 드러난다는 것이고^^

    사람과 사귐뿐 아니라^^ 논어와 오래한 진달래님이 집중했던 시간도 있네요^^

    <논어 카메오 열전>에서 진달래님과 논어의 오랜 사귐의 향연을 기대하겠습니다~~~ 화이팅^^

  • 2021-07-24 08:21

    와...시작했군요.

    재밌을 것 같아요. 두근두근 기다릴게요^^

  • 2021-07-24 09:12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논어 속 등장인물의 이야기와 지금 우리의 고민을 잘 엮은 진달래샘의 이야기!!

    쏙쏙 들어오네요~ㅎㅎㅎ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만땅입니다~~^^

  • 2021-07-24 10:51

    주연을 넘어 조연까지!

    이런 무궁무진한 이야기거리가 숨어있는 보물같은 논어네요.

    다음 인물은 누구일까 기다려집니다^^ 

  • 2021-07-25 07:49

    맞아요!! 사람과 잘 사귄다는 일 넘 어려운 일이에요!!

  • 2021-07-26 07:01

    그러게요 '경'의 태도로 사람을 사귀는 건 정말 쉽지 않네요.

    자신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조건 수긍하는 것도 아니고...

    새삼 안자가 대단해보입니다..!

  • 2021-07-29 07:10

    사람 사는 일이 사귐이 처음이자 끝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군요

    쭈욱 힘있게 글써주세요^^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는 양화를 피했다   양화가 공자를 만나고자 했다. 그런데 공자는 매번 그를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양화는 공자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삶은 돼지고기를 선물로 보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선물을 한 사람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 예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양화를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난처해진 공자는 꾀를 내어 자기도 양화가 없는 틈을 타 그의 집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례를 하고 그의 집을 나서는데, 공교롭게도 막 집으로 돌아오던 양화와 마주치게 되었다. 공자를 본 양화가 그를 불렀다. “이리 와 보십시오. 제가 당신과 할 말이 있습니다.” 공자가 다가가자 양화가 말했다. “보배를 품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내버려 둔다면 인(仁)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나랏일 하기를 좋아하면서 때를 놓친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해와 달이 흘러가니, 세월이 나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나도 장차 벼슬을 하겠습니다.” (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孔子時其亡也 而往拜之 遇諸塗 謂孔子曰 來 予與爾言 曰 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 曰 不可 好從事而亟失時 可謂知乎 曰 不可 日月逝矣 歲不我與 孔子曰 諾 吾將仕矣) 『논어』 「양화,1」   양화(陽貨)가 직접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논어』에 이 한 편뿐이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서로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선물을 주고, 또 인사를 가는 장면이 한 편의 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했다. 양화는 「자한」편에 공자가 광 땅에서 죽을 뻔 했던 일(子畏於匡)의 비하인드 스토리처럼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광...
공자는 양화를 피했다   양화가 공자를 만나고자 했다. 그런데 공자는 매번 그를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양화는 공자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삶은 돼지고기를 선물로 보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선물을 한 사람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 예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양화를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난처해진 공자는 꾀를 내어 자기도 양화가 없는 틈을 타 그의 집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례를 하고 그의 집을 나서는데, 공교롭게도 막 집으로 돌아오던 양화와 마주치게 되었다. 공자를 본 양화가 그를 불렀다. “이리 와 보십시오. 제가 당신과 할 말이 있습니다.” 공자가 다가가자 양화가 말했다. “보배를 품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내버려 둔다면 인(仁)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나랏일 하기를 좋아하면서 때를 놓친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해와 달이 흘러가니, 세월이 나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나도 장차 벼슬을 하겠습니다.” (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孔子時其亡也 而往拜之 遇諸塗 謂孔子曰 來 予與爾言 曰 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 曰 不可 好從事而亟失時 可謂知乎 曰 不可 日月逝矣 歲不我與 孔子曰 諾 吾將仕矣) 『논어』 「양화,1」   양화(陽貨)가 직접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논어』에 이 한 편뿐이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서로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선물을 주고, 또 인사를 가는 장면이 한 편의 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했다. 양화는 「자한」편에 공자가 광 땅에서 죽을 뻔 했던 일(子畏於匡)의 비하인드 스토리처럼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광...
진달래
2022.04.04 | 조회 347
논어 카메오 열전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했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 「술이,14」 중   백이숙제 이야기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아들들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맏이인 백이가 아니라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숙제는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다. 이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나라 밖으로 도망을 갔다. 숙제도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도망을 가, 결국 고죽국 사람들은 중간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고죽국을 나온 두 사람은 서쪽의 서백창(西伯昌)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서백창은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막 은(殷)나라의 주(紂)왕을 치러 갈 참이었다. 백이와 숙제는 이에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효(孝)라 할 수 없습니다. 신하의 신분으로 군주를 치러 가는 것은 인(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무왕의 곁에 있던 신하들이 그 둘을 죽이려고 했다. 이 때 강태공이 말리며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義人)이다.” 전쟁에 나간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천하의 사람들이 주나라를 따랐지만 백이와 숙제만이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들은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살다 굶어 죽었다.『사기열전』「백이열전」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첫 번째 편인 「백이 열전」 속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이다. 자기들의 뜻을 지키기 위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은 이 두 사람의 행동은 이후 지조 있고 청렴한 선비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했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 「술이,14」 중   백이숙제 이야기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아들들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맏이인 백이가 아니라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숙제는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다. 이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나라 밖으로 도망을 갔다. 숙제도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도망을 가, 결국 고죽국 사람들은 중간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고죽국을 나온 두 사람은 서쪽의 서백창(西伯昌)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서백창은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막 은(殷)나라의 주(紂)왕을 치러 갈 참이었다. 백이와 숙제는 이에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효(孝)라 할 수 없습니다. 신하의 신분으로 군주를 치러 가는 것은 인(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무왕의 곁에 있던 신하들이 그 둘을 죽이려고 했다. 이 때 강태공이 말리며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義人)이다.” 전쟁에 나간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천하의 사람들이 주나라를 따랐지만 백이와 숙제만이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들은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살다 굶어 죽었다.『사기열전』「백이열전」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첫 번째 편인 「백이 열전」 속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이다. 자기들의 뜻을 지키기 위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은 이 두 사람의 행동은 이후 지조 있고 청렴한 선비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진달래
2022.02.13 | 조회 601
논어 카메오 열전
자산은 은혜로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자산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혜로운 사람이다.”(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논어』 「헌문」10   타이완 작가 탕누어의 『역사, 눈앞의 현실』은 『춘추좌전(春秋左傳)』의 리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탕누어는 잘 주목하지 않았던 ‘자산(子産/?~기원전522)’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자산은 춘추시대 정(鄭)나라 출신으로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재상 중에 하나였다. 『춘추좌전』을 읽어보면 실제 자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뭐 이렇게 보면 탕누어가 이 책에서 자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정나라는 작은 나라였고, 자산의 행적은 이후 『사기(史記)』에 그다지 많이 언급되지 않았다. 어쩌면 『춘추좌전』 이후에 서서히 잊혀 진 자산이 탕누어에 의해 다시 불려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자산이 했던 일 중, 가장 논란이 되었던 형서(刑書) 주조와 관련해 그가 변명 아닌 변명으로 남겼던 “저는 재능이 없어서 자손 대의 일까지 미칠 수 없고, 당대의 일만 구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僑不才 不能及子孫 吾以救世也)”라는 말을 전면에 내세우며 말이다. 자산을 흔히 정자산(鄭子産)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나라 자산이라는 뜻이다. 자산은 그의 자이다. 이름은 교(僑)이며 공손교(公孫僑)라 칭한다. 호칭으로 알 수 있듯이 그는 정나라 목공의 손자로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다. 정나라는 작은 나라였지만 주(周)나라와의 돈독한 관계로 춘추시대 초기에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나라와 사이가 멀어지고, 진(晉)이나 제(齊), 초(楚) 등의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국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여기에는 귀족들의 세력 다툼으로 내정이 불안정했던 것도 큰...
자산은 은혜로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자산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혜로운 사람이다.”(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논어』 「헌문」10   타이완 작가 탕누어의 『역사, 눈앞의 현실』은 『춘추좌전(春秋左傳)』의 리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탕누어는 잘 주목하지 않았던 ‘자산(子産/?~기원전522)’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자산은 춘추시대 정(鄭)나라 출신으로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재상 중에 하나였다. 『춘추좌전』을 읽어보면 실제 자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뭐 이렇게 보면 탕누어가 이 책에서 자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정나라는 작은 나라였고, 자산의 행적은 이후 『사기(史記)』에 그다지 많이 언급되지 않았다. 어쩌면 『춘추좌전』 이후에 서서히 잊혀 진 자산이 탕누어에 의해 다시 불려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자산이 했던 일 중, 가장 논란이 되었던 형서(刑書) 주조와 관련해 그가 변명 아닌 변명으로 남겼던 “저는 재능이 없어서 자손 대의 일까지 미칠 수 없고, 당대의 일만 구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僑不才 不能及子孫 吾以救世也)”라는 말을 전면에 내세우며 말이다. 자산을 흔히 정자산(鄭子産)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나라 자산이라는 뜻이다. 자산은 그의 자이다. 이름은 교(僑)이며 공손교(公孫僑)라 칭한다. 호칭으로 알 수 있듯이 그는 정나라 목공의 손자로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다. 정나라는 작은 나라였지만 주(周)나라와의 돈독한 관계로 춘추시대 초기에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나라와 사이가 멀어지고, 진(晉)이나 제(齊), 초(楚) 등의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국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여기에는 귀족들의 세력 다툼으로 내정이 불안정했던 것도 큰...
진달래
2021.11.24 | 조회 322
논어 카메오 열전
관중은 인한 사람입니까   자로가 말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죽었고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인하지 못한 것이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면서도 군사력으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논어』「헌문」17   관중(管仲)은 제(齊)나라의 정치가로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중(仲)은 자이다. 우리에게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운 시절, 친구인 포숙아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던 관중은 후에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말로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포숙아는 제나라의 공자 규와 소백이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규를 지지하던 관중과 달리 소백을 모시고 있었다. 후에 소백이 제 환공의 자리에 오르자 포숙아는 관중을 추천하여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에 관중은 제 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들고, 제나라를 제후국 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였다. 제 환공은 관중을 높여 중부(仲父)라 불렀다고 한다.     공자는 칭찬에 인색하다. 『논어』에 누가 인(仁)하냐고 물으면 대체로 “인한지 모르겠다.(不知其仁也)”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로가 관중은 인하지 못한 사람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공자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如其仁)”라고 대답한 것은 대단한 칭찬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관중과 제 환공이 쇠약해진 주(周)나라를 대신해, 제후들을 규합하여 주 왕실을 받들게 하고, 북쪽의 융족이 침략했을 때 그를 막아냄으로써 중원의 문화를 지킨 것을 높게 평가했다. 춘추전국시대를...
관중은 인한 사람입니까   자로가 말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죽었고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인하지 못한 것이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면서도 군사력으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논어』「헌문」17   관중(管仲)은 제(齊)나라의 정치가로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중(仲)은 자이다. 우리에게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운 시절, 친구인 포숙아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던 관중은 후에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말로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포숙아는 제나라의 공자 규와 소백이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규를 지지하던 관중과 달리 소백을 모시고 있었다. 후에 소백이 제 환공의 자리에 오르자 포숙아는 관중을 추천하여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에 관중은 제 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들고, 제나라를 제후국 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였다. 제 환공은 관중을 높여 중부(仲父)라 불렀다고 한다.     공자는 칭찬에 인색하다. 『논어』에 누가 인(仁)하냐고 물으면 대체로 “인한지 모르겠다.(不知其仁也)”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로가 관중은 인하지 못한 사람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공자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如其仁)”라고 대답한 것은 대단한 칭찬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관중과 제 환공이 쇠약해진 주(周)나라를 대신해, 제후들을 규합하여 주 왕실을 받들게 하고, 북쪽의 융족이 침략했을 때 그를 막아냄으로써 중원의 문화를 지킨 것을 높게 평가했다. 춘추전국시대를...
진달래
2021.09.22 | 조회 367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와 제자들이 아닌 『논어』 속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공자는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런 작은 궁금증으로 <논어 카메오 열전>을 시작합니다.      『논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 혹은 옛날 현인(賢人), 성왕(聖王) 등등이 있다. 공자는 이들에 대한 다양한 평을 논어에 남겼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물평은 대체로 제자들과의 강학(講學) 과정에서 남게 된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소회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사교성 좋은 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공야장」, 16   안평중은 우리가 흔히 안자(晏子)라고 알고 있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은 영(嬰)이고 자가 평중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그가 죽은 해는 기원전 500년으로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보다 50세 정도 많다. 『안자춘추』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안자가 쓴 것은 아니고, 안자의 언행을 모아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책이다.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 안자를 소개하면서 “만약 안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서 마부가 되어 채찍을 드는 일이라도 할 정도로 나는 안자를 흠모하고 있다.(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고 평했다. 흔히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이야기 할 때 관중과 제환공을 예로 드는데 안자와 제경공도 그에 못지않게 본다. 그러니까 안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명망이 높았던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논어』에는 안자에 대해 이렇게 단 한 줄의 평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평도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라니,...
공자와 제자들이 아닌 『논어』 속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공자는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런 작은 궁금증으로 <논어 카메오 열전>을 시작합니다.      『논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 혹은 옛날 현인(賢人), 성왕(聖王) 등등이 있다. 공자는 이들에 대한 다양한 평을 논어에 남겼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물평은 대체로 제자들과의 강학(講學) 과정에서 남게 된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소회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사교성 좋은 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공야장」, 16   안평중은 우리가 흔히 안자(晏子)라고 알고 있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은 영(嬰)이고 자가 평중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그가 죽은 해는 기원전 500년으로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보다 50세 정도 많다. 『안자춘추』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안자가 쓴 것은 아니고, 안자의 언행을 모아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책이다.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 안자를 소개하면서 “만약 안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서 마부가 되어 채찍을 드는 일이라도 할 정도로 나는 안자를 흠모하고 있다.(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고 평했다. 흔히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이야기 할 때 관중과 제환공을 예로 드는데 안자와 제경공도 그에 못지않게 본다. 그러니까 안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명망이 높았던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논어』에는 안자에 대해 이렇게 단 한 줄의 평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평도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라니,...
진달래
2021.07.23 | 조회 546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