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약방 에세이
      1. 나는 실패한 걸까?   10대까지는 스무살이 목표인 것처럼 살았다. 그 때가 되면 나를 옭아맨 숱한 규제들이 한 방에 펑하고 날아갈 거라 생각했다. 스물은 성인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게 자유와 같은 말로 이해되었다. 구체적인 꿈을 갖지 못한 채 나는 맹목적으로 스무살을 갈망했다. 막상 20대가 되니 혼란스러웠다. 내가 대학을 왜 갔는지 그제서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난 뭘 기대했던 걸까? 방황하던 눈길에 걸린 현수막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학보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사회를 만났다. 나는 강의실보다 학보사와 인쇄소, 시위 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론, 부모의 걱정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걱정이 늘 따라다녔다. 무엇 하나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살았다.   대학 졸업 후 2년을 학생운동조직에서 일했다. 확신보다는 대의에 대한 당위로 선택한 길이었다. 거기서 전 남편을 만났다. 나는 결혼을 부모로부터 벗어날 최선의 길로 생각했다. 삶을 직시하지 않은 비겁함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로 숨겨졌다. 결혼을 한 후에야 깨달았다. 우리는 삶을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와 헤어진 건 막 서른이 됐을 때였다. 아들이 만 세살이 되기 전이었다. 나는 아들과 함께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부모의 그늘로 다시 들어갔다. 어린 아들의 돌봄 뿐 아니라 내 한 몸 사는데 필요한 가사까지 전적으로 부모님께 의탁하며, 구애없이 사회생활을 했다. 서른이면 젊음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젊었고, 사회생활에서 새로운 기회도 생겼다.   나는 30대가...
      1. 나는 실패한 걸까?   10대까지는 스무살이 목표인 것처럼 살았다. 그 때가 되면 나를 옭아맨 숱한 규제들이 한 방에 펑하고 날아갈 거라 생각했다. 스물은 성인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게 자유와 같은 말로 이해되었다. 구체적인 꿈을 갖지 못한 채 나는 맹목적으로 스무살을 갈망했다. 막상 20대가 되니 혼란스러웠다. 내가 대학을 왜 갔는지 그제서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난 뭘 기대했던 걸까? 방황하던 눈길에 걸린 현수막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학보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사회를 만났다. 나는 강의실보다 학보사와 인쇄소, 시위 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론, 부모의 걱정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걱정이 늘 따라다녔다. 무엇 하나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살았다.   대학 졸업 후 2년을 학생운동조직에서 일했다. 확신보다는 대의에 대한 당위로 선택한 길이었다. 거기서 전 남편을 만났다. 나는 결혼을 부모로부터 벗어날 최선의 길로 생각했다. 삶을 직시하지 않은 비겁함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로 숨겨졌다. 결혼을 한 후에야 깨달았다. 우리는 삶을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와 헤어진 건 막 서른이 됐을 때였다. 아들이 만 세살이 되기 전이었다. 나는 아들과 함께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부모의 그늘로 다시 들어갔다. 어린 아들의 돌봄 뿐 아니라 내 한 몸 사는데 필요한 가사까지 전적으로 부모님께 의탁하며, 구애없이 사회생활을 했다. 서른이면 젊음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젊었고, 사회생활에서 새로운 기회도 생겼다.   나는 30대가...
문탁
2023.12.04 | 조회 109
인문약방 에세이
      1. 나의 방황이 시작되다   2020년 여름이 찾아올 무렵, 나는 번아웃에 빠졌다. 2007년 입사 이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회사는 그동안의 내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을 완벽하게 끝내고 느낄 수 있는 그 뿌듯함이 내가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자발적인 야근도 모자라 집에 가서도 다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오곤 했다. 일이 아무리 많이 쌓여 있어도 재미있기만 했고, 하나씩 업무를 완수할 때마다 느끼는 성취감은 달콤했으며, 직장동료들로부터 나의 업무능력을 인정받기라도 하면 난 지칠 줄 모르고 더 열심히 일에 매달렸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업무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회사 내 대표적인 워커홀릭이었던 내가 어느 순간 일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 업무를 처리하면서 느꼈던 보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에 비례하게 조직에 대해 내가 느끼는 회의감은 점차 커져 갔다.         조직생활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는 것은 나의 지난 삶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바보같이 일만 열심히 했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조직에 충성한 것일까? 지금까지의 삶은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이라 애써 위안했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과, 성공, 능력, 인정, 승진과 같은 것들이 더이상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타인이 정한 기준과 평가에 맞춰서 살아왔던 내가, 이제는 내 인생의 주체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인생의 방향은커녕 난 ‘내가 어떤...
      1. 나의 방황이 시작되다   2020년 여름이 찾아올 무렵, 나는 번아웃에 빠졌다. 2007년 입사 이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회사는 그동안의 내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을 완벽하게 끝내고 느낄 수 있는 그 뿌듯함이 내가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자발적인 야근도 모자라 집에 가서도 다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오곤 했다. 일이 아무리 많이 쌓여 있어도 재미있기만 했고, 하나씩 업무를 완수할 때마다 느끼는 성취감은 달콤했으며, 직장동료들로부터 나의 업무능력을 인정받기라도 하면 난 지칠 줄 모르고 더 열심히 일에 매달렸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업무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회사 내 대표적인 워커홀릭이었던 내가 어느 순간 일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 업무를 처리하면서 느꼈던 보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에 비례하게 조직에 대해 내가 느끼는 회의감은 점차 커져 갔다.         조직생활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는 것은 나의 지난 삶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바보같이 일만 열심히 했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조직에 충성한 것일까? 지금까지의 삶은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이라 애써 위안했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과, 성공, 능력, 인정, 승진과 같은 것들이 더이상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타인이 정한 기준과 평가에 맞춰서 살아왔던 내가, 이제는 내 인생의 주체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인생의 방향은커녕 난 ‘내가 어떤...
문탁
2023.12.04 | 조회 62
인문약방 에세이
    1.과학적 세계관으로 삶을 해석하기   이 소설은,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 중 하나이다. 테드 창은 쓰는 작품 마다 SF계의 유명한 상은 다 휩쓸어 버리는, 현존하는 최고의 SF 소설가로 평가 받는 작가이다. 그가 쓰는 글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정교하게 잘 짜여진 세계관 안에서 펼쳐져,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선 작가가 연결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하드 SF’ 소설 중에서도 더욱 하드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중 친화적인 익숙한 장르적 요소 또한 갖춰 SF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 공감도 녹여 넣는, 넘사벽 소설가이다.   나 역시 이 여덟 개의 소설 중 어느 것도 만만한 것이 없었다. 좀 익숙한 소재이다 싶으면 상상만으론 따라가기 어려운 설정이 나오고, 그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선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가 결합된 단계들이 필요해 나무위키와 유투브의 영상들을 PC창에 여러 개를 띄어두고서 책을 읽어야 했다.   그의 소설은 SF 장르이지만 판타지 요소가 첨가되어 있거나, 판타지 장르다 싶으면 SF적 요소를 덧붙여 전개한 것들이 나와서 상상력과 과학적 논리가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공통된 주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포함한) 우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주는 기계와도 같은 것이라 과학을 통해 그것을 탐구하면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에...
    1.과학적 세계관으로 삶을 해석하기   이 소설은,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 중 하나이다. 테드 창은 쓰는 작품 마다 SF계의 유명한 상은 다 휩쓸어 버리는, 현존하는 최고의 SF 소설가로 평가 받는 작가이다. 그가 쓰는 글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정교하게 잘 짜여진 세계관 안에서 펼쳐져,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선 작가가 연결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하드 SF’ 소설 중에서도 더욱 하드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중 친화적인 익숙한 장르적 요소 또한 갖춰 SF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 공감도 녹여 넣는, 넘사벽 소설가이다.   나 역시 이 여덟 개의 소설 중 어느 것도 만만한 것이 없었다. 좀 익숙한 소재이다 싶으면 상상만으론 따라가기 어려운 설정이 나오고, 그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선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가 결합된 단계들이 필요해 나무위키와 유투브의 영상들을 PC창에 여러 개를 띄어두고서 책을 읽어야 했다.   그의 소설은 SF 장르이지만 판타지 요소가 첨가되어 있거나, 판타지 장르다 싶으면 SF적 요소를 덧붙여 전개한 것들이 나와서 상상력과 과학적 논리가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공통된 주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포함한) 우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주는 기계와도 같은 것이라 과학을 통해 그것을 탐구하면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에...
문탁
2023.12.04 | 조회 137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1. 오래된 장식품   우리 집 책장은 책으로 가득 차있지만 항상 한켠에는 여유 공간이 있다. 여행에서 가져온 작은 소품들, 엽서들을 전시한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작은 트리, 루돌프인형, 희미한 조명들까지 그 공간을 채운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임을 알 수 있다. 정화의 감성으로 한껏 포근해진 공간을 임수는 감사히 즐긴다.   정화는 어릴 적부터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의 따뜻한 빛이 좋았다고 한다. 모태신앙의 영향인데 개종의 과정 중에 있는 지금도 정화는 자신만의 리츄얼로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꺼내서 책장의 한켠을 꾸민다. 그 장식품 안에는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물건들이 있다. 모두 빛에 바래지도 않았고 깔끔하다. 정화가 말하기 전까지 그렇게 오래된 줄 몰랐을 정도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책장 한켠을 채운 크리스마스 트리와 그 친구들   우리 집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물론 큰집으로 이사 오면서 새로운 가구들도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임수도 물욕이 많지 않기도 하고 새로운 걸 잘 사질 않으니 오래된 물건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정화와 임수의 물건상태는 사뭇 다르다. 정화의 물건들은 트렌디하지는 않지만 제 역할을 다한다. 깔끔하고 정돈되어있으며 심지어 사랑을...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1. 오래된 장식품   우리 집 책장은 책으로 가득 차있지만 항상 한켠에는 여유 공간이 있다. 여행에서 가져온 작은 소품들, 엽서들을 전시한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작은 트리, 루돌프인형, 희미한 조명들까지 그 공간을 채운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임을 알 수 있다. 정화의 감성으로 한껏 포근해진 공간을 임수는 감사히 즐긴다.   정화는 어릴 적부터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의 따뜻한 빛이 좋았다고 한다. 모태신앙의 영향인데 개종의 과정 중에 있는 지금도 정화는 자신만의 리츄얼로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꺼내서 책장의 한켠을 꾸민다. 그 장식품 안에는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물건들이 있다. 모두 빛에 바래지도 않았고 깔끔하다. 정화가 말하기 전까지 그렇게 오래된 줄 몰랐을 정도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책장 한켠을 채운 크리스마스 트리와 그 친구들   우리 집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물론 큰집으로 이사 오면서 새로운 가구들도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임수도 물욕이 많지 않기도 하고 새로운 걸 잘 사질 않으니 오래된 물건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정화와 임수의 물건상태는 사뭇 다르다. 정화의 물건들은 트렌디하지는 않지만 제 역할을 다한다. 깔끔하고 정돈되어있으며 심지어 사랑을...
루틴
2023.11.30 | 조회 271
인문약방 에세이
        “우주는 다른 말로 바꾸면 시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둘이 아니다. 시간은 공간의 다른 펼침이다. 그리고 그 시공간이 변화해 가는 리듬을 자연이라 한다. 스스로 그러함이란 변화의 ‘차서’(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를 뜻한다. 차서를 어길 때 우리는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지난 2년 간의 세미나가 마무리되고 있다. 세미나의 제목대로 나는 공부를 통해 50대와 노년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찾고 싶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책들이 많았지만 영감을 준 저자들도 꽤 있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연구하고 기술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파커 파머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온전한 나”를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데비라 리비나 폴 칼라니티처럼 당당하고 의연하게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작가들의 용기를 본받고 싶기도 했다. 세미나 공부가 나를 탐구하는 데 귀중한 시발점이 되었다.    난 공부를 통해 소명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세상에 이로운 그런 무언가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없던 소명이 짠 하고 갑자기 나타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세미나에서 읽었던 많은 책들의 공통된 테마였던 몸과 일상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 몸을 어떻게 쓰고 일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쉰을 넘긴 내 몸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풀타임에 주말 알바까지 견디어 냈던 청년기의 강단은 오간데 없다. 이제 서너 시간 일하면 왼쪽 어깨에 통증이 오고 드러눕고 싶다. 한쪽 귀의 청력 상실로 누가 왼쪽에서 말을 건네면 되물어야 할 때가 많다. 앞으로 내 몸은 가속도가 붙어 정상성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난 내 몸을 수치들과 동일시했다. 나이, 몸무게, 혈압, 콜레스테롤 등의 숫자와 앓고 있는 질병이 내 몸을 설명하는 언어였다. 또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이해했다. 건강 검진 결과상의 수치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따로 관리하면(‘관리 받으면’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된다고 생각했다. 사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난 예순까진 전일제 노동을 너끈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몸에 대해 무지했고 일상에 대한 상상력도 빈곤했다. 돈 버는 노동과 그것을 잊게 해주는 여가 말고, 일상을 세심하게 설계해 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형편상 돈 버는 게 중요했고 젊은 신체였기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내 몸은 노동에 적합한 신체로 길들여졌다. 적어도 8시간은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몸의 동작과 동선도 화폐의 증식을 위한 공간에 최적화되었을 것이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기고 일에서 번아웃을 경험할 때까지 몸과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다.          소외된 몸, 문제적 몸   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건 내 신체의 이곳 저곳이 고장나기 시작하면서다. 약 7년 전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오른쪽 귀에서 회오리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멈추지 않았다. 난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찾았고 MRI 촬영을 했다. 다음엔 신경과 전문의와 미팅이 이어졌다. 모두들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의사들은 서로를 추천하기만할 뿐 소통하지 않았다. 아무도 청력 손실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난 당시 역류성 식도염도 앓고 있었다. 가슴에서 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가정의학 전문의는 약을 처방하였다. 한 달이 지나도 증상 개선은 없었고 변비 등의 부작용만 겪었다. 음식과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것 같아 얘기를 꺼냈는데 의사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약을 바꿔보자는 얘기만 하였다. 난 분과화된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경험했다. 슬프게도 의사들은 내 몸에 대해 잘 몰랐다.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어 보였다. 내가 내 몸에 대해 무지한 채로 살아왔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청력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식도염에 대해서는 원인을 알아보기로 했다. 난 그날그날 먹은 음식들을 기록하는 일지를 썼다.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나의 식습관에 답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빈 속에 뜨거운 커피를 몇 잔씩 들이키는 습관이 있었다. 오후에도 늘 커피를 마셔야 했다. 모닝 커피를 카페인이 없는 걸로 바꿨다. 저녁 식사 후 TV를 보며 즐겨먹었던 초콜릿이나 감자칩도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음식들을 줄이거나 끊으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지만, 난 횟수나 양을 현격하게 줄였다. 그 덕분인지 식습관을 바꾼 지1년 후 즈음엔 위산 역류가 거의 사라졌다. 역류성 식도염은 단지 음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 몸이 커피와 초콜릿, 감자칩 등에 길들여지게 된 데 원인이 있었다. 일상, 특히 일에서 내 몸이 소외되어 있었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음식이라는 손쉬운 보상이 필요했다. 습관을 바꾸어 병이 좋아진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몸에 대해 공부를 하겠다거나 일상의 활동과 리듬을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특정 질병에 걸리면 내 몸과 질병에 대한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내 몸에 지독히 들러붙은 습관들을 하나씩 점검할 좋은 기회였는데도 말이다. 내 몸은 소외된 채 문제로 남았다.      자연의 리듬과 차서   고미숙은 일상의 활동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관한 힌트를 우주(또는 자연)의 리듬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동양 우주론에서는 인간의 몸이 “우주적 질료들의 재배치”를 통해 구성되었다 본다.  우리의 몸을 지수화풍 (불교) 또는 목화토금수 (음양오행론)라는 자연적 질료들의 조합으로 이해한 것이다. 저자는 이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사용한 은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초신성의 폭발로 탄소, 산소, 질소 등이 탄생했고, 이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탄생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죽은 후 우리 몸이 바람과 공기, 물로 흩어지게 된다는 사실 또한 몸이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몸을 우주의 축소판, 즉 소우주로 보는 동양사상에서는 삶의 이치를 자연의 순환에서 찾았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또는 우주적) 리듬에 따라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삶이다.  지구에 춘하추동이라는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의 몸에는 이에 대응하는 생로병사라는 리듬이 있다.  봄은 생동하는 에너지가 비전을 낳게 하고(목) 여름은 불과 같은 맹렬함을 발휘하게 한다(화). 가을은 튼실한 열매를 맺는데 주력하는 때이고(금) 겨울은 삶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는 계절이다(수).  우리의 전체 인생 뿐 아니라 하루의 일상에도 목화토금수라는 변전하는 오행의 리듬이 적용된다.    나는 생애 주기에서 가을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활동했던 여름은 이제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제 열매를 거둘 때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조건과 나의 무지  때문에 자본이 심어준 욕망을 추종했다. 나의 여름은 뚜렷한 방향이 없었다. 수확의 시기인 50대에 내가 어떤 열매를 거둘지, 아니면 특별한 열매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의 일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몸도 시공간도 달라진 50대 일상의 차서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는 봄여름의 속도나 활동들과는 달라야 한다. 나의 일상을 살피고 차서에 맞는 활동들을 탐색할 시점이다.          미국의 여성 작가 르 귄은 일상적 활동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할 것인지를 날카롭게 통찰한다. 그녀의  생활 에세이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서 르 귄은 일과 여가의 이분법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버드 대학 동창회에서 그녀와 동기들을 대상으로 보낸 설문 조사가 그 계기였다. 그 설문에는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설문지를 만들었던 사람은 통상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여가를 규정했다. 설문에서 제시된 여가의 예는  TV시청, 골프, 보드게임, 독서, 그림 그리기, 글쓰기 등이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노동이고 자발적으로 하는 오락이나 의미 있는 일은 여가라는 통념적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었다. 르귄은 본인의 인생에서 여가(spare) 시간은 따로 없었다고 말한다. 평생 프리랜서 작가로 살았던 그녀에게 글쓰는 일은 자발적으로 하는 분주한 노동이고, 여행이나 독서 뿐 아니라 장보기, 낮잠 자기, 고양이와 놀고 소통하는 것도 일상을 꽉 채우는(occupied) 활동이다. 그녀의 통찰 덕분에 난 노동과 여가라는 이분법로 구분될 수 없는 소중한 일상적 활동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연결과 교감 – 목수벌과 저녁 밥상   일상을 재구성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자연의 리듬에 어긋나 살았던 몸이 신호를 보냈기 떄문이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나는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당시 나는 산책을 하기로 했다. 숨쉴 수 있는 시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동네의 산책길이나 근처 공원들을 걸었다. 지금 직장을 얻기 몇 년 전 나는 오래된 나무, 수많은 네 발 동물들, 다양한 종의 새와 벌 등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로 이사한 상태였다. 걷기는 그간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초봄이 되면 난 꿀벌이나 목수벌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이들을 처음 목격하는 날에 내 가슴은 뭉클하고 벅차 오른다. 운수대통한 날이다. 벌들마다 선호하는 꽃들이 있다. 클로버, 이름 없는 들꽃, 호박꽃, 화려한 장미 중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각기 다른 종류의 벌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된다. 여름 초저녁엔 앞마당에 앉아 반딧불이를 관찰한다. 일 분 동안 시야에 들어오는 반딧불이가 몇 마리인지 센 다음 이를 기록해 둔다. 이를 열 번 정도 반복한다. 며칠 동안 과업을 수행하고 숫자를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같은 도시에 사는 과학자에게 보낸다. 난 반딧불이들, 과학자, 그리고 이에 참가하는 (누구인지 잘은 모르지만) 이웃들과 연결되었다고 느낀다.  이 활동들로 인해 몸이 금방 좋아지지는 않았다. 대신 난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과 조금씩 연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내가 생명체들과 네트워크를 맺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들과 감응할 수 있는 신체를 가졌다는 게 감사했다. 난 주위에 생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크고 작은 모임들이 조직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야생화 모임, 새 관찰 모임, 나무 돌보기 모임 등. 내 몸과 일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생명체들과 그리고 타자들과 보다 긴밀히 연결되고 싶었다. 가능한 한 노동을 줄이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활동으로 일상을 채워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이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욕망은 낯선 것이었다. 계속 확장하고 싶은 기분 좋은 욕망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연결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나와 파트너는 둘 다 일을 하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저녁을 한다 (내가 더 자주하긴 하지만^^). 지금의 저녁 메뉴 루틴이 정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고 이를 조율하면서 여러 메뉴가 탄생했다. 나와 상대의 다른 입맛을 절충하여 밥을 하는 것은 처음엔 피곤한 작업이었지만 이제 소중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파트너 어머니와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녀는 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 나와 달리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 음식이 조금이라도 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금새 포크를 내려 놓을 만큼 까다롭다. 난 세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 메뉴를 정하고 장보고 요리를 한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다. 이는 요리에 소질도 없고 이제 귀찮아 하는 80대의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돌봄이다. 같이 밥 먹고 대화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생명체들과 교감하는 것, 밥을 하고 같이 먹는 것, 이는 모두 르 귄의 말대로 통상적 노동도 여가 활동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 일상의 활동들이다. 거기에는 연결과 교감이 있다.      낯선 욕망, 새로운 실험   내가 회사일을 하면서 매일 산책하고 저녁을 해 먹고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건 코로나 이후 근무 형태가 변해 재택 근무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 나는 번아웃을 겪은 후 상사와 면담을 하여 근무시간을 줄였다(당연히 급여가 줄었다). 그리고 휴가를 최대한 다 썼다. 2년동안 세미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에세이 기간엔 동료들이 얼굴보기 힘들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휴가를 자주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최근 몇 년 간 노동 이외의 활동을 내 시공간에 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롭고 유연한 직장 분위기의 덕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노동 위주의 일상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계속 틈새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제 틈새를 찾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연결과 교감을 위한 삶의 영역을 점차 넓히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게 50대의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의 주 내용은 일상의 차서를 자연의 리듬에 맞추고 생명체와 타자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활동을 모색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자기 소외적 노동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걷고, 운동하고, 생명체들과 소통하고, 밥하고, 먹고, 돌보고, 공부하는 일을 말한다. 40대의 일상과 비교해 보면 이는 매우 낯선 욕망들이다. 따라서 내 몸은 이러한 일상을 다소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적응하는 데 시간도 소요될 것이다.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갈등 상황도 생겨날 것이다.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이 낯선 욕망을 따를 여러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느껴진다. 새로운 시공간의 차서에 조응하는 일상의 실험이 기대된다.     
        “우주는 다른 말로 바꾸면 시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둘이 아니다. 시간은 공간의 다른 펼침이다. 그리고 그 시공간이 변화해 가는 리듬을 자연이라 한다. 스스로 그러함이란 변화의 ‘차서’(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를 뜻한다. 차서를 어길 때 우리는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지난 2년 간의 세미나가 마무리되고 있다. 세미나의 제목대로 나는 공부를 통해 50대와 노년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찾고 싶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책들이 많았지만 영감을 준 저자들도 꽤 있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연구하고 기술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파커 파머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온전한 나”를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데비라 리비나 폴 칼라니티처럼 당당하고 의연하게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작가들의 용기를 본받고 싶기도 했다. 세미나 공부가 나를 탐구하는 데 귀중한 시발점이 되었다.    난 공부를 통해 소명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세상에 이로운 그런 무언가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없던 소명이 짠 하고 갑자기 나타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세미나에서 읽었던 많은 책들의 공통된 테마였던 몸과 일상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 몸을 어떻게 쓰고 일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쉰을 넘긴 내 몸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풀타임에 주말 알바까지 견디어 냈던 청년기의 강단은 오간데 없다. 이제 서너 시간 일하면 왼쪽 어깨에 통증이 오고 드러눕고 싶다. 한쪽 귀의 청력 상실로 누가 왼쪽에서 말을 건네면 되물어야 할 때가 많다. 앞으로 내 몸은 가속도가 붙어 정상성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난 내 몸을 수치들과 동일시했다. 나이, 몸무게, 혈압, 콜레스테롤 등의 숫자와 앓고 있는 질병이 내 몸을 설명하는 언어였다. 또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이해했다. 건강 검진 결과상의 수치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따로 관리하면(‘관리 받으면’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된다고 생각했다. 사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난 예순까진 전일제 노동을 너끈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몸에 대해 무지했고 일상에 대한 상상력도 빈곤했다. 돈 버는 노동과 그것을 잊게 해주는 여가 말고, 일상을 세심하게 설계해 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형편상 돈 버는 게 중요했고 젊은 신체였기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내 몸은 노동에 적합한 신체로 길들여졌다. 적어도 8시간은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몸의 동작과 동선도 화폐의 증식을 위한 공간에 최적화되었을 것이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기고 일에서 번아웃을 경험할 때까지 몸과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다.          소외된 몸, 문제적 몸   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건 내 신체의 이곳 저곳이 고장나기 시작하면서다. 약 7년 전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오른쪽 귀에서 회오리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멈추지 않았다. 난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찾았고 MRI 촬영을 했다. 다음엔 신경과 전문의와 미팅이 이어졌다. 모두들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의사들은 서로를 추천하기만할 뿐 소통하지 않았다. 아무도 청력 손실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난 당시 역류성 식도염도 앓고 있었다. 가슴에서 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가정의학 전문의는 약을 처방하였다. 한 달이 지나도 증상 개선은 없었고 변비 등의 부작용만 겪었다. 음식과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것 같아 얘기를 꺼냈는데 의사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약을 바꿔보자는 얘기만 하였다. 난 분과화된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경험했다. 슬프게도 의사들은 내 몸에 대해 잘 몰랐다.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어 보였다. 내가 내 몸에 대해 무지한 채로 살아왔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청력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식도염에 대해서는 원인을 알아보기로 했다. 난 그날그날 먹은 음식들을 기록하는 일지를 썼다.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나의 식습관에 답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빈 속에 뜨거운 커피를 몇 잔씩 들이키는 습관이 있었다. 오후에도 늘 커피를 마셔야 했다. 모닝 커피를 카페인이 없는 걸로 바꿨다. 저녁 식사 후 TV를 보며 즐겨먹었던 초콜릿이나 감자칩도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음식들을 줄이거나 끊으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지만, 난 횟수나 양을 현격하게 줄였다. 그 덕분인지 식습관을 바꾼 지1년 후 즈음엔 위산 역류가 거의 사라졌다. 역류성 식도염은 단지 음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 몸이 커피와 초콜릿, 감자칩 등에 길들여지게 된 데 원인이 있었다. 일상, 특히 일에서 내 몸이 소외되어 있었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음식이라는 손쉬운 보상이 필요했다. 습관을 바꾸어 병이 좋아진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몸에 대해 공부를 하겠다거나 일상의 활동과 리듬을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특정 질병에 걸리면 내 몸과 질병에 대한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내 몸에 지독히 들러붙은 습관들을 하나씩 점검할 좋은 기회였는데도 말이다. 내 몸은 소외된 채 문제로 남았다.      자연의 리듬과 차서   고미숙은 일상의 활동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관한 힌트를 우주(또는 자연)의 리듬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동양 우주론에서는 인간의 몸이 “우주적 질료들의 재배치”를 통해 구성되었다 본다.  우리의 몸을 지수화풍 (불교) 또는 목화토금수 (음양오행론)라는 자연적 질료들의 조합으로 이해한 것이다. 저자는 이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사용한 은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초신성의 폭발로 탄소, 산소, 질소 등이 탄생했고, 이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탄생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죽은 후 우리 몸이 바람과 공기, 물로 흩어지게 된다는 사실 또한 몸이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몸을 우주의 축소판, 즉 소우주로 보는 동양사상에서는 삶의 이치를 자연의 순환에서 찾았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또는 우주적) 리듬에 따라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삶이다.  지구에 춘하추동이라는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의 몸에는 이에 대응하는 생로병사라는 리듬이 있다.  봄은 생동하는 에너지가 비전을 낳게 하고(목) 여름은 불과 같은 맹렬함을 발휘하게 한다(화). 가을은 튼실한 열매를 맺는데 주력하는 때이고(금) 겨울은 삶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는 계절이다(수).  우리의 전체 인생 뿐 아니라 하루의 일상에도 목화토금수라는 변전하는 오행의 리듬이 적용된다.    나는 생애 주기에서 가을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활동했던 여름은 이제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제 열매를 거둘 때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조건과 나의 무지  때문에 자본이 심어준 욕망을 추종했다. 나의 여름은 뚜렷한 방향이 없었다. 수확의 시기인 50대에 내가 어떤 열매를 거둘지, 아니면 특별한 열매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의 일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몸도 시공간도 달라진 50대 일상의 차서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는 봄여름의 속도나 활동들과는 달라야 한다. 나의 일상을 살피고 차서에 맞는 활동들을 탐색할 시점이다.          미국의 여성 작가 르 귄은 일상적 활동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할 것인지를 날카롭게 통찰한다. 그녀의  생활 에세이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서 르 귄은 일과 여가의 이분법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버드 대학 동창회에서 그녀와 동기들을 대상으로 보낸 설문 조사가 그 계기였다. 그 설문에는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설문지를 만들었던 사람은 통상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여가를 규정했다. 설문에서 제시된 여가의 예는  TV시청, 골프, 보드게임, 독서, 그림 그리기, 글쓰기 등이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노동이고 자발적으로 하는 오락이나 의미 있는 일은 여가라는 통념적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었다. 르귄은 본인의 인생에서 여가(spare) 시간은 따로 없었다고 말한다. 평생 프리랜서 작가로 살았던 그녀에게 글쓰는 일은 자발적으로 하는 분주한 노동이고, 여행이나 독서 뿐 아니라 장보기, 낮잠 자기, 고양이와 놀고 소통하는 것도 일상을 꽉 채우는(occupied) 활동이다. 그녀의 통찰 덕분에 난 노동과 여가라는 이분법로 구분될 수 없는 소중한 일상적 활동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연결과 교감 – 목수벌과 저녁 밥상   일상을 재구성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자연의 리듬에 어긋나 살았던 몸이 신호를 보냈기 떄문이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나는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당시 나는 산책을 하기로 했다. 숨쉴 수 있는 시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동네의 산책길이나 근처 공원들을 걸었다. 지금 직장을 얻기 몇 년 전 나는 오래된 나무, 수많은 네 발 동물들, 다양한 종의 새와 벌 등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로 이사한 상태였다. 걷기는 그간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초봄이 되면 난 꿀벌이나 목수벌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이들을 처음 목격하는 날에 내 가슴은 뭉클하고 벅차 오른다. 운수대통한 날이다. 벌들마다 선호하는 꽃들이 있다. 클로버, 이름 없는 들꽃, 호박꽃, 화려한 장미 중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각기 다른 종류의 벌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된다. 여름 초저녁엔 앞마당에 앉아 반딧불이를 관찰한다. 일 분 동안 시야에 들어오는 반딧불이가 몇 마리인지 센 다음 이를 기록해 둔다. 이를 열 번 정도 반복한다. 며칠 동안 과업을 수행하고 숫자를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같은 도시에 사는 과학자에게 보낸다. 난 반딧불이들, 과학자, 그리고 이에 참가하는 (누구인지 잘은 모르지만) 이웃들과 연결되었다고 느낀다.  이 활동들로 인해 몸이 금방 좋아지지는 않았다. 대신 난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과 조금씩 연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내가 생명체들과 네트워크를 맺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들과 감응할 수 있는 신체를 가졌다는 게 감사했다. 난 주위에 생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크고 작은 모임들이 조직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야생화 모임, 새 관찰 모임, 나무 돌보기 모임 등. 내 몸과 일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생명체들과 그리고 타자들과 보다 긴밀히 연결되고 싶었다. 가능한 한 노동을 줄이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활동으로 일상을 채워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이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욕망은 낯선 것이었다. 계속 확장하고 싶은 기분 좋은 욕망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연결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나와 파트너는 둘 다 일을 하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저녁을 한다 (내가 더 자주하긴 하지만^^). 지금의 저녁 메뉴 루틴이 정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고 이를 조율하면서 여러 메뉴가 탄생했다. 나와 상대의 다른 입맛을 절충하여 밥을 하는 것은 처음엔 피곤한 작업이었지만 이제 소중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파트너 어머니와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녀는 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 나와 달리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 음식이 조금이라도 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금새 포크를 내려 놓을 만큼 까다롭다. 난 세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 메뉴를 정하고 장보고 요리를 한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다. 이는 요리에 소질도 없고 이제 귀찮아 하는 80대의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돌봄이다. 같이 밥 먹고 대화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생명체들과 교감하는 것, 밥을 하고 같이 먹는 것, 이는 모두 르 귄의 말대로 통상적 노동도 여가 활동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 일상의 활동들이다. 거기에는 연결과 교감이 있다.      낯선 욕망, 새로운 실험   내가 회사일을 하면서 매일 산책하고 저녁을 해 먹고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건 코로나 이후 근무 형태가 변해 재택 근무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 나는 번아웃을 겪은 후 상사와 면담을 하여 근무시간을 줄였다(당연히 급여가 줄었다). 그리고 휴가를 최대한 다 썼다. 2년동안 세미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에세이 기간엔 동료들이 얼굴보기 힘들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휴가를 자주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최근 몇 년 간 노동 이외의 활동을 내 시공간에 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롭고 유연한 직장 분위기의 덕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노동 위주의 일상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계속 틈새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제 틈새를 찾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연결과 교감을 위한 삶의 영역을 점차 넓히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게 50대의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의 주 내용은 일상의 차서를 자연의 리듬에 맞추고 생명체와 타자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활동을 모색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자기 소외적 노동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걷고, 운동하고, 생명체들과 소통하고, 밥하고, 먹고, 돌보고, 공부하는 일을 말한다. 40대의 일상과 비교해 보면 이는 매우 낯선 욕망들이다. 따라서 내 몸은 이러한 일상을 다소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적응하는 데 시간도 소요될 것이다.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갈등 상황도 생겨날 것이다.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이 낯선 욕망을 따를 여러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느껴진다. 새로운 시공간의 차서에 조응하는 일상의 실험이 기대된다.     
문탁
2023.11.28 | 조회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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