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낯선 욕망을 실험할 때 / 해야

문탁
2023-11-28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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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다른 말로 바꾸면 시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둘이 아니다. 시간은 공간의 다른 펼침이다. 그리고 그 시공간이 변화해 가는 리듬을 자연이라 한다. 스스로 그러함이란 변화의 ‘차서’(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를 뜻한다. 차서를 어길 때 우리는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지난 2년 간의 세미나가 마무리되고 있다. 세미나의 제목대로 나는 공부를 통해 50대와 노년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찾고 싶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책들이 많았지만 영감을 준 저자들도 꽤 있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연구하고 기술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파커 파머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온전한 나”를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데비라 리비나 폴 칼라니티처럼 당당하고 의연하게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작가들의 용기를 본받고 싶기도 했다. 세미나 공부가 나를 탐구하는 데 귀중한 시발점이 되었다. 

 

난 공부를 통해 소명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세상에 이로운 그런 무언가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없던 소명이 짠 하고 갑자기 나타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세미나에서 읽었던 많은 책들의 공통된 테마였던 몸과 일상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 몸을 어떻게 쓰고 일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쉰을 넘긴 내 몸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풀타임에 주말 알바까지 견디어 냈던 청년기의 강단은 오간데 없다. 이제 서너 시간 일하면 왼쪽 어깨에 통증이 오고 드러눕고 싶다. 한쪽 귀의 청력 상실로 누가 왼쪽에서 말을 건네면 되물어야 할 때가 많다. 앞으로 내 몸은 가속도가 붙어 정상성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난 내 몸을 수치들과 동일시했다. 나이, 몸무게, 혈압, 콜레스테롤 등의 숫자와 앓고 있는 질병이 내 몸을 설명하는 언어였다. 또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이해했다. 건강 검진 결과상의 수치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따로 관리하면(‘관리 받으면’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된다고 생각했다. 사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난 예순까진 전일제 노동을 너끈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몸에 대해 무지했고 일상에 대한 상상력도 빈곤했다. 돈 버는 노동과 그것을 잊게 해주는 여가 말고, 일상을 세심하게 설계해 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형편상 돈 버는 게 중요했고 젊은 신체였기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내 몸은 노동에 적합한 신체로 길들여졌다. 적어도 8시간은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몸의 동작과 동선도 화폐의 증식을 위한 공간에 최적화되었을 것이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기고 일에서 번아웃을 경험할 때까지 몸과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다. 

 

 

 

 

소외된 몸, 문제적 몸

 

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건 내 신체의 이곳 저곳이 고장나기 시작하면서다. 약 7년 전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오른쪽 귀에서 회오리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멈추지 않았다. 난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찾았고 MRI 촬영을 했다. 다음엔 신경과 전문의와 미팅이 이어졌다. 모두들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의사들은 서로를 추천하기만할 뿐 소통하지 않았다. 아무도 청력 손실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난 당시 역류성 식도염도 앓고 있었다. 가슴에서 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가정의학 전문의는 약을 처방하였다. 한 달이 지나도 증상 개선은 없었고 변비 등의 부작용만 겪었다. 음식과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것 같아 얘기를 꺼냈는데 의사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약을 바꿔보자는 얘기만 하였다. 난 분과화된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경험했다. 슬프게도 의사들은 내 몸에 대해 잘 몰랐다.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어 보였다. 내가 내 몸에 대해 무지한 채로 살아왔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청력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식도염에 대해서는 원인을 알아보기로 했다. 난 그날그날 먹은 음식들을 기록하는 일지를 썼다.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나의 식습관에 답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빈 속에 뜨거운 커피를 몇 잔씩 들이키는 습관이 있었다. 오후에도 늘 커피를 마셔야 했다. 모닝 커피를 카페인이 없는 걸로 바꿨다. 저녁 식사 후 TV를 보며 즐겨먹었던 초콜릿이나 감자칩도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음식들을 줄이거나 끊으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지만, 난 횟수나 양을 현격하게 줄였다. 그 덕분인지 식습관을 바꾼 지1년 후 즈음엔 위산 역류가 거의 사라졌다. 역류성 식도염은 단지 음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 몸이 커피와 초콜릿, 감자칩 등에 길들여지게 된 데 원인이 있었다. 일상, 특히 일에서 내 몸이 소외되어 있었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음식이라는 손쉬운 보상이 필요했다. 습관을 바꾸어 병이 좋아진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몸에 대해 공부를 하겠다거나 일상의 활동과 리듬을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특정 질병에 걸리면 내 몸과 질병에 대한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내 몸에 지독히 들러붙은 습관들을 하나씩 점검할 좋은 기회였는데도 말이다. 내 몸은 소외된 채 문제로 남았다. 

 

 

자연의 리듬과 차서

 

고미숙은 일상의 활동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관한 힌트를 우주(또는 자연)의 리듬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동양 우주론에서는 인간의 몸이 “우주적 질료들의 재배치”를 통해 구성되었다 본다.  우리의 몸을 지수화풍 (불교) 또는 목화토금수 (음양오행론)라는 자연적 질료들의 조합으로 이해한 것이다. 저자는 이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사용한 은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초신성의 폭발로 탄소, 산소, 질소 등이 탄생했고, 이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탄생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죽은 후 우리 몸이 바람과 공기, 물로 흩어지게 된다는 사실 또한 몸이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몸을 우주의 축소판, 즉 소우주로 보는 동양사상에서는 삶의 이치를 자연의 순환에서 찾았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또는 우주적) 리듬에 따라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삶이다.  지구에 춘하추동이라는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의 몸에는 이에 대응하는 생로병사라는 리듬이 있다.  봄은 생동하는 에너지가 비전을 낳게 하고(목) 여름은 불과 같은 맹렬함을 발휘하게 한다(화). 가을은 튼실한 열매를 맺는데 주력하는 때이고(금) 겨울은 삶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는 계절이다(수).  우리의 전체 인생 뿐 아니라 하루의 일상에도 목화토금수라는 변전하는 오행의 리듬이 적용된다. 

 

나는 생애 주기에서 가을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활동했던 여름은 이제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제 열매를 거둘 때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조건과 나의 무지  때문에 자본이 심어준 욕망을 추종했다. 나의 여름은 뚜렷한 방향이 없었다. 수확의 시기인 50대에 내가 어떤 열매를 거둘지, 아니면 특별한 열매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의 일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몸도 시공간도 달라진 50대 일상의 차서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는 봄여름의 속도나 활동들과는 달라야 한다. 나의 일상을 살피고 차서에 맞는 활동들을 탐색할 시점이다. 

 

 

 

 

미국의 여성 작가 르 귄은 일상적 활동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할 것인지를 날카롭게 통찰한다. 그녀의  생활 에세이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서 르 귄은 일과 여가의 이분법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버드 대학 동창회에서 그녀와 동기들을 대상으로 보낸 설문 조사가 그 계기였다. 그 설문에는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설문지를 만들었던 사람은 통상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여가를 규정했다. 설문에서 제시된 여가의 예는  TV시청, 골프, 보드게임, 독서, 그림 그리기, 글쓰기 등이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노동이고 자발적으로 하는 오락이나 의미 있는 일은 여가라는 통념적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었다. 르귄은 본인의 인생에서 여가(spare) 시간은 따로 없었다고 말한다. 평생 프리랜서 작가로 살았던 그녀에게 글쓰는 일은 자발적으로 하는 분주한 노동이고, 여행이나 독서 뿐 아니라 장보기, 낮잠 자기, 고양이와 놀고 소통하는 것도 일상을 꽉 채우는(occupied) 활동이다. 그녀의 통찰 덕분에 난 노동과 여가라는 이분법로 구분될 수 없는 소중한 일상적 활동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연결과 교감 – 목수벌과 저녁 밥상

 

일상을 재구성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자연의 리듬에 어긋나 살았던 몸이 신호를 보냈기 떄문이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나는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당시 나는 산책을 하기로 했다. 숨쉴 수 있는 시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동네의 산책길이나 근처 공원들을 걸었다. 지금 직장을 얻기 몇 년 전 나는 오래된 나무, 수많은 네 발 동물들, 다양한 종의 새와 벌 등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로 이사한 상태였다. 걷기는 그간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초봄이 되면 난 꿀벌이나 목수벌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이들을 처음 목격하는 날에 내 가슴은 뭉클하고 벅차 오른다. 운수대통한 날이다. 벌들마다 선호하는 꽃들이 있다. 클로버, 이름 없는 들꽃, 호박꽃, 화려한 장미 중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각기 다른 종류의 벌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된다. 여름 초저녁엔 앞마당에 앉아 반딧불이를 관찰한다. 일 분 동안 시야에 들어오는 반딧불이가 몇 마리인지 센 다음 이를 기록해 둔다. 이를 열 번 정도 반복한다. 며칠 동안 과업을 수행하고 숫자를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같은 도시에 사는 과학자에게 보낸다. 난 반딧불이들, 과학자, 그리고 이에 참가하는 (누구인지 잘은 모르지만) 이웃들과 연결되었다고 느낀다.  이 활동들로 인해 몸이 금방 좋아지지는 않았다. 대신 난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과 조금씩 연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내가 생명체들과 네트워크를 맺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들과 감응할 수 있는 신체를 가졌다는 게 감사했다. 난 주위에 생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크고 작은 모임들이 조직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야생화 모임, 새 관찰 모임, 나무 돌보기 모임 등. 내 몸과 일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생명체들과 그리고 타자들과 보다 긴밀히 연결되고 싶었다. 가능한 한 노동을 줄이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활동으로 일상을 채워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이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욕망은 낯선 것이었다. 계속 확장하고 싶은 기분 좋은 욕망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연결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나와 파트너는 둘 다 일을 하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저녁을 한다 (내가 더 자주하긴 하지만^^). 지금의 저녁 메뉴 루틴이 정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고 이를 조율하면서 여러 메뉴가 탄생했다. 나와 상대의 다른 입맛을 절충하여 밥을 하는 것은 처음엔 피곤한 작업이었지만 이제 소중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파트너 어머니와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녀는 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 나와 달리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 음식이 조금이라도 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금새 포크를 내려 놓을 만큼 까다롭다. 난 세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 메뉴를 정하고 장보고 요리를 한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다. 이는 요리에 소질도 없고 이제 귀찮아 하는 80대의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돌봄이다. 같이 밥 먹고 대화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생명체들과 교감하는 것, 밥을 하고 같이 먹는 것, 이는 모두 르 귄의 말대로 통상적 노동도 여가 활동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 일상의 활동들이다. 거기에는 연결과 교감이 있다. 

 

 

낯선 욕망, 새로운 실험

 

내가 회사일을 하면서 매일 산책하고 저녁을 해 먹고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건 코로나 이후 근무 형태가 변해 재택 근무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 나는 번아웃을 겪은 후 상사와 면담을 하여 근무시간을 줄였다(당연히 급여가 줄었다). 그리고 휴가를 최대한 다 썼다. 2년동안 세미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에세이 기간엔 동료들이 얼굴보기 힘들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휴가를 자주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최근 몇 년 간 노동 이외의 활동을 내 시공간에 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롭고 유연한 직장 분위기의 덕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노동 위주의 일상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계속 틈새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제 틈새를 찾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연결과 교감을 위한 삶의 영역을 점차 넓히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게 50대의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의 주 내용은 일상의 차서를 자연의 리듬에 맞추고 생명체와 타자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활동을 모색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자기 소외적 노동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걷고, 운동하고, 생명체들과 소통하고, 밥하고, 먹고, 돌보고, 공부하는 일을 말한다. 40대의 일상과 비교해 보면 이는 매우 낯선 욕망들이다. 따라서 내 몸은 이러한 일상을 다소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적응하는 데 시간도 소요될 것이다.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갈등 상황도 생겨날 것이다.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이 낯선 욕망을 따를 여러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느껴진다. 새로운 시공간의 차서에 조응하는 일상의 실험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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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약방 에세이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문탁
2023.12.11 | 조회 264
인문약방 에세이
  석공1 - 안녕하세요? 앙코르석공님. 석공2 - 네. 안녕하세요, 앙코르석공님.   석공1 - 저는 나이듦연구소의 일일기자 앙코르석공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이듦연구소에서는 나이듦과 자기서사라는 주제로 에세이쓰기 시즌3를 진행하고 있으며, 앙코르석공님의 에세이쓰기를 위해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앙코르석공님과 나이듦에 관한 개인적 경험에 대해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편의를 위해 이제부터는 앙코르석공님을 그냥 석공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그냥 석공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리고 석공님, 거짓이나 왜곡만 없다면 과장이나 미화 정도는 인정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석공2 - 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리저리 생각해 보아도 팔이 안으로 굽듯이 아무리 거짓이 없이 말하려고 하여도 본의 아니게 좋게만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었는데, 이제 조금 편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석공1 - 우선 석공님께서는 언제쯤부터 나이듦을 의식하기 시작하셨나요? 석공2 - 내가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좀 우습기는 하지만, 쉰아홉 살 때부터 나이듦을 본격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순 살이 되는 게 싫어서, 우스갯소리로 6학년이 되는 게 싫어서 그해 이후로는 나이를 세지도 얘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나이를 모르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내 나이를 물어보면, 몇 년간 계속 쉰아홉이라고 대답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플러스알파라고 덧붙였습니다. 아, 이제는 그것도 낯간지러워서 그렇게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석공1 - 석공님, 이곳 나이듦연구소에서는 나이듦에 관해 특히 인문학을 중심으로 많이 사유하게 됩니다. 석공님은 석공님의 나이듦에 인문학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석공2 - 저는 살아오는 동안 몇...
  석공1 - 안녕하세요? 앙코르석공님. 석공2 - 네. 안녕하세요, 앙코르석공님.   석공1 - 저는 나이듦연구소의 일일기자 앙코르석공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이듦연구소에서는 나이듦과 자기서사라는 주제로 에세이쓰기 시즌3를 진행하고 있으며, 앙코르석공님의 에세이쓰기를 위해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앙코르석공님과 나이듦에 관한 개인적 경험에 대해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편의를 위해 이제부터는 앙코르석공님을 그냥 석공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그냥 석공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리고 석공님, 거짓이나 왜곡만 없다면 과장이나 미화 정도는 인정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석공2 - 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리저리 생각해 보아도 팔이 안으로 굽듯이 아무리 거짓이 없이 말하려고 하여도 본의 아니게 좋게만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었는데, 이제 조금 편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석공1 - 우선 석공님께서는 언제쯤부터 나이듦을 의식하기 시작하셨나요? 석공2 - 내가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좀 우습기는 하지만, 쉰아홉 살 때부터 나이듦을 본격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순 살이 되는 게 싫어서, 우스갯소리로 6학년이 되는 게 싫어서 그해 이후로는 나이를 세지도 얘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나이를 모르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내 나이를 물어보면, 몇 년간 계속 쉰아홉이라고 대답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플러스알파라고 덧붙였습니다. 아, 이제는 그것도 낯간지러워서 그렇게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석공1 - 석공님, 이곳 나이듦연구소에서는 나이듦에 관해 특히 인문학을 중심으로 많이 사유하게 됩니다. 석공님은 석공님의 나이듦에 인문학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석공2 - 저는 살아오는 동안 몇...
문탁
2023.12.11 | 조회 91
인문약방 에세이
      1.인물들이 고통 앞에서 취한 태도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단편소설 <지옥은 신의 부재>는 주인공 닐의 생애를 보여준다. 닐은 다리에 선천적인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그는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됐지만 좌절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장애 때문에 생기는 갈등 상황에도 꽤 잘 대응하며 살아내는 인물이다. 자신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아내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던 그는 천사의 강림이라는 사건으로 아내(사라)를 잃는다.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림’은 마치 자연재해와 비슷하다. 불시에 일어나고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다. 차이점이라면 기적도 있다는 것이다. ‘강림’으로 불치병이 치유되거나 장애가 사라지거나 하는 일도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라의 영혼은 천국으로 갔다. 닐은 아내가 없는 삶을 견딜 수 없었고 그녀와의 재회를 위해 천국으로 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 헤맨다.   아내를 잃고 좌절한 닐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썼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강림’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공감과 위로로 아픔을 극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연대의 방법을 통해 신에 대한 사랑을 성취하면 천국으로 가서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닐을 설득했지만, 닐은 그 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은 삶을 그 가능성 하나에 걸어야 하는데다가 도대체가 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성공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다. ‘강림’ 때 새어 나오는 천상의 빛을 보고 천국에 간 범죄자의 사례를 알게...
      1.인물들이 고통 앞에서 취한 태도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단편소설 <지옥은 신의 부재>는 주인공 닐의 생애를 보여준다. 닐은 다리에 선천적인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그는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됐지만 좌절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장애 때문에 생기는 갈등 상황에도 꽤 잘 대응하며 살아내는 인물이다. 자신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아내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던 그는 천사의 강림이라는 사건으로 아내(사라)를 잃는다.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림’은 마치 자연재해와 비슷하다. 불시에 일어나고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다. 차이점이라면 기적도 있다는 것이다. ‘강림’으로 불치병이 치유되거나 장애가 사라지거나 하는 일도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라의 영혼은 천국으로 갔다. 닐은 아내가 없는 삶을 견딜 수 없었고 그녀와의 재회를 위해 천국으로 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 헤맨다.   아내를 잃고 좌절한 닐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썼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강림’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공감과 위로로 아픔을 극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연대의 방법을 통해 신에 대한 사랑을 성취하면 천국으로 가서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닐을 설득했지만, 닐은 그 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은 삶을 그 가능성 하나에 걸어야 하는데다가 도대체가 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성공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다. ‘강림’ 때 새어 나오는 천상의 빛을 보고 천국에 간 범죄자의 사례를 알게...
문탁
2023.12.11 | 조회 164
인문약방 에세이
      1. 죽음을 탐구하고 싶었던 청년   나이듦과 자기서사의 세 번째 시즌, 마지막 교재인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서른 여섯 살의 신경외과 7년차 레지던트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면서 22개월 후인 2015년 3월 9일에 죽기 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어릴 때 뉴욕 북동부에 살다가 열 살에 사막도시인 애리조나의 킹맨으로 이사를 간다. 폴은 사막의 자유를 사랑했고 친구들과 사막을 탐험했다. 의사인 아버지가 늘 바쁜걸 보고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고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을 문학으로 여겼다. 폴은 문학을 전공하면서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월트 휘트먼의 작품을 연구했다. 하지만 학위논문을 마치면서 문학공부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들고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을 찾게 되었다. 폴은 의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의과 대학원에 입학한다.   폴은 의과 대학원에서 신경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한다. 신경외과의 특성상 완벽을 추구하고 “가장 도전적으로 또한 가장 직접적으로 의미, 정체성, 죽음과 대면”하게 해준다는 것이 폴이 신경외과를 선택한 이유였다. 이후에 폴은 암 진단을 받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죽음을 탐구하고 싶었던 청년이 죽음을 맞았으니 선물이 아닌가라고.     2. 사명감으로 신경외과의로 복직   신경외과의는 폴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 중에 중요한 하나다. 병으로 레지던트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 폴은 정체성을 잃었다. 환자복을 입은 폴은 주어에서 직접목적어가 된 기분이었다. 폴은 죽음을 이해하고...
      1. 죽음을 탐구하고 싶었던 청년   나이듦과 자기서사의 세 번째 시즌, 마지막 교재인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서른 여섯 살의 신경외과 7년차 레지던트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면서 22개월 후인 2015년 3월 9일에 죽기 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어릴 때 뉴욕 북동부에 살다가 열 살에 사막도시인 애리조나의 킹맨으로 이사를 간다. 폴은 사막의 자유를 사랑했고 친구들과 사막을 탐험했다. 의사인 아버지가 늘 바쁜걸 보고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고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을 문학으로 여겼다. 폴은 문학을 전공하면서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월트 휘트먼의 작품을 연구했다. 하지만 학위논문을 마치면서 문학공부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들고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을 찾게 되었다. 폴은 의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의과 대학원에 입학한다.   폴은 의과 대학원에서 신경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한다. 신경외과의 특성상 완벽을 추구하고 “가장 도전적으로 또한 가장 직접적으로 의미, 정체성, 죽음과 대면”하게 해준다는 것이 폴이 신경외과를 선택한 이유였다. 이후에 폴은 암 진단을 받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죽음을 탐구하고 싶었던 청년이 죽음을 맞았으니 선물이 아닌가라고.     2. 사명감으로 신경외과의로 복직   신경외과의는 폴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 중에 중요한 하나다. 병으로 레지던트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 폴은 정체성을 잃었다. 환자복을 입은 폴은 주어에서 직접목적어가 된 기분이었다. 폴은 죽음을 이해하고...
문탁
2023.12.11 | 조회 82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12월 4일 아침 6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사방이 컴컴할 때 집을 나섰다. 혜화역에서 열리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기자회견에 지지 방문을 가는 길이었다. 올해 다섯 번째 방문이다. 전장연에서는 2021년 12월 3일부터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시작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권리와 관련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라고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2월에는 경복궁역에서 치러진 삭발식에 참석했었다. 역 승강장안 출근인파가 뒤섞이는 현장에서 삭발하는 장애인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둘레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는 첫 단계는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 검색이다.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은 둘레길의 입구까지 지하철과 마을버스 등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 과정은 공기처럼 당연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이동권을 투쟁해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데다, 그마저도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지 않아 권리가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듣고 있자니 내가 누리고 있는 당연함이 특권으로 느껴졌다.           이번 기자회견은 교통약자의 이동 편의를 위한 특별교통수단 예산과 관련 국토교통위원회가 증액한 금액(271억원)을 포함해서 내년 예산안에 반영해달라고 촉구하기 위해 열렸다. 아침 8시 혜화역 5-3번 승강장...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12월 4일 아침 6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사방이 컴컴할 때 집을 나섰다. 혜화역에서 열리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기자회견에 지지 방문을 가는 길이었다. 올해 다섯 번째 방문이다. 전장연에서는 2021년 12월 3일부터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시작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권리와 관련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라고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2월에는 경복궁역에서 치러진 삭발식에 참석했었다. 역 승강장안 출근인파가 뒤섞이는 현장에서 삭발하는 장애인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둘레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는 첫 단계는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 검색이다.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은 둘레길의 입구까지 지하철과 마을버스 등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 과정은 공기처럼 당연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이동권을 투쟁해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데다, 그마저도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지 않아 권리가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듣고 있자니 내가 누리고 있는 당연함이 특권으로 느껴졌다.           이번 기자회견은 교통약자의 이동 편의를 위한 특별교통수단 예산과 관련 국토교통위원회가 증액한 금액(271억원)을 포함해서 내년 예산안에 반영해달라고 촉구하기 위해 열렸다. 아침 8시 혜화역 5-3번 승강장...
기린
2023.12.05 | 조회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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