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가는 최적의 경로 / 김은영
문탁
2023-12-0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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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학적 세계관으로 삶을 해석하기
이 소설은,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 중 하나이다. 테드 창은 쓰는 작품 마다 SF계의 유명한 상은 다 휩쓸어 버리는, 현존하는 최고의 SF 소설가로 평가 받는 작가이다. 그가 쓰는 글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정교하게 잘 짜여진 세계관 안에서 펼쳐져,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선 작가가 연결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하드 SF’ 소설 중에서도 더욱 하드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중 친화적인 익숙한 장르적 요소 또한 갖춰 SF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 공감도 녹여 넣는, 넘사벽 소설가이다.
나 역시 이 여덟 개의 소설 중 어느 것도 만만한 것이 없었다. 좀 익숙한 소재이다 싶으면 상상만으론 따라가기 어려운 설정이 나오고, 그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선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가 결합된 단계들이 필요해 나무위키와 유투브의 영상들을 PC창에 여러 개를 띄어두고서 책을 읽어야 했다.
그의 소설은 SF 장르이지만 판타지 요소가 첨가되어 있거나, 판타지 장르다 싶으면 SF적 요소를 덧붙여 전개한 것들이 나와서 상상력과 과학적 논리가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공통된 주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포함한) 우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주는 기계와도 같은 것이라 과학을 통해 그것을 탐구하면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과학적 사실이 현실의 그것들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세계 안에서의 ‘과학적 세계관’은 반드시 타당한 원리와 흐름을 가지고 있다.
『네 인생의 이야기』또한 외계인과의 교감이라는 소재와 그들의 언어와 사고 방식 등을 탐구하는 SF적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지만, 어느새 죽음이나 삶에 대한 문제, 깨달음의 상태 등을 ‘물리학의 원리’와 연결 지어서 이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소설적 은유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 삶의 문제들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유용할 수 있겠다는 설득이 되면서, 나의 첫 SF 소설 읽기는 힘겨운 경이로움으로 시작되었다.
2. 헵타포드의 언어 사용은 헵타포드적 사고로 변화시킨다
어느 날 갑자기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했고,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 지를 알아내기 위해 전세계의 물리학자와 언어학자들이 모인다. 루이즈는 언어학자로 외계인들과 소통을 시작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 같이 개개의 단어로 분해해 재조립함으로써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읽는 사람이 메시지 전체의 문맥을 ‘미리’ 알고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진 언어였던 것이다. 그것은 체계적으로 정보를 기록하고 그것을 습득하기 위한 언어가 아닌, 비선형적, 비분절적으로 문장에 어떤 우선 순위 체계도 없이 거대한 복합체를 만드는 방식으로 구성된 언어였다.
루이즈는 그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헵타포드(7개의 발을 가졌다는 뜻으로 외계인을 지칭)의 언어를 (분석하지 않고) 받아들여 그들처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선, (헵타포드의) 문자를 쓰기 전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완결된 구도로 결정하기 위한 사유를 충분히 한 후, 첫 획을 긋는 방식을 반복했다. 점차 즉각적으로 획을 긋는 것이 가능해졌고, 처음 긋는 선들이 그녀가 전달하려는 내용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횟수가 많아졌다.
루이즈가 헵타포드의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증가할수록 그녀의 사고하는 방식도 변화하게 된다. 그녀의 사고는 도형의 형태로 코드화되고, 낮에도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 빠져 그녀의 사고가 ‘유리창에 서리가 끼듯이 생겨나는’ 어의문자로 대체되는 풍경을 보게 되곤 했다. 그렇다고 그녀의 사고 속도가 빨라져 더 앞서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사유하는 명제들은 언어를 넘어 만다라와 가까운 대칭성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부유’ 하는 듯 머무르고, 그럴 때의 루이즈는 명제들 사이의 전제 조건과 결론을 호환하는 방법에 오랜 시간 빠져들어 있기도 했다.
헵타포드처럼 사유할 때 모든 요소의 힘들은 동등했고, 모두가 동일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므로 그것들의 관계는 고유한 방향성도, 특정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사고의 맥락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할수록 루이즈는 점점 더 그들처럼 사유하는 게 가능해졌고, 오랫동안 인류가 인과적 맥락으로 생각해오던 방식을 떠나 모든 사건을 그 근원에 깔리는 하나의 (최소화 혹은 최대화라는) 목적을 지각하며 한번에 경험하게 되는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로, 루이즈는 미래를 ‘아는’ 자가 된다!
3. 미래를 아는 것과 자유의지
사실, 소설의 처음부터 루이즈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서로 교차되면서 보여지고 있었다. 독자들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과거의 회상 장면 정도로 여기며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다가 헵타포드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헵타포드적 사유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장면들의 의미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루이즈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 번에 보는구나!’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은 동일한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이즈의 남편이 그녀에게 아이를 가지기를 원하는 지를 묻는 장면이다. 이것은 헵타포드의 언어와 사고를 받아들인 루이즈의 사고가 원형적으로 인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딸의 죽음이라는 미래를 알지만 그 미래를 선택하는 그녀의 의지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미래를 알지만 그 미래를 선택하게 되는 것에는 무엇이 작동할까?
저자는, 정해진 운명이 있지만 그것을 거스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다른 선택을 했음에도 결국 그 운명에 따라 결과가 이루어진다는, 그리스 비극의 예(운명과 관련해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이야기 구조이다)는 여기에 들어맞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대신에 『세월의 책』이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책에는 어떤 사람의 (가능한 미래가 아닌)실제에 관한 미래가 시나리오처럼 쓰여져 있다. 누군가 이 책을 읽고서 ‘난 다른 선택을 할 거야’라고 할 지라도 그것을 막는 어떤 강제적인 힘은 없지만, 『세월의 책』의 시나리오는 절대, 네버, 결단코 옳아야 한다는 것이 또한 강력한 전제가 된다.
이 두 가지가 양립 가능한가? 자유의지는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의 전제하에 이뤄지는 것이고, 정해진 미래의 시나리오는 결정된 미래이며 단 하나의 가능성일 뿐인데 말이다. ‘통상적으로’ 대답한다면 양립할 수 없다가 답이지만, 저자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미래를 아는 경험이 오히려 사람을 바꿔놓지 않을까? 이것이 오히려 절박감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철학적 질문의 근거로 물리학의 이론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빛이 수면에 도달한 후 수중으로 나아갈 때,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하지 않고, 애초에 목적지를 설정한 후 그곳으로 가기 위한 가장 빠른 시간을 선택한다는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를 가져온다.
동일한 물질 세계를 지각하면서도 빛의 움직임을 인과관계로 보지 않고 목적론적으로 바라보는 이론과 같이, 헵타포드적 의식은 모든 사건을 한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 후에는 그들의 동기 또한 그것에 일치시키며, 그 목적지로 가는 최적의 경로를 실행해 나가기 위한 행위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려는 자는 애초에 미래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반대로 미래를 알게 된 사람은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한 언어를 사용하고(‘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선 대화가 행해져야 한다’) 그가 아는 연대기가 실연되도록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오묘한 운명론적 진리를 우리와 헵타포드가 포함된, 우주의 여러 가능성 있는 원리 중 하나일 수 있다며 루이즈의 인생 이야기로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질문이 생성된다.
루이즈는 앞으로 인생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자유의지로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굳이 무엇을 찾거나 선택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정해진 경로대로 살아갈 것인데 말이다.
루이즈 또한 소설의 끝에서 질문을 한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230)
이 질문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루이즈는 자신에게 일어날 일(사건)은 볼 수 있고 그 일들의 과정들이 우주적 섭리임을 직관할 수는 있으나 그 경로가 설정된 이유는 여전히 모르고 있다. 헵타포드의 사유가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빛이 출발과 동시에 정해진 목적지로 가는 경로가, 그것이 이루어진 후에야 최소화의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일어나는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보아야만 최소화 혹은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함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루이즈는 자신의 인생 순간순간마다 일어나야 할 사건들이 이뤄질 수 있게 말하고 행동한다. 그녀의 인생이라는 한 편의 연극에서, 주어진 대사와 액션을 하면서 타인의 인생과 연결되고 우주 전체의 흐름 안에서 자신의 경로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미래를 아는 자, 운명을 아는 자의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 해석해 본다.
4. 내 인생의 최적의 경로
루이즈에게 미래를 본다는 일은, 결국 현재를 강렬하게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과 같다.
지금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고, 그들과의 이별과 그에 따른 고통과 상실도 받아들이는 것, 그것들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고 생각하며 생의 목적을 떠올리는 일이다. 그리고 내 인생의 목적지는 죽음임을 결코 잊지 않으면서.
미래를 모르고 살아도 특별하게 다를 것도 없는 일인데, 루이즈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매순간 내가 해야 할 말과 행동을 그대로 실행하면서, 이 과정의 의미를 지켜보는 인생을 선택하는 것은 외롭고, 때론 두렵고 버거울 것 같은데, 헵타포드의 세계관을 더 경험하고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면서 기꺼이 이 사유와 삶을 선택한다.
그것은 인생이 결국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가장 최고의 삶의 방식임을 알게 되어서가 아닐까? 죽음으로 가기 위한 그 모든 경로를 거쳐 도착해야 할 목적지에 왔을 때, 내 인생의 과정의 의미를 깨닫게 될 거라는 기대 혹은 설레임으로, 도저히 다른 선택은 생각할 수도 없는 깨달은 자의 경지와 같은 것.
그렇다면, 미래를 볼 일이 없을 내가 나의 인생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 인생에 주어진 삶의 목적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내게 올 생로병사의 순간들을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살아내면서 그 경로들이 주는 삶의 의미를 매순간 정신차리고, 헤아릴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항상, 죽음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임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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