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오래 보아야 예쁘다

루틴
2023-11-3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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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1. 오래된 장식품

 

우리 집 책장은 책으로 가득 차있지만 항상 한켠에는 여유 공간이 있다. 여행에서 가져온 작은 소품들, 엽서들을 전시한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작은 트리, 루돌프인형, 희미한 조명들까지 그 공간을 채운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임을 알 수 있다. 정화의 감성으로 한껏 포근해진 공간을 임수는 감사히 즐긴다.

 

정화는 어릴 적부터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의 따뜻한 빛이 좋았다고 한다. 모태신앙의 영향인데 개종의 과정 중에 있는 지금도 정화는 자신만의 리츄얼로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꺼내서 책장의 한켠을 꾸민다. 그 장식품 안에는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물건들이 있다. 모두 빛에 바래지도 않았고 깔끔하다. 정화가 말하기 전까지 그렇게 오래된 줄 몰랐을 정도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책장 한켠을 채운 크리스마스 트리와 그 친구들

 

우리 집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물론 큰집으로 이사 오면서 새로운 가구들도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임수도 물욕이 많지 않기도 하고 새로운 걸 잘 사질 않으니 오래된 물건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정화와 임수의 물건상태는 사뭇 다르다. 정화의 물건들은 트렌디하지는 않지만 제 역할을 다한다. 깔끔하고 정돈되어있으며 심지어 사랑을 받는 듯 은은한 광택이 돈다.

 

2. 정화의 생활명품

 

11월 25일 토요일자 경향신문에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칼럼이 하나 실렸다. 이 칼럼에서 다룬 <단순한 열망>에서는 상업적 미니멀리즘 트렌드의 한 갈래로 ‘이케아 미니멀리즘’을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즘은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처럼 여겨져 왔는데 가성비 좋기로 유명한 이케아와는 언뜻 매치되지 않아 보였다. 이케아 미니멀리즘이란 한번 쓰고 버려도 상관없는 값싼 물건들을 사는 ‘가성비’ 좋은 소비를 일컫는 말이다. 물건의 의미를 상실한 채 언제든 대체가능한 물건을 소비하는 현상은 값싼 노동력과 환경오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주변 물건과 좋은 관계 맺기에 대해서 사유한다.

 

 미니멀한 환상

 

임수는 물욕이 없고 대체로 가성비 좋은 물건을 구매하는 편인데, 이러한 소비성향이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와 가까워 보여 나름 자부심을 느껴왔지만, 사실 물건과의 관계맺기를 포기해 버리는 이케아 미니멀리즘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물건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물건을 험하게 쓰는 태도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해 정화는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물건을 종종 사는 편이다. 양쪽 날이 분리되는 가위, 초경량 휴대용 독서대, 크기를 반으로 줄인 종이티슈, 발목을 조이지 않는 방한양말 등등. 임수가 생각하지도 못한 생활 속 불편한 점을 찾아내서 일상을 좀 더 윤택하게 하는 물건들이 많다. 보통 이런 생활물품을 소비하다보면 물건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고 자본주의에 이끌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는 경우가 허다한데, 정화는 좀 달랐다. 자신의 생활에 꼭 맞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물건을 잘 찾는 안목이 있었다. 가히 정화의 ‘생활명품’들이었다(<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중)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선

 

정화의 생활명품은 쓰는 사람과 물건의 TPO(Time, Place, Occasion)가 적절하다. 쓰는 사람의 입장만이 아니라 그 물건이 제 역할을 하도록 돕는다. 쓰고 난 뒤 정리는 물론이고, 망가져있으면 방치하지 않고 보수하고, 떠나보내야 할 때는 감사함을 표시한다. 새로운 물건으로 대체되어도 옛날 물건과의 추억을 종종 떠올리기도 한다. 정화는 값에 상관없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함께하는 물건들을 참 소중히 여긴다. 정화에게 물건은 한번 쓰고 버려도 상관없는 언제든 교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정화와 함께하는 물건들은 자연스레 생활명품 반열에 오른다.

 

정화의 생활명품들

 

물건에게도 예를 다한다고 생각을 하니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보이던 정화의 태도가 물건과 소통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임수는 사람들을 부품처럼 취급하는 자본주의 실상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정작 물건은 함부로 쓴다. 인간중심적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임수는 오래된 물건이지만 엣지있게 잘 사용하고 싶은 로망이 있다. 어느 도시의 오래된 건물이나 물건에 빛이 날 때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귀찮아서 대충 쓰게 되거나 또는 안 쓰고 말지가 된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소비하는 즐거움마저 잃게 된다.

 

3. 전전긍긍이 아닌 건건함으로

 

물건에도 예를 다하는 정화의 비결은 뭘까? 유독 정화의 물건에서 광이 나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느낌 있게 바꾸는 일은 단순히 감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옆에서 차근히 지켜보니 감성을 넘어 성실함이 동반된다. 정화는 물건을 보좌하듯이 바삐 움직인다. 때가 되면 꺼내서 닦고, 사용할 때도 햇빛에 바래지 않게 위치를 조절하고, 혹시나 망가진 부분이 있으면 수리한다. 계절 물건은 방치하지 않고 깨끗하게 닦아서 먼지가 앉지 않게 잘 보관해둔다. 그러면 다음해에 그 물건이 같은 자리를 또 채운다.

 

크리스마스 장식품뿐 아니라 계절별 이불과 옷, 선풍기, 온열기, 자동차, 하루하루 사용한 물건들 모두 감사히 사용하고 제 위치에 정돈해놓는다. 한번은 브리타 정수기통 아래가 조금 깨져서 울퉁불퉁해졌었다. 정화는 싱크대 상판이 긁히지 않고 깨진 부위가 더 커지지 않도록 정수기통의 위치를 실리콘 받침대 위로 정한 후 임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의 말도 남긴다. 하지만 임수의 스케일에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정화와 임수는 물건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어긋남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밑바닥이 거친 브리타 정수기통을 싱크대 상판에 함부로 두는 순간 정화의 잔소리가 날아온다. 한소리 들은 임수는 괜히 심통이 난다.  

 

임수도 정화가 잘 관리한 물건과 공간을 쓸 때는 기분이 참 좋다. 하지만 자신도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귀찮고 답답해진다. 그런 정화에게 "이런 거 다 지키고 살면 치매 걸린다"고 훈수를 둔 적도 있다. 집에서 조차 살얼음 걷듯 전전긍긍하는 모습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임수에게는 상기를 계속 시켜도 놓치는 것들이 정화에게는 몸속 어딘가에 자동키가 켜지듯이 스텝바이스텝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구삼효, 군자가 종일토록 그침 없이 힘쓰며 저녁이 되어도 두려운 듯이 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 <내 인생의 주역 1.중천건, 전전긍긍이 아니라 종일건건>

 

청소를 한번 할라 치면 임수는 물을 사방 군데 다 튀겨가며 그동안 미뤄놨던 청소란 청소를 다하고 지쳐서는 다른 일들은 뒷전이다. 반면 정화는 소리 없이 사부작 사부작 일을 한다. 임수입장에서는“청소 했었어?”이럴 정도로 소소하게 그리고 꾸준히 한다. 소소하다는 건 청소를 한 번에 끝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은 변기, 내일은 욕조 이렇게 나눠서 한다. 근데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니 정화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물건과 공간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에서 윤이 나는 굉장히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초반에 많이 싸웠던 이유 중에 하나였다. 한번 할 때 끝장을 보는 임수와 달리 조금씩 건건히 하는 정화, 사주를 공부한 뒤 임수는 변명을 해보기도 했다. 정화는 안정적인 기운을 타고났으니 주변 환경이 안정적이어서 건건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임수는 불안정한 기운을 타고났으니 물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한다고 말이다. 

 

정화는 좋아하는 걸 오래 즐기기 위해서 한 번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매사를 건건하게 수행한다. 그래야 내일도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항상 꾸준하다. 그런 모습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고 불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주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 그 태도는 비난과 싸움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상대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와 달라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볼 수도 있다. 임수가 하나부터 열까지 정화가 요구하는 말을 다 들을 수는 없어도 노력은 해볼 수 있다. 에너지를 한곳에만 잔뜩 쏟는 방식을 고쳐보기도 하고, 좀처럼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와도 다독여 볼 수 도 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자주 비추며, 정말 하기 싫을 때는 양해를 구해보는 노력을 해본다. 그래도 싸우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지만^^;;

 

4. 마치며

 

이번 연재가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임수편 마지막 글이다. 가까운 사람의 좋은 점을 발견하는 건 상대의 역할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좋게 보이지 않는다. 나와 다르고 어색하고 이해가 안갈 때가 많다. 그래서 자주 싸운다. 하지만 상대방의 행동이 나를 망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믿음만 있다면 귀를 기울여보자. 그러다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다보니 티격태격했지만 4년의 세월을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댓글 6
  • 2023-12-01 09:32

    아니 제 방한양말이 왜 저기에 있는 건가요? 매우 민망하네요^^;;
    제가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잊고 지냈던 마음을, 별것도 아닌 제 물건을 예쁘게 보아준 임수에게 고맙습니다.
    임수편 마지막 연재글 잘 읽었습니다. 일년동안 너무 고생많았어요^^

    • 2023-12-01 14:34

      글구 저 양말은 다리가 잘 붓는 당뇨질환자용 양말인데, 발목부분이 낙낙하고 재질이 도톰해서 저는 방한용 양말로 신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산타 양말로도 활용 가능합니다.

  • 2023-12-01 13:08

    생활명품! 끌리는 용어예요^^
    저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그간 연재하느라 임수 수고 많았어요!!

  • 2023-12-01 13:46

    다른 점이 많은 임수와 정화, 둘이 맨날 싸운다고 쓰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를 살피는 모습이 참 따뜻하고 세심하군요!

  • 2023-12-01 14:05

    그래서 우리 임수님이 어쩌다 정화님 이야기할 때면
    눈 속에 하트도 있고 별도 있고 양말도 있었군요. ^^

    사부작거리며 서로를 위해 마음 쓰는
    정임합목하우스 포에버~~~🙏

  • 2023-12-01 16:09

    루틴, 애쓰셨습니다~~ 차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간들이 쌓여가고 있군요^^ 알흠답습니다그려~~~

인문약방 에세이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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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11 | 조회 264
인문약방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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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11 | 조회 91
인문약방 에세이
      1.인물들이 고통 앞에서 취한 태도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단편소설 <지옥은 신의 부재>는 주인공 닐의 생애를 보여준다. 닐은 다리에 선천적인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그는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됐지만 좌절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장애 때문에 생기는 갈등 상황에도 꽤 잘 대응하며 살아내는 인물이다. 자신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아내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던 그는 천사의 강림이라는 사건으로 아내(사라)를 잃는다.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림’은 마치 자연재해와 비슷하다. 불시에 일어나고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다. 차이점이라면 기적도 있다는 것이다. ‘강림’으로 불치병이 치유되거나 장애가 사라지거나 하는 일도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라의 영혼은 천국으로 갔다. 닐은 아내가 없는 삶을 견딜 수 없었고 그녀와의 재회를 위해 천국으로 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 헤맨다.   아내를 잃고 좌절한 닐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썼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강림’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공감과 위로로 아픔을 극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연대의 방법을 통해 신에 대한 사랑을 성취하면 천국으로 가서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닐을 설득했지만, 닐은 그 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은 삶을 그 가능성 하나에 걸어야 하는데다가 도대체가 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성공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다. ‘강림’ 때 새어 나오는 천상의 빛을 보고 천국에 간 범죄자의 사례를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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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11 | 조회 164
인문약방 에세이
      1. 죽음을 탐구하고 싶었던 청년   나이듦과 자기서사의 세 번째 시즌, 마지막 교재인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서른 여섯 살의 신경외과 7년차 레지던트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면서 22개월 후인 2015년 3월 9일에 죽기 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어릴 때 뉴욕 북동부에 살다가 열 살에 사막도시인 애리조나의 킹맨으로 이사를 간다. 폴은 사막의 자유를 사랑했고 친구들과 사막을 탐험했다. 의사인 아버지가 늘 바쁜걸 보고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고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을 문학으로 여겼다. 폴은 문학을 전공하면서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월트 휘트먼의 작품을 연구했다. 하지만 학위논문을 마치면서 문학공부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들고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을 찾게 되었다. 폴은 의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의과 대학원에 입학한다.   폴은 의과 대학원에서 신경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한다. 신경외과의 특성상 완벽을 추구하고 “가장 도전적으로 또한 가장 직접적으로 의미, 정체성, 죽음과 대면”하게 해준다는 것이 폴이 신경외과를 선택한 이유였다. 이후에 폴은 암 진단을 받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죽음을 탐구하고 싶었던 청년이 죽음을 맞았으니 선물이 아닌가라고.     2. 사명감으로 신경외과의로 복직   신경외과의는 폴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 중에 중요한 하나다. 병으로 레지던트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 폴은 정체성을 잃었다. 환자복을 입은 폴은 주어에서 직접목적어가 된 기분이었다. 폴은 죽음을 이해하고...
      1. 죽음을 탐구하고 싶었던 청년   나이듦과 자기서사의 세 번째 시즌, 마지막 교재인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서른 여섯 살의 신경외과 7년차 레지던트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면서 22개월 후인 2015년 3월 9일에 죽기 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어릴 때 뉴욕 북동부에 살다가 열 살에 사막도시인 애리조나의 킹맨으로 이사를 간다. 폴은 사막의 자유를 사랑했고 친구들과 사막을 탐험했다. 의사인 아버지가 늘 바쁜걸 보고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고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을 문학으로 여겼다. 폴은 문학을 전공하면서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월트 휘트먼의 작품을 연구했다. 하지만 학위논문을 마치면서 문학공부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들고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을 찾게 되었다. 폴은 의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의과 대학원에 입학한다.   폴은 의과 대학원에서 신경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한다. 신경외과의 특성상 완벽을 추구하고 “가장 도전적으로 또한 가장 직접적으로 의미, 정체성, 죽음과 대면”하게 해준다는 것이 폴이 신경외과를 선택한 이유였다. 이후에 폴은 암 진단을 받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죽음을 탐구하고 싶었던 청년이 죽음을 맞았으니 선물이 아닌가라고.     2. 사명감으로 신경외과의로 복직   신경외과의는 폴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 중에 중요한 하나다. 병으로 레지던트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 폴은 정체성을 잃었다. 환자복을 입은 폴은 주어에서 직접목적어가 된 기분이었다. 폴은 죽음을 이해하고...
문탁
2023.12.11 | 조회 82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12월 4일 아침 6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사방이 컴컴할 때 집을 나섰다. 혜화역에서 열리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기자회견에 지지 방문을 가는 길이었다. 올해 다섯 번째 방문이다. 전장연에서는 2021년 12월 3일부터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시작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권리와 관련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라고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2월에는 경복궁역에서 치러진 삭발식에 참석했었다. 역 승강장안 출근인파가 뒤섞이는 현장에서 삭발하는 장애인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둘레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는 첫 단계는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 검색이다.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은 둘레길의 입구까지 지하철과 마을버스 등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 과정은 공기처럼 당연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이동권을 투쟁해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데다, 그마저도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지 않아 권리가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듣고 있자니 내가 누리고 있는 당연함이 특권으로 느껴졌다.           이번 기자회견은 교통약자의 이동 편의를 위한 특별교통수단 예산과 관련 국토교통위원회가 증액한 금액(271억원)을 포함해서 내년 예산안에 반영해달라고 촉구하기 위해 열렸다. 아침 8시 혜화역 5-3번 승강장...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12월 4일 아침 6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사방이 컴컴할 때 집을 나섰다. 혜화역에서 열리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기자회견에 지지 방문을 가는 길이었다. 올해 다섯 번째 방문이다. 전장연에서는 2021년 12월 3일부터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시작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권리와 관련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라고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2월에는 경복궁역에서 치러진 삭발식에 참석했었다. 역 승강장안 출근인파가 뒤섞이는 현장에서 삭발하는 장애인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둘레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는 첫 단계는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 검색이다.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은 둘레길의 입구까지 지하철과 마을버스 등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 과정은 공기처럼 당연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이동권을 투쟁해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데다, 그마저도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지 않아 권리가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듣고 있자니 내가 누리고 있는 당연함이 특권으로 느껴졌다.           이번 기자회견은 교통약자의 이동 편의를 위한 특별교통수단 예산과 관련 국토교통위원회가 증액한 금액(271억원)을 포함해서 내년 예산안에 반영해달라고 촉구하기 위해 열렸다. 아침 8시 혜화역 5-3번 승강장...
기린
2023.12.05 | 조회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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