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15회] 완성을 향한 끝없는 미완성의 길, 화수미제(火水未濟)

봄날
2024-04-22 08:29
145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도 없고 응()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수화기제(水火旣濟)괘는 여섯 효 모두가 이 원칙에 딱 들어맞는다. 즉 여섯 효 모두가 제 자리(正位)에 있고, 모두 정응관계인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과 반대로 화수미제는 주역의 64괘 중에 여섯 효가 모두 바른 자리가 아닌(不正位) 유일한 괘이다. 바른 자리가 아니면 그 효가 처한 상황은 안정되지 못하다는 것이 기본 전제이다. 그렇다면 모든 효가 바른 자리가 아닌 화수미제괘는 불안정성이 아주 크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1-4, 2-5, 3-6효간에 호응관계는 있다. 각 효가 불안정하다면 이 호응관계에 기대어볼 수 있지 않을까? 유감스럽게도 화수미제괘에서는 이 상응관계도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기제와 미제의 물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기제괘와 미제괘의 물상은 물과 불인데, 위 아래의 배치가 다르다. 기제괘는 위에 물이 있고 아래에 불이 있는 반면, 미제괘는 위는 불, 아래는 물이 있는 형상이다. 불은 위로 타오르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상식적으로는 불이 활활 타오를 때 그 위로 물을 끼얹으면 불이 다 타지 않고 꺼져버리니까, 이것이야말로 ‘다하지 못한’ 미제(未濟)가 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또 불이 위에서 다 타버리니까 기제(旣濟)가 되는 것이 타당해보인다. 그러나 주역은 이 상식을 가볍게 뒤집어버린다. 기제괘의 물상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아래의 불이 위에 있는 물을 모두 기체로 졸여버리는 ‘작용의 관계’로 푼 것이다. 상하간의 적극적인 관계작용은 물은 아래로, 불은 위쪽으로 가려는 에너지의 운동 방향 때문에 생긴다. 그러니 기제괘는 상하가 적극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완전한 승화를 이룬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미제괘는 불은 불대로, 물은 물대로 운동의 방향이 서로 반대쪽을 향하고 있으므로 어떤 일을 함께 도모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그나마 의지할 여지가 있는 효끼리의 호응관계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미제괘의 효들은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는 이제부터 새로 시작하는 일에서 주변의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그야말로 각자도생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꼬리를 적시다머리를 적시다

수화기제와 화수미제괘의 효사들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초효와 상효에 같은 구절이 들어가 있는데, 그 뜻은 정반대이거나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다. 우선 수화기제와 화수미제의 초효에는 각각 ‘유기미(濡其尾)’ 즉, ‘꼬리를 적시다’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는데, 전체 문장의 뜻은 아주 다르다. 기제괘의 초구는 “수레바퀴가 (뒤로) 당기고 꼬리를 적시니 허물이 없다”인 반면, 미제괘의 초육은 “꼬리를 적시니 부끄럽다”이다.

꼬리를 적시는 같은 사건의 결과가 하나는 ‘허물이 없고’ 다른 하나는 ‘부끄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기제괘의 초구는 양의 기운인데다 기제괘의 상황에서 일을 급하게 처리할 수 있는 가능성에 저항해서 (능동적으로)수레바퀴를 뒤로 끌고 꼬리를 적시는 등의 노력으로 질주 본능을 절제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미제괘의 초육은 자신에 대한 믿음 없이 조급하고 미숙하게 일을 시작한 데서 일을 그르치게 된다.

 

또 기제괘와 미제괘의 상효에는 ‘유기수(濡其首)’, 즉 ‘머리를 적신다’라는 표현이 똑같이 들어있다.

기제괘의 유기수는 음(陰)의 유약함이 상황을 마무리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위태로운 상황’인 반면, 미제괘의 유기수는 상황을 제압할 수 있는 강한 양이, 바로 그 강함 때문에 자신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마치 술에 취하듯 스스로의 능력에 도취되어 헤어나지 못한다. 같은 구절이라도 상황과 때에 따라 그 해석과 실천 방향이 달라진다. 주역의 괘상과 괘명(卦名), 괘사와 효사를 종합적으로 엮어서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릇 주역의 말을 해석할 때는 여러모로 살펴봐야 한다. 괘의 이름이 연유한 배경을 따져보고, 괘상으로도 보고, 괘사와 효사가 의미하는 바를 다각적으로 살펴야 주역이 권하는 인간의 길을 제대로 알게 된다.

 

끝남 속에 시작이 있다

수화기제괘의 기제(旣濟)가 ‘이미 건넜다’는 뜻인 반면, 화수미제괘이 미제(未濟)는 ‘아직 건너지 않았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수화기제는 ‘완성’을, 화수미제는 ‘미완성’을 이야기한다. 마지막괘가 미제괘로 종결된 것은 주역의 가장 큰 주제인 ‘변화’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역(周易)의 역(易)이라는 글자에 이미 변화의 뜻을 함유하고 있다. 그렇듯 이미 모든 것이 완수된 ‘아름다운 마무리’로 끝날 법한 상황에서, 단지 기제괘 뒤에 미제괘를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일은 끝남으로 그치는 일이 없으며, 그것은 곧 또 다른 시작’이라는 메시지를 준다.

 

화수미제괘에는 두 가지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첫 번째는 괘사에 드러나듯이 ‘아직 끝마치지 않은 상황’ 설정이다. 미제괘의 괘사는 이렇다.

 

미제는 형통하니, 어린 여우가 거의 건너다 그 꼬리를 적심이니, 이로울 바가 없느니라.

 

‘형통하다’는 주역의 괘사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대개의 경우 괘사의 앞부분에서 괘의 성격을 단정하는데, 그 성격은 괘사의 뒷부분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조건적으로 가능하다. 미제괘의 괘사를 보더라도, 괘의 기본적인 성질은 형통한데, 가령 어린 여우가 물을 건너다 꼬리를 적시는 서투름이 이롭지 않은 결과를 낳으니, ‘형통’은 신중을 기해 물을 다 건널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할 때 주어진다. 이때의 어린 여우가 상징하는 것은 하나는 미숙하고 성급함을, 또 하나는 (역시 어려서 서투르기 때문에 오는 것이겠지만)방심함이다. 꼬리를 적시는 것은 물을 건너는 동안 내내 긴장하여 건너서 거의(almost) 다 완수되려는 순간,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긴장을 풀어버린 결과이다. 결국 물을 제대로 건너지 못해 상황이 지체되거나 중단된, 미완의 상태가 된다. 꾀많은 동물의 대명사인 여우도 어리고 보면 상황판단이 안되고 서두르다 일을 그르친다는 것인데, 이때의 미숙함은 반드시 실제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일이 거의 끝나가는 상태에서 방심하기도 하고, 완성이 코앞에 다가오면 조급해서 빨리 마치려 한다. 이럴 때에 우리는 ‘어린 여우’가 된다.

 

화수미제괘의 두 번째 상황 설정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어떤 가능성’이다. 그것은 첫 번째의 상황과 완전히 별개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 완수하지 못한 상황은 그것을 마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초의 완수과정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는 어린 여우가 꼬리를 적신다는 상황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떤 새로운 움직임을 가리킨다.

 

바로 이 ‘어떤 움직임’이야 말로 주역이 화수미제괘를 마지막에 배치한 깊은 뜻의 배경이 된다. 변화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아니, 미제괘에 미션처럼 주어진 변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괘사를 설명하는 대상전은 “불이 물 위에 있음이 미제이니, 군자가 보고서 신중히 사물을 분별하여 제 자리에 거하게 한다.”고 말한다. 상전의 말을 풀어보면, 변화의 내용은 바로 제 자리에 돌려놓기이고, 그 변화의 주체는 군자이다. 제 자리로 돌려놓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지금은 제 자리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군자가 신중하게 사물을 살펴 제 자리에 돌려놓는다면 그것은 여섯 효가 모두 바른 자리(正位)에 있는 수화기제괘가 될 것이다. 문제는 뒷걸음질쳐서 바로 앞의 괘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는 것, 처음부터 하나씩 제자리로 돌려놓는 노력을 하고 나서야 수화기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씩 새롭게 시작해야 하므로 화수미제는 그리하여 모든 것의 시작인 중천건(重天乾)괘로 이어진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끝남 속에 이미 시작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화수미제괘는 종즉유시(終則有始), 즉 ‘끝남 속에 시작이 있다’는 주역의 시간 관념을 잘 설명해주는 괘라고 할 수 있다.

 

세상 만물에 완성은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일상은 완성되고 마무리되는 것보다는, 미완성이고 마무리되지 않는 일 투성이이다. 아니, 애초에 완성이나 마무리는 없다. 나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작년 주역 세미나의 결과물로서 크리에이티브하게(주역세미나 이름이 ‘크리에이티브 주역’이다) 민화로 8개의 소성괘를 그린 패널을 제작했었다. 발표를 마치고 났을 때, 나는 세미나도 끝났고 발표도 끝났다고 생각해서 몇 개의 패널을 맘에 들어하는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수화기제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올해 주역을 공부하는 몇몇 공동체가 모여 ‘주역 페스티발’을 진행하기로 했을 때, 내가 그린 민화를 소재로 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이미 패널은 다 선물한 상황이고, 저장해두었던 이미지 파일도 시원찮아 결국 쓰기 어렵게 됐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화수미제괘의 초육인 ‘물을 건너다 꼬리를 적신 여우’ 꼬라지가 된 것을 깨달았다. 공부가 시작은 있을지 모르지만 끝이라는 게 있을 리 없는데, 우리는 한 시즌, 한 학기, 한 해 단위로 뭔가 매듭짓고 ‘다 했다’고 느낀다. 그 지점이 바로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잠시 잊기도 한다. 그래서 화수미제괘는 방심하지 말고, 성급하게 굴지도 말고, 언제나 끝남에 시작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각각의 효사에 경계의 말을 꾹꾹 눌러 담고 있다. 끝남을 향해, 완성을 향해 가지만 그것은 항상 지향일 뿐, 우리는 늘 미완성의 길 위에 있다. 그것을 안다면 두려워하거나 좌절할 일은 없다. 우리는 그 미완의 길을 걷고 또 걸을 따름이다.

 

댓글 6
  • 2024-04-22 09:36

    짝짝짝! 그동안 연재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종즉유시(終則有始)라 하셨으니 언젠가 다시 봄날샘의 주역글이 시작되겠죠? 기대할게요^^

  • 2024-04-22 09:56

    수고하셨습니다. 16회 깜짝 올라오는게 화수미제 아닐까용~

  • 2024-04-22 10:25

    봄날샘의 주역이야기 애정하는 1인으로서 다시 시작될 주역이야기 고대하고 있을게요^^
    수고많으셨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 2024-04-22 21:05

    드디어 일단락을 지으셨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샘이 준 손괘 패널은 갖다드릴 수도 있는데요 ㅎㅎㅎ

  • 2024-04-23 20:14

    댓글은 처음 이지만...
    샘이 해석한
    주역이 권하는 인간의 길을
    쭉~~~~읽었어요.
    수고하셨어요.

  • 2024-05-01 23:41

    그 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주역 공부도 그렇고, 연재도 그렇고, 쭈욱 꾸준히 연재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주역의 힘일까, 공부의 힘일까, 그렇지 않으면 주역 공부의 힘일까ㅎㅎ 감사히 잘 읽었습니당.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24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2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45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8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9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