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13회] 장문중이 몰랐던 것

진달래
2023-10-0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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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1.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말씀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불후는) 이런 것을 두고 이르는 것입니다.”(魯有先大夫曰臧文仲 旣沒, 其立言 其是之謂乎)『춘추좌전』양공24년

 

장문중의 이름은 진(辰)으로 장손진(臧孫辰)이라 불린다. 문중(文仲)은 그의 시호이다. 공자보다 60여년 앞선 사람이다. 장(臧)씨는 춘추시대 초기의 노나라 공족 집안으로 12대 군주인 효공(孝公)의 후손이다. 희(姬)성인 노나라 공족이 장(臧)을 성으로 쓰게 된 것은 효공의 아들인 장희백(臧僖伯)의 자(字), 자장(子臧)을 성으로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집안은 장희백과 그의 아들인 장애백(臧哀伯)도 유명했는데 이들은 모두 군주가 예에 맞지 않은 일을 할 때면 간(諫)하는 것으로 『좌전』에 자주 등장한다.

장문중 역시 『좌전』에서 자주 그의 말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사기(史記)』에서는 한 번도 언급 되지 않았다. 장문중은 노나라 장공(莊公), 민공(閔公), 희공(僖公), 문공(文公), 네 명의 군주를 섬기며 많은 일을 했다. 특히 장문중은 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 제나라로 가 곡식을 얻어 온 일로 크게 칭송 받았다. 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희공이 무녀(巫)와 곱사등이(尫)를 태워 죽이려고 했었을 때 막은 일로도 유명하다. 당시의 풍속에 이렇게 나라에 큰 재해가 들면 무당을 희생으로 바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장문중이 나와서 희공에게 간언을 한다.

 

“그것은 가뭄에 대한 대비책이 아닙니다. 성곽을 수리하고 음식을 줄이며, 비용을 아끼고 검소함에 힘쓰고 서로 나누어 먹도록 권장하십시오. 이것이 지금 당장 힘 써야 할 일입니다. 무녀(巫)나 곱사등이(尫)들이 어찌 하겠습니까? 하늘이 그를 죽이고자 한다면 태어나게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능히 가뭄에 들게 할 수 있는 자라며 그를 불태워 죽이고 나면 가뭄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非旱備也 脩城郭 貶食省用 務穡勸分 此其務也 巫尪何為 天欲殺之 則如勿生)『춘추좌전』희공21년

 

미신적인 방법이 아닌 실질적으로 가뭄에 대한 대비책을 내놓는 장문중을 보면 그가 당시 사람들에 비해 매우 합리적인 사람인 듯하다. 뿐만 아니라 희공이 진(晉)나라에 들어가 땅을 나누어 받아오라고 시킨 적이 있는데 이 때, 묵었던 객관의 사람들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빨리 가서 땅을 받아 온 적도 있다.

이런 이야기 외에도 『좌전』에 나온 여러 이야기들을 보면 숙손표가 왜 그를 입언(立言)이라고 칭했는지 이해가 된다.

 

  중국문자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점술용 귀갑  사진/쉬쉰(徐訊) 출처 인민화보

 

  1. (/큰거북 껍질)’가 뭐 길래

 

『춘추좌전』이나 『국어(國語)』에서 볼 수 있는 장문중에 대한 이야기들이 물론 모두 좋은 이야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녀와 곱사등이를 희생으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 일에는 반대 했으나, 희귀한 새가 날아들자 그 새가 앉은 자리에 제사를 지내게 하는 등 일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런데 『논어』 속에 장문중에 대한 공자의 평은 그다지 썩 좋지 않다. 『논어』에는 장문중에 대해 두 번 언급하고 있는데 또 다른 글에서도 장문중이 당시 유하혜가 현명한 사람인 줄 알면서도 그를 천거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고 있다.

먼저 공자가 장문중에게서 문제로 삼은 것은 그가 ‘채(큰거북 껍질)’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걸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북껍질은 당시 사람들이 점을 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대부 정도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채(蔡)는 크기가 큰 거북 껍질로 이는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 점을 치는 용도로 사용했다. ‘귀(龜)’와 ‘채(蔡)’는 둘 다 거북을 말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 둘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는 듯하다. 거북을 흔히 귀라고 했는데, 채는 특별히 보귀(寶龜), 원귀(元龜), 수귀(守龜)라고도 하고, 크기가 한 자 이상이 되는 큰 거북을 말했다. 그리고 이 채는 천자와 제후만이 소장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장문중의 잘못은 일단 이 채를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문중은 그 신분이 대부였으므로 채를 가질 수 없었다. 또 『주례(周禮)』를 살펴보면 귀와 채는 사당에 보관하는 것으로 따로 집을 만들어 보관하지 않았다. 그러면 기둥머리에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 마름풀을 그린 곳이 장문중의 사당이라는 건데, 이런 사당의 장식은 천자의 사당에서나 할 수 있는 것으로 대부는 할 수 없었다. 즉 채를 소장하는 것도, 사당의 장식도, 모두 예(禮)에 맞지 않는 것으로 천자 혹은 제후나 할 수 있는 것을 장문중이 대부의 신분으로 했다는 것이다. 후대의 주석가들은 장문중의 이런 태도를 관중이 궁에 있는 문을 가리는 병풍을 자기 집에 둔다거나 제후들의 회합 때 사용하는 반점(탁자)을 집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춘추시대는 신분제 사회이다. 신분제 사회의 특징은 모든 것이 예에 의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군주, 대부, 사, 평민 등이 점을 칠 때도 각각 그 신분에 맞게 해야 한다. 모두 거북점을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거북점을 칠 때도 그 신분에 따라 거북이의 크기가 달랐다.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 국립고궁박물관

 

  1. 장문중은 지혜롭지 않다

 

공자는 늘 이러한 신분을 넘는, 즉 예에 맞지 않는 행동, 또는 사치를 경계했다. 이는 관중을 평할 때나 장문중을 평할 때나 일관되게 보여주는 태도이다. 그런데 관중이 예에 맞지 않은 일을 할 때는 그가 인하지 않다고 했는데, 장문중의 경우 지혜롭지 않다고 여겼다.

문공 2년에 노나라가 태묘에서 큰 제사를 지내면서 희공(僖公)의 위패를 민공(閔公)보다 높여서 합사(合祀)를 했다. 희공은 민공의 형이었지만 민공이 먼저 군주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이는 순서를 거꾸로 제사 지내는 것이 되었다. 『좌전』은 이 일의 말미에 공자의 장문중에 대한 평을 달았다. 아마도 그가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을 꾸짖고 있는 듯하다. 공자는 여기서 장문중의 세 가지 인(仁)하지 못한 점과 세 가지 지혜롭지(知) 못한 점을 이야기했다.

 

“전금(유하혜)을 아래로 낮춘 것과 여섯 관문을 설치하고, 첩에게 돗자리를 짜서 팔도록 한 일은 세 가지 인하지 못한 일이다. 신분에 맞지 않는 쓸데없는 것을 설치하여 큰 거북을 보관하고, 순서를 거스르는 제사를 방치한 채 그대로 두고, 바닷새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 것, 이 세 가지는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下展禽 置六關 妾織蒲 三不仁也 作虛器 縱逆祀 祀爰居 三不知也) 『춘추좌전』 문공2년

 

그런데 여기서 공자가 장문중에게 지혜롭지 못하다고 한 세 가지는 모두 당대에는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 아닌 듯 보이나, 후대에는 어떤 전례가 될 수 있는 일들이다. 대부이면서 채를 소유한 것도, 희공의 위패를 민공보다 높여서 제사를 지낸 것도, 원거(爰居)라는 바닷새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 일이 그렇다.

바닷새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 일은 『국어』에서 볼 수 있는데, 바다에 접하지 않은 노나라에서 바닷새가 사흘이나 동문 밖에 앉아 있자, 이를 상서로운 일이라고 생각한 장문중이 제사를 지내게 한 일이다. 당시 제사는 국가의 일로 함부로 지낼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전례가 될 수 있는 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장문중은 한 번 제사를 지내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후대에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번거로운 예를 자꾸 만들어내게 된다. 공자가 이와 같은 일들을 ‘지혜롭지 못하다’고 한 것은 장문중이 이러한 판단 없이 즉,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당대의 사람들 대부분이 장문중을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따라서 그가 채를 소유하고 그것을 보관하는 사당에 장식을 한 일 등은 그의 평판과 지위에 ‘그럴 수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자는 그의 이런 행동이 후대에 삼환이 태산에 제사를 지내고, 팔일무를 자기 집 마당에서 출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장문중이 많은 훌륭한 일들을 했음에도 지혜롭지 못한 인물로 남게 된 이유일 것이다.

댓글 4
  • 2023-10-02 17:20

    사치 좋아하는 누군가가 몹시 뜨끔한 글이로군요 ㅎㅎㅎ.
    '6공화국 말, 진관현에 살던 군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서랍 하나에 붓 열두자루와 잉크 열댓병을 넣어두었다. 혼자서 수레 두 대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이에 대해 군이 말하길 '이번 생은 틀렸어...' ㅠㅠ

  • 2023-10-04 09:19

    장문중이 <좌전>에 많이 등장하는 군요 ㅎ
    <논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좌전>도 읽어야 ㅋ
    당대사람들의 평가와 공자님의 평가는 다른 면이 있네요.
    안과 밖이 일치해야 직(直)한 것이고, 직하지 않으면 이미 인하거나 지혜롭다고는 할 수 없을테니까요.

  • 2023-10-06 21:02

    팔일무에 대한 비판이 어쩌면 장문중에서부터..! 비판에도 계보가 있네요

  • 2023-10-07 15:08

    장문중은 스스로 의문의 1패라고 생각할듯^^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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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4.02.08 | 조회 280
논어 카메오 열전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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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5 | 조회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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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1 | 조회 410
논어 카메오 열전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달래
2023.07.11 | 조회 295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진달래
2023.04.26 | 조회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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