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약방 에세이
      k를 퀴어링, 어디로 갈 것인가?     권경덕     k는 지난 10년 동안 실패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자퇴에 실패했고(맞지 않는 전공 수업을 꾸역 꾸역 들으며 학위를 취득했고), 이별에 실패했고(전 애인과 제때 헤어지지 못해서 흑역사를 만들었고), 독립에 실패했다(호기롭게 독립했지만 7년 만에 다시 부모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실패 이전까지 k는 'OO 밖에서'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지향했지만, 독립적이고 번듯한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추구할수록 불안정함은 커져갔다. 하지만 k의 실패는 무언가를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자퇴에 실패했지만 어쨌든 졸업해서 학교를 떠났고, 이별에 실패했지만 시간이 흘러 결국 헤어졌고, 독립에 실패했지만 서울의 어느 주택 옥탑방에 무사히 눌러앉았기 때문이다. k는 이제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 이상을 갈망하는 대신, 지상 위에서의 공생, 혹은 기생의 기술을 탐구하고 있다. 옥탑방에 출몰하는 바퀴벌레와 주거권을 놓고 협상하고, 구석에 은밀히 서식하는 거미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유대감을 형성한다. k 역시 다시 독립하기 전까지는 집주인과 잘 공생하는 법, 옥탑방에 잘 기생하는 법을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k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1.이상한(queer) 만남들   k는 2021년 겨울, 길드다 워크숍 <동물을 퀴어링>으로 문탁네트워크에 처음 접속했다. "온갖 빛깔의 퀴어를 만나고, 고착화된 나의 시선을 비틀어보는 워크샵"이라는 소개가 인상적이었다. 퀴어(queer)는 원래 ‘이상한, 기이한’ 같은 뜻이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성소수자 정체성을 지칭하거나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등의 근대적 규범에 도전하는 이론과 실천(퀴어링)을 일컫는다. 워크숍에서는...
      k를 퀴어링, 어디로 갈 것인가?     권경덕     k는 지난 10년 동안 실패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자퇴에 실패했고(맞지 않는 전공 수업을 꾸역 꾸역 들으며 학위를 취득했고), 이별에 실패했고(전 애인과 제때 헤어지지 못해서 흑역사를 만들었고), 독립에 실패했다(호기롭게 독립했지만 7년 만에 다시 부모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실패 이전까지 k는 'OO 밖에서'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지향했지만, 독립적이고 번듯한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추구할수록 불안정함은 커져갔다. 하지만 k의 실패는 무언가를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자퇴에 실패했지만 어쨌든 졸업해서 학교를 떠났고, 이별에 실패했지만 시간이 흘러 결국 헤어졌고, 독립에 실패했지만 서울의 어느 주택 옥탑방에 무사히 눌러앉았기 때문이다. k는 이제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 이상을 갈망하는 대신, 지상 위에서의 공생, 혹은 기생의 기술을 탐구하고 있다. 옥탑방에 출몰하는 바퀴벌레와 주거권을 놓고 협상하고, 구석에 은밀히 서식하는 거미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유대감을 형성한다. k 역시 다시 독립하기 전까지는 집주인과 잘 공생하는 법, 옥탑방에 잘 기생하는 법을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k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1.이상한(queer) 만남들   k는 2021년 겨울, 길드다 워크숍 <동물을 퀴어링>으로 문탁네트워크에 처음 접속했다. "온갖 빛깔의 퀴어를 만나고, 고착화된 나의 시선을 비틀어보는 워크샵"이라는 소개가 인상적이었다. 퀴어(queer)는 원래 ‘이상한, 기이한’ 같은 뜻이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성소수자 정체성을 지칭하거나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등의 근대적 규범에 도전하는 이론과 실천(퀴어링)을 일컫는다. 워크숍에서는...
문탁
2023.07.03 | 조회 303
인문약방 에세이
      버틀러의 새로운 존재론 ‘상호의존성’ 개념정리   기린   1.의존을 질문하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병원 진료가 있어서 우리 집으로 올라오셨다. 혼자 보내는 시간에 책이라도 읽어보시라고 연말에 냈던 내 책을 드렸다. 며칠이 지나 퇴근을 한 나에게 책을 다 읽었다고 했다. 그러고 첫 마디가 “지금까지 이렇게 남들한테 빌붙어 살았냐?”는 반문이었다. 다른 내용도 많은데 유독 백만 원을 벌어 살겠다는 내용과 관련한 부분이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빌붙어 살았다’는 표현을 듣는 순간 버럭하는 마음이 치솟았지만, 숨을 가누고 다음에 얘기하자며 그 순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 표현은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팔십 중반이신 어머니의 인식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공동체에서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의 삶의 방식을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버틀러는 『비폭력의 힘』에서 비폭력을 실천해야 하는 설득력 있는 이유 중의 하나로, 우리 생명체의 구성요소로 사회적 유대관계를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곧 “사회적 상호의존성이 생명의 한 속성임을 보편적인 방식으로 언명한” 다음에야, 사회적 유대 관계를 공격하는 폭력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 무엇에 의존하고 무엇이 각자에게 의존하는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어쨌든 상호적으로 의존하는 관계임을 인식할 수 있을 때에야, 개인 윤리로서의 비폭력을 넘어서는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버틀러는 사회적 존재론의 차원에서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이 개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버틀러의 상호의존성   버틀러는 『비폭력의 힘』에서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맞폭력이 필요하다는...
      버틀러의 새로운 존재론 ‘상호의존성’ 개념정리   기린   1.의존을 질문하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병원 진료가 있어서 우리 집으로 올라오셨다. 혼자 보내는 시간에 책이라도 읽어보시라고 연말에 냈던 내 책을 드렸다. 며칠이 지나 퇴근을 한 나에게 책을 다 읽었다고 했다. 그러고 첫 마디가 “지금까지 이렇게 남들한테 빌붙어 살았냐?”는 반문이었다. 다른 내용도 많은데 유독 백만 원을 벌어 살겠다는 내용과 관련한 부분이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빌붙어 살았다’는 표현을 듣는 순간 버럭하는 마음이 치솟았지만, 숨을 가누고 다음에 얘기하자며 그 순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 표현은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팔십 중반이신 어머니의 인식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공동체에서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의 삶의 방식을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버틀러는 『비폭력의 힘』에서 비폭력을 실천해야 하는 설득력 있는 이유 중의 하나로, 우리 생명체의 구성요소로 사회적 유대관계를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곧 “사회적 상호의존성이 생명의 한 속성임을 보편적인 방식으로 언명한” 다음에야, 사회적 유대 관계를 공격하는 폭력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 무엇에 의존하고 무엇이 각자에게 의존하는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어쨌든 상호적으로 의존하는 관계임을 인식할 수 있을 때에야, 개인 윤리로서의 비폭력을 넘어서는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버틀러는 사회적 존재론의 차원에서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이 개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버틀러의 상호의존성   버틀러는 『비폭력의 힘』에서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맞폭력이 필요하다는...
문탁
2023.07.03 | 조회 164
인문약방 에세이
      삐침과 빡침 : 마을에서 돌봄을 실천한다는 것은     김윤경       새로운 상상계:시민적 돌봄·난잡한 돌봄   나는 작년에 문탁네트워크에서 돌봄을 공부했고, 올해는 양생을 공부한다. 작년 ‘나이듦’세미나에서 읽었던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 중 전희경의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받기」 는 나에게 새로운 개념을 선사했다. 바로 ‘시민적 돌봄’이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돌봄을 발명해낸 개념이다. 이 새로운 돌봄관계는 ‘가족 돌봄’을 넘어서고, ‘서비스’들과는 다른, 다치고 아프고 늙고 언젠가는 죽어가는 취약한 존재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연루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의존’이라는 조건을 기본으로 한다. 전희경은 이 보편적이면서 불가피한 공동의 운명을 ‘시민적 돌봄’이라고 명명한다. 감정이 있고 취약하며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고 보살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다정한 존재로서의 ‘시민’을 상상해보라고 말이다.   또 올해 양생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읽은 『돌봄 선언』에서는 ‘난잡한 돌봄’이란 개념을 나에게 선사했다. 그 개념은 1980~1990년대 에이즈 인권운동 액트 업 활동가인 더글러스 크림프의 에세이 「전염병 중에 난잡할 수 있는 방법」에 근거를 둔 것이다. 에이즈 유행의 원인이 게이들의 성적 난잡함에 있다는 주장에 그는 게이들의 성 문화의 난잡함은 ‘실험적’인 성적 행위를 배가했음을 의미한다고 응수했다. 그는 난잡함이라는 개념을 ‘가벼운’ 또는 ‘진정성 없는’이라는 의미가 아닌 게이들이 서로에 대해 친밀감과 돌봄을 다양화하며 실험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난 친밀감으로 많은 관계들을 교차하며 난잡하게 돌봄을 실천하자고, 다정하면서 강한 시민으로서 다른 시민을 돌보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올해 초, 한 마을 모임에 참석했고, 다행히 정치적으로 견해가...
      삐침과 빡침 : 마을에서 돌봄을 실천한다는 것은     김윤경       새로운 상상계:시민적 돌봄·난잡한 돌봄   나는 작년에 문탁네트워크에서 돌봄을 공부했고, 올해는 양생을 공부한다. 작년 ‘나이듦’세미나에서 읽었던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 중 전희경의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받기」 는 나에게 새로운 개념을 선사했다. 바로 ‘시민적 돌봄’이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돌봄을 발명해낸 개념이다. 이 새로운 돌봄관계는 ‘가족 돌봄’을 넘어서고, ‘서비스’들과는 다른, 다치고 아프고 늙고 언젠가는 죽어가는 취약한 존재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연루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의존’이라는 조건을 기본으로 한다. 전희경은 이 보편적이면서 불가피한 공동의 운명을 ‘시민적 돌봄’이라고 명명한다. 감정이 있고 취약하며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고 보살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다정한 존재로서의 ‘시민’을 상상해보라고 말이다.   또 올해 양생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읽은 『돌봄 선언』에서는 ‘난잡한 돌봄’이란 개념을 나에게 선사했다. 그 개념은 1980~1990년대 에이즈 인권운동 액트 업 활동가인 더글러스 크림프의 에세이 「전염병 중에 난잡할 수 있는 방법」에 근거를 둔 것이다. 에이즈 유행의 원인이 게이들의 성적 난잡함에 있다는 주장에 그는 게이들의 성 문화의 난잡함은 ‘실험적’인 성적 행위를 배가했음을 의미한다고 응수했다. 그는 난잡함이라는 개념을 ‘가벼운’ 또는 ‘진정성 없는’이라는 의미가 아닌 게이들이 서로에 대해 친밀감과 돌봄을 다양화하며 실험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난 친밀감으로 많은 관계들을 교차하며 난잡하게 돌봄을 실천하자고, 다정하면서 강한 시민으로서 다른 시민을 돌보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올해 초, 한 마을 모임에 참석했고, 다행히 정치적으로 견해가...
문탁
2023.07.02 | 조회 219
인문약방 에세이
1. “그리고 다른 부류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가 세고 주관이 뚜렷한 이들. 대차고 까다롭고, ‘집시의 음울함’을 풍기고, 탁월한 지성을 갖추었으나 세심하지 않고, 감성은 공격적이지 온화하지 않으며, 말투와 태도는 냅다 직설적이고, 우아함이나 겸손함 따위는 결여되어 있으며 아슬아슬하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사나운 애착」, 비비안 고닉, 202쪽)     드라마 ‘닥터 차정숙’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늦은 나이에 병원에 취직하여 실수도 하고 좌절도 하며 녹록하지 않은 직장 생활을 버텨내는 주인공(차정숙)의 모습이 판타지 같지만은 않아서 공감하며 보고 있다. 나에게 주인공보다 더 눈길이 갔던 인물은 같은 과 선배이자 주인공 아들의 여자 친구 ‘소라’이다. ‘일에 관해서는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며 이러한 원칙은 후배 교육에서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 jtbc. 닥터 차정숙. 인물 소개) 드라마 속 그녀는 주인공의 실수에 직설적인 비난을 쏟아낸다. 그녀의 날카로운 질책은 온 병동에 울리고 이를 보다 못한 남자 친구(주인공의 아들)가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라’고 조언하자 ‘나는 잘하고 있다’며 돌아선다. 드라마의 전개 상 소라는 자신이 그렇게 다그치던 나이 많은 주인공이 남자 친구의 엄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텐데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가 궁금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거친 태도를 후회할 것인가? 그 상대가 시어머니인데’. 소라는 그 사실을 알고 잠시 이불킥 하지만 ‘우리가 결혼할 사이도 아니고, 남자 친구의 엄마라고 해서 내가 달라져야하는지’ 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예상했던 답이 아니었기에 신선했다. 왜 나는 시어머니라고 해서 그녀가...
1. “그리고 다른 부류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가 세고 주관이 뚜렷한 이들. 대차고 까다롭고, ‘집시의 음울함’을 풍기고, 탁월한 지성을 갖추었으나 세심하지 않고, 감성은 공격적이지 온화하지 않으며, 말투와 태도는 냅다 직설적이고, 우아함이나 겸손함 따위는 결여되어 있으며 아슬아슬하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사나운 애착」, 비비안 고닉, 202쪽)     드라마 ‘닥터 차정숙’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늦은 나이에 병원에 취직하여 실수도 하고 좌절도 하며 녹록하지 않은 직장 생활을 버텨내는 주인공(차정숙)의 모습이 판타지 같지만은 않아서 공감하며 보고 있다. 나에게 주인공보다 더 눈길이 갔던 인물은 같은 과 선배이자 주인공 아들의 여자 친구 ‘소라’이다. ‘일에 관해서는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며 이러한 원칙은 후배 교육에서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 jtbc. 닥터 차정숙. 인물 소개) 드라마 속 그녀는 주인공의 실수에 직설적인 비난을 쏟아낸다. 그녀의 날카로운 질책은 온 병동에 울리고 이를 보다 못한 남자 친구(주인공의 아들)가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라’고 조언하자 ‘나는 잘하고 있다’며 돌아선다. 드라마의 전개 상 소라는 자신이 그렇게 다그치던 나이 많은 주인공이 남자 친구의 엄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텐데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가 궁금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거친 태도를 후회할 것인가? 그 상대가 시어머니인데’. 소라는 그 사실을 알고 잠시 이불킥 하지만 ‘우리가 결혼할 사이도 아니고, 남자 친구의 엄마라고 해서 내가 달라져야하는지’ 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예상했던 답이 아니었기에 신선했다. 왜 나는 시어머니라고 해서 그녀가...
천유상
2023.06.07 | 조회 270
인문약방 에세이
  1.모범생 딸의 방황과 탐색 “이건 내가 알던 딸이 아니야.” 엄마 입장에서는 27년간 모범생으로 속 한 번 썩이지 않던 딸이 낯설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의 집안일을 잘 돕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수다를 같이 떨어주고 미주알고주알 묻지 않아도 이것저것 잘 말해주는 딸이었다. 엄마에게 나는 서울의 4년제 대학도 나오고 중국으로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직장도 잘 다니는 딸이기도 했다. 그러던 딸이 갑자기 주중에는 무역회사에서 퇴근하고 술 마시느라 연락도 없이 밤늦게 들어오거나 외박을 하거나, 주말에도 2030등산동호회를 다니느라 또 집에 붙어있질 않으니, 엄마는 딸이 방황하고 있다고 느꼈다. 더군다나 내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아빠는 모두 엄마 탓을 해대는 통에 엄마는 이중고를 겪었다.     엄마의 이런 마음은 고려하지도 않고 나는 ‘이건 내가 알던 딸이 아니야’라는 엄마 말을 듣고 그동안 애써 유지해오던 가면을 이제야 깬 것 같아서 시원하고 통쾌했다. ‘나는 나래가 공부 못 할 줄 알았는데, 곧잘 하네.“ 중학교 1학년 때쯤 아빠가 엄마에게 말을 듣고나서 나는 줄곧 반 1등의 모범생 모드를 약간의 압박을 느끼면서도 편하고 즐겁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시험 때 잠깐의 벼락치기가 아닌 1년을 공부해야 하는 고3때 나는 오히려 한,중,일 드라마에 빠지고 친구들을 꼬여내어 노래방에서 놀며 보내다 당연히 명문대는커녕 서울의 4년제 대학에 겨우 붙었다. 딱히 분명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재수는 하기도 싫었으면서, 당연히 돌아온 결과를 받아들이기보다 내가 가장 불만족스러워했다.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를...
  1.모범생 딸의 방황과 탐색 “이건 내가 알던 딸이 아니야.” 엄마 입장에서는 27년간 모범생으로 속 한 번 썩이지 않던 딸이 낯설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의 집안일을 잘 돕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수다를 같이 떨어주고 미주알고주알 묻지 않아도 이것저것 잘 말해주는 딸이었다. 엄마에게 나는 서울의 4년제 대학도 나오고 중국으로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직장도 잘 다니는 딸이기도 했다. 그러던 딸이 갑자기 주중에는 무역회사에서 퇴근하고 술 마시느라 연락도 없이 밤늦게 들어오거나 외박을 하거나, 주말에도 2030등산동호회를 다니느라 또 집에 붙어있질 않으니, 엄마는 딸이 방황하고 있다고 느꼈다. 더군다나 내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아빠는 모두 엄마 탓을 해대는 통에 엄마는 이중고를 겪었다.     엄마의 이런 마음은 고려하지도 않고 나는 ‘이건 내가 알던 딸이 아니야’라는 엄마 말을 듣고 그동안 애써 유지해오던 가면을 이제야 깬 것 같아서 시원하고 통쾌했다. ‘나는 나래가 공부 못 할 줄 알았는데, 곧잘 하네.“ 중학교 1학년 때쯤 아빠가 엄마에게 말을 듣고나서 나는 줄곧 반 1등의 모범생 모드를 약간의 압박을 느끼면서도 편하고 즐겁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시험 때 잠깐의 벼락치기가 아닌 1년을 공부해야 하는 고3때 나는 오히려 한,중,일 드라마에 빠지고 친구들을 꼬여내어 노래방에서 놀며 보내다 당연히 명문대는커녕 서울의 4년제 대학에 겨우 붙었다. 딱히 분명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재수는 하기도 싫었으면서, 당연히 돌아온 결과를 받아들이기보다 내가 가장 불만족스러워했다.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를...
나래
2023.06.07 | 조회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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