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5회] 호랑이 꼬리를 밟다, 리호미

봄날
2022-04-03 21:49
575

 

대학 졸업반때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던 기억이 난다. ‘00고 졸업’ ‘00대 졸업예정’이 내 이력의 전부였다. 이후 내 이력서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한 줄씩 추가됐다. 줄과 줄 사이, 수많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울고 웃던 내력을 이력서에 표현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이력서를 쓰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효과는 있다. 이력서의 끝에는 ‘위의 내용은 사실과 틀림없음을 증명하며, 사실과 다를 경우 그에 따른 피해를 감수한다’는 서약까지 붙어있다. 주역 천택리(天澤履)괘의 이(履)라는 글자는, 바로 자신의 살아온 내력을 거짓없이 써야 하는 이력서의 이(履)자이다. 이 글자는 ‘밟는다’ ‘신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천택리괘는 나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택리괘는 위는 하늘, 아래는 연못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 상괘는 굳세고 하괘는 기뻐함이라는 각각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상체가 가진 곧은 품새를 하체가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 천택리괘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하늘의 올곧음을 기뻐하면서 기꺼이 따르는 모습’을 주역은 리호미(履虎尾),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상체인 건괘는 호랑이를, 하체인 택괘는 사람을 상징한다. 사람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뜻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천택리괘를 흥미롭게 느낀 건, 괘사와 효사에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똑같은 구절이 세 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구절은 세 번 모두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각각 다른 강도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 예()의 실천이다

천택리괘의 괘사는 ‘리호미(履虎尾) 부질인(不咥人) 형(亨)’이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데 사람을 물지 않으니 형통하다”고 풀이한다. 이때의 리호미(履虎尾)는 실제로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니까 ‘호랑이’와 ‘꼬리’, 그리고 ‘밟는다’의 의미를 각각 읽어내야 한다. 우선 호랑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하늘, 하늘의 법칙이다. 꼬리가 뜻하는 것은 뒤, 즉 앞서지 않고 따라가는 것, 앞선 이의 뒤통수를 보는 것이다. ‘밟는다’가 의미하는 것은 실천이다. 상전에서는 이 실천을 예(禮)라고 설명한다. 예란 어떤 것일까? “하늘이 위에 있고 못이 아래에 있는 것이 리괘(履卦)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위아래를 분별하고,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는 것”이 바로 예이다.

 

위아래를 분별한다고 하면 즉각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작동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예(禮)는 청년의 희망을 찍어누르는 ‘수저드립’같은 것이 아니다. 예란 천도가 드러난 대로 치밀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예를 다한다는 것은 사람마다 (자신의 지위나 상황과 상관없이)어떤 일에 대한 ‘A to Z’의 과정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실천에는 ‘기꺼이 따라함’이라는 단서도 붙는다. 그러니까 이때의 예는 법이나 제도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한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실천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실천의 방향은 ‘하늘이 제시하는 길’ 즉, 천도(天道)이다. 그런데 하늘의 길은 대로처럼 우리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천도를 따르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천택리괘는 그 어려운 천도를 따르는 핵심이 실천이라고 말한다. 실천없이 천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비록 어떻게 하는 것이 천도를 따르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책임지며 돌아보는 일에 내가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괘사는 일()이고 효사는 때()이다

그런데 이런 ‘천도를 따르는 일’을 왜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위험천만한 이미지로 표현했을까? 혹시 정말로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처럼 극적인 순간, 혹은 장면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아닐까? 이 리호미는 주역의 텍스트가 가지는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괘사의 리호미가 사회적인 약속을 실천하는 일(事) 전체를 가리킨다면, 효사의 리호미는 그 실천과정에서 생기는 일종의 ‘위반’, 즉 일상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실수, 어긋남의 순간(時)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의 리호미는 길(吉)하고, 어떤 때의 리호미는 흉(凶)하다. 길한 것은 그 실수를 잘 다루어 일상을 회복한 것이고, 흉한 것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결국 리호미는 잠시도 쉬지 않는 인간의 행위과정, 즉 일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변용에 대한 스토리이다. 천택리괘의 효사에서 다루는 리호미를 자세히 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직면할 수 있는 위반의 순간에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길할 수 있을까.

 

호랑이꼬리를 밟으니 흉하다

천택리괘에 등장하는 세 번의 리호미 중에, 두 번째 리호미는 육삼효에 등장한다. 육삼의 효사는 “애꾸눈이 남들처럼 보고, 절름발이가 남들처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랑이 꼬리를 밟아서 사람을 무니 흉하고, 무인이 대군이 된다(육삼 묘능시 파능리 리호미 질인 흉 무인 위우대군, 六三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 武人 爲于大君).”이다. 이때 묘(眇)는 애꾸눈, 파(跛)는 절름발이이다. 삼효는 하괘의 맨 윗자리이고 원래 양이 있어야 할 자리인데 천택리괘에서는 음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바로 애꾸눈과 절름발이로 표현한 것이다. 애꾸눈과 절름발이로 표현한 것은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 이런 식의 표현은 곧장 장애인 비하로 취급되어 지탄을 받는다. 그러나 주역은 애꾸눈과 절름발이를 ‘정상에 미치지 못하는 모자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적인 결함이 장애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지나친 ‘오만’이나 ‘자기과시’가 장애라는 것이다. 오만과 자기과시의 결과, 자기자신만 위기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어렵게 만든다. 주역이 리호미로서 경계하는 것은 현재의 위치나 상황을 자세히 돌아보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이같은 위기의 가능성이다.

 

호랑이꼬리를 밟았는데도 길하다

구사에 마지막 리호미가 나온다. 구사의 효사는 “호랑이 꼬리를 밟으니, 두려워하고 조심하면 마침내 길할 것이다(구사 리호미 색색 종길 九四 履虎尾 愬愬 終吉).”라고 해석한다. 육삼과 마찬가지로 호랑이 꼬리를 밟았는데 이번에는 길하다고 한다. 색색(愬愬)(혹은 ‘삭삭’으로도 읽는다)은 ‘두려워하다’는 뜻의 색(愬)이라는 글자를 거듭해서 그 모습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호랑이 꼬리를 밟았는데도 극도로 조심하면 길하다는 것이다. 극도로 조심하는 것은 위태로운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구사는 상체의 첫 자리이자, 건괘의 아랫자리이다. 하체에서 상체로 국면이 바뀌었다는 뜻이니, 실천의 방법도 달라진다. 원래 음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양이 자리잡았으니까 그 기운이 이미 강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색색’은 강한 힘을 컨트롤하라는 주문이다. 즉 속도를 내는 힘이 아니라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조절하는 힘이 중요하다. 구사는 다행히 그런 능력이 있으니(속도나 힘을 조절함으로써) 길한 결과를 얻게 된다.

 

리호미에는 고정불변의 형식이 없다

 

리호미는 예의 실천이고, 예는 ‘천도(天道)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 예를 따르며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 물론 이것은 시대적으로 각기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다. 귀하고 천한 신분이 나뉘어 있던 조상들의 사회에서 예는 바로 그 신분에 맞는 규범을 따르는 것이 곧 천도였다. 신분질서가 사라진 오늘날에는 예를 찾는 것도, 그 예를 실천하는 것도 어렵다. 고정불변한 법칙으로 주어지면 차라리 편하게 따르면 될텐데, 알다시피 일상에는 늘 변수가 따른다. 그래서 인간의 실천은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처럼 진땀 빼게 만드는 긴장의 연속이다. 길흉은 그 변수의 등장에 따라 변용되는 인간실천의 결과이다. 어제는 길이었지만 오늘은 흉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삶의 변용이 요구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그 방향타가 되어줄만한 존재를 찾는다. 책을 읽거나 스승을 만나 그 가르침을 뒤따라 가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쉽지 않다. 이전에는 분명한 길이었을지 몰라도, 늘 다른 변수를 가진 리호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최근 불가피하게 한 조직의 대표를 맡게 됐다. 능력도 열정도 선임대표에 미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가 다져놓은 길을 충실히 따라가리라 다짐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매번 뭔가를 결정해야 하고 매번 뭔가 새로운 선택을 요구받는다. 이때 내가 혹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내맘대로 보인다고 믿고, 해낼 수 없는 것을 내맘대로 서둘러 앞서가려다 육삼의 리호미가 되는 것은 아닌지, 육삼의 리호미는 나를 흔들어 깨운다.

 

또 하나 명심할 것은 이렇게 내가 밟아가는 길은 나혼자 밟고 지나가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나의 뒤를 따라 그 길을 밟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한 걸음, 한 걸음 함부로 내디딜 수 있겠는가. 천택리괘의 리호미처럼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이다.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때는(踏雪野中去)

어지러이 걷지 말라(不須胡亂行)

오늘 나의 발자국은(今日我行跡)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라(遂作後人程)”

- 서산대사의 시에서

 

 

댓글 3
  • 2022-04-04 17:53

    처음 주역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처음 댓글을 달아봅니다.

    늘 처음은 참 어렵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삶의 역동.

    주역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네요.

     

  • 2022-04-05 17:24

    어려운 건 제가 글을 잘 못쓰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역이야기가 재미있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좀더 분발할께요.

  • 2022-04-11 08:39

    무엇인가의 뒤를 따르는데, 그 뒤를 또 따르는게 있을거라는 마무리가 인상적이네요

    미처 생각못했던 부분인데, 봄날쌤의 현장에서 나오는 생생한 배움이군요

    호랑이 꼬리는 밟지도, 밟지 않지도 말아야겠군요 ㅎㅎ

봄날의 주역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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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3.02.27 | 조회 394
봄날의 주역이야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통해 이제는 전세계적인 놀이가 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술래가 이 문장을 말하고 뒤돌아보는 순간, 사람들은 전력질주 하다가 즉시 멈춰야 한다. 이때 앞으로 나가는 관성을 막지 못하고 움직이면 지게 된다. 움직임과 멈춤 사이를 절묘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이 놀이의 관건이다. 난괘 중의 난괘로 꼽히는 수산건(水山蹇)괘의 상황이 꼭 이렇다. 마구 앞으로 달려 나가도 안되지만, 그저 멈춰 있기만 해도 패한다. 만약 사업을 하거나, 이성을 만나거나, 어떤 큰 일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점을 쳐서 수산건괘를 얻었다면, 당장 그 일을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 그만큼 수산건괘는 어떤 일을 강행하는 것이 어려운 때임을 강조한다. 이 어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가. 수산건(水山蹇), 앞으로 가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라 주역에서 ‘물’은 험함, 고난의 상징이다. 그래서 주역의 괘 중에 ‘안좋은 괘’ ‘어려운 괘’라고 불리는 괘에는 항상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들어있다. 수산건괘도 상괘가 감괘이다. 위는 물, 아래는 산이 놓여 있는 형상의 수산건괘는 높은 산을 간신히 넘었는데, 다시 물을 만나는 고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앞은 험한 강이고, 뒤는 내가 넘어온 산이 있으니,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   괘의 순서로 볼 때 수산건(水山蹇)괘는 화택규(火澤睽)괘의 다음에 나온다. 주역 64괘를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서 해석하는 서괘전은 “규(睽)는 어긋남이니 어긋나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수산건괘(蹇卦)로 받았다”고 말한다. 규는 ‘사팔눈’처럼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반목하는 형상으로, 소통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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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2.11.10 | 조회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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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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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주역이야기
전쟁에 정당한 명분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뉴스가 매일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와의 개전선언 이래, 우크라이나, 특히 동남부 돈바스, 마리우폴을 비롯한 각 지역은 포화에 휩싸여있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지역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러시아의 예상은 빗나갔고, 강력한 우크라이나의 저항으로 전쟁은 석달째로 접어들었다. 이 지역의 90%이상의 집들은 파괴됐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길 위에 내던져졌다. 많은 지역에서, 어제는 러시아의 탱크가 도로를 질주했다가 오늘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탈환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지옥에 다름없다. 얼마 전, 이 전쟁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니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알자는 심정으로 <봄날의 살롱>이 열렸다. 속시원한 대답이나 해결책이 있을리 만무였고, 우리는 전쟁이라는 참상 앞에서 무기력한 슬픔을 나눌 뿐이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고 그 피해는 오롯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번 전쟁의 원인에 대해 여기저기 말이 많다. 그 원인은 간단하지 않다. 전쟁의 대의는 아주 복잡하고 오래된 역사적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기도 하고, 나토-미국의 연합과 러시아-유라시아 진영간의 격돌의 장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명분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전쟁이 참혹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명분이건 간에 먼저 전쟁을 도발한 자는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국민이라는 이유로, 하릴없이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매일을 견뎌야 하는 운명,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고 집을 잃고 굶주림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 운명을 지운 사태에 대해 어떤 명분이 정당한가.  ...
전쟁에 정당한 명분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뉴스가 매일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와의 개전선언 이래, 우크라이나, 특히 동남부 돈바스, 마리우폴을 비롯한 각 지역은 포화에 휩싸여있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지역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러시아의 예상은 빗나갔고, 강력한 우크라이나의 저항으로 전쟁은 석달째로 접어들었다. 이 지역의 90%이상의 집들은 파괴됐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길 위에 내던져졌다. 많은 지역에서, 어제는 러시아의 탱크가 도로를 질주했다가 오늘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탈환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지옥에 다름없다. 얼마 전, 이 전쟁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니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알자는 심정으로 <봄날의 살롱>이 열렸다. 속시원한 대답이나 해결책이 있을리 만무였고, 우리는 전쟁이라는 참상 앞에서 무기력한 슬픔을 나눌 뿐이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고 그 피해는 오롯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번 전쟁의 원인에 대해 여기저기 말이 많다. 그 원인은 간단하지 않다. 전쟁의 대의는 아주 복잡하고 오래된 역사적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기도 하고, 나토-미국의 연합과 러시아-유라시아 진영간의 격돌의 장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명분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전쟁이 참혹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명분이건 간에 먼저 전쟁을 도발한 자는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국민이라는 이유로, 하릴없이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매일을 견뎌야 하는 운명,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고 집을 잃고 굶주림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 운명을 지운 사태에 대해 어떤 명분이 정당한가.  ...
봄날
2022.05.12 | 조회 415
봄날의 주역이야기
  대학 졸업반때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던 기억이 난다. ‘00고 졸업’ ‘00대 졸업예정’이 내 이력의 전부였다. 이후 내 이력서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한 줄씩 추가됐다. 줄과 줄 사이, 수많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울고 웃던 내력을 이력서에 표현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이력서를 쓰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효과는 있다. 이력서의 끝에는 ‘위의 내용은 사실과 틀림없음을 증명하며, 사실과 다를 경우 그에 따른 피해를 감수한다’는 서약까지 붙어있다. 주역 천택리(天澤履)괘의 이(履)라는 글자는, 바로 자신의 살아온 내력을 거짓없이 써야 하는 이력서의 이(履)자이다. 이 글자는 ‘밟는다’ ‘신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천택리괘는 나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택리괘는 위는 하늘, 아래는 연못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 상괘는 굳세고 하괘는 기뻐함이라는 각각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상체가 가진 곧은 품새를 하체가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 천택리괘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하늘의 올곧음을 기뻐하면서 기꺼이 따르는 모습’을 주역은 리호미(履虎尾),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상체인 건괘는 호랑이를, 하체인 택괘는 사람을 상징한다. 사람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뜻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천택리괘를 흥미롭게 느낀 건, 괘사와 효사에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똑같은 구절이 세 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구절은 세 번 모두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각각 다른 강도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 예(禮)의 실천이다 천택리괘의 괘사는 ‘리호미(履虎尾) 부질인(不咥人) 형(亨)’이다. “호랑이...
  대학 졸업반때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던 기억이 난다. ‘00고 졸업’ ‘00대 졸업예정’이 내 이력의 전부였다. 이후 내 이력서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한 줄씩 추가됐다. 줄과 줄 사이, 수많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울고 웃던 내력을 이력서에 표현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이력서를 쓰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효과는 있다. 이력서의 끝에는 ‘위의 내용은 사실과 틀림없음을 증명하며, 사실과 다를 경우 그에 따른 피해를 감수한다’는 서약까지 붙어있다. 주역 천택리(天澤履)괘의 이(履)라는 글자는, 바로 자신의 살아온 내력을 거짓없이 써야 하는 이력서의 이(履)자이다. 이 글자는 ‘밟는다’ ‘신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천택리괘는 나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택리괘는 위는 하늘, 아래는 연못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 상괘는 굳세고 하괘는 기뻐함이라는 각각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상체가 가진 곧은 품새를 하체가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 천택리괘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하늘의 올곧음을 기뻐하면서 기꺼이 따르는 모습’을 주역은 리호미(履虎尾),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상체인 건괘는 호랑이를, 하체인 택괘는 사람을 상징한다. 사람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뜻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천택리괘를 흥미롭게 느낀 건, 괘사와 효사에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똑같은 구절이 세 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구절은 세 번 모두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각각 다른 강도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 예(禮)의 실천이다 천택리괘의 괘사는 ‘리호미(履虎尾) 부질인(不咥人) 형(亨)’이다. “호랑이...
봄날
2022.04.03 | 조회 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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