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3회] 엣지있게 잘 쓰는 이야기, 화천대유

봄날
2021-12-13 09:13
498

대장동 부동산개발비리사건으로 주역이 “떴다”. 의혹의 핵심에 있는 화천대유(火天大有)라는 자산관리회사의 이름 때문이다. 주역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제는 화천대유가 주역의 괘이름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천대유는 수도권에 유일하게 남았다는 대장동 금싸라기땅을 개발하는 거대 기업컨소시엄에 참여했다. 그리고 수백억원의 막대한 배당이익을 챙겼다. 그렇게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 회사 이름값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는 것은, 화천대유괘가 주역 64괘 중에서도 아주 좋은 괘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허물이 없다, 길하다, 이롭지 않음이 없다

주역 64괘 중 14번째인 화천대유(火天大有)는 주역 속에서도 대표적인 ‘부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火)을 상징하는 이괘(離卦☲)가 위에 있고, 아래에는 하늘(天)을 의미하는 건괘(乾卦☰)가 놓여있다. 하늘 위에 불이 놓여있는 형상(䷍), 하늘 위에 있는 불은 태양을 가리킨다. 태양은 만물을 자라게 하는 에너지원으로서, 자연의 온갖 생산물들이 결실을 맺게 한다. 이른 바 ‘등따시고 배부른 때’가 바로 화천대유의 시기이다. 그래서 대유(大有)라는 괘이름이 붙었다. ‘크게 있음’ 혹은 ‘크게 소유함’ 정도로 해석되는 화천대유괘는, 그래서 괘사도 토를 달지 않고 ‘크고 형통하다(元亨)’라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효사들도 ‘허물이 없다’거나 ‘길하다’거나 ‘이롭지 않음이 없다’로 끝난다. 큰 경계의 목소리도 없고 헤쳐나가야 할 어려운 미션도 없다. 태평성대(太平聖代)가 이런 것 아닐까.

 

초구는 해를 끼치지 않으니 신중하면 허물이 없다.

구이는 큰 수레로 실으니, 싣고 나아가는 바가 있어서 허물이 없다.

구삼은 공(公)이 천자에 제사지내듯 하니, 소인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구사는 지나치게 성대함을 쫒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

육오는 진실한 믿음으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사귀니, 위엄이 있으면 길하다.

상구는 하늘로부터 도우니, 이롭지 않은 일이 없다.

 

사람들은 흔히 강력한 군주의 힘과 권능의 우산 아래 태평성대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주역에서는 양(陽)은 굳셈, 강한 성질을, 음(陰)은 부드러운 성질을 가진 것으로 푼다. 일반적으로 군주의 자리를 가리키는 육효는 양, 그러니까 강한 능력을 발휘하는 구오가 바른 자리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화천대유의 세상을 이루는 군주의 재질은 의외로 음, 즉 부드러움이다. 단 하나의 음효인 육오가 나머지 다섯 효를 거느리고 ‘부드러운 위엄’으로 세상을 다스린다. 화천대유의 시기에는 자신을 낮추고 수렴하며 ‘믿음의 관계망’을 구축하는 음의 군주여야 하늘이 내려주는 부를 인간세상에 쌓을 수 있다.

 

하늘은 주고, 인간은 쓴다

대유괘의 풍요로운 세상에는 재화만 넘쳐나는 것이 아니다. 대유괘의 바로 앞에 있는 괘는 천화동인(天火同人)이다. 천화동인은 말 그대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들판에 가득 모여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화천대유의 풍요로움은 하늘의 에너지와, 뜻을 모아 함께 모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합작품 정도가 되겠다. 이렇게 보면 화천대유의 세상은 물질뿐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넘치고, 사람들 간의 관계도 넘쳐흐르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재화가 넘치고 사람들이 넘치고 관계가 넘치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일까. 대유의 대(大)는 단순히 ‘크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크기, 계산불가능한, 혹은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나 성질의 것을 가리킨다. 화천대유의 때에 쌓이는 재화는 기본적으로 자연이 대지에 주는 선물처럼 차고 넘치는 것, 즉 일종의 ‘과잉’의 성질을 띤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하늘이 내리는 혜택은 인간들이 쓸만큼 맞춤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다. 태양은 무심하게 땅으로 비추어 만물이 생장하고 열매맺게 할 뿐, 그 본질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다. 그것이 선이 되고 악이 되는 것은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에 달려있다. 과잉의 부를 사람들이 어떻게 처분하는가. 결국 화천대유는 부를 생산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부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유의 부는 공적인 것이다

그러면 부를 어떻게 쓰라는 것인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유괘의 풍요로움은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았을 때 내린 하늘의 응답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산처럼 쌓인 부(富)는 한 두 사람의 공으로 치부할 수 없다. 즉 화천대유의 부는 사적으로 전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적으로 전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넘치는 재화와 관계들은 사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부의 일부가 빠져나가 은닉되고 몇몇 사람의 소유로 축적된다. 주자는 “소유한 것이 이미 큰데 다스림이 없으면 재앙이 그 가운데서 싹트기 마련”이라고 경고한다. 주자가 다스리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부의 분배가 사적으로 전용되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개인의 역량껏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 늘리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생각’은 근대의 산물이다. 우리가 읽은 인류학 텍스트는 이것이 당연한 생각이 아니었던 시대에 대해 말한다. 고대사회의 사람들은 이 잉여의 부가 그 사회 전체를 흔드는 큰 위협이 되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하는 방식을 고민했다. 그것이 포틀래치, 극단적인 ‘소비경쟁’으로 나타났다. 포틀래치는 북미 인디언 사회에서 큰 일이 있을 때 이웃 부족을 초대해 벌이는 축제로,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마당 한가득 쌓아놓고 모두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거나 태워버린다. 파괴적인 소비경쟁은 또 명예경쟁이기도 해서, 파산에 이를 정도로 과하게 나눠준 부족의 추장은 그 대신 ‘명예’를 얻는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이 ‘저주의 몫(부의 잉여)’은 인류 역사에서 항상 등장했으며, 이것이 고대에는 공적인 파괴의식으로, 근대에는 가혹한 전쟁 등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이것이 파괴되지 않고 사유화되고 축적됨(고임)으로써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고 한다.

 

주역의 시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상전에 ‘군자는 악을 막고 선을 드날려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따른다(君子以, 遏惡揚善, 順天休命)’는 말이 나온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이미 태생이 ‘공적인 풍요로움’인 대유를, 사적으로 울타리치는 것이 악이다. 개인의 몫으로 빠져나간 부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흐르지(순환되지) 않는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개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부는 재앙을 부른다는 것이 상전의 경고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선은 잉여의 부가 보다 많은 사람, 보다 많은 관계로 넓혀져서 다시 풍요로움으로 순환되는 것을 말한다. 상전이 말한 ‘선을 드날리는 군자’는 풍요로움을 순환시키는 주체이다.

 

소인은 할 수 없다, 소인불극(小人不克)

그렇다면 대유괘에서 군자는 누구일까. 이쯤에서 나는 구삼의 효사가 눈에 띄었다. 주역의 독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인 계사전에 따라 여섯 효를 두 개씩 세 쌍으로 묶어서 천(天)-지(地)-인(人)의 개념을 대입할 수 있다. 즉 상효와 오효를 하늘(天)에, 초효와 이효를 땅(地)에, 삼효와 사효를 사람(人)에 배속시켜서 보는 것이다. 대유괘의 육오와 상구가 천하의 부를 내려받는 것은 하늘의 일을 수렴하는 것이니 자연스럽고 그럴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으면 문제가 없다. 초구와 구이도 역시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그대로 따르면 허물이 없다.

 

변수는 사람의 역할에 배속된 구삼과 구사이다. 나는 구삼의 ‘공용향우천자 소인불극(公用亨于天子 小人弗克)’이라는 효사를, 부가 독점되지 않고, 공적으로 분배되도록 애쓰는 군자의 태도로 읽는다. ‘공용향우천자(公用亨于天子)’는 제후가 천자에게 제사를 바친다는 뜻으로 해석하거나, 자신이 천자인 듯이 하늘에 정성들여 제사를 지낸다고도 풀 수 있다. 어떻게 풀이하든, 부를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는 방향으로 쓰려 한다는 것이다. 부유함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으로 사용하는 것. 효사의 뒷부분인 ‘소인불극’은 이같은 사회적 나눔은 소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상전에서 말한 ‘악을 막고 선을 드날리는 군자’ 정도가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 ‘부의 공적인 분배’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사회적 부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군자뿐이다. 자산관리회사인 화천대유와 관련인물들은, 단적으로 말해 과잉의 부를 사적으로 전용했다. 그러한 행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전용한 이익금의 분배에 불만을 품은 내부고발로 비롯됐다고 한다. 사적인 욕심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해 서로를 손가락질하고 서로를 엮고, 결국 나란히 폴리스 라인에 서게 만들었다. 요컨대 그들은 화천대유의 때를 알았을지언정, 그 쓰는 법은 고민하지 않았으니 군자라 할 수 없다.

 

작은 부라도 엣지있게 쓰면 군자다

얼마 전, 나는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 사이에 통용되는 대안화폐인 ‘복’을 가지고 행해진 작은 이벤트에 참여했다. 친구들이 낸 물건을 복으로 경매하는 행사였다. 예상외로 많은 물건들이 등장하고 친구들의 참여가 뜨거웠다. 복경매는 성황을 이루었고 물건을 낸 사람이나 물건을 산 사람들 모두 그 자리가 즐거웠다. 오가는 복과 함께 즐거움이 오갔고, 경매에 사용된 복의 규모 이상으로 풍요로운 관계가 재생산되었다. 물건은 무조건 높은 복을 부른 사람에게 낙찰되지 않았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골고루 분배되었다. 나는 대유괘가 말하는 풍요로움을 재생산하는 모습이 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복경매를 즐기는 우리의 모습은 다름 아닌 군자를 지향하는 그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군자가 따로 있지 않다. 아무리 작은 물질이라도, 그것을 우리의 관계를 강화하고 풍성하게 하는 방식으로 고민해서 멋지게, 엣지있게 쓰면, 그 순간 나는 군자가 된다.^^//

댓글 5
  • 2021-12-13 17:26

     '지나치게 성대함을 쫓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는 구사의 효도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1-12-14 09:41

    50억클럽으로 지들끼리 나누는 부가 소인들의 잔치였네요^^

  • 2021-12-14 22:13

    주역 일타강사 봄날샘이 친절히 알려주는 군자 되는 쉬운(?) 방법!!!

     

  • 2021-12-15 13:59

    👍👍👍

  • 2021-12-19 12:38

    와~ 엣지있게 잘 쓰셨네요!

    화천대유를 다시 볼수있어서 참 좋습니다.

    자리에 배속하여 푸는 계사전의 방식도 차후 세미나를 해보고싶게 만드는군요^^

    게다가...우리도 군자가 될수있다니...듣기 좋아요^^

봄날의 주역이야기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친구가, 자기가 직접 심어 싹을 틔웠다며 작은 아보카도 화분을 하나 주었다. 단단한 아보카도 씨앗 한가운데가 쩍 벌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싹이 나고 줄기가 한 뼘만 한 길이로 자라나 있었다. 친구의 말로는 아보카도는 싹을 틔우기가 어렵지, 한번 싹이 나오면 쑥쑥 잘 자랄 것이니 어렵지 않게 키울 수 있다고 한다. 씨앗에서 싹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까지 이 식물은 얼마나 힘든 고난을 견뎌냈을까.   만물의 시작, 수뢰둔괘 주역 64괘의 세 번째인 수뢰둔(水雷屯)괘는 주역에서 시간과 공간이 열린 후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지점을 가리킨다. 하늘을 뜻하는 건괘(乾卦)와 땅을 뜻하는 곤괘(坤卦)의 다음에 나오는 괘가 바로 둔괘이다. 서괘전에서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다”고 했으니 둔괘는 하늘과 땅이 열리고 난 후 바야흐로 사물들이 생겨나기 이전, 혼돈(chaos)의 세상에서 무언가가 생겨나는, 우주생성의 드라마 현장이다. 원시지구의 대기상황처럼 둔괘의 상괘는 물이고, 하괘는 우레이다. 천지가 검은 먹구름으로 꽉 차있고 순간순간 그 속에서 ‘번쩍’하며 천둥과 번개가 친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때. 둔괘는 크건 작건 모든 시작에서 만나는 고난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우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이 어렵다. 또 언제 닥칠지 예감하는 것이 어렵고, 실천하는 것이 또 어렵다. 주역의 대표적인 난괘인 둔괘는 그 어려움이 바로 ‘시작’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다른 난괘와 비교된다. 주역이 말하는 시작의 어려움은 과연 무엇이고, 그 어려움을 이겨낼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자.   판단하기 어려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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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3.02.27 | 조회 394
봄날의 주역이야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통해 이제는 전세계적인 놀이가 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술래가 이 문장을 말하고 뒤돌아보는 순간, 사람들은 전력질주 하다가 즉시 멈춰야 한다. 이때 앞으로 나가는 관성을 막지 못하고 움직이면 지게 된다. 움직임과 멈춤 사이를 절묘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이 놀이의 관건이다. 난괘 중의 난괘로 꼽히는 수산건(水山蹇)괘의 상황이 꼭 이렇다. 마구 앞으로 달려 나가도 안되지만, 그저 멈춰 있기만 해도 패한다. 만약 사업을 하거나, 이성을 만나거나, 어떤 큰 일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점을 쳐서 수산건괘를 얻었다면, 당장 그 일을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 그만큼 수산건괘는 어떤 일을 강행하는 것이 어려운 때임을 강조한다. 이 어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가. 수산건(水山蹇), 앞으로 가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라 주역에서 ‘물’은 험함, 고난의 상징이다. 그래서 주역의 괘 중에 ‘안좋은 괘’ ‘어려운 괘’라고 불리는 괘에는 항상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들어있다. 수산건괘도 상괘가 감괘이다. 위는 물, 아래는 산이 놓여 있는 형상의 수산건괘는 높은 산을 간신히 넘었는데, 다시 물을 만나는 고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앞은 험한 강이고, 뒤는 내가 넘어온 산이 있으니,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   괘의 순서로 볼 때 수산건(水山蹇)괘는 화택규(火澤睽)괘의 다음에 나온다. 주역 64괘를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서 해석하는 서괘전은 “규(睽)는 어긋남이니 어긋나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수산건괘(蹇卦)로 받았다”고 말한다. 규는 ‘사팔눈’처럼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반목하는 형상으로, 소통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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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2.11.10 | 조회 404
봄날의 주역이야기
  고난이 연거푸 닥칠 때 나는 최근 부득이하게 한 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을 맡았다. 회사의 형태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 사기업과는 달리, 그 운영과 사업은 사회적으로, 즉 공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사회의 일원이던 내가 대표를 맡은 것은 이같은 공적인 기능의 유지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고, 나를 이어서 누군가가 또 그 역할을 맡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맡은 역할을 다 파악하기도 전에 회사재정이 출렁거렸다. 적자로 시작한 회사재정 상황은 나의 임금은 둘째로 치고, 매달 직원들의 월급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웠다. 앵벌이하는 사람처럼 나는 매일같이 입출금장부를 들여다보며 노심초사했다. 한 두달 사이 이제 숨통이 트인다 싶었는데, 이번엔 일 잘하던 직원이 퇴사하겠다고 나섰다. 성격이 싹싹하고 부지런해서 고객응대는 물론이고 연차에 비해 디자인 실력도 뛰어났다. 그 사람을 대신할 새 직원을 뽑는 일은 도대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어깨가 천근처럼 무거워졌고, 입맛이 똑 떨어졌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일에 신경질을 냈고, 모든 일에 심드렁해졌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런 고난이 찾아오는 걸까. 나는 이런 상황을 넘겨주고 쏙 빠진 전임대표가 원망스러웠다. 전화해서 화풀이라도 해볼까 하는 쪼잔한 생각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고난에 고난이 겹쳐 힘겨운 때가 있다. ‘엎친 데 덮친 격’ ‘갈수록 태산’ 같은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 주역의 중수감(重水坎)괘는 바로 이처럼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몰려오는 상황을 말하는 괘이다. 감(坎)은 물을 뜻하는데 중수감괘는 물(水)이 중복된다(重)는 뜻을 가진다. 주역에서 물,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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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2.07.25 | 조회 509
봄날의 주역이야기
전쟁에 정당한 명분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뉴스가 매일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와의 개전선언 이래, 우크라이나, 특히 동남부 돈바스, 마리우폴을 비롯한 각 지역은 포화에 휩싸여있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지역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러시아의 예상은 빗나갔고, 강력한 우크라이나의 저항으로 전쟁은 석달째로 접어들었다. 이 지역의 90%이상의 집들은 파괴됐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길 위에 내던져졌다. 많은 지역에서, 어제는 러시아의 탱크가 도로를 질주했다가 오늘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탈환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지옥에 다름없다. 얼마 전, 이 전쟁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니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알자는 심정으로 <봄날의 살롱>이 열렸다. 속시원한 대답이나 해결책이 있을리 만무였고, 우리는 전쟁이라는 참상 앞에서 무기력한 슬픔을 나눌 뿐이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고 그 피해는 오롯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번 전쟁의 원인에 대해 여기저기 말이 많다. 그 원인은 간단하지 않다. 전쟁의 대의는 아주 복잡하고 오래된 역사적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기도 하고, 나토-미국의 연합과 러시아-유라시아 진영간의 격돌의 장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명분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전쟁이 참혹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명분이건 간에 먼저 전쟁을 도발한 자는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국민이라는 이유로, 하릴없이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매일을 견뎌야 하는 운명,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고 집을 잃고 굶주림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 운명을 지운 사태에 대해 어떤 명분이 정당한가.  ...
전쟁에 정당한 명분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뉴스가 매일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와의 개전선언 이래, 우크라이나, 특히 동남부 돈바스, 마리우폴을 비롯한 각 지역은 포화에 휩싸여있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지역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러시아의 예상은 빗나갔고, 강력한 우크라이나의 저항으로 전쟁은 석달째로 접어들었다. 이 지역의 90%이상의 집들은 파괴됐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길 위에 내던져졌다. 많은 지역에서, 어제는 러시아의 탱크가 도로를 질주했다가 오늘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탈환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지옥에 다름없다. 얼마 전, 이 전쟁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니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알자는 심정으로 <봄날의 살롱>이 열렸다. 속시원한 대답이나 해결책이 있을리 만무였고, 우리는 전쟁이라는 참상 앞에서 무기력한 슬픔을 나눌 뿐이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고 그 피해는 오롯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번 전쟁의 원인에 대해 여기저기 말이 많다. 그 원인은 간단하지 않다. 전쟁의 대의는 아주 복잡하고 오래된 역사적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기도 하고, 나토-미국의 연합과 러시아-유라시아 진영간의 격돌의 장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명분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전쟁이 참혹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명분이건 간에 먼저 전쟁을 도발한 자는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국민이라는 이유로, 하릴없이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매일을 견뎌야 하는 운명,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고 집을 잃고 굶주림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 운명을 지운 사태에 대해 어떤 명분이 정당한가.  ...
봄날
2022.05.12 | 조회 415
봄날의 주역이야기
  대학 졸업반때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던 기억이 난다. ‘00고 졸업’ ‘00대 졸업예정’이 내 이력의 전부였다. 이후 내 이력서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한 줄씩 추가됐다. 줄과 줄 사이, 수많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울고 웃던 내력을 이력서에 표현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이력서를 쓰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효과는 있다. 이력서의 끝에는 ‘위의 내용은 사실과 틀림없음을 증명하며, 사실과 다를 경우 그에 따른 피해를 감수한다’는 서약까지 붙어있다. 주역 천택리(天澤履)괘의 이(履)라는 글자는, 바로 자신의 살아온 내력을 거짓없이 써야 하는 이력서의 이(履)자이다. 이 글자는 ‘밟는다’ ‘신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천택리괘는 나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택리괘는 위는 하늘, 아래는 연못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 상괘는 굳세고 하괘는 기뻐함이라는 각각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상체가 가진 곧은 품새를 하체가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 천택리괘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하늘의 올곧음을 기뻐하면서 기꺼이 따르는 모습’을 주역은 리호미(履虎尾),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상체인 건괘는 호랑이를, 하체인 택괘는 사람을 상징한다. 사람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뜻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천택리괘를 흥미롭게 느낀 건, 괘사와 효사에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똑같은 구절이 세 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구절은 세 번 모두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각각 다른 강도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 예(禮)의 실천이다 천택리괘의 괘사는 ‘리호미(履虎尾) 부질인(不咥人) 형(亨)’이다. “호랑이...
  대학 졸업반때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던 기억이 난다. ‘00고 졸업’ ‘00대 졸업예정’이 내 이력의 전부였다. 이후 내 이력서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한 줄씩 추가됐다. 줄과 줄 사이, 수많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울고 웃던 내력을 이력서에 표현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이력서를 쓰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효과는 있다. 이력서의 끝에는 ‘위의 내용은 사실과 틀림없음을 증명하며, 사실과 다를 경우 그에 따른 피해를 감수한다’는 서약까지 붙어있다. 주역 천택리(天澤履)괘의 이(履)라는 글자는, 바로 자신의 살아온 내력을 거짓없이 써야 하는 이력서의 이(履)자이다. 이 글자는 ‘밟는다’ ‘신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천택리괘는 나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택리괘는 위는 하늘, 아래는 연못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 상괘는 굳세고 하괘는 기뻐함이라는 각각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상체가 가진 곧은 품새를 하체가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 천택리괘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하늘의 올곧음을 기뻐하면서 기꺼이 따르는 모습’을 주역은 리호미(履虎尾),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상체인 건괘는 호랑이를, 하체인 택괘는 사람을 상징한다. 사람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뜻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천택리괘를 흥미롭게 느낀 건, 괘사와 효사에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똑같은 구절이 세 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구절은 세 번 모두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각각 다른 강도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 예(禮)의 실천이다 천택리괘의 괘사는 ‘리호미(履虎尾) 부질인(不咥人) 형(亨)’이다. “호랑이...
봄날
2022.04.03 | 조회 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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