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양생에세이 ②]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타자를 마주할 수 있을까- 조은

인문약방
2022-01-02 20:30
262

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그동안 사유할 수 있는 동물로서 고유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의 저자 에두아르도 콘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상징적’인 것이며, ‘상징적’인 것만이 기호는 아니라고 말한다. 기호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기호를 사용한다. 콘은 퍼스의 기호학을 참조하여 기호에 관해 설명한다. 기호에는 ‘상징적(symblic)’인 것뿐만 아니라 ‘아이콘적(iconic)’, ‘인덱스적(indexical)’ 기호가 있다고 말한다. 이 기호들을 만들어내고 해석하는 것을 기호작용이라고 하며, 기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우리로서 존재할 수 있다.

 

기호작용은 살아있는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살아있는 세계를 구성한다. 다수 종들 간의 관계가 가능하고 또한 그러한 관계를 분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기호적 성향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호작용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표상하는 세계들로부터 인간을 분리해서 묘사하는 이원론적인 인류학적 접근법을 넘어 일원론적인 접근법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을 넘어서 생각한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도 날을 세우고 살지만은 않을 것 같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공부하면서도 인간을 넘어선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는데,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인간을 넘어설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봉덕이는 생각한다

 

많은 종과의 기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고, ‘자기’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숲에 사는 루나족과 다르게 도시에 사는 인간들이 다른 존재와의 기호작용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고기동에 사는 나는 아파트에 사는 것보다는 비인간 존재들과 아주 조금 더 가까운 편이다. 새들이 밭에 있는 먹이를 먹으러 오거나,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 마주치는 개와 고양이, 가끔 운전하다가 만나는 고라니와 다람쥐.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 마주쳤던 개였다. 고기동에 이사를 온 지 8년이 다 되어가는데 지금까지도 동네를 돌아다니는 큰 개들이 무서워서 밤에 혼자 걷는 것은 피한다. 큰 개를 무서워했던 내가 대략 3년째 20킬로가 넘어가는 개, 봉덕이와 함께 살고 있다. 가장 가까운 비인간 동물인 봉덕이가 <숲은 생각한다>를 읽는 중간중간 생각났다.

 

 

 

 

봉덕이는 처음에는 밖에서 지내다가 현재는 집 안과 밖을 넘나들며 살고 있다. 밖에서 지낼 때는 지금보다 좀 더 야생적이었다. 날아다니는 새를 잡은 적도 있고, 쥐도 여러 마리 잡았다. 그때는 솔직히 봉덕이를 잘 알지 못했다. 아니, 봉덕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 봉덕이랑 마주치는 게 집을 나갈 때랑 들어올 때 마당에서 잠시 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두 발로 내 다리를 잡는 봉덕이를 떼고, 집으로 들어오기에 바빴다. 더 놀다 가라는 봉덕이의 행동을 어떤 의미(기호)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갑고, 더 있고 싶어서 그런 걸 가족들은 자꾸 훈련으로 가르쳐야 할 문제행동이라고 봤다. 그래서 여러 훈련을 시도했었다. 현관문에서 대문을 가는 길에 ‘앉아’를 시켜가며 간식을 주기도 했었고, 한동안은 무시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안으로 들어와서 긴 시간을 함께하니 자연스럽게 그 행동은 없어졌다. 긴 시간을 같이 생활하면서 나도 봉덕이도 서로의 기호를 전보다 더 잘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봉덕이가 나가고 싶을 때, 배가 고플 때, 놀고 싶을 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봉덕이는 우리가 언제 자려고 하는지, 나가려고 하는지, 산책하러 가는지를 구분한다.

 

나는 솔직히 ‘인간적’인 걸 넘어서 생각하는 걸 너무 원했지만, 한편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봉덕이랑 내가 기호작용을 통해서 각자 새로운 자기로 또 우리로 창발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지구를 넘어서

 

<숲은 생각한다> 마지막 세미나 시간에 나왔던 이야기가 있다. ‘기호’로 받아들이는 것. 그 말을 들었을 때 생각났던 책이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김초엽 작가의 sf 소설이다. 단편집으로 구성되어있는 이 책에서 ‘스펙트럼’이라는 단편이 생각났다. 외계 생명체를 탐사하는 연구원이었던 희진이 탐사 도중 조난을 당하며 낯선 행성에서 외계생명체 루이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루이는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행성에 있는 도구들로 그림을 그리는 데에 보낸다. 희진은 자신을 돌봐주는 루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외계 생명체들과 간단한 비언어적 의사소통도 가능해졌다. 희진은 연구원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행성을 분석하고 지구에 알리려고 했지만, 점차 지구의 도구들 없이, 행성 자체를 감각으로만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졌다. 희진은 루이의 그림들이 예술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의미를 기록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언어인 그림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포기했다. 희진은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루이, 네게는.”

희진은 루이의 눈에 비친 노을의 붉은 빛을 보았다.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희진은 결코 루이가 보는 방식으로 그 풍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희진은 루이가 보는 세계를 약간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고, 기쁨을 느꼈다.

 

나는 숲을 넘어서, 지구를 넘어서, 다른 존재를 저렇게 마주할 수 있을까. 아니 지구 안에서라도, 숲에서라도,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라도 타자를 마주할 수 있을까. <숲은 생각한다>에서 시작해서 우주로까지 가보았다. 나는 이 두 책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이 책들을 통해서 어렴풋이 느껴진다. 타자를 마주하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처음의 질문은 ‘어떻게 그 남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였다. 이해하고 싶었고,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은 마음의 방향이 조금 달라졌다. ‘남자’들에 방점을 찍은 저 질문 자체가 맞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남자의 범위를 벗어나 보는 것? 모든 남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범위를 벗어나서 그저 하나의 주체로서 관계를 맺는 것. 그 정도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난 그냥 어떤 타자와 마주하게 될 때 내 세상 안에서만 타자를 해석하기 싫다. 좀 더 넓은 타자를 마주하고 싶다. 나는 그런 노력을 기꺼이 하는 사람이다.

댓글 1
  • 2022-01-03 13:52

    좀 더 넓은 타자를 마주하는 노력을 기꺼이 하는 분이라면 이미 게임 오버~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나의 해방일지>, 청년들의 서사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끝나자마자 언론매체에는 ‘해방’과 ‘추앙’을 제목으로 내세운 글들이 빼곡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반했다’, 무엇에 반했을까? 스타덤에 오른 손석구의 시크한 연기, 미정의 주옥같은 대사들, 주조연을 모두 아우르는 따뜻한 연출……. 아마도 우리는 이 드라마에서 ‘우리’를 보았을 것이고, 또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삼남매 가운데 창희와 친구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함께 일하는 편의점 점주들에게 성실한 본사 직원으로 인정받고, 연애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여자가 ‘대시’할 만큼, 창희는 근면성실하고 매력자본이 충분하다. 그러나 차가 없어서 키스한 공간이 없고, 월천만원의 수익을 내는 재테크 방법을 알아도 빚내서 투자하는 걸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돈을 모을 수 없다. ‘1원짜리’, ‘계란 흰자’, ‘유기견’, ‘견딜 수 없는 촌스러움’, ‘마음 둘 데 없는 쪽팔림’이 창희가 자신과 친구들을 호명하는 방식이다. 돈 욕심 많고 성격 파탄자에 가까운 회사 동료를 싫어하지만,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 말처럼 수준 떨어지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 같아 어떻게든 거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방법이 창희에게는 승진이었다. 차 없는 경기도 남자가 서울 여자와 연애하기 힘든 것만큼 창희의 승진도 쉽게 풀려가지 않는다. 이후 창희는 퇴사와 창업을 시도하지만 빚더미에 오르고 결국 편의점 점주로 이 빚을 갚아나간다. 드라마 속 그의 대사처럼 “태어나서 희열, 쾌락, 황홀 이런 걸 경험해본 적이 없”고 “사나이 인생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쪽팔리니냐?”는 항의처럼...
<나의 해방일지>, 청년들의 서사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끝나자마자 언론매체에는 ‘해방’과 ‘추앙’을 제목으로 내세운 글들이 빼곡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반했다’, 무엇에 반했을까? 스타덤에 오른 손석구의 시크한 연기, 미정의 주옥같은 대사들, 주조연을 모두 아우르는 따뜻한 연출……. 아마도 우리는 이 드라마에서 ‘우리’를 보았을 것이고, 또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삼남매 가운데 창희와 친구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함께 일하는 편의점 점주들에게 성실한 본사 직원으로 인정받고, 연애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여자가 ‘대시’할 만큼, 창희는 근면성실하고 매력자본이 충분하다. 그러나 차가 없어서 키스한 공간이 없고, 월천만원의 수익을 내는 재테크 방법을 알아도 빚내서 투자하는 걸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돈을 모을 수 없다. ‘1원짜리’, ‘계란 흰자’, ‘유기견’, ‘견딜 수 없는 촌스러움’, ‘마음 둘 데 없는 쪽팔림’이 창희가 자신과 친구들을 호명하는 방식이다. 돈 욕심 많고 성격 파탄자에 가까운 회사 동료를 싫어하지만,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 말처럼 수준 떨어지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 같아 어떻게든 거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방법이 창희에게는 승진이었다. 차 없는 경기도 남자가 서울 여자와 연애하기 힘든 것만큼 창희의 승진도 쉽게 풀려가지 않는다. 이후 창희는 퇴사와 창업을 시도하지만 빚더미에 오르고 결국 편의점 점주로 이 빚을 갚아나간다. 드라마 속 그의 대사처럼 “태어나서 희열, 쾌락, 황홀 이런 걸 경험해본 적이 없”고 “사나이 인생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쪽팔리니냐?”는 항의처럼...
겸목
2022.07.04 | 조회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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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인문약방
2022.01.02 | 조회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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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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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2 | 조회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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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독특한 9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천재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그런 아이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지리도 예민하고, 울음을 달고 사는, 그리고 사회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아이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기저기 검사도 많이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지능 상위 1%, 사회성 하위 1%. 한 가지를 좋아하면 몇 년 동안 좋아하는 터라, 지금은 유니코드 문자표에 푹 빠져있다. 아이는 눈 뜨자마자 생각난 듯 나에게 묻는다. “엄마, 에스페란토라는 문자를 아세요? 인공어 중에 하난데요. 제이 위에 이런 삿갓 모양이 그려져 있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든 게 괴상하게 그려놓은 꼬부랑 글씨 같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해도, 사실 나도 힘들다. 거기에 사람들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쉽게 알아채지 못해서,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보니,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를 다니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 왜 온종일 이상한 세계 여러 나라 문자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똥을 누는 것 같은 당연한 생리 현상을 그토록 무서워하는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아이 ‘되기’는 가능하기나 할까.         흰 눈 잉꼬 같은 아이를 알아간다는 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엔 아이...
나는 조금 독특한 9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천재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그런 아이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지리도 예민하고, 울음을 달고 사는, 그리고 사회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아이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기저기 검사도 많이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지능 상위 1%, 사회성 하위 1%. 한 가지를 좋아하면 몇 년 동안 좋아하는 터라, 지금은 유니코드 문자표에 푹 빠져있다. 아이는 눈 뜨자마자 생각난 듯 나에게 묻는다. “엄마, 에스페란토라는 문자를 아세요? 인공어 중에 하난데요. 제이 위에 이런 삿갓 모양이 그려져 있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든 게 괴상하게 그려놓은 꼬부랑 글씨 같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해도, 사실 나도 힘들다. 거기에 사람들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쉽게 알아채지 못해서,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보니,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를 다니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 왜 온종일 이상한 세계 여러 나라 문자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똥을 누는 것 같은 당연한 생리 현상을 그토록 무서워하는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아이 ‘되기’는 가능하기나 할까.         흰 눈 잉꼬 같은 아이를 알아간다는 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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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페미니즘, 그런 거였어?   2020년 겨울, 우리 회사 모(母)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35살의 최연소 여성 임원이 탄생했다. 2021년 여름, 그녀는 부하 직원에게 막말을 퍼부었다는 짧은 논란을 끝으로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경질되었다. 갑이 을에게 횡포를 저질렀고, 그에 따른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문득 내 시선에 다른 문제가 겹쳐 보인다. 남성 임원이 막말 따위(?)로 경질되는 건 본 적이 없다. 폭력이나 성추행 정도는 돼야 문책받는다. 특히 이 문제가 기사화되면서 여성 임원 할당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공정한 평가로 선발하지 않고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사람을 뽑아 올리니 이런 문제가 생긴단다. 그동안 여성을 위한 자리는 특별히(?) 배제되었다는 점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에서 정희진의 책을 다루던 날이었다. 모두가 사회 문제를 속 시원한 글솜씨로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녀의 글에 홀딱 반해서 왁자지껄 토론하던 중이었다. 학인 한 명이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아들을 키우다 보니 남자가 여자보다 불리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함께 노는 아이들 사이에 때리는 여아와 맞는 남아의 불공평(?)도 존재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데, 소수의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고 푸념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다른 학인의 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당하는 시대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고착된 남녀 구조가 이제 막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불편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페미니즘, 그런 거였어?   2020년 겨울, 우리 회사 모(母)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35살의 최연소 여성 임원이 탄생했다. 2021년 여름, 그녀는 부하 직원에게 막말을 퍼부었다는 짧은 논란을 끝으로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경질되었다. 갑이 을에게 횡포를 저질렀고, 그에 따른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문득 내 시선에 다른 문제가 겹쳐 보인다. 남성 임원이 막말 따위(?)로 경질되는 건 본 적이 없다. 폭력이나 성추행 정도는 돼야 문책받는다. 특히 이 문제가 기사화되면서 여성 임원 할당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공정한 평가로 선발하지 않고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사람을 뽑아 올리니 이런 문제가 생긴단다. 그동안 여성을 위한 자리는 특별히(?) 배제되었다는 점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에서 정희진의 책을 다루던 날이었다. 모두가 사회 문제를 속 시원한 글솜씨로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녀의 글에 홀딱 반해서 왁자지껄 토론하던 중이었다. 학인 한 명이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아들을 키우다 보니 남자가 여자보다 불리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함께 노는 아이들 사이에 때리는 여아와 맞는 남아의 불공평(?)도 존재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데, 소수의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고 푸념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다른 학인의 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당하는 시대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고착된 남녀 구조가 이제 막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불편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김지연
2021.12.06 | 조회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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