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양생에세이 ①] 알지 못한 채 아이를 알아가는 법 - 모로

인문약방
2022-01-0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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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독특한 9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천재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그런 아이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지리도 예민하고, 울음을 달고 사는, 그리고 사회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아이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기저기 검사도 많이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지능 상위 1%, 사회성 하위 1%. 한 가지를 좋아하면 몇 년 동안 좋아하는 터라, 지금은 유니코드 문자표에 푹 빠져있다. 아이는 눈 뜨자마자 생각난 듯 나에게 묻는다. “엄마, 에스페란토라는 문자를 아세요? 인공어 중에 하난데요. 제이 위에 이런 삿갓 모양이 그려져 있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든 게 괴상하게 그려놓은 꼬부랑 글씨 같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해도, 사실 나도 힘들다. 거기에 사람들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쉽게 알아채지 못해서,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보니,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를 다니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 왜 온종일 이상한 세계 여러 나라 문자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똥을 누는 것 같은 당연한 생리 현상을 그토록 무서워하는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아이 ‘되기’는 가능하기나 할까.

 

 

 

 

흰 눈 잉꼬 같은 아이를 알아간다는 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엔 아이 생각이 났다. 책에 따르면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호과정의 산물이다. 즉, 우리의 사고는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아이는 어떤 식으로 기호작용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 상호작용의 간극이 인간과 재규어만큼 다르다면 어떨까?

 

이 책의 소제목인 ‘알지 못한 채 알아가기’라는 말이 좋았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차리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매일 함께 하는 시간과 다양한 경험들이 쌓여서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똥을 누기가 극도로 두려웠던 이유는 생리 활동은 컴퓨터처럼 분명한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가 더 어릴 때는 불규칙적으로 배가 아픈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고, 다음에는 똥을 누는 행위에서의 괄약근 조절 -힘을 주면서 동시에 풀어야 하는 행위- 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왜 생리 현상을 위해 내가 지금 하는 재미있는 놀이 활동을 멈추어야 하는지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이와 나는 수많은 시간 –거의 5년 가까이-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때론 울고, 싸우고, 달래고, 이해시키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받아들였다. 마치 똥이 외계 생물체가 되는 양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이 그토록 지난했다.

 

 

 

루나족의 이야기에서 흰 눈 잉꼬 겁주기 모형이 등장한다. 잉꼬를 쫓아내기 위해서 잉꼬-겁주기라는 허수아비를 제작하는데,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맹금류랑은 전혀 닮지 않았다. 널빤지 두 개를 십자 모양으로 묶은 후, 빨갛고 파란 줄무늬를 어설프게 그려 넣었는데, 얼핏 보면 아이들이 만들다 만 장난감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맹금류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잉꼬들에게 맹금류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상상하는 데 있다. 잉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추측이 여러 가지 효과를 통해서 알아가는 것이다. 아이는 나에게 흰 눈 잉꼬와 같다. 한글의 원리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읽고 쓸 수 있지만, 생리 작용의 원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가르쳐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 나와 전혀 다른 사고를 하는 존재와의 간극을 시행착오와 추측을 통해서 좁혀나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시행착오, 그 속에서 갈팡질팡하기

 

 

아이가 어렸을 때는 정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유치원에 갈 5살이 되자, 나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 나와 떨어져 있는 것을 힘들어하는 터라, 시험 삼아 느티나무 도서관 옆에 있는 발도르프 어린이집의 오후반에 보냈다. 우리 집에서 거기까지 느릿느릿 걸어도 도보로 10분 남짓. 하지만 매일 거기 데려다주는데 30분, 한 시간 이상이 걸린 적도 있었다. 나는 단지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줄 알고, 다들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런 줄만 알았다. 선생님도 좋으시고, 아이들도 10명 남짓밖에 안 되는 오후반인 데다가, 일주일에 두어 번이라 여러모로 고민 끝에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다. 발도르프 교육은 기본적으로 책을 없애고 자연 위주는 놀이 활동을 많이 하는데, 책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무서운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큰 도전이었다. 아이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좋은 교육 속에 밀어 넣었으니, 그 몇 달은 정말로 전쟁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기관에 실패했다.

 

그리곤 남편 회사 어린이집에 운 좋게 당첨되었다. 나름 유명한 그 어린이집은, 새로 지은 인테리어가 아주 근사했다. 여기도 공부보다는 인성 위주의 교육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처음 몇 달간은 어린이집 밑 맥도날드에서 1분 대기조를 탔고, 그 이후에도 한 달 출석 일수 8일을 겨우 채우면서 다녔다. 나중에 알았는데, 종일 구석에 앉아서 책만 보고 있었던 날이 더 많았다고 했다. 매일 불려 다니고, 데리고 갔다 왔다, 주차장에 드러눕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렇다면 빠듯하게 공부를 시키는 영어 유치원에 보내야 할까.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지긋지긋해져서, 7살 2학기쯤에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나와 집에서 냄새나게 붙어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코로나 상황이 이어지면서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학교를 몇 번 못 갔기 때문에 거의 일 년 반 가까이 둘이 붙어있었다. 나는 미치고 팔짝 뛸 모양새였는데 아이는 ‘자기에겐 코로나가 행운과도 같다’라고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를 못 가는 것을 얼마나 행복해 하던지...

 

그때야 알았다. 아이는 정말로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거였다. 그렇다면 이때껏 내가 했던 고단한 노력은 다 헛것이었나? 어린이집이 뭐라고 그 고생을 했나.. 싶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번에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아이를 그냥 놔두기에도, 그리고 뭔가 하는 것도 매끄럽지 않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구나. 이것과 저것의 혼동 사이에서 조금씩 알아가는 것, 기호를 해석하고, 실패하고, 또다시 도전함으로써 추측하는 길.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다.

 

 

외부와 내부를 아우르는 막대기가 된다는 것

 

이 책에는 퍼스펙티브주의라는 말도 나온다. 생소한 이 단어는 각자의 ‘자기’들 간의 유사성을 발견함으로써 다른 자기에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루나족은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 이름 장난 같은 걸 하는데, 예를 들어 내 이름이 친구 남편의 이름과 같을 때, 나에게 “자기~”라고 부르는 등의 농담을 나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다수의 퍼스펙티브를 아우르는 시야를 찾아낸다. 루나족 신화에서 영웅과 재규어가 지붕을 보수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웅은 지붕 위에 올라가 구멍을 막으려고 하지만, 밖에서는 구멍을 찾기가 힘들다. 반면 건물 안에 있는 재규어는 빛이 새어 나오는 부분을 통해 구멍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너무 높이 있어서 막기는 힘들다. 이때 내부에서 외부로 막대기를 끼워 넣음으로써 내부와 외부의 퍼스펙티브를 정렬한다. 막대기를 통해 양쪽이 다 보이게 되는 것이다. 영웅은 구멍을 막은 뒤 문을 닫아 재규어를 가둔다. 막대기를 꽂는 행위가 재규어에게는 예기치 못한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베이트슨의 이중기술과도 연결되는데, 두 눈을 예로 들었을 때,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보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그사이에 어떤 유사성을 인식하고 차이를 비교하는 이중기술을 발휘함으로써 전체를 포괄하는 인식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시간, 깊이에의 지각이 그 사이에서 창발한다. 사회성 부족과 영재성을 잇는 특징 사이에서, 어떤 차이점과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속에 막대기를 찔러넣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을까.

 

 

처음에 아이가 발달상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여러 기관을 찾았고, 거기서 뜻밖의 영재라는 개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기뻤다. 아이가 모자란다는 것보다, 넘친다는 말은 얼마나 달콤한 후시딘인가. 고슴도치 엄마는 한동안 이 프레임에 빠져서 아이를 해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해석 또한 결코 적절하지 못했다. 머리가 좋은 것이 꼭 학교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꼭 무언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중요한 것은 영재냐 사회성 부족이냐가 아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의사소통하고 해석하느냐에 달렸다. 상징으로써 아이를 바라보는 인식의 한계를 깨고, 그것을 넘어선 기호작용으로써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까? 나를 거쳐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내가 아이의 막대기가 되어 줄 수 있을까?

 

 

해피엔딩이 아닌 진행형

 

 

하지만 아이는 내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서도 자랐다. 1학년 때만 해도 친구들과 인사 한 번 하지 않았는데, 이젠 가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오늘만 해도 담임 선생님께 기분 좋은 문자가 왔다. 점심 먹고 친구랑 교실 뒤편에서 알까기를 하고 있다며 동영상도 보내주셨다. 마스크 너머로 신난 눈빛이 즐거워 보였다. 사회성이 서로 부딪혀가면서 생긴다고만 생각했지만, 꼭 그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안다. 머리로써 먼저 이해하고 그다음에 행동이 나오는 아이도 있다. 나와 지지고 볶는 시간 역시 꼭 도태된 시간만은 아니었다. 둘이 나누는 시간이 충분해지니 비로소 그다음으로 한 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과 저것을 아우르는 막대기 역할을 꼭 나 혼자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조금 벗어났다. 아이는 다행히 선생님 복이 많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아이를 살펴봐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한다. 지금 만난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아이의 일들을 나에게 알려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교실 안에서 선생님만의 ‘막대기’가 되어 주고자 고민하고, 아이들을 연결한다. 언젠가는 아이가 그런 다양한 막대기들을 딛고 자기의 세상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됨을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아직도 진행형이다. 얼마 전에도 학교에 제법 가는 거 같아 방과후 학교를 신청했다가 장렬하게 실패했다. 오랜만에 학교에서 울고 불어서 방과 후 선생님께 소환되었다. 학교에 안 간다고 드러눕는 날도 여전히 많다. 그럴 때는 정해진 방법이 없다. 어떤 날은 억지로 보내고, 어떤 날은 학교를 빼고 둘이 커피숍에 가서 빵이랑 음료를 먹기도 하고, 책방에 들어서 책을 읽기도 한다. 아니면 그냥 집에서 뒹굴뒹굴한다. 그러다 보면 내일 또 밖에 나가겠지. 지금 나의 꿈(?)은 태권도 학원에 보내는 거다. 소박한 꿈을 꾸고, 아이와 조율하면서 그렇게 나는 매일매일 시행착오 중이다.

댓글 3
  • 2022-01-03 09:17

    지금도 모르겠는 큰 아이 키울 때 생각이 나네요. 늘 한 켠 막막했었는데 저 우주를 다 이해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문득 알게 되면서 편해졌어요^^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바로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이 제 목표였는데 이제 성년이 되어 제가 자주 도와달라고 하네요 ㅎㅎ

    모로님의 작은 꿈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시길 선배맘으로 응원할게요.

  • 2022-01-03 09:26

    이 글을 읽다보니 저도 처음 모로님을 꿈지락에서 봤을 때부터, 문탁 게시판의 글을 통해 만나기까지 알지 못한채로 알아가고 있는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 2022-01-03 10:56

    ‘시행착오’야말로 진정한 기호작용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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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 청년들의 서사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끝나자마자 언론매체에는 ‘해방’과 ‘추앙’을 제목으로 내세운 글들이 빼곡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반했다’, 무엇에 반했을까? 스타덤에 오른 손석구의 시크한 연기, 미정의 주옥같은 대사들, 주조연을 모두 아우르는 따뜻한 연출……. 아마도 우리는 이 드라마에서 ‘우리’를 보았을 것이고, 또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삼남매 가운데 창희와 친구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함께 일하는 편의점 점주들에게 성실한 본사 직원으로 인정받고, 연애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여자가 ‘대시’할 만큼, 창희는 근면성실하고 매력자본이 충분하다. 그러나 차가 없어서 키스한 공간이 없고, 월천만원의 수익을 내는 재테크 방법을 알아도 빚내서 투자하는 걸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돈을 모을 수 없다. ‘1원짜리’, ‘계란 흰자’, ‘유기견’, ‘견딜 수 없는 촌스러움’, ‘마음 둘 데 없는 쪽팔림’이 창희가 자신과 친구들을 호명하는 방식이다. 돈 욕심 많고 성격 파탄자에 가까운 회사 동료를 싫어하지만,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 말처럼 수준 떨어지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 같아 어떻게든 거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방법이 창희에게는 승진이었다. 차 없는 경기도 남자가 서울 여자와 연애하기 힘든 것만큼 창희의 승진도 쉽게 풀려가지 않는다. 이후 창희는 퇴사와 창업을 시도하지만 빚더미에 오르고 결국 편의점 점주로 이 빚을 갚아나간다. 드라마 속 그의 대사처럼 “태어나서 희열, 쾌락, 황홀 이런 걸 경험해본 적이 없”고 “사나이 인생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쪽팔리니냐?”는 항의처럼...
<나의 해방일지>, 청년들의 서사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끝나자마자 언론매체에는 ‘해방’과 ‘추앙’을 제목으로 내세운 글들이 빼곡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반했다’, 무엇에 반했을까? 스타덤에 오른 손석구의 시크한 연기, 미정의 주옥같은 대사들, 주조연을 모두 아우르는 따뜻한 연출……. 아마도 우리는 이 드라마에서 ‘우리’를 보았을 것이고, 또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삼남매 가운데 창희와 친구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함께 일하는 편의점 점주들에게 성실한 본사 직원으로 인정받고, 연애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여자가 ‘대시’할 만큼, 창희는 근면성실하고 매력자본이 충분하다. 그러나 차가 없어서 키스한 공간이 없고, 월천만원의 수익을 내는 재테크 방법을 알아도 빚내서 투자하는 걸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돈을 모을 수 없다. ‘1원짜리’, ‘계란 흰자’, ‘유기견’, ‘견딜 수 없는 촌스러움’, ‘마음 둘 데 없는 쪽팔림’이 창희가 자신과 친구들을 호명하는 방식이다. 돈 욕심 많고 성격 파탄자에 가까운 회사 동료를 싫어하지만,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 말처럼 수준 떨어지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 같아 어떻게든 거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방법이 창희에게는 승진이었다. 차 없는 경기도 남자가 서울 여자와 연애하기 힘든 것만큼 창희의 승진도 쉽게 풀려가지 않는다. 이후 창희는 퇴사와 창업을 시도하지만 빚더미에 오르고 결국 편의점 점주로 이 빚을 갚아나간다. 드라마 속 그의 대사처럼 “태어나서 희열, 쾌락, 황홀 이런 걸 경험해본 적이 없”고 “사나이 인생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쪽팔리니냐?”는 항의처럼...
겸목
2022.07.04 | 조회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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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인문약방
2022.01.02 | 조회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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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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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나는 조금 독특한 9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천재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그런 아이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지리도 예민하고, 울음을 달고 사는, 그리고 사회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아이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기저기 검사도 많이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지능 상위 1%, 사회성 하위 1%. 한 가지를 좋아하면 몇 년 동안 좋아하는 터라, 지금은 유니코드 문자표에 푹 빠져있다. 아이는 눈 뜨자마자 생각난 듯 나에게 묻는다. “엄마, 에스페란토라는 문자를 아세요? 인공어 중에 하난데요. 제이 위에 이런 삿갓 모양이 그려져 있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든 게 괴상하게 그려놓은 꼬부랑 글씨 같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해도, 사실 나도 힘들다. 거기에 사람들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쉽게 알아채지 못해서,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보니,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를 다니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 왜 온종일 이상한 세계 여러 나라 문자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똥을 누는 것 같은 당연한 생리 현상을 그토록 무서워하는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아이 ‘되기’는 가능하기나 할까.         흰 눈 잉꼬 같은 아이를 알아간다는 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엔 아이...
나는 조금 독특한 9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천재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그런 아이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지리도 예민하고, 울음을 달고 사는, 그리고 사회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아이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기저기 검사도 많이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지능 상위 1%, 사회성 하위 1%. 한 가지를 좋아하면 몇 년 동안 좋아하는 터라, 지금은 유니코드 문자표에 푹 빠져있다. 아이는 눈 뜨자마자 생각난 듯 나에게 묻는다. “엄마, 에스페란토라는 문자를 아세요? 인공어 중에 하난데요. 제이 위에 이런 삿갓 모양이 그려져 있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든 게 괴상하게 그려놓은 꼬부랑 글씨 같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해도, 사실 나도 힘들다. 거기에 사람들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쉽게 알아채지 못해서,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보니,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를 다니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 왜 온종일 이상한 세계 여러 나라 문자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똥을 누는 것 같은 당연한 생리 현상을 그토록 무서워하는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아이 ‘되기’는 가능하기나 할까.         흰 눈 잉꼬 같은 아이를 알아간다는 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엔 아이...
인문약방
2022.01.02 | 조회 262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페미니즘, 그런 거였어?   2020년 겨울, 우리 회사 모(母)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35살의 최연소 여성 임원이 탄생했다. 2021년 여름, 그녀는 부하 직원에게 막말을 퍼부었다는 짧은 논란을 끝으로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경질되었다. 갑이 을에게 횡포를 저질렀고, 그에 따른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문득 내 시선에 다른 문제가 겹쳐 보인다. 남성 임원이 막말 따위(?)로 경질되는 건 본 적이 없다. 폭력이나 성추행 정도는 돼야 문책받는다. 특히 이 문제가 기사화되면서 여성 임원 할당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공정한 평가로 선발하지 않고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사람을 뽑아 올리니 이런 문제가 생긴단다. 그동안 여성을 위한 자리는 특별히(?) 배제되었다는 점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에서 정희진의 책을 다루던 날이었다. 모두가 사회 문제를 속 시원한 글솜씨로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녀의 글에 홀딱 반해서 왁자지껄 토론하던 중이었다. 학인 한 명이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아들을 키우다 보니 남자가 여자보다 불리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함께 노는 아이들 사이에 때리는 여아와 맞는 남아의 불공평(?)도 존재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데, 소수의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고 푸념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다른 학인의 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당하는 시대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고착된 남녀 구조가 이제 막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불편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페미니즘, 그런 거였어?   2020년 겨울, 우리 회사 모(母)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35살의 최연소 여성 임원이 탄생했다. 2021년 여름, 그녀는 부하 직원에게 막말을 퍼부었다는 짧은 논란을 끝으로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경질되었다. 갑이 을에게 횡포를 저질렀고, 그에 따른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문득 내 시선에 다른 문제가 겹쳐 보인다. 남성 임원이 막말 따위(?)로 경질되는 건 본 적이 없다. 폭력이나 성추행 정도는 돼야 문책받는다. 특히 이 문제가 기사화되면서 여성 임원 할당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공정한 평가로 선발하지 않고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사람을 뽑아 올리니 이런 문제가 생긴단다. 그동안 여성을 위한 자리는 특별히(?) 배제되었다는 점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에서 정희진의 책을 다루던 날이었다. 모두가 사회 문제를 속 시원한 글솜씨로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녀의 글에 홀딱 반해서 왁자지껄 토론하던 중이었다. 학인 한 명이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아들을 키우다 보니 남자가 여자보다 불리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함께 노는 아이들 사이에 때리는 여아와 맞는 남아의 불공평(?)도 존재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데, 소수의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고 푸념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다른 학인의 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당하는 시대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고착된 남녀 구조가 이제 막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불편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김지연
2021.12.06 | 조회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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