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14회] 더욱 이롭게 되는 길, 풍뢰익(風雷益)
봄날
2024-03-0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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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유의해서 읽어보면, 흐르는 부가 흘러서 닿는 지점이 다르고, 그 지점에서 부의 성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익괘에서는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 부가 널리 백성에게 미치는 반면, 손괘에서는 아래에 있는 것을 (윗자리에 있는)개인이 취한다. 같은 부라고 하더라도 익괘에서는 공적(公的)인 부(富)로, 손괘에서는 사적(私的)인 부(富)로 변하는 것이다. 이같은 공적인 부와 사적인 부를 주역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주역에서 덜어내거나 빼는 것은 양이 음으로 변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보태거나 더하는 것은 음이 양으로 변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손괘는 하괘의 양효가 상괘로 올라가고, 익괘는 상괘의 양효가 아래로 내려간 것으로 본다. 이렇게 음양이 위아래로 이동하면서 역동적인 부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나, 위에서 덜어 아래에 더하나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는 것인데, 하나의 괘 안에서 더하고 빼는 것이니 어떻게 손익을 따질 수 있냐는 질문이 생긴다. 하지만 이천의 ‘성(城)을 쌓는 비유’를 보면 주역이 말하는 손익의 개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익(益)이 위의 흙을 덜어 아래에 보탬으로써 기초를 두텁게 해 성의 위아래가 모두 안정되고 튼튼하게 되는 반면, 손(損)은 아래의 것을 빼서 위를 더 높여서 (성이)위태롭고 떨어지기 쉬운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같은 크기의 부가 어느 방향으로 흐르냐에 따라 그 쓰임이 공(公)과 사(私)로 구분되고, 공적으로 쓰이는 부는 마치 성을 쌓을 때 기초를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것같은 효용이 있다는 것을 주역은 명쾌하게 설명한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익괘에서 부가 흐르는 방향은 위에서 아래로, 즉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더구나 익괘를 구성하고 있는 물상을 볼 때 이러한 부의 유동은 더욱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바람과 우레가 만나면
익괘의 물상은 바람과 우레이다. 아래에 우레가 진동하고 그 위에 바람이 있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바람이 맹렬하면 우레가 빠르고, 우레가 격렬하면 바람이 거세어져 서로 그 에너지가 더해지므로 이것을 익(益)의 이미지로 취한 것이다. 익(益)이라는 글자는 그릇(皿)위로 물(水)이 흘러넘치는 모습을 표현하는 회의문자이기도 하다. 바람이 불고 우레가 치면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대지라는 그릇에 담긴 만물이 풍요로워진다. 또한 우레를 나타내는 하괘인 진괘와 바람을 뜻하는 상괘인 손괘는 각각 동쪽과 동남쪽의 방향에 배치되어 있고 오행으로도 나무(木)에 배속되어 있으므로 봄에 생동하는 나무의 기운이 더욱 풍성해진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더하다’ ‘유익하다’ ‘넉넉해지다’는 뜻의 익괘가 구성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감지하는 것은 첫 번째는 움직임이 세다는 것, 두 번째는 뭔가 보탬(플러스)이 된다는 것이다. 익괘의 괘사는 그 두 가지의 의미를 그대로 표현한다.
“익괘는 나아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롭고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益 利有攸往 利涉大川).”
‘리유유왕(利有攸往)’은 움직여 실행함으로써 이로움이 생긴다는 뜻으로 주역의 단골 표현문구이다. 또한 ‘리섭대천(利涉大川)’은 뭔가 큰 일을 하는 것에 이롭다는 뜻으로, 이 문장 또한 주역에 자주 등장한다. 즉 익괘의 물상에서 보이는 강렬한 에너지는 큰 일을 하는데 쓰이고, 그 효과 역시 아주 크니, 익괘의 때는 부단히 큰일을 마주하여 움직이고 실행하는 것이 덕목이 되는 때이다. 괘사를 더욱 상세하게 풀어주는 단전에서는 이렇게 위에서 덜어 아래에 더함으로써 생겨나는 ‘이로움’을 ‘천지의 공(天地之功)’이라고 말한다. 즉 하늘이 베풀고 땅이 그것을 받아 만물을 낳으니 인간을 비롯한 만물이 이 땅에서 태어나고 살아간다.
고대 신분제 사회에서 만들어진 주역의 괘는 상괘는 윗사람, 하괘는 아랫사람이라는 배치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같은 구도를 손괘와 익괘에 적용해보면, 경제적인 관점의 부(富)는 손괘에서는 하괘의 아랫사람, 즉 백성들이 내는 세금으로 생각할 수 있고, 익괘에서는 윗사람들이 백성들에 펴는 복지정책, 은택 같은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구도를 현대에 그대로 적용해서 위정자들의 시혜성 복지로 보는 것은 익괘를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익괘는 오히려 사적인 부의 축적이 당연시되는 현대에 더 강한 메시지를 준다. ‘천지의 베품’이라는 개념은 이미 ‘사적으로 전용되는 부’에서 벗어나 사회구성원들이 만들어 내는 ‘공통의 부(富)’를 가리킨다. 나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익괘의 역동성은 공통의 부의 ‘크기’보다, 부의 유동에 따라 부수적으로(자연스럽게) 따라나오는 (어쩌면 더 중요한)관계의 풍요로움을 위해 제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간에 자신의 돈이나 재화를 덜어 공통의 부에 보태는 사람들에게, 익괘는 그렇게 함으로써 구축되는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풍요로워지는지에 대한 영감을 제시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길하다
여기서 생겨나는 관계성은 상하 구분없이 더불어 호응하고 믿는 관계성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 즉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는 좋은 관계가 쉽게 형성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주역은 낙관적이고 아름다운 휴먼스토리가 아니다. 익괘의 더함과 이로움의 결과는, 사회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좋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다.
“바람과 우레가 익(益)이니, 군자가 보고서 좋은 것(善)을 보면 옮겨가고, 허물이 있으면 (즉시)고친다.”(익괘의 대상전)
이때 ‘좋은 것’이란 어떤 것일까. 상괘인 손괘는 ‘겸손하다’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위에서 아래에 베풀면서도 그 태도는 늘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것은 곧 좋은 방향, 올바른 방향을 뜻하는 것으로, 덜어내고 보태주는 쪽이나 더해서 받는 쪽이나 상호간에 기쁨이 넘치는 쪽이 바로 ‘좋은 방향’일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늘 좋은 방향으로 익의 도(道)를 쓰는 것이 중요하며, 군자도 인간이므로 때로 허물이 생길 때가 있지만 그것을 즉시 고치는 태도가 중요하다. 베푸는 쪽이 ‘시혜’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베풀 때, 아랫사람들은 기뻐할 것이고, 사회 전체의 믿음과 기쁨이 커지는 관계로 나아간다. 익괘의 각 효들은 이미 기본적으로 상하간의 조응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상괘와 하괘의 각 효들이 음-양, 혹은 양-음으로 짝지워져 있으므로, 상괘가 기꺼이 자신을 덜어 아래에 보태면 하괘의 주인공들 역시 기쁨으로 화답하도록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익괘는 괘사 뿐 아니라 상구를 제외한 모든 효사에 ‘길(吉)하다’거나 ‘중도를 행한다(中行)’는 표현이 들어있다. 그만큼 상하의 호응이 원만하고 순조로워 보인다. 상괘의 선행(善行)이 이행되는 데 따라 하괘도 이에 기쁘게 응한다. 이처럼 좋은 방향으로의 ‘부의 흐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길하다. 이때 흐르는 부가 ‘공통의 부(富)’임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도 좋지만 더욱 좋은 방향으로
입춘이 지났지만 여전히 쌀쌀했던 겨울날, 문탁네트워크와 마을공유지파지사유, 인문약방의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길위기금’이라는, 청년들의 자립과 활동을 지원하는 작은 금고에 관해, 새해의 활동과 계획을 나누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기금의 형성은 친구들의 자발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지며, 기금의 지출도 공통의 ‘느슨한 규칙’ 정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회의 공지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많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적지않은 돈이 청년 활동비나 학비, 생활보조비 등에 쓰였다는 것에 놀랐다. 그만큼의 돈을 우리가 함께 마련해왔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회의를 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하나는 기금에 대한 친구들의 관심과 애정이 이전에 비해 좀 덜한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였다. 또 하나는 정작 기금을 쓰는 주체들이 기금을 쓰려면 망설여지거나 뭔가 기금 사용에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것이 있다는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기금을 일종의 ‘공통의 부’라고 할 때, 잘 흘러야 하는 부가 언젠가부터, 어딘가에서부터 흐름이 무뎌지고 있다는 신호로 본 것이다. 기금이 ‘시혜’가 되지 않고 ‘선물’로 잘 쓰일 수 있는 방법을 나누었고, 돈을 내는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짐에 따라 기금의 통장잔고가 줄어들고 있는데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나는 이 과정이 익괘의 상전에서 말하는 ‘군자가 쓰는 익(益)의 도(道)’를 실천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여유가 사회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자기의 것을 덜어 보태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책무이다. 또한 돈을 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즐겁게 호응하는 관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결론은, 지금까지도 길위기금이 잘 운영되어 왔지만, 더욱 좋은 방향으로 기금이 잘 흐르도록 함께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유동하는 부와 함께 더욱 두터워지고 즐거워지는 관계의 확장, 주역이 말하는 익괘의 세상은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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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특히 "끊임없이 유동하는 부와 함께 더욱 두터워지고 즐거워지는 관계의 확장, 주역이 말하는 익괘의 세상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마지막 문장이 화창한 봄날의 온기처럼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상하 구분없이 더불어 호응하고 믿는 관계성'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오네요.
길위기금도 이런 관계성으로 지금까지 잘 왔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바람과 우레처럼 서로 시너지를 내는 관계가 쭈~욱 되기를...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해요. 공통의 부에 대해 다시 곱씹어보게 되네요^^
익괘의 역동성은 공통의 부의 ‘크기’보다, 부의 유동에 따라 부수적으로(자연스럽게) 따라나오는 (어쩌면 더 중요한)관계의 풍요로움을 위해 제시되고 있다는 점, 기억할게요. 주역 재밌어요^^
길위기금이 서로에게 보탬이 되는 관계의 풍요로움으로 작동하기 위해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보겠습니다. 많관부!!!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