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31회]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청량리
2024-02-19 01:24
184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이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처드를 중심으로 영화를 읽어나가면 영화의 제목이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라 왜 ‘디 아워스(hours)’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흐름을 바꿔 읽어보면 어떨까? 시간 순서대로 흐르는 ‘버지니아 – 로라 – 클라리사 – 버지니아’의 구조에서, 앞부분을 연결되는 맨 뒤로 배치하면 로라 클라리사 버지니아의 흐름이 된다.

 

 

01 로라 × 리처드

신해철의 노래가사처럼 로라는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나에게 쓰는 편지, 1991)’을 모두 갖춘 미국 중산층 집안의 아내이다. ‘남편들은 그런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 속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나, 그녀는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혼자 속으로 삭인다.

누군가와의 어떤 관계 속에서 ‘착하다’는 것이 꼭 ‘좋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몸이 안 좋은 로라 대신 아들의 아침을 챙기는 ‘착한’ 남편 댄은 그런 의미에서 ‘악하진’ 않지만, 로라에게는 ‘나쁜’ 사람인지도 모른다. 댄은 로라가 읽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서 공감하지 않거나 못한다. 화목한 가정이 목표인 댄은 ‘악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것이 왜 로라의 숨통을 조이는지, 그래서 자살이나 가출로 이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착함’은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나쁨’이 되기도 한다.

 

 

여하튼 로라 역시 남편의 생일파티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구색을 갖추려고 그저 생일 케이크를 굽는 것뿐이다. 눈치가 빤한 아들 리처드도 이미 알고 있다. 사실 엄마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계획도 없다는 걸. 그리고 둘째를 임신 중이지만, 엄마는 이웃집에 사는 부인 ‘키티’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도 리처드는 알고 있다. 남편이 출근 후, 키티가 로라를 찾아온다. 로라, 우리집 개 밥 좀 줘. 그 말 하려고 왔어? 음....사실 자궁에서 뭔가 자라고 있대. 로라는 걱정마라며, 괜찮다고 키티를 안아주며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키티가 병원으로 떠나고, 리처드는 거실에서 불안한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 뭐, 왜? 어쩌라고?? 로라는 리처드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쏘아붙이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한참을 누워 있던 로라는 불현듯 일어나 수면제를 모두 챙기고는 리처드에게 말한다. 우리 다시 케이크 만들자.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거야. 아빠가 오기 전에 할 일이 생겼어. 리처드는 엄마의 변덕을 이해할 순 없지만, 로라가 하고 싶은 걸 같이 하기 위해 식탁으로 온다.

케이크를 다 만들고 나서, 잠깐 있다 올 것처럼 옆집 아줌마에게 리처드를 맡기고 떠나는 로라. 그런데 엄마가 흐느끼는 모습에 리처드는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엄마!!!! 엄마!!!! 뒤늦게 리처드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쫓아가지만 로라의 차는 그대로 멀어진다. 리처드는 엄마에게 버림받았음을 직감한다.

 

 

영화는 로라의 모습을 버지니아 혹은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으로 이어지도록 여러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오버랩’시키면서 보여준다. 버지니아가 자신의 세계 혹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로라 역시 버지니아와 댈러웨이 부인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그들과 ‘공명’한다.

로라는 급하게 차를 몰고 어느 호텔방으로 들어간다. 약을 꺼내놓고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가 로라는 침대에 눕는다. 영화의 첫 장면, 버지니아의 몸이 강물에 잠겨 흘러가듯, 로라가 누운 침대 주변으로 순식간에 (강)물이 차오르며 로라를 집어 삼킨다.

바로 다음 장면, 버지니아는 소설을 구상하며 혼자 중얼거린다. 그래, 그녀가 죽을 필요는 없겠어. 대신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할 것 같아. 그러자 로라는 마치 소설의 주인공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울부짖는다. “안 돼, 도저히 못 하겠어!!” 결국 로라는 집으로 돌아간다. 둘째가 태어나면 집을 나가겠다고 다짐하면서.

 

 

02 클라리사 × 리처드

리처드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차로 떠났던 그 시간에 갇혀 살고있다. 게다가 리처드의 동성애적 성향 역시 엄마로부터 영향 받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처드는 에이즈에 걸렸고, 그의 남자친구는 떠난 지 오래다. 뉴욕의 허름한 건물 꼭대기 자신의 방에 갇혀 사는 리처드를 방문하는 유일한 사람은 옛 연인 클라리사다. 허나 클라리사도 이제는 자신의 여자친구와 동거 중이다.

오늘은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가 있는 날이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처럼 “직접 꽃을 사와야겠어”라고 클라리사는 말했다. 소설의 주인공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이름이 같은 클라리사 본의 별명은 그래서 ‘댈러웨이 부인’이다.

오래 전 리처드와 하룻밤을 보낸 해변의 어느 아침, 리처드가 클라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인사한다. “안녕, 댈러웨이 부인” 클라리사는 고백한다. 그때 이후로 리처드에게 갇혀 있었다고. 리처드는 엄마가 떠났던 시간에 붙잡혀 있고, 클라리사는 리처드와 함께 했던 어느 아침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한다. 나에게 커다란 고통(리처드) 또는 행복의 전부인 시간(클라리사) 속에 그들은 멈춰 있다.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이지만, 실상 우리의 시간은 째깍째깍 초침을 따라 흐르지 않는다.

 

 

리처드가 자살하기 전 흘리는 눈물은 엄마 로라에게 갇혀 지낸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를 떠나야만 했던 엄마를 뒤늦게 이해하게 된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였을까? 클라리사가 자신에게 묶여있지 않기를 바라는 리처드는 결국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려고 한다. “당신은 늘 자부심과 용기를 가장하며, 침묵을 덮으려고 항상 파티를 열지. 내가 죽으면 당신은 행복해 할까?" 리처드는 클라리사에게 묻는다.

“글도 제대로 못 쓰는 내 꼴 좀 봐요. 그동안 내 삶과 행복을 지켜주느라 그댄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참아내며 모두가 날 떠나도 끝까지 내 곁을 지켜준 당신. 이제 당신을 놔줘야 할 것 같군요. 그래도 우리 두 사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잖아요.” 이건 극 중 버지니아가 남편 레너드에게 쓴 편지 내용 중 일부다. 그러나 리처드가 클라리사에게 남기는 글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03 버지니아 × 리처드

영화 속에서 리처드는 버지니아와 함께 결국 자살에 이르는 인물로 등장한다. “나도 알아요. 내가 당신 삶을 망치고 있다는 걸. 내 인생의 행복은 당신 덕분이지만, 살아가며 더 이상 당신 삶을 망칠 수 없어요.” 당신 덕분에 나는 살아가지만, 나의 존재로 당신이 계속 불행해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버지니아와 리처드를 보면 결국 삶의 부조리는 외부적 조건들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마주하게 되는 걸까?

 

 

버지니아의 남편 레너드가 어느 날 묻는다. 왜 당신의 소설에서는 누군가 꼭 죽어야 하냐고. 그러자 버지니아는 그래야 나머지 사람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고, 그래서 시인이 먼저 죽는다고 말한다. 1941년 남편과 언니 앞으로 유서를 남기고 버지니아는 우즈 강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유서에서 버지니아는 이렇게 고백한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삶의 부조리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시인은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시인의 시간(hours)은 죽음으로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이들에게 질문으로 남는다. 때문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부조리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자살은 단 하나의 철학적 문제”인지도 모른다.

 

리처드는 말한다. “클라리사, 당신 삶의 의미를 나한테서 찾진 말아요.” 버지니아의 죽음이 로라에게 흐르듯,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죽음을 통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일종의 ‘의식의 시간(hours)’을 갖게 된다. 그것은 버지니아가 말하는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알게 되는 삶의 의미를 찾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죽은 시인의 ‘해방일지’는 지금도 계속 써지고 있다.

 

댓글 5
  • 2024-02-19 09:59

    '죽은 시인'이 들어가면 명작이 되나봐요
    띠우샘과 읽었을 때는 자신을 마주하라고,
    청량리샘의 글을 함께 읽으니 마주하고서 과감이 싸워가라
    처럼 느껴지네용

  • 2024-02-19 15:31

    삶의 부조리를 견디지 못하고 선택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됨요, 둘이 한 영화에 대해 쓰는데 다른 문장들로 엮이네요~~ 신박한 기획^^ 연재 재개를 응원~~

  • 2024-02-19 15:47

    머무르는 시간으로
    알게되는 것이 있는거 같네요.
    오늘은 ‘하나의 영화, 두개의 시선’에
    잠시 머물러볼께요. 고맙습니다.

  • 2024-02-20 15:31

    the hours, the years
    모두 자막에서는 '세월'로 번역되었을거에요.
    원소설이 처음 우리나라에 번역되었을때도 <세월>이었대요.

    누군가는 버티고, 누군가는 사랑하고, 누군가는 삶대신 죽음을 택하고, 누군가는 죽음 속에서 삶을 택하고....
    결국엔 그 시간들이 세월이 우리를 삼키겠죠. 별 수 없어요. 최선을 다해 존재의 그 아가리를, 심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수밖에^^

    하나의 영화, 두개의 시선. 기획 좋네요

  • 2024-02-25 13:44

    리처드를 중심에 놓고 보다니!! 생각해 본 적 없는 시선이라서 놀랐어요.ㅎ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띠우
2024.04.28 | 조회 15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6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21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28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314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