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가 양생이다> 8회 원칙에 매인 '경금'의 공동체 밥상 입성기

기린
2021-04-19 02:51
567
  1. 공동체 밥상을 책임지겠어!

 

 2017년 말 워크샵에서 다음 해의 공동체 주방을 운영하는 매니저 활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같이 할 파트너를 찾던 어느 날, 공부방에서 당시 공동체 주방이었던 주술밥상 매니저와 마주쳤다. 회계 등등의 인수인계 잡무와 내년 운영 계획 등이 오가는데 분위기가 점점 예민해졌다. 결국은 언성이 높아졌다.

 

친구: 그럼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그동안 여섯이나 했다는 거야?!

나: 같이 하겠다는 사람이 없잖아! 그럼 혼자서라도 해야지!

 

우리 둘은 씩씩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친구가 다시 말을 걸었고 함께 차를 마시면서 서로의 입장에 대해 이야기 했다. 친구는 기존의 매니저 여섯 중에 할 수 있는 사람을 좀 더 물색해보자고 했다. 이미 그들의 의사를 타진해 보았던 나는 다들 부담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우리는 그날 나와 함께 공동체 밥상을 맡을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는 상황, 그것을 어떻게 봐야할지 적절한 말도 찾지 못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2016년 공동체 밥상이 파지사유로 내려오면서 ‘주술밥상’ 시대가 열렸다. 주술밥상은 공동체의 밥상과 단품요리를 만드는 찬방을 함께 운영해 보겠다고 했다. 음식을 잘 하는 친구들과 기획력 있는 친구까지 합심해서 예술작품 같은 요리로 대박을 내보자는 야심찬 밥상의 출현이었다. 그리고 2018년 봄 나는 그 주방을 운영하는 주체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 과정에서 저런 사단이 났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잘 해보자는 마음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날 우리는 제각각 마음이 좀 상했다. 나는 그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새삼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 혼자서라도 공동체 밥상을 책임지겠어!

 

 

 일인가구인 나는 공동체 밥상에서 대부분의 끼니를 해결했다. 그러다보니 채 소화시키지 못한 텍스트의 어려운 문장을 공동체의 밥상에서 소화시키는 때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선물 세미나에서 ‘선물’이 우리가 흔히 주고받는 선물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선물이 선물이지 도대체 뭔 소린가 싶었다. 그러다 주방으로 들어오는 선물을 기록해두는 ‘선물의 노래’ 게시판을 보게 되었다. 쌀은 기본적으로 선물로 해결 되었다. 여행을 다녀온 회원들은 산지 특산물을 주방 선물로 들고 왔다. 공동체에서 축하할 일이 있을 때 특식이라도 만들게 되면 그 재료는 대부분 선물로 충당되었다. 집에서 해결하기에 많은 양은 공동체 주방으로 흘러왔다. 그렇게 들어오는 선물들 덕분에 이 천 원으로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었고 주방 회계는 대부분 흑자로 마감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선물이 일 대 일로 교환되지 않고 밥상을 통해 공동체 전체 구성원들 사이로 순환되는 곳, 그 순환으로 공동체의 안녕이 지속 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 밥상을 지속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내가 주방의 매니저로 나서는데 한 몫을 했다.

 

2.곡진함에 대하여

 

 혼자라도 하겠다고 우겼지만 정말 그렇게 될까 걱정이 되기도 할 즈음, 주술밥상에서 매니저로 참여했던 다른 친구가 같이 하겠다고 나섰다. 우리 둘 이름에 ‘은’자가 있다고 옛날 가수인 은방울 자매로 하라는 농담이 현실이 되어 ‘은방울 키친’으로 명명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우선 매일 아침 주방으로 출근하면서 몸이 공간과 익숙해지도록 길을 들였다. 전날 말려둔 그릇들을 정리하고 흩어져 있는 주방집기들의 자리를 정해 수납했다. 주방 등도 LED 등으로 바꾸었다. 한층 밝아진 주방에서 밥당번들이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한 마디씩들 하니 어깨가 으쓱해졌다. 밥당번을 하러 온 친구에게 냉장고에 박혀 있던 탄 밥이 드문드문 섞인 찬밥의 처치곤란을 하소연했다. 그 밥이 점심 밥상에 까만 점이 맛있게 박힌 주먹밥으로 재탄생했을 때 정말 기뻤다. 매니저의 고충을 귀담아 들어준 친구의 마음도 그렇고 공동체 밥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순환의 진면목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기』를 읽을 때 칠십 편의 열전에서 느낀 감흥을 살려 홈피에 매달 ‘밥상열전’을 썼다. 한 친구가 주방에서 쓰는 무쇠 압력솥이 너무 무겁다고 적당한 새 압력솥을 선물했다. 그 솥으로 당시 주역을 공부하던 이문서당 2분기 쫑특식에서 사십인 분의 밥을 해내었다. 그 날의 사십인 분의 비빔밥을 먹은 이문서당 동학들은 어려운 주역 공부의 시름을 위로받았다.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청년들이 여름에 인문학 캠프를 열었다. 그 때 공동체 밥상에서 다섯 끼를 차려냈다. 닭볶음, 바지락스파게티, 도토리묵밥, 야채비빔밥, 닭가슴살너겟, 떡볶이 등등이었다. 밥당번으로 나선 친구들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활약으로 가능해진 밥상이었다. 김영민이 쓴 『동무론』에 공동체를 꾸려가는데 필요한 요소로 구성원들의 ‘곡진한 노동’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공동체 밥상에서 펼쳐지는 이런 순간이야말로 곡진한 노동이 만든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그 일들은 밥상열전을 통해 이야기가 되어 ‘별일 없이’ 공동체 밥상이 차려지는 안부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 안부가 늘 평안할 수는 없었다. 주방으로 들어오는 선물들은 여전히 풍성했지만, 달마다 조직하는 밥당번은 늘 구멍이 생겼다. 나는 점점 회원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어떤 타이밍에 밥당번표를 내밀 것인가. 어떤 세미나에 가서 단품을 생산하자 제안할 것인가.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 슬슬 나를 피하고 있다는 기운마저 느껴질 때도 있었다. 월초에 있는 운영회의에서 다음 달의 밥당번표를 돌리면서 밥당번이 부족하다고 내내 하소연했다. 그러면 늘 있는 일이 아니냐는 심드렁한 반응부터 빠진 회원 명단을 작성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다보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다. 여기가 함께 공부하고 밥도 먹는 공동체라면 ‘당연히’ 공부도 하고 밥도 해야지! 이런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공동체를 꾸려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3. 경금이 고수했던 원리원칙의 시간

 

작년에 양생 프로젝트에서 사주명리를 공부했다. 사주 명리에 의하면 나의 일간은 ‘경금’이다. 경금은 “원리원칙적이고 구조화를 잘 시키고 정의감을 가지고 호전적으로 세상과 맞서려” 하는 기질을 지닌다고 한다. 공동체에 와서 동양고전을 공부하면서 원리원칙을 좋아하는 나의 기질이 더 기승을 부렸다. 고전의 문장은 사유로 벼리지기도 전에 원칙으로 읽히기 일쑤였다. 공동체 밥상을 보살피는 자리에서는 차질 없이 끼니마다 밥상이 차려지는 것도 나의 원칙이 되었다. 밥당번표가 한 곳도 빠짐없이 꽉 채워지는 것도 당연하게 포함되었다.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니 시도 때도 없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에 의하면 경금은 원칙을 강하게 내세우다보니, 그것이 현실화되지는 않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더 세차게 내세우려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혼자서라도 밥상매니저를 하겠다고 우기는 나와 딱 겹쳐진다. 공동체의 안녕에 기여하고 싶은 정의감으로 공동체 밥상에 입성해서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원칙을 내세우는 경금의 활약, 고백하자면 내가 제일 힘들었다. 밥상을 못 차리는 사태가 일어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 피곤했다. 어느 순간부터 밥상의 안녕보다 나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몸에 힘 좀 빼라는 친구의 충고라도 들으면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는 ‘그럼 니가 해보든지!’ 라고 응수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2020년 1월,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적인 모임을 금지하는 조치가 속속 실행되면서 공동체에서 함께 공부하고 밥을 먹는 일상이 사적인 모임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 와중에 코로나 상황은 빠른 속도로 심각해져서 세미나들이 줌으로 대체되고 공동체의 밥상도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시쳇말로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색은 못했지만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내가 세웠던 원칙을 더 이상 고수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했다. 바이러스의 번성이 밥상을 닫게 할 수도 있는 경험은 지난 십 년 동안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막상 밥상 문을 닫아보니 나의 원칙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동시에 그 원칙 때문에 내내 밥상을 차려졌다고 여겼던 내가 보였다. 사람과 선물이 순환되면서 지속되는 공동체의 안녕은 한 사람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 우주의 기운이 때를 맞춰준 결과였을 뿐이다. 그것을 모르고 날뛰다가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나의 꼴이 참 한심했다.

 

 

4. 앎은 사후약방문이다

 

 공동체 밥상이 차려지지 않는 내내 옛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공동체 밥상에서 먹는 밥은 언제나 맛있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집안에서도 살림을 하던 터라 자신만의 레시피가 두둑한 이들이 꽤 있었다. 다 아는 맛도 그들이 만들면 풍미가 깊었고, 새로운 맛은 오감을 자극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밥당번은 두 사람이 함께 했는데, 세미나를 함께 하는 동학일 수도 있고 주방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는 경우도 있었다. 그 시간은 함께 세미나를 하면서 느낀 희노애락을 공유하는 뒷담화로 양념을 하는 시간, 이 공부 공동체에 대해 서로서로 알게 된 정보를 나누면서 밥을 익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밥당번을 몇 번쯤 거치면서 주방의 집기가 눈에 익고 익숙하게 앞치마를 두르다보면 공동체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 붙었다. 나 역시 이런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점점 세미나를 하러 오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나는 은방울 키친의 매니저로 활동하는 동안 세 명의 매니저와 함께 일했다. 첫 번 짝은 주술밥상에서도 활동했던 친구로 공동체 밥상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여러 조목들을 전수해 주었다. 당시 그 친구의 여러 사정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나 혼자 밥상을 꾸려가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내줘서 참 고마웠다. 결국 그 친구는 취직을 하게 되면서 매니저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다음은 세미나를 같이 해본 적은 없는 친구와 함께 일했다. 그러다보니 밥상 운영 회의보다 서로를 탐색하는 대화시간이 더 길어지곤 했다. 그래도 음식 잘 하는 그 친구 덕분에 식재료 장보기 등이 훨씬 수월해졌었다. 하지만 그 친구도 오래 함께 하지는 못했다.  다른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함께한 짝은 서당 교사를 할 때 학부모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텃밭 가꾸기에 일가견이 있던 친구라 텃밭활동을 함께 한 이력도 있었다. 우리 둘은 죽이 척척 맞아서(그 친구가 나에게 맞춰 줬을 수도 ㅋ) 텃밭에서 바지런히 키운 열무로 김치를 담궈서 밥상에 내는 뿌듯함도 누렸다. 요리 솜씨까지 특출 나서 공동체에 소문난 밥상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들에게는 집에서는 가족들을 건사해야 하고 공동체에 나와서는 공동체의 밥상까지 챙겨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고단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때로는 밥상을 받은 친구들이 보이는 무한한 감동을 보며 ‘알아주는’ 이들이 있어서 노고의 기쁨도 느끼는, 그래서 계속 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는 일이기도 했다.

 

 

 코로나는 여전히 맹렬하고 열 명,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는 날은 요원해 보인다. 그 사이 공동체도 더 작은 규모로 나뉘어졌다. 공동체 밥상인 은방울 키친도 문을 닫았고 나의 공동체 밥상 매니저 활동도 종료되었다. 그리고 파지사유에 ‘공식당’을 열었다. 파지사유에서 활동하는 상근자들이 돌아가면서 밥을 하고 소수의 인원들이 뚝뚝 떨어져 앉아서 점심 한 끼를 해결한다. 그동안 공동체 밥상에서 익은 버릇 때문에 묵묵히 밥만 먹지는 않지만, 예전처럼 공동체의 온갖 안부가 뒤섞이는 동네 우물가 같은 수다의 공간은 사라졌다. 그제야 우리가 지나 온 시간들이 실감되었다. 달마다 행사를 기획하고 해마다 인문학 축제를 하면서 거리낌 없이 함께 모여서 웃고 떠들었던 시간, 사람이 뒤섞이고 온갖 음식이 흘러 다녔던 분위기, 그 때가 참 좋은 삶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앎은 지나고 나서야 온다고 했던가. 사후약방문격이다. 어느 날이었다. 사십인 분도 거뜬히 해내는 뻑적지근한 점심과 달리 공부방에서 공부하는 운영회원 대 여섯이 저녁을 먹은 날이었다. 주술밥상 매니저 일을 인계하면서 나와 언성까지 높였던 친구가 밥당번을 했다. 다들 언제 이렇게 솜씨가 좋아졌냐 신기해했다.

 

친구: 나의 음식 솜씨는 주술밥상 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제 집 식구들도 인정해. 공동체 밥상이야말로 노력 대비 만족도 높은 가성비 짱인 곳이야~

 

맞다. 밥상의 안녕 때문에 제풀에 지쳤다가도 그 한 끼를 먹고 나면 마음도 한껏 느긋해져서 다시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무쇠 같다는 경금이 연마되기에 이만한 가성비를 낼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나에게 공동체 밥상은 그런 곳이었다.

 

댓글 5
  • 2021-04-19 09:42

    그 정겨운 지옥에서. 

    열정은 뜨거움이 아니라 꾸준함이라는 걸 알게 해주셨습니다.

    늦었지만, 존경을~^^

     

    사족. 사진 1>

    은주와 제가 날아댕기며 차린 레전드 밥상! 이문서당 쫑파티 밥상입니다.  흐르는 아니 튕기는 땀으로 간을 맞춘 밥상. 저 사진 박제해주세요!ㅎ

  • 2021-04-19 09:46

    사진1처럼 밥먹어본게 언제인지 ㅠ

    그래도 밥상은 늘 차려지고 우리는 또 거기에 있을것이야 ㅎ

    기린샘의 꾸준함도 경금의 힘이니 너무구박은 마시고요 ㅋ

    기린샘과 함께한 짝님들 멋있습니다~~♡

  • 2021-04-19 10:24

    문탁 밥 먹고 큰 꼬맹이들 사진 보니 반갑다!!!밥심이 촥오~

  • 2021-04-20 23:23

    기린은 문탁의 빡센 곳들만 골라 다니는 듯

    그 빡센 곳들을 모두 돌면 득도할 것이야

    너무 도가 높아지면 같이 못노는데.....

    그만 돌게 할 수도 없고

     

  • 2021-04-27 14:03

    와....그때가 2017년..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집니다. 지금은 재미있는 추억만 남은 밥상.

    그리워요 ^^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2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57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0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96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92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