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5] 두여자의 우당탕탕 한 집 살이-<그레이스 앤 프랭키>

요요
2024-04-05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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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도 너무 다른 그레이스와 프랭키

 

내가 아는 미드라고는 고릿적 시절에 영어 배운다고 몇 번 본 <프렌즈>가 전부였다. 그런데 최근 70대의 늙은 여자 둘이 주인공인 미드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보게 되었다. 이 여자들, 70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고 활달하며 독립적이고 전투적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내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70대의 기운 없고 세상일에 초탈한 은둔자 이미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60대가 되기 전 60대를 몰랐던 것처럼 70대를 향해 가고 있는 지금도 나는 70대를 모른다.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나이 70에 동시에 이혼당한다. 두 여자의 남편들이 20년 동안 서로 사랑해 온 사이였다고 커밍아웃을 했기 때문이다. 두 여자는 남편들이 사랑한 기간만큼이나 오랫동안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왔지만 서로에 대해 완전 비호감인 관계였다. 성격, 스타일, 취향, 추구하는 가치 등 비슷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두 여자가 남편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집을 나와 남편들의 공동소유였던 바닷가 세컨 하우스에서 같이 살게 된다.(파도치는 해변이 바로 앞에 있는 멋진 집이라 부럽다.^^)

 

남편들이 서로 사랑에 빠진 사이라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는 두 여자가 같이 살면서 겪게 되는 제2의 인생이 이 드라마에서 펼쳐진다. 한 집에서 살아야 하니 두 여자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70대라고 해서 침착하고 지혜롭고 서로에게 관대하고 성숙한 할머니들의 우정을 기대했다가는 여지없이 뒤통수를 맞는다. 그레이스는 프랭키가 자유분방하고 감정적이어서 종잡을 수 없고 늘 집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질려 하고, 프랭키는 그레이스가 꾸미기를 좋아하고 감정표현에도 서투르고 원리원칙만 내세우고 명령하고 간섭하는 잔소리쟁이라고 학을 뗀다.

 

드라마 한 편에 하나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니 매편 온갖 일들을 겪으면서 두 여자는 마음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인다. 40년의 결혼생활 내내 남편과의 관계에서 제대로 된 정서적인 교류라고는 없이 마치 사업 파트너처럼 협력하며 살아왔던 그레이스는 프랭키로 인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을 배운다. 남편과 허물없는 친구로 지내며 일상의 대소사를 전적으로 떠맡기며 살아왔던 프랭키는 그레이스 덕분에 더 독립적으로 되어간다. 두 여자, 20년간 자신들을 속여온 남편을 잃은 대신 지지고 볶으며 멋진 여자 친구를 얻는다. 두 여자가 변화하는 만큼 전남편과의 관계도 편안해진다. 이혼보다 이혼 이후의 삶이 더 드라마틱하다. 인생,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니다. 나이가 몇 살이냐와 상관없이 우리는 늘 새로운 시작 앞에 선다.

 

성장서사가 아닌 나이듦의 서사가 보인다

 

그런데 내가 이 드라마에 빠지게 된 것은 이 드라마가 두 여자의 성장 서사여서가 아니었다. 두 여자는 지금 60대인 나와 비교하더라도 주름살도 적고 절대 비교 불가의 우아함과 멋진 몸매(그레이스)와 치렁치렁 히피스타일(프랭키)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자유분방한 예술혼(프랭키)과 철두철미한 사업가 정신(그레이스)을 구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70대의 늙은 여자라는 것을 리얼하게 그리는 장면들의 미덕 때문에 드라마에 빠졌다. 나는 그런 장면들이 너무 좋았다.

 

가령 두 여자가 함께 동네마트에 가서 직원을 부른다. 그런데 그 직원은 마치 두 여자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남자 직원은 젊은 여성이 오자 친절하게 응대하지만 늙은 여자 둘에 대해서는 투명인간 취급한다. 손짓 발짓으로 불러도 오지 않자 결국 두 사람은 그냥 나오고 마는데 그때 프랭키는 계산도 하지 않고 물건을 슬쩍 집어왔다.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이자 엄격한 도덕주의자인 그레이스가 놀라자 프랭키는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데 뭐가 문제냐고. 투명인간 대접에 투명인간으로 답하는 이 여자들의 유쾌한 대응, 이 드라마에서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그레이스가 오래전 사랑에 빠졌던 남자를 다시 만나는 에피소드에서도 늙음과 질병이 전경으로 등장한다. 알고 보니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그 남자의 아내가 알츠하이머 환자였다. 눈을 찔끔 감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며 행복한 미래를 꿈꾼 그레이스. 남자의 집을 찾았다가 우연히 남자의 아내와 부딪친다. 그레이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 집을 떠난다. 70대에도 연애하고 섹스할 수 있다. 그러나 돌보아야 하는 아픈 아내가 있는 남자를, 그 아내가 정상적인 인지능력도 없고 그 남자와 어떤 정서적 교류도 하지 못하는 알츠하이머 환자라고 해서 계속 만나도 될까? 그레이스의 연애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프랭키와 그레이스에게는 베이브라는 친구가 있다. 베이브는 몇차례 암의 위기를 이겨냈다. 그런데 다시 온 몸에 암세포가 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베이브는 존엄사를 결정하고 온갖 약초를 다루는 능력을 갖춘 프랭키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레이스는 신이 준 생명을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그러나 결국 베이브가 여는 마지막 파티에 참여하여 작별 인사를 나눈다. 두 여자는 베이브의 유언대로 사모바르에 베이브의 유골을 넣어 자신들의 집에 두고 수시로 베이브의 유골과 대화를 나눈다. 집 앞 해변에 베이브의 유골함을 들고 나온 두 여자, 실수로 사모바르를 엎게 되고, 유골은 해변의 모래에 쏟아진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멋진 산골장이라고 생각했다. 70대에 죽음은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던 결정적 장면이 하나 더 있다. 프랭키는 종종 허리가 아프다. 둘이 노인 여성을 위한 바이브레이터 사업을 하면서 비즈니스 미팅 준비를 하던 중 프랭키가 앉아있기 힘들다고 마루에 드러눕는다. 갑자기 찾아온 허리의 통증. 프랭키는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한다. 프랭키를 옮기려고 힘을 주다 그레이스도 통증을 느끼고 드러눕는다. 두 사람이 동시에 꼼짝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레이스는 말한다. 손목이 아프고 무릎이 아픈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허리가 이렇게 아프기는 처음이라고. 구조를 요청해야 하는데 전화기는 저 멀리 있다. 결국 발에 힘을 주고 등을 밀어서 그들은 전화기로 가야했다. 늙은 여성 둘이 같이 살면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

 

70대, 머지 않았다

 

그 에피소드에서는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소풍>이 생각났다. 거기서도 김영옥은 허리가 아프면 꼼짝을 못했다. 김영옥이 움직이지 못하자 친구 나문희가 김영옥을 입원도 시키고 퇴원도 시키며 돌본다. 허리가 아픈 김영옥과 빠르게 파킨슨이 진행되고 있는 나문희, 두 사람은 도시락 싸서 경치좋은 곳으로 소풍을 가서 삶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그런데 소풍을 가기로 한 날 허리 통증이 도졌다. 허리가 아파 꼼짝 못하면 자유 죽음도 미루어야 한다. 바닷가 별장에서 노년의 희노애락을 겪는 미국의 두 중산층 백인 여자와 남해의 개발 예정지인 시골 동네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두 여자의 삶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러나 늙음 앞에 장사 없다는 것, 또 친구가 있기에 외로움, 늙음, 죽음을 잘 통과해 갈 수 있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나는 누구와 어떻게 늙어가게 될까. 나이듦 연구소를 시작하면서 시니어 공동체 주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작년에 두 번 공동체 주택 답사를 했고, 같이 늙어 가면서 다른 노년을 상상해 보자고 의기투합한 친구들과 올해 두 번 집 지을 땅을 보러 다녔다. 경제적 능력도 다르고 가족 상황도 다른 우리가 함께 살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어떤 난관을 돌파해야 할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문탁에서 같이 공부하고 밥먹고 십년 넘게 서로를 의지하며 혼자서는 못할 공부를 하고 친구가 되고 공동체적 삶을 살아온 것처럼 전통적 가족관계 너머에서 서로를 돌보며 나이들고 죽음을 맞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러니 지금보다 좀 더 열심히 땅도 보고 집도 보아야겠다. 공부하다 보니 50대가 지나가고 60대가 되어 있더라. 공부하다 보면 70대도 금방 올 것 같다.

 

 

베이브의 생전 장례 파티의 마지막 인삿말

모두 와줘서 고마워. 내가 지금껏 만난 멋진 친구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몰라. 여기 모인 친구들 모두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 가슴이 너무 벅차네. 그럼 이제 다들 꺼져줘!

 

존엄사 직전 그레이스와 베이브의 대화

[그레이스] 정말 해야겠어? 앞으로 좋은 날이 기다릴지도 모르잖어? 앞날은 모르는 거야.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어.

[베이브] 기적은 필요없어. 좋은 인생이었는 걸. 진심으로 살아냈지. ‘평화와 기쁨이 숨이 되어.’ ‘평화와 기쁨이 숨이 되어.’(만트라) 뭔 헛소린가 싶겠지만 난 정말 분에 겨운 생을 살았어.

[그레이스]자기 없이 우린 어쩌지?

[베이브] 살아야지.

 

 

 

  • 나이듦과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
  • 여자들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 성격, 취향, 가치관 모두 다른 나이든 두 여자가 함께 살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고 싶은 사람
  • 커밍아웃하고 은퇴한 두 남자가 어떻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지 보고 싶은 사람
  • 코미디 좋아하는 사람
댓글 4
  • 2024-04-06 09:00

    “기적은 필요없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네요.
    저도 한때 열심히 봤던 미드인데요. 기억이 새록새록.
    그리고 여기는 제인폰다의 팬클럽?? ㅋㅋ

  • 2024-04-06 09:09

    ㅋㅋㅋ
    나도 시즌7까지 다봤다는
    여자들은 친구들끼리 사는게 더 재밌고 좋은거같아요
    여행도 그렇고 ㅎㅎㅎ

  • 2024-04-06 10:27

    아, 시즌7이라. . 가능하면 드라마는 시즌제여서 잘 안 보게 되는데, 이건 꼭 챙겨 봐야 할듯. . 게다가 요요샘이 추천한다니 흔치 않은 드라마일듯~ㅎ 고맙습니다!

  • 2024-04-06 13:28

    와.. 이 드라마 꼭 보고 싶네요.
    ‘내가 꽂힌 대사’에 울컥울컥해집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