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6] 62년생 김찬호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

문탁
2024-04-1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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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명인과 김찬호의 노년 이야기?!

 

책 표지가 인상적이다. 거기에는 내가 알던, 명민하면서도 다정한 눈빛, 까맣고 숱 많은 머리를 지닌 준수한 김찬호는 없다. 대신 훤하게 벗겨진 이마, 짧은 흰머리, 깊은 주름의 초로의 사내가 떡하니 박혀있다. 또 “격랑의 현대사를 주도해 온 베이비부머 세대는 노년의 라이프 스타일에서도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자기 해방의 스토리텔링부터 성장 마인드셋까지 품위 있는 나이듦을 위한 ‘전환의 기술’”이라는 설명도 적혀있다. 약간의 동병상련과 다소간의 동업자 의식.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더 결정적 이유는, 이 책 이전에 김명인의 칼럼을 읽었기 때문이다.

 

올 2월15일 자 한겨레신문의 <김명인 칼럼>의 제목은 “노년의 길목에서”였다. 그는 칼럼에서 자신의 생애사를 간단히 정리한다. 자신은 “이른바 ‘58년 개띠’로서 대표적인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는데, 다른 베이비붐 세대처럼 청소년기에는 “반공 제일주의와 가부장주의, 폭력적 군사문화에 찌든 채 성장했으나” 운 좋게 대학생이 된 후 청년기에는 “제적도 고문도 투옥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이른바 ‘민족민중민주변혁’이라 불리던 한국 사회의 일대 혁명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동요하며 보냈다”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체제는 견고했고, 운이 좋아 대학교수가 되었지만, 그 봉급으로 자식을 유학 보내는 순간 다른 386처럼 사실상 ‘전향’한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는 성찰도 이어진다.

 

그러다 맞게 된 정년퇴임과 다가온 노년. 김명인은 자신에게 다시 묻는다. 어찌 보내야 노년을 잘 보내는 것일까? “말로는 이제는 세상일 좀 잊고 살아야겠다고 공언해 보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앞으로도 “부단히 생각하고 말하고 글 쓰고 행동하면서 이 요지부동의 세상에 맞서게 될 것”이라는 다짐이 이어진다. 그리고 다음 문장, “이 세상과 타협하며 추하게 늙고 싶지도, 세상이 추하다고 혼자서만 곱게 늙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는 푸흡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혼잣말, “곱게 늙고 싶어도 곱게 늙을 수 없을 텐데, 그게 늙는다는 건데”

 

사실 난 이 칼럼을 신문에서 읽은 게 아니라 SNS에서 읽었다. 많은 사람이 이 칼럼을 공유하면서 공감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칼럼에서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다. 나이듦은 속수무책으로 닥치는 것인데, 그의 나이듦에 대한 언표가 지나치게 ‘의지적’이고 ‘선언적’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러다 김찬호의 이 책을 본 것이다. 나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남성 지식인 두 명이 비슷한 시기에 노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약간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일원으로 이제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자각하는 것도 공통적이었다. 이제 노년 이야기도 남성 지식인이 주도하게 되는가? 나는 ‘62년생 김찬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2. 앗, 이건 노년 이야기가 아니잖아?

 

이 책의 부제는 “삶의 리셋 버튼을 누르는 마흔 단어”이다. 나도 나이듦과 관련해서 7개 정도의 키워드를 뽑아 놓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40개라는 키워드에 일단 주눅 드는 기분이었다. 책을 열고 목차를 보았다. ‘파국’, ‘하산’, ‘정정함’, ‘전환’, ‘눈물’, ‘스토리텔링’, ‘연민’, ‘응시’, ‘공동체’, ‘경로’, ‘혐로’, ‘복지’, ‘손님’, ‘자존’, ‘망상’, ‘고백’, ‘지피지기’, ‘멈춤’, ‘줏대’, ‘이순’, ‘경청’, ‘교학상장’, ‘쓴소리’, ‘탐구’, ‘책’, ‘유산’, ‘독서’, ‘도서관’, ‘육아’, ‘성숙’, ‘보람’, ‘선배’, ‘시간’, ‘후회’, ‘상실’, ‘유병장수’, ‘연명’, ‘존엄’, ‘마을’, ‘우선순위’라는 40개의 단어.

 

눈 밝은 사람은 이 키워드를 보고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전환, 눈물, 스토리텔링, 교학상장, 탐구, 도서관 같은 것이 딱히 나이듦의 키워드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읽다 보니 이 책은 나이듦을 주제로 쓴 체계적인 저작이라기보다는 그동안 각종 매체에 기고했던 칼럼 등을 다시 모아놓은 책이었다. 그 칼럼들을 6개의 큰 주제로 분배하고, 각각의 칼럼에 위와 같은 키워드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제목을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라고 단 것이다. 약간의 실망. 이건 편집자의 의도였을까? 작가의 의지였을까?

 

하여, ‘62년생 김찬호’의 나이듦에 관한 이야기는 40개의 작은 이야기보다는 머리말에서 더 잘 나타난다. 그는 지금 두 가지 돌봄에 참여한다. 하나는 그가 환갑 때 얻은 손녀의 돌봄. 딸이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그도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손녀를 돌보는 일에 손을 보탠다. 그리고 100세가 되신 아버지의 돌봄. 주된 돌봄 제공자는 여동생(역시 주된 돌봄은 k-장녀들의 몫이다. 끄응)이지만 자신도 아버지의 “교회 출석과 병원 진료 등의 나들이에 동행하고 안마를 해드리고 때로 식사도 챙겨” 드린다. 하지만 아버지를 물리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잘 돌봐드린다고 해서 아버지의 신체적 통증과 일상의 무료함,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노년의 쇠락은 오롯이 각자의 몫이다. 손녀를 통해 공식적으로 할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를 통해 미래의 자신을 내다보면서 저자는 자신의 노임됨을 자각한다.

 

저자는 이 책을 “철부지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 내면을 점검하고 손질하는 수행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사회학자답게 그것을 위해서는 기성세대의 자화상을 해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베이비부머 세대는 기성세대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70년대는 새로운 청년문화를 이끌고, 80년대는 민주화를 이루면서 정치적 실세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고도성장의 혜택도 충분히 누린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사회의 기득권. 따라서 그것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지위 불안, 허세, 자아도취, 집단망상 같은 퇴행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현대사의 큰 변화를 주도해 온 베이비부머는 노년의 라이프 스타일에서도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은 자신처럼 생각하는 주변의 선후배들을 초대하는 책이기도 하다.

 

나는 잠시 또 망설인다. 그의 초대에 응하고 싶은 마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 역시 ‘386 세대’의 지나친 집단 자의식 아닐까, 라는 마음. 여전히 뭔가 서걱거린다.

 

 

3. 나이듦의 이야기는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이순”이라는 키워드에서 저자는 앞자리가 ‘6’으로 바뀌는 소감은 각별하다고 말한다. 머지않아 법적으로 노인이 되는 현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고도 하면서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을 통과하면서 스스로 자신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향해 가는가, 타인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고, 세상은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부끄럽지 않은 노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라고, 묻는다고 한다. 나는 앞자리가 ‘6’으로 바뀌는 순간,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회의하거나 홈페이지에 댓글을 달거나 강의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선배”라는 키워드에서도 저자는 어떻게 시대의 어른, 인생의 선배가 될 것인지를 고민한다. 고구려 시대에서 선배(이때 선배의 한자는 先輩와 통용될 수 있는 仙輩이다)는 평소에는 학문에 힘쓰거나 여러 가지 기예를 익히고 가까운 산을 찾아 탐험하면서 환난 구제나 성곽, 도로 축성에 관여하다가 전쟁 때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나가 싸워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고 한다. 즉 전근대사회에서 선배란 공익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말했으니, 지금 식으로 말하면 공공선을 위해 연대하는 ‘선배 시민’들을 말하는 것이다. ‘어른, 김장하’의 김장하도 “후배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편익을 기꺼이 내려놓는 선배다.” 

 

나는 막 딴지를 걸고 싶어진다. 그렇게 ‘지당하신 말씀’ 말고, 선생님은 주름과 뱃살 때문에 고민한 적 없으세요? 저처럼 회전근개가 파열되어서 집안일이 겁나거나 무릎이 아파서 산에 가지 못했던 적은 없으세요? 기억력은요? 저는 요즘 정말 치매 검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총기가 사라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누어야 할 이야기는 일반론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사례일지도 몰라요. 우리 평생, 어떻게 좋은 부모가 될까, 어떻게 좋은 시민이 될까, 어떻게 좋은 학교를 만들까, 라는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왔는데, 이제는 또다시 어떻게 좋은 노인이 될까, 라고 질문하고 있군요.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드는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 아닐까요? 그런 질문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우리 세대의 마지막 기여일지도 몰라요.

 

아, 좀 많이 나갔다. 어쩌면 칼럼이라는 글의 형식과 분량의 제한이 일반론을 반복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다. 칼럼의 마지막 문장은 매번 지당한 말로 끝낸다. ㅠ) 그래서 이렇게 말해본다. 선생님, 저는 이 책에서 "쓴소리" 재밌었어요. 나이를 먹으면 점점 잔소리 듣기 싫거든요. 그런데 어쩌면 잔소리 해주는 사람이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독서"도 좋았어요. 2018년 NHK 설문을 인용하면서 건강 노인이 지닌 가장 공통적인 생활 습관이 ‘독서’인데, 그 이유가 도서관에 가느라 운동량이 유지되고, 뭔가 배우겠다는 호기심이 생명력을 향상시켜서라는 분석이 재밌더군요. 저도 늘 공부가 구원이라고 말해요. 책을 통해 뭘 많이 배워서가 아니라 책 읽느라, 세미나 하느라, 딴짓(소비)하지 않아서 구원받는 거라구요.

 

 

김명인도 김찬호도 우리 시대에 귀중한 지식인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두 사람 다 좋아한다. 늘 그들의 글에서 많이 배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노년 이야기는 나와 좀 다르다고 느낀다. 나는 직관적으로 그것이 ‘젠더’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인상에 불과하다. 하여 이 리뷰는 어쩌면 반쪽자리일지도 모른다. 이 문제를 좀 더 생각하고 정리하는 것도 나의 노년 글쓰기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해졌다. 

 

 

 

 

 

 

 

“경로석은 모자라고 경로당은 한산하다”(73)

 

-덧붙임

고령화사회에 대한 촌철살인의 묘사.

제도적으로 노인은 65세 이상부터이다. 지하철이 공짜이고, 지하철 경로석에 떳떳하게 앉아도 되고, 경로당에 가서 공짜로 밥을 얻어 먹을 수도 있다. 노령연금(국민연금)도 받는다. 문제는 (초)고령화 사회에서 이런 65세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2023년 12월31일 기준, 65세 이상 인구는 973만 411명으로 전체 인구의 18.96%이다. 엊그제 총선에서 60세 이상 유권자는 무려 31%에 달했다. (60대, 17.19% / 70대 이상 14.24%)

이러니 지하철에서는 80세 노인이 70세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게 되고, 경로당에는 젊은 노인들이 가지 않게 된다.

 

 

 

“휴브리스(hubris)란, 한계를 무시한 야심에 이끌려 파멸에 이르는 오만을 가리킨다. 과거의 성공 경험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방법을 맹신할 때,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이르기 일쑤다” (123)

 

-덧붙임

알다시피 영어 hubris는 그리스어 hybris에서 온 말이다. 우리가 자연스럽다, 라고 말하는 것에 벗어난 것은 다 hybris이다. 나이가 드는데도 주름살이 없길 바라고, 내가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이 적게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자명한 이치에도 불과하고 계속 나 혼자 많이 갖고 싶다면, 그게 바로 hybris이다.

동아시아 사유에서도 이것을 경계하는 말은 수없이 많다. (노자와 장자를 보시오! ㅋ) 후대의 양명도 전습록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생의 가장 큰 병폐는 바로 이 傲(오만)이라는 단 한 글자에 있다! (人生大病只是一傲字)” <주역> 건괘의 상효, “향룡유회(亢龍有悔)” 도 명심, 또 명심^^

 

 

 

“우리는 상실을 통해 비로소 삶의 깊은 진실에 눈을 뜰 수 있다. 심신의 나약함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정직하게 마주하면서 영혼의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다.”(243)

 

-덧붙임

‘영혼의 진검승부’ 이 단어에 확실히 꽂혔다. 그게 뭔지는 차차 생각해보는 걸로.

 

 

 

“I see you. 영화 <아바타 : 물의 길>(2022)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인사말이다. 아프리카 줄로족의 ‘사우보나’라는 인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러면 상대방은 ‘응기코나’(예, 나도 당신을 봅니다)라고 화답한다고 한다... ‘I see you’는, 이미 알고 있는 사이지만 지금 이 순간 상대방을 새롭게 발견한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I see you’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을 드러낸다. 그냥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환대가 이뤄진다. 그런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전형적인 상황이 갓난아기를 볼 때다.., 거기에는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이 깃들어있다.” (63)

 

-덧붙임

아, 아침마다 내가 수없이 많은 단톡방에 ‘good morning’을 남기는데, 이제 ‘i see you’로 바꿔볼까? 좋은 말인 것 같다!

 

 

 

 

 

 

1. 지금 은퇴후 글쓰기를 하고 있는 가마솥님께 추천합니다. 남성서사가 많이 없어서 어쨌든 비슷한 또래의 동성(同性)의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2. 최근 당뇨와 신장염 진단을 동시에 받고 멘붕에 빠진 남동생에게 추천합니다. 그동안 자기가 자기를 너무 돌보지 않았다는 후회의 말을 자주 하더라구요. 특히 이 책의 40개의 키워드 중 ‘시간’과 ‘후회’ 부분을 꼭 읽어보라고 하고 싶네요.

댓글 4
  • 2024-04-13 19:13

    I see you 인사 좋은데요? ^^

  • 2024-04-14 08:56

    예전에 같이 놀던? 김찬호샘도 많이 늙었구만요 ㅎㅎ
    가마솥에게 선물할께요~~^^

  • 2024-04-14 09:29

    ㅋㅋㅋ 쓸 말이 없다 한숨 쉬신거 페이크?아니심 ㅋㅋ 이렇게 길~~~게 쓰시고선요! 잘 읽었습니다 ~

  • 2024-04-14 13:01

    I see you. 눈을 마주보고 나누면 더 좋은 인사일 듯 합니다. 나이듦과 돌봄. 봄과 보임.
    작가분 눈이 참 맑아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