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읽기/논어3] 공자님의 자식 키우기
도라지
2022-07-11 09:50
344
“군자는 근본에 힘을 쓰니, 근본이 서면 도가 생긴다. 효도와 우애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학이-2/낭송논어 p.35)
공자가 지향한 인간상은 ‘군자’다. 위 문장은 군자가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이 효도와 우애라고 말하고 있다. 가족 안에서 효와 우애로 다진 마음을 세상을 향해 꺼내어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서 ‘인’의 가능성은 숨 쉬고 있다. 뭐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군자가 아니라서 싱거울 정도지만 어쨌거나 ‘인’은 발아하지 못했을 뿐 내 주변 일상에 잠재해 있다.
그런데 문득 궁금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데 있어 어떻게 하는 것이 ‘인’한 것일까? 하지만 논어에서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에 관련된 이야기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보편윤리라서 공자는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사랑’의 이름으로 자식을 망치거나, 혹은 서로 미워하는 부모 자식 관계를 흔히 볼 수 있다. 많은 금쪽같은 자식들은 부모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엄마란 가장 가까이에서 스치는 칼날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삼가함(愼)을 예(禮)로 삼아
공자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공리(孔鯉). 백어(伯魚)라고도 한다. 스무 살에 얻은 아들이었으니 나이로 치면 1기 제자와 2기 제자들 중간쯤 되는 연배다. 공자가 69세일 때 50세의 나이로 (안회보다 1년 먼저)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계씨편에 진강(자금)과 백어의 대화가 나온다.
진강이 공자의 아들 백어에게 물었다.
“그대는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백어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일찍이 아버님께서 홀로 서 계실 때 제가 종종 걸음으로 지나가니, ‘시를 배웠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물러나 시를 배웠습니다. 다른 날에 또 홀로 서 계시기에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니, ‘예를 배웠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를 배우지 않으면 바로 설 수 없다(不學禮, 無以立)’고 하셨습니다. 나는 물러나 예를 배웠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진강이 물러나와 기뻐하며 말했다.
“하나를 물어 세 가지를 얻었다. 시에 대해 듣고, 예에 대해 듣고, 또 군자는 자식을 멀리한다는 것을 들었다.” (계씨-13/낭송논어 p.547)
진강의 질문은 그가 자공에게 했던 “선생께서 겸손해서 그렇지, 중니가 어찌 선생보다 뛰어나겠습니까?”(자장-25)라는 질문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진강은 공자보다 40세 어린 제자인데(자공의 제자로 보기도 한다) 공자의 명성에 의심을 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진강의 백어를 향한 질문은 공자가 아무리 제자들을 아낀대도 아들만을 위한 ‘특별한 교육방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의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진강의 질문에 백어는 뜰 앞에서 단 두 가지에 대해 들었다고 대답할 뿐이다. 그것은 바로 ‘시(詩)’와 ‘예(禮)’였다. 공자가 아들에게 당부한 ‘시’는 말(言)을 바로하기 위함이었고, ‘예’는 자립(立)을 제대로 하기 위함이었다. 공자는 열다섯에 뜻을 세우고 서른에 자립했다고 한다. ‘立’은 열다섯에 세운 뜻(志于學)에 매진하여 서른에 사회에 나가 그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버지 공자가 백어에게 했다는 두 가지 말은 아들이 서른이 되도록 노심초사하며 가슴에 품고 있던 아버지의 당부였다고 볼 수 있다. 공자가 아들 백어에게 얼마나 말을 아꼈는지 짐작되는 장면이다.
공자에게 ‘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소통시키는 핵심 사상이었다. 그렇다면 백어의 대답을 통해 비쳐진 공자의 내리사랑은 ‘삼가함(愼)’을 ‘예’로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부모는 자식을 대함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 삼가해야 하는 것일까? 반면 부모가 자식을 위해 기꺼이 해도 되는 일은 무엇일까?
서(恕)로써 한다
부모는 자식을 늘 살핀다. 대놓고 살피면 혹여 부담스러워할까 나는 몰래 살핀 적도 많았다. 큰아이가 한참 사춘기였던 무렵엔 쳐다보는 것도 녀석이 불편해했었다. 그래서 등교하는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베란다에 숨어 하염없이 내려다 본 적도 있었다. ‘매정하고 쌀쌀맞은 놈’이라고 속으로 욕하면서도 서운했다. 그런데 내 눈길을 큰 아이는 왜 그렇게 불편해했을까? 나는 어쩌다 마주친 아이의 눈빛을 붙잡고 잔소리를 해댔을 것이 틀림없다. 방 안이 어질러진 것에 대해, 과제를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해, 얼굴에 난 여드름에 대해. 아이는 찌푸린 얼굴로 쏟아내던 관심을 가장한 엄마의 욕심이 불편하고 싫었을 것이다.
자공이 물었다. “한마디 말로 평생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일 것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
(위령공-23/낭송논어 p.509)
주자는 위 문장에 대해 이렇게 덧붙인다.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면 그 베풂이 무궁하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논어집주」 성백현 역주 P.452)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봐야 했던 공자의 아들 백어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백어는 소문난 스승인 아버지 공자에게 뭔가를 따로 배우고 싶었던 적은 있었을까? 자신이 아버지 앞에 나서면 다른 제자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볼까 걱정되어 아버지가 홀로 계실 때서야 종종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대로 공자인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백어에 대한 애착이 왜 없었을까? 하지만 학당을 이룬 아버지의 명성에 주눅들까봐 아들에게 어떤 말도 하기 어려웠을 테고, 그로 인해 아들의 교육을 망칠까 걱정한 것은 아닐까?
진강은 백어의 대답을 듣고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자식을 멀리한다는 것을 들었다”라고. 서(恕)로써 염려했을 공자와 백어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멀리함’ 속에 있는 서로를 향한 마음(恕)과 태도(禮)에서 멀고도 가까운 부모 자식 간의 애씀 또한 느껴진다.
“방학동안 문탁에서 하는 수학 세미나를 해보면 어떨까?” 나의 말에 옆에 있던 작은 아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공부를 더 오래하면 멋진 청유형 문장으로 아이들을 꼬실 수 있을까? 이런 망상이 수시로 일어나지만, 아직은 공부로 아이들을 감화시키지 못하는 나라서 오늘도 그냥 나만 열심히 사는 걸로 한다. 물론 아이들이 책 읽기를 바라는 나의 기대는 또 고개를 쳐들겠지만, 아이들 역시 지금까지 보여준 것처럼 나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나의 기대치를 용납하지 않을 것 또한 틀림없기에 나는 이제 어떠한 실망도 좌절도 없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지나간 내 시절을 자주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할머니댁에 가시면서 하룻밤 집을 비우시던 엄마 아빠가 얼마나 반가웠던가. 나는 부모님이랑은 텔레비전도 같이 보기 싫어서 ‘모래시계’도 안 본 사람이 아니었던가. 부모가 마음 놓고 자식을 살펴도 되는 것은 ‘건강’밖에 없는 것 같다. 문탁에서 일찍이 다른 쌤들께서 자식한텐 밥만 잘 해주면 된다고 하시던 말씀 또한 이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맹무백이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근심합니다.” (위정-6/낭송논어 p.58)
(질문하는 이의 상황에 맞는 대답을 하는 공자의 화법을 고려하건데 당시 노나라의 대부였던 맹무백은 허약한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공자는 그런 맹무백에게 건강이 효라는 답을 한다.)
숨어서 하던 대놓고 하던 자식이 건강한지 살피고 염려하는 딱 거기까지만. 이제 성인이 된 두 아이에게 내가 ‘서’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삼가함’의 마지노선이자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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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다 큰 자식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지라
건강한지 살피는 정도가 할 수 있는 일이네요
알아서 잘 살려니 믿는 수밖에요
공자님과 아들의 에피소드는 새롭네요
자식에게 삼가는 예로써 공자와 그 아들의 정원에서의 대화를 상상해 봤어요. 나름 품격 있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