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8회] '짱어탕'을 끓이듯이 마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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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4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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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 김지원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 사고들,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매달 한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짱어탕을 끓이듯이 마감하기

 

 

몇 번이나?

 

목공수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마감과 관련한 것이다. 가구의 마감은 보통 칠을 의미하는데, 경우에 따라 나뭇결을 덮는 페인트칠을 할 때도 있고, 나무 본연의 색을 살려주기 위해 오일을 칠하기도 한다. 나뭇결이 보이면서도 좀 더 진한 색상이나 다른 톤의 색상을 표현하고 싶을 땐 스테인을 칠한다. 이처럼 칠은 물론 미적인 측면에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원목 가구의 경우엔 보다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다. 칠을 하지 않은 목재를 흔히들 ‘백골’이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잘 건조되어 허연 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백골 상태의 목재는 이물질을 바로 흡수해버린다. 칠을 하는 첫 번째 목적은 건조된 상태의 목재가 뭐든지 흡수하는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함이다. 식탁에 물 컵을 올려뒀을 때 컵 밑단의 자국이 그대로 남는다면 곤란하다. 뿐만 아니라 죽은 나무, 특히 겨울철 등산하다가 잘못 잡아 사고가 나기 십상인 바짝 마른 줄기처럼 나무는 충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가 된다. 칠은 이렇게 취약한 나무가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단단해지도록 한다.

 

칠이 어떻게 그런 효과를 가져 오는지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대부분의 물성이 그렇듯 목재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멍들이 있는데, 이 사이를 채우고 있던 수분들이 날아가며 목재가 변형을 겪는다. 수분이 충분히 날아가고, 또 충분히 변형을 겪은 목재를 가지고 가구를 만든 뒤에 하는 칠은 이 수분 구멍을 물처럼 날아가 버리지 않는 물성으로 다시 채워주는 일이다. 페인트는 막을 만들어 목재를 보호하고, 오일은 이 구멍들에 자리를 잡아 가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니스’라거나, ‘바니쉬’ 등의 마감재는 이 위에 한차례 더 막을 형성해, 외부 충격이나, 벌레, 균(곰팡이)의 침투를 막아준다.

 

이 작업은 그러나 이런 대단한 효과들에 비해 꽤 평범해 보인다. 작업을 위한 대표적인 도구는 두 가지인데, 붓과 사포다. 붓과 사포는 꼭 목공을 하지 않더라도 특별히 신기하지 않은, 따라서 목공의 다른 공정들에 비해 특별한 기술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작업이다. 그런데도 마감과 관련한 질문이 많은 이유는 뭘까? 학생들의 질문은 보통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몇 번이나 칠해야 하나요?” 혹은 “더해야 돼요?”

 

상황에 따라

 

‘강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집을 터는 강도robber말고, 힘, 단단함의 정도를 의미하는 강도strength 말이다. 투명한 오일을 백골 상태의 목재에 묻히면 나무가 살아있을 때에 가지고 있던 색깔을 회복하는 것이 선명히 눈에 보이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칠에선 그 이전의 상태와의 차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이때부터 목재의 강도는 시각이 아니라 촉각의 영역이다. 물론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 단단함의 정도 역시 꼭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서도 몇 가지 서로 다른 마감 상태의 나무를 만져보면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그러한 감각이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어느 정도의 칠이 가구의 마감으로 적정한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하는 상황, 혹은 그것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조금 다른 문제가 된다. 그것은 경험의 영역, 시행착오 끝에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하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칠했을 때 가구가 충분히 방수를 하는지, 가구가 놓일 환경이 습할 때, 혹은 건조할 땐 어떤 다른 요소들을 고려해야 할지, 칠과 칠 사이의 간격은 어느 정도로 조절하면 좋을지 등, 이런 문제들은 사실 한마디 말로 설명이 어렵고, 경우에 따라 너무 다른 답변들이 필요할 수 있다. 그래서 학생들의 질문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명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이고, 어떤 답을 해주어도 “1+1=?”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명징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외우라” 했던가. 그럼에도 답변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선 페인트 혹은 오일 제조사가 제품에 써놓은 매뉴얼을 읽어준다. “프라이밍 오일 1-2회 도장, 하드 오일 1-2회 도장 후 동일 제조사에서 제작한 oo왁스를 사용하세요.” 물론 이 매뉴얼엔 언제나 단서가 붙는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하루 종일 떠들어도 모자란 이 ‘상황들’에 대한 설명은 내 몫이다. 물론 나는 이를 설명하는 일이 즐겁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상대가 듣고 싶은가는 논외로 하고 끝없는 무용담을 들려주는 선임이 된 것 같은 못된 기분으로… “예전에 어느 집에 테이블을 납품한 일이 있었는데 말이야”…. 요약하자면 마감은 충분한 경험과 시간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만능 오일

 

그런데 어느 날 나의 이야기들이 너무 괴로웠는지, 한 학생이 그동안 내가 사용해본 적이 없는 칠을 가져왔다. “만능 오일, 상·하도 구분 없이 사용 하세요!” 미심쩍은 광고 문구와 함께 “2회 도장으로 끝”이라는 이 오일을 칠하겠다며 들고 온 것이다. 난 자존심이 좀 상하긴 했지만,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진 않았다. 10년 정도 나무를 다뤄 온 나에게도 마감과 관련한 경험과 시간이 충분하다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늘 마감이 너무 많은 시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특히 날씨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아 기한을 지키지 못하거나, 이미 납품한 이후 환경에 따라 마감을 다시 해야 하는 경우들이 종종 생긴다. 그래서 더 간편한 소재가 나온다면 딱히 사용해보길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제품에 적힌 매뉴얼대로 사용해보길 권했고, 나 역시 시도해보았다. 칠은 어렵지 않았고, 그럭저럭 기존에 더 오랜 시간을 들여 작업해야했던 제품에 비해 더 적은 횟수로 비슷한 상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찾아왔다. 가구를 완성하고 2-3개월이 지난 뒤에 학생이 문제가 생겼다며 다시 가구를 가져왔을 때, 칠이 하얗게 들뜨며 벗겨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내 경험상 첫 도장이 충분히 마르지 않은 경우나, 서로 다른 종류의 칠(유성과 수성)을 번갈아 칠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한 것이었다. 제품 제조사에 전화로 문의를 해보았지만 콜센터 직원은 환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 원인에 대한 진단은 없었다(당연하다. 그는 칠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가구 전체에 사포질을 한 뒤 재 도장을 해보았지만 동일한 문제가 반복해 나타났다. 결국은 원인을 찾지 못한 채 가구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 마감에는 워낙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꼭 새로운 제품을 사용해서 벌어지는 일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더 편리한 제품이 더 문제가 많다는 인과가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때론 조건에 따라 늘 해오던 제품을 가지고 늘 해오던 방식으로 칠을 해도 문제가 생길 때가 있고, 새로운 제품이 실제로 더 편리하게 좋은 효과를 만들어 그것을 사용하게 되기도 한다. 위의 경우에서도 학생이 칠한 가구에선 문제가 생겼지만, 동일한 제품으로 내가 칠한 샘플은 특별히 이상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니 우연한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엔 분명히 생각해봄직한 점이 있다. 새로운 상품들은 더 자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내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칭했던 부분을 일축함으로써 소비자를 공략한다는 것이다.

 

한 꼬집 넣어

 

이반 일리치는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라는 책에서 ‘현대화된 가난’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동사가 명사화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화된 가난이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우리가 겪게 되는 절망들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가난이란 꼭 화폐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화된 가난은 창조성이나 주체성, 즉 우리가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 삶을 스스로 가꾸는 능력이 부재함을 의미한다. 예컨대 ‘배우다’가 ‘교육’으로, ‘낫는다’가 ‘의료’로, ‘움직이다’가 ‘교통’으로….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행위들에 질문하기를 멈추고 서비스의 구매자가 되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제도에 의존하게 된다. 단호한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물론 일리치의 말이 꼭 정답은 아니다. 지난 세기의 철학자인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명사화되고 전문화된 영역들의 순기능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그의 말에 공감하는 대목은, 우리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경험들의 가치를 회복해야한다는 점이다. 만능 오일은 분명 ‘마감하기’의 수많은 변수와 가능성들, 그리고 그에 따른 대응의 경험과 능력을 명징한 광고문구와 ‘만능’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에 비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경험들은 너무 쉽게 변명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비가 오면 칠이 늦게 마른다는 사실, 유성과 수성 칠을 섞어서 쓰게 되면 때로 하얀 자국이 생기고, 어떤 칠들은 마르는 데 몇 주씩 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건조되었을 때 발휘하는 놀라운 효과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이나 칠해야 하나요?” 혹은 “더해야 돼요?”라는 학생들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난 이 질문과 대답의 장면이 어떤 다른 장면들을 떠올리도록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설프게 요리를 하다 간을 못 맞추는 상황이나, 어떤 재료를 어떤 크기로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를 모를 때 할머니나 엄마에게 전화를 하면, 이들은 “한 꼬집 넣어”라거나 “한소끔 끓이라”거나 “나박나박” 혹은 “숭덩숭덩 썰어 넣으라”거나, “팍팍 치라”거나 하는, 지금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암호 같은 말들을 한다. 그것이 몇 그람인지, 몇 센티미터, 몇 분인지를 알려주면 쉬울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절대 그러한 보편적 단위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요리는 재료의 상태나 크기, 불의 세기나 팬의 강도 등 더 많은 변수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은 그들의 경험과 내 고유의 경험들이 합쳐지면서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한다. 아 “한 꼬집은 이정도지!”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정리하자면 할머니의 ‘짱어탕’이나(할머니는 절대 그것을 ‘장어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엄마의 가자미 미역국 같은 칠을 하고 싶다는 말이다. 학생들에게도 그런 것을 알려주고 싶다.

 

 

댓글 6
  • 2021-08-25 12:26

    ‘칠’에도 온갖 경험과 오묘함이 깃들어 있군요~

    근데 옛날엔 옻칠, 기름칠을 했다는데 서양에선 무슨 칠이 있을까요? 급궁금…

    • 2021-08-26 09:56

      서양에도 동양과 비슷한 것들이 많습니다. 식물이나 곤충에서 채취한 오일, 동물이나 광물, 꽃에서 착색을 위한 도료를 만들기도 하고, 이를 소젖과 혼합해 사용한 밀크페인트 등 다양한 종류들이 있어요!

  • 2021-08-25 13:16

    몇 년 전,  막 쓰던 긴 백골(?)목재들을 뜯어 상판으로 연결해 철재다리달아 큰 테이블을 만들었었는데ᆢ 바로 그 상판에 저런 일이 일어났었어요.

     

    먼저 올리브오일을 발랐었던가ᆢ 여하튼 그위에 바니쉬도 몇번 발랐던거 같은데 더운 날이 오자 허옇게  ㄱ각질이 ㅎㅎ

     

    대충 그대로 쓰기를 몇년째 하면서, 나중에 싹  밀고 다시 이쁘게 칠해야지 하고 있었는데ᆢ  무각질 얼짱이 될 가능성이 없는건가요?

    한번 저렇게 되면? ㅜ

    • 2021-08-26 10:01

      혹시 식용 올리브 오일을 바르셨나요? 올리브 오일은 경화되는 속도가 상당히 오래 걸리는 것이라, 바니쉬를 칠하기 전에 (생각보다 아주 긴) 충분한 건조시간이 필요해요. 어쩌면 백골상태에서 '막 쓰던(?)' 시간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자국들이 누적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구요. 어떤 제품을 쓰셨는지, 어떤 상태인지 보아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2021-08-26 11:07

    한 20년 전 거실 탁자를 구입할 때, 무지 탁자에 동백오일을 발라주고는 기름병을 주고 가더라구요.

    나중에 또 바르라며.. 그런데 또 바르진 않았어요.

    동백 기름은 코팅된 느낌보다는 흡수된 느낌인데,

    손 때가 타서 점점 더 진해지는 느낌도 있고, 전 나름 좋더라구요.

     

  • 2021-09-09 13:35

     현장과 연결되서 인가요? 그냥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 (2005)>       1. 퇴물 카우보이, 어머니를 찾아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두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휴대폰을 사적공간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다른 입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부 혹은 가족이라면 남과는 다른 정도로 공유해야 한다는 사람과 휴대폰을 본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까지, 여섯 명의 생각에서 차이들이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이 몸의 일부인 젊은 세대라면 당연히 사적공간이라는 쪽이 강하겠지만, 전제가 부부나 가족이 되면 그 경계에 대해 모호한 입장들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만큼 어떤 잘못도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달콤한 말이 여러 매체의 형태로 재생산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 만큼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의 오프닝은 인상적이다. 검은 화면에 난 두 개의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것이 주인공의 두 눈과 매우 닮아있음을 알게 된다. 광활한 서부에서 말을 타고 사라지는 인물의 모습에 정통 서부극인가 할 찰나에 볼품없고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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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2.01.17 | 조회 314
요요와 불교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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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3 | 조회 28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인문약방
2022.01.02 | 조회 330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인문약방
2022.01.02 | 조회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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