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양생에세이 ③] 공생 딜레마 - 현민

인문약방
2022-01-0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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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 잣대가 허상이기도 하거니와 비인간 자기들은, 어쩌면 인간도 그렇게 따져지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 <숲은 생각한다>의 저자 에두아르도 콘은 숲으로 들어가 숲 속의 자기들을 밝혀내고자 했다면, 도시에서 자라고 살아가는 나는 새로운 고민에 맞닿게 됐다. 인간만이 가득해 보이는 이 도시의 비인간 자기들은 모두 안녕할까?

 

 

 

 

 

 

2. 피해자이며 구원받는 자와 가해자이며 구원자

 

유독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 길을 걷다가 차에 치인 고양이를 발견하거나, 길을 잃어 보이는 강아지를 만나는 일. 인도 한가운데서 죽은 비둘기를 보거나, 도로 한복판에서 멧꿩을 마주치는 일.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다. 다친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가면서 병원비로 있는 돈을 몽땅 쓸 각오를 했고, 길 잃은 강아지는 제 발로 집을 찾아가기를 바랬다. 죽은 비둘기를 묻어주고 싶지만 만질 수가 없었고, 약속시간에 늦어 꿩을 마주치고도 떠나버렸다. 이 도시에서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그들을 만날 때 나는 자주 당황스러워진다. 그들이 너무 살아있어서, 또는 너무 죽어있어서 나는 내가 한 선택들과 이 세상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가 도시에 살지 않았다면 그중 일부는 조금 더 수월하게 지나쳤을 수 있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인간만이 가득해 보이는, 그러나 비인간 동물들과도 함께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그들은 금방 바스라질 것 같다.

 

 

 

어떤 동물들은 집 안에서, 인간 가족이 되어 살아간다.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상식이 된 만큼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사는 일은 흔해졌다. 사람들은 동물을 ‘키운’다. 비인간 동물은 인간처럼 대해 지고 인간으로 키워진다. 인간은 본인을 엄마/아빠, 언니/오빠의 역할로 위치 짓고 동물들은 자연스레 동생, 아기로 부른다. 비인간들은 이성애 정상 가족의 역할을, 정상적인 인간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취약한 존재, 어리고 부족한 존재가 된다. 그들은 아기가 되어, 오이디푸스화 되어 인간과 관계 맺는다.

 

또 어떤 동물들은 인간들의 집 밖에서, 매일 생사를 오간다. 집 밖의 동물들은 그야말로 피해자가 된다.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어느 날 그 길에서(2006)>는 로드킬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세 명의 연구원의 자취를 따라간다.

 

"사람들은 다른데도 많은데 왜 하필 동물들이 도로로 올라와서 차에 치여 죽냐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가 없어요. 행동반경이 1.5km으로 가장 적은 너구리조차도, 도로를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어요. 수많은 야생동물이 잠자고, 짝짓기하고, 숨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서식지 유형이 필요한데 야생동물도 도로가 싫음에도 살아가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도로를 오가는 거죠."

 

며칠 전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운전자로써 이동을 하기 위해 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미 차에 치여 죽은 시체들을 지나치면서, 도로의 쓰레기들을 보며 시체일까 움찔거리는 내가 방관자 같이 느껴졌다. 잠재적 범죄자 같기도 했다.

 

고속도로가 아닌 나의 동네에서 비인간 동물을 만날 때도 고민은 이어진다. 이 길 잃은 강아지를 유기견 센터에 신고하면 2주 안에 안락사를 당하겠지? 하지만 이 길 위에 있으면 차에 치이거나 보신탕 재료가 될 수도 있겠지? 이 동물들을 그곳에 그대로 두고 오는 것은 존중일까, 방치일까? 아니면 그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내 세계에 끌어들이는 것은 개입일까, 상생일까? 왜 도시에서 동물들은 언제나 피해자일 수밖에 없을까? 왜 나는 그들의 친구가 아니라 구원자가 되나? 도로에 들어가면 위험한 걸 알지만 도로를 넘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차에 치인 동물들처럼, 인간의 것들은 그들의 삶에 너무 많이 개입되어 있다. 비인간 동물은 피해자이면서 구원받는 자가 되며 인간은 가해자이며 구원자가 된다. 정녕 비인간 동물은 도시에서 ‘자기’로써 대해질 수 없는 걸까?

 

 

3.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키니까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초반에는 이런 독백이 나온다.

 

‘다카가 숲 싸워라. 스즈가 숲 싸워라. 홍군이든 청군이든 어디든 져라. 패배한 너구리는 죽어버려라. 다카가 숲은 오늘 없어졌다. 스즈가 숲은 내일 없어진다. 남은 너구리는 살 곳이 없다. 남은 너구리는 어디로 가나? … 패배한 너구리는 죽여 버려라. 모두를 위해서 죽여야 해! 살아남아 봤자 소용이 없다. 남은 너구리는 신중히 행동하여 새끼를 안 낳도록 해야 한다. 새끼를 낳아봤자 소용이 없어. 너희가 살 숲이 없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도쿄 인근 산에 살던 너구리들이 도시화 개발로 인해 터전이 없어져 인간들에게 대항하여 생존 대작전을 펼치는 이야기이다. 영화 초반 도시화 개발이 시작되면서, 다카가 숲과 스즈가 숲에 살던 너구리들이 영역싸움을 벌일 때 나이 많은 너구리 할머니가 나타나 북을 치며 독백을 읊는다. 할머니의 호통을 듣고 단결한 숲의 너구리들은 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그들은 인간연구 5개년 계획에 돌입하고, 수년간 금지되어 있던 변신술을 배워 인간과의 결전을 준비한다. 변신술을 익힌 너구리들은 공사현장을 마비시키고, 사람들을 겁주고, 나무를 자를 수 없게 몸으로 버틴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결말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시도에도 인간들은 숲을 없애고 도시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끝에서 변신술이 불가능한 너구리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다 차에 치여 목숨을 잃고, 변신술이 가능한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위장하여 인간으로 살아간다.

 

결국은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걸까? 너구리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살아남아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 그러나 너구리들이 죽어야만 하는 세상이 인간에게 좋을 리 없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적에는 어떤 동물들이 살았을까? 그것이 인간이더라도, 인간이 아닌 동물이더라도 분명 한 종의 동물만이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무서워했을 테고, 절대로 침범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었을 테고, 또 가끔은 서로를 벗 삼아 살았을 것이다. 분명 그 시절의 동물들은 귀여운 존재도, 불쌍한 존재도 아니었을 것이다.

 

언젠가 sf소설에서 얼룩말들이 집단 자살하는 부분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이 아니라면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만으로도 너무 슬펐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이 먼저 겪고 있을 고난에 대해 생각해본다. 또 인간 중에서도 재난을 가장 먼저 겪을 이들을 생각해본다. 가난한 내 친구들이, 앞으로도 가난할 나와 내 친구들이 이 땅에 살았을 비인간 동물들처럼 쫓겨나지 않을 리 없다. 살아있는 것들은 살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자신을 바꿔내는데, 책 속 몇 사람들은 지구에 사는 짐승들이 자살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세상에 좋은 것과 나쁜 것만 있다면 사는 것이 좀 더 쉽겠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아서 이 글은 답도 없이 질문뿐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딜레마를 겪는 것이 삶을 살아내는 과정이 될 테다. 그럴 때, 삶이 자주 흔들릴 때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킨다’는 문장을 기억하며 지구에 사는 나와 내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댓글 2
  • 2022-01-03 14:04

    저는 잘 모르기도 하고 확신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어서 인간 아닌 self 들이 집단자살 하기 전에 방향이 틀어질지도 모르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현민님처럼 치열하게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어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여겨지거든요. 

    봄부터 날마다 산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갈 때마다 얼마나 다른지, 숲은 정말 살아있구나.. 하는 걸 매일 느껴요. 자연과 멀었던 저희 남편도 그 말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한사람씩 저마다의 계기로 지구 위에 인간이라는 개체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self 들에 관해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다면 달라지겠죠. 그랬으면 좋겠고요.

  • 2022-01-03 16:54

    집에 길냥이 가족이 왔는데 모두 네명이어요

    엄마는 매일 밥을 주고 차갑지 않는 물을 챙겨주고 살피십니다

    현민씨 에세이를 들은 후 그 아이들을 보며 나는 구원자일까?  생각하다가 과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하며 한동안 그들을 쳐다봅니다

    그들도 유리창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요

    남편은 집도 지어주고 추울까봐 담요도 넣어주고 문앞에 비닐막도 쳐주었는데 이제는 마당에서 쥐를 사냥하기도 하면서 거의 제집처럼 지내고 있네요

    그래도 우리가 나가면 경계하며 저만큼 떨어져서 우리를 살피긴 하지만요

    이들과 우리는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  하여간 귀엽고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현민씨를 통한 배움이 있었네요 ^^

봄날의 주역이야기
  인생은 참아야 할 일투성이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거나 변화하려고 한다. 새해 첫 일출을 보러 산으로, 바다로 가기도 하고, 새로 산 일기장에 정성들여 첫 줄을 쓴다. 작심삼일이 될 것이 뻔한 계획을 또 잡는다. 그런 새해의 다짐을 지키는 데는 크든 작든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술이나 담배를 끊는다던가, 매일 운동을 한다던가,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를 한다던가 하는 일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 실행에는 또 크든 작든 ‘절제’가 요구된다. 술이나 담배를 끊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금단증상처럼 견디기 힘든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운동이나 공부도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억누르거나 견뎌내야 한다. 운동을 하려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어하는 내 몸을 다스려야 하고, 공부도 가령 졸음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고, 견디고, 억눌러야 하는 일투성이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에서 늘 절제심을 시험받는다. 주역에도 이런 ‘절제’에 관한 괘가 있다. 60번째 수택절(水澤節)괘는 괘 자체가 60이라는 한 주기를 매듭짓는 자리에 위치해 있기도 하고, 인간사에서 중요한 절제를 다루는 괘이기도 하다. 절(節)은 수목의 마디, 뼈의 마디, 음절의 곡조, 사물의 한 단락, 규칙, 절제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절(節)이라는 글자에 대나무 죽(竹)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대나무가 마디 하나를 키우고 또 다른 마디 키우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인간을 비롯한 자연 속의 생명들은 그런 방식으로 삶을 펼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절제이다. 마디를 매듭짓고 마디를 새로 시작할 때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가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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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2.01.26 | 조회 667
지난 연재 읽기 길드다 아젠다
  대선이 이슈다. 이 말을 하는 나 자신도 어색하다. 그만큼 나는 대선에 관심이 없고, 정치나 시사 이슈들에 어둡다. 그런 내가 대선에 관한 글을 쓰게 되다니 너무 어이가 없지만, 그런 김에 내가 왜 이렇게 정치에 관심이 없는지, 내 주변의 20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해볼까 한다.     내 삶이랑 정치랑 무슨 상관인데        난 정치 자체에 비관적이라기보다는 정치와 내 삶이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느낀다. 파란색 정권일 때나 빨간색 정권일 때나 내 삶에서 체감한 차이는 없었다. 물론 알게 모르게 정책에 따른 혜택과 불이익을 받은 적도 있었겠지만, 그걸 정권의 영향으로 연결 지어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다. 법을 잘 지키며 살아온 것도 아니고(나는 무단횡단을 자주 한다), 오히려 법을 이용하면서 군대도 면제받았으니(중졸 학력으로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았는데, 그마저도 장기 대기자로 면제처리를 받았다), 국가 입장에서 보면 나쁜 놈이려나? 아니면 자기들 밥그릇 챙기려는 정책을 펼쳐도 관심 없는 호구?      반면 내가 처한 환경은 좀 특이하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문탁 주변 사람들은 왼쪽 성향이 강한데, 내가 자주 보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고향 친구들은 완전 오른쪽이다. 진보, 보수 같은 키워드만으로 두 집단을 설명할 순 없지만, 어쨌든 대략적으로는 그런 느낌이다. 그리고 내가 봐온 왼쪽은 ‘다 함께 잘 사는 삶’을 추구하지만,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그냥 이념적으로만 추구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반면 오른쪽은 모두가 잘사는 삶보다는 주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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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현(코코팰리 혹은 김왈리)
2022.01.23 | 조회 40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 (2005)>       1. 퇴물 카우보이, 어머니를 찾아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두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휴대폰을 사적공간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다른 입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부 혹은 가족이라면 남과는 다른 정도로 공유해야 한다는 사람과 휴대폰을 본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까지, 여섯 명의 생각에서 차이들이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이 몸의 일부인 젊은 세대라면 당연히 사적공간이라는 쪽이 강하겠지만, 전제가 부부나 가족이 되면 그 경계에 대해 모호한 입장들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만큼 어떤 잘못도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달콤한 말이 여러 매체의 형태로 재생산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 만큼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의 오프닝은 인상적이다. 검은 화면에 난 두 개의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것이 주인공의 두 눈과 매우 닮아있음을 알게 된다. 광활한 서부에서 말을 타고 사라지는 인물의 모습에 정통 서부극인가 할 찰나에 볼품없고 작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 (2005)>       1. 퇴물 카우보이, 어머니를 찾아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두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휴대폰을 사적공간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다른 입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부 혹은 가족이라면 남과는 다른 정도로 공유해야 한다는 사람과 휴대폰을 본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까지, 여섯 명의 생각에서 차이들이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이 몸의 일부인 젊은 세대라면 당연히 사적공간이라는 쪽이 강하겠지만, 전제가 부부나 가족이 되면 그 경계에 대해 모호한 입장들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만큼 어떤 잘못도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달콤한 말이 여러 매체의 형태로 재생산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 만큼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의 오프닝은 인상적이다. 검은 화면에 난 두 개의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것이 주인공의 두 눈과 매우 닮아있음을 알게 된다. 광활한 서부에서 말을 타고 사라지는 인물의 모습에 정통 서부극인가 할 찰나에 볼품없고 작은...
띠우
2022.01.17 | 조회 321
요요와 불교산책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요요
2022.01.16 | 조회 44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카메라로 드러나는 질문의 태도 |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 | 롤랑 조페 감독 | 1984             영화 <킬링필드>는 1973년 캄보디아에서 시작합니다. 인접한 베트남에서 전쟁에 패한 미국이 막 철수할 무렵이었죠. 그로 인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캄보디아 ‘론 놀’정권의 세력도 약해지고, 론 놀 역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즈’가 무정부 상태의 캄보디아를 장악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즈의 기자 시드니(샘 워터스톤)는 급박한 캄보디아의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수도 프놈펜으로 날아갑니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 현지통역인 겸 기자인 프란(행 S. 응고르)은 비행기가 연착되고, 지프차들이 어디론가 급하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합니다. 그의 예상대로 그날, 크메르 루즈군을 섬멸하기 위한 폭격이 미국의 잘못으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폭탄이 투하되고 수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왼쪽이 시드니, 오른쪽이 프란   다음 날 두 사람은 함께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려하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군의 방해로 미군 헬기를 이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기자라고, 기자!!” 물론 소용없습니다.시드니는 미군 대령에게도, 프란에게도...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카메라로 드러나는 질문의 태도 |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 | 롤랑 조페 감독 | 1984             영화 <킬링필드>는 1973년 캄보디아에서 시작합니다. 인접한 베트남에서 전쟁에 패한 미국이 막 철수할 무렵이었죠. 그로 인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캄보디아 ‘론 놀’정권의 세력도 약해지고, 론 놀 역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즈’가 무정부 상태의 캄보디아를 장악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즈의 기자 시드니(샘 워터스톤)는 급박한 캄보디아의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수도 프놈펜으로 날아갑니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 현지통역인 겸 기자인 프란(행 S. 응고르)은 비행기가 연착되고, 지프차들이 어디론가 급하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합니다. 그의 예상대로 그날, 크메르 루즈군을 섬멸하기 위한 폭격이 미국의 잘못으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폭탄이 투하되고 수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왼쪽이 시드니, 오른쪽이 프란   다음 날 두 사람은 함께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려하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군의 방해로 미군 헬기를 이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기자라고, 기자!!” 물론 소용없습니다.시드니는 미군 대령에게도, 프란에게도...
청량리
2022.01.03 | 조회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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