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양생에세이 ②]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타자를 마주할 수 있을까- 조은

인문약방
2022-01-0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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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그동안 사유할 수 있는 동물로서 고유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의 저자 에두아르도 콘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상징적’인 것이며, ‘상징적’인 것만이 기호는 아니라고 말한다. 기호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기호를 사용한다. 콘은 퍼스의 기호학을 참조하여 기호에 관해 설명한다. 기호에는 ‘상징적(symblic)’인 것뿐만 아니라 ‘아이콘적(iconic)’, ‘인덱스적(indexical)’ 기호가 있다고 말한다. 이 기호들을 만들어내고 해석하는 것을 기호작용이라고 하며, 기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우리로서 존재할 수 있다.

 

기호작용은 살아있는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살아있는 세계를 구성한다. 다수 종들 간의 관계가 가능하고 또한 그러한 관계를 분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기호적 성향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호작용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표상하는 세계들로부터 인간을 분리해서 묘사하는 이원론적인 인류학적 접근법을 넘어 일원론적인 접근법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을 넘어서 생각한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도 날을 세우고 살지만은 않을 것 같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공부하면서도 인간을 넘어선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는데,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인간을 넘어설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봉덕이는 생각한다

 

많은 종과의 기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고, ‘자기’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숲에 사는 루나족과 다르게 도시에 사는 인간들이 다른 존재와의 기호작용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고기동에 사는 나는 아파트에 사는 것보다는 비인간 존재들과 아주 조금 더 가까운 편이다. 새들이 밭에 있는 먹이를 먹으러 오거나,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 마주치는 개와 고양이, 가끔 운전하다가 만나는 고라니와 다람쥐.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 마주쳤던 개였다. 고기동에 이사를 온 지 8년이 다 되어가는데 지금까지도 동네를 돌아다니는 큰 개들이 무서워서 밤에 혼자 걷는 것은 피한다. 큰 개를 무서워했던 내가 대략 3년째 20킬로가 넘어가는 개, 봉덕이와 함께 살고 있다. 가장 가까운 비인간 동물인 봉덕이가 <숲은 생각한다>를 읽는 중간중간 생각났다.

 

 

 

 

봉덕이는 처음에는 밖에서 지내다가 현재는 집 안과 밖을 넘나들며 살고 있다. 밖에서 지낼 때는 지금보다 좀 더 야생적이었다. 날아다니는 새를 잡은 적도 있고, 쥐도 여러 마리 잡았다. 그때는 솔직히 봉덕이를 잘 알지 못했다. 아니, 봉덕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 봉덕이랑 마주치는 게 집을 나갈 때랑 들어올 때 마당에서 잠시 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두 발로 내 다리를 잡는 봉덕이를 떼고, 집으로 들어오기에 바빴다. 더 놀다 가라는 봉덕이의 행동을 어떤 의미(기호)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갑고, 더 있고 싶어서 그런 걸 가족들은 자꾸 훈련으로 가르쳐야 할 문제행동이라고 봤다. 그래서 여러 훈련을 시도했었다. 현관문에서 대문을 가는 길에 ‘앉아’를 시켜가며 간식을 주기도 했었고, 한동안은 무시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안으로 들어와서 긴 시간을 함께하니 자연스럽게 그 행동은 없어졌다. 긴 시간을 같이 생활하면서 나도 봉덕이도 서로의 기호를 전보다 더 잘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봉덕이가 나가고 싶을 때, 배가 고플 때, 놀고 싶을 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봉덕이는 우리가 언제 자려고 하는지, 나가려고 하는지, 산책하러 가는지를 구분한다.

 

나는 솔직히 ‘인간적’인 걸 넘어서 생각하는 걸 너무 원했지만, 한편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봉덕이랑 내가 기호작용을 통해서 각자 새로운 자기로 또 우리로 창발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지구를 넘어서

 

<숲은 생각한다> 마지막 세미나 시간에 나왔던 이야기가 있다. ‘기호’로 받아들이는 것. 그 말을 들었을 때 생각났던 책이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김초엽 작가의 sf 소설이다. 단편집으로 구성되어있는 이 책에서 ‘스펙트럼’이라는 단편이 생각났다. 외계 생명체를 탐사하는 연구원이었던 희진이 탐사 도중 조난을 당하며 낯선 행성에서 외계생명체 루이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루이는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행성에 있는 도구들로 그림을 그리는 데에 보낸다. 희진은 자신을 돌봐주는 루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외계 생명체들과 간단한 비언어적 의사소통도 가능해졌다. 희진은 연구원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행성을 분석하고 지구에 알리려고 했지만, 점차 지구의 도구들 없이, 행성 자체를 감각으로만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졌다. 희진은 루이의 그림들이 예술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의미를 기록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언어인 그림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포기했다. 희진은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루이, 네게는.”

희진은 루이의 눈에 비친 노을의 붉은 빛을 보았다.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희진은 결코 루이가 보는 방식으로 그 풍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희진은 루이가 보는 세계를 약간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고, 기쁨을 느꼈다.

 

나는 숲을 넘어서, 지구를 넘어서, 다른 존재를 저렇게 마주할 수 있을까. 아니 지구 안에서라도, 숲에서라도,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라도 타자를 마주할 수 있을까. <숲은 생각한다>에서 시작해서 우주로까지 가보았다. 나는 이 두 책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이 책들을 통해서 어렴풋이 느껴진다. 타자를 마주하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처음의 질문은 ‘어떻게 그 남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였다. 이해하고 싶었고,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은 마음의 방향이 조금 달라졌다. ‘남자’들에 방점을 찍은 저 질문 자체가 맞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남자의 범위를 벗어나 보는 것? 모든 남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범위를 벗어나서 그저 하나의 주체로서 관계를 맺는 것. 그 정도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난 그냥 어떤 타자와 마주하게 될 때 내 세상 안에서만 타자를 해석하기 싫다. 좀 더 넓은 타자를 마주하고 싶다. 나는 그런 노력을 기꺼이 하는 사람이다.

댓글 1
  • 2022-01-03 13:52

    좀 더 넓은 타자를 마주하는 노력을 기꺼이 하는 분이라면 이미 게임 오버~

     

봄날의 주역이야기
  인생은 참아야 할 일투성이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거나 변화하려고 한다. 새해 첫 일출을 보러 산으로, 바다로 가기도 하고, 새로 산 일기장에 정성들여 첫 줄을 쓴다. 작심삼일이 될 것이 뻔한 계획을 또 잡는다. 그런 새해의 다짐을 지키는 데는 크든 작든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술이나 담배를 끊는다던가, 매일 운동을 한다던가,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를 한다던가 하는 일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 실행에는 또 크든 작든 ‘절제’가 요구된다. 술이나 담배를 끊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금단증상처럼 견디기 힘든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운동이나 공부도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억누르거나 견뎌내야 한다. 운동을 하려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어하는 내 몸을 다스려야 하고, 공부도 가령 졸음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고, 견디고, 억눌러야 하는 일투성이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에서 늘 절제심을 시험받는다. 주역에도 이런 ‘절제’에 관한 괘가 있다. 60번째 수택절(水澤節)괘는 괘 자체가 60이라는 한 주기를 매듭짓는 자리에 위치해 있기도 하고, 인간사에서 중요한 절제를 다루는 괘이기도 하다. 절(節)은 수목의 마디, 뼈의 마디, 음절의 곡조, 사물의 한 단락, 규칙, 절제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절(節)이라는 글자에 대나무 죽(竹)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대나무가 마디 하나를 키우고 또 다른 마디 키우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인간을 비롯한 자연 속의 생명들은 그런 방식으로 삶을 펼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절제이다. 마디를 매듭짓고 마디를 새로 시작할 때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가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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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2.01.26 | 조회 666
지난 연재 읽기 길드다 아젠다
  대선이 이슈다. 이 말을 하는 나 자신도 어색하다. 그만큼 나는 대선에 관심이 없고, 정치나 시사 이슈들에 어둡다. 그런 내가 대선에 관한 글을 쓰게 되다니 너무 어이가 없지만, 그런 김에 내가 왜 이렇게 정치에 관심이 없는지, 내 주변의 20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해볼까 한다.     내 삶이랑 정치랑 무슨 상관인데        난 정치 자체에 비관적이라기보다는 정치와 내 삶이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느낀다. 파란색 정권일 때나 빨간색 정권일 때나 내 삶에서 체감한 차이는 없었다. 물론 알게 모르게 정책에 따른 혜택과 불이익을 받은 적도 있었겠지만, 그걸 정권의 영향으로 연결 지어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다. 법을 잘 지키며 살아온 것도 아니고(나는 무단횡단을 자주 한다), 오히려 법을 이용하면서 군대도 면제받았으니(중졸 학력으로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았는데, 그마저도 장기 대기자로 면제처리를 받았다), 국가 입장에서 보면 나쁜 놈이려나? 아니면 자기들 밥그릇 챙기려는 정책을 펼쳐도 관심 없는 호구?      반면 내가 처한 환경은 좀 특이하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문탁 주변 사람들은 왼쪽 성향이 강한데, 내가 자주 보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고향 친구들은 완전 오른쪽이다. 진보, 보수 같은 키워드만으로 두 집단을 설명할 순 없지만, 어쨌든 대략적으로는 그런 느낌이다. 그리고 내가 봐온 왼쪽은 ‘다 함께 잘 사는 삶’을 추구하지만,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그냥 이념적으로만 추구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반면 오른쪽은 모두가 잘사는 삶보다는 주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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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현(코코팰리 혹은 김왈리)
2022.01.23 | 조회 40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 (2005)>       1. 퇴물 카우보이, 어머니를 찾아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두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휴대폰을 사적공간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다른 입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부 혹은 가족이라면 남과는 다른 정도로 공유해야 한다는 사람과 휴대폰을 본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까지, 여섯 명의 생각에서 차이들이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이 몸의 일부인 젊은 세대라면 당연히 사적공간이라는 쪽이 강하겠지만, 전제가 부부나 가족이 되면 그 경계에 대해 모호한 입장들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만큼 어떤 잘못도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달콤한 말이 여러 매체의 형태로 재생산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 만큼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의 오프닝은 인상적이다. 검은 화면에 난 두 개의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것이 주인공의 두 눈과 매우 닮아있음을 알게 된다. 광활한 서부에서 말을 타고 사라지는 인물의 모습에 정통 서부극인가 할 찰나에 볼품없고 작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 (2005)>       1. 퇴물 카우보이, 어머니를 찾아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두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휴대폰을 사적공간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다른 입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부 혹은 가족이라면 남과는 다른 정도로 공유해야 한다는 사람과 휴대폰을 본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까지, 여섯 명의 생각에서 차이들이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이 몸의 일부인 젊은 세대라면 당연히 사적공간이라는 쪽이 강하겠지만, 전제가 부부나 가족이 되면 그 경계에 대해 모호한 입장들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만큼 어떤 잘못도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달콤한 말이 여러 매체의 형태로 재생산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 만큼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의 오프닝은 인상적이다. 검은 화면에 난 두 개의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것이 주인공의 두 눈과 매우 닮아있음을 알게 된다. 광활한 서부에서 말을 타고 사라지는 인물의 모습에 정통 서부극인가 할 찰나에 볼품없고 작은...
띠우
2022.01.17 | 조회 319
요요와 불교산책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요요
2022.01.16 | 조회 44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카메라로 드러나는 질문의 태도 |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 | 롤랑 조페 감독 | 1984             영화 <킬링필드>는 1973년 캄보디아에서 시작합니다. 인접한 베트남에서 전쟁에 패한 미국이 막 철수할 무렵이었죠. 그로 인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캄보디아 ‘론 놀’정권의 세력도 약해지고, 론 놀 역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즈’가 무정부 상태의 캄보디아를 장악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즈의 기자 시드니(샘 워터스톤)는 급박한 캄보디아의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수도 프놈펜으로 날아갑니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 현지통역인 겸 기자인 프란(행 S. 응고르)은 비행기가 연착되고, 지프차들이 어디론가 급하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합니다. 그의 예상대로 그날, 크메르 루즈군을 섬멸하기 위한 폭격이 미국의 잘못으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폭탄이 투하되고 수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왼쪽이 시드니, 오른쪽이 프란   다음 날 두 사람은 함께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려하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군의 방해로 미군 헬기를 이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기자라고, 기자!!” 물론 소용없습니다.시드니는 미군 대령에게도, 프란에게도...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카메라로 드러나는 질문의 태도 |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 | 롤랑 조페 감독 | 1984             영화 <킬링필드>는 1973년 캄보디아에서 시작합니다. 인접한 베트남에서 전쟁에 패한 미국이 막 철수할 무렵이었죠. 그로 인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캄보디아 ‘론 놀’정권의 세력도 약해지고, 론 놀 역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즈’가 무정부 상태의 캄보디아를 장악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즈의 기자 시드니(샘 워터스톤)는 급박한 캄보디아의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수도 프놈펜으로 날아갑니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 현지통역인 겸 기자인 프란(행 S. 응고르)은 비행기가 연착되고, 지프차들이 어디론가 급하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합니다. 그의 예상대로 그날, 크메르 루즈군을 섬멸하기 위한 폭격이 미국의 잘못으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폭탄이 투하되고 수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왼쪽이 시드니, 오른쪽이 프란   다음 날 두 사람은 함께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려하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군의 방해로 미군 헬기를 이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기자라고, 기자!!” 물론 소용없습니다.시드니는 미군 대령에게도, 프란에게도...
청량리
2022.01.03 | 조회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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