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4회] 무엇이 비린 것인가?

요요
2022-01-16 17:08
448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현실을 웅변한다.

 

새벽이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니 더더욱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집단 사육하고 그렇게 생산된 고기를 먹는 삶의 방식에 대해 회의가 커진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면서 고심 끝에 나름의 윤리적 결정으로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육식 권하는 사회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고기 권하는 사회이다. 육식문화는 튼튼한 몸과 강인한 체력을 강조하는 건강담론, 위생담론과 함께 사회 진보와 경제 성장의 상징이 되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의 길을 간 일본을 보자. 일본은 7세기 이후 1000년이 넘도록 이런 저런 이유로 네발달린 짐승을 먹는 것이 금지된 나라였다. 그런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의 정책으로 육식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몸집이 왜소한 것도 나라가 부강하지 않은 것도 육식을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와규가 맛있고 비싼 고급 쇠고기로 등극하고 쓰끼야끼와 같은 음식이 일본의 대표음식이 된 것은 채 150년이 되지 않는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불교문화마저 바꾸어버렸다. 그때부터 승려들의 육식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개화된 문명인으로 살려면 육식을 좋아해야 했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인도도 오랫동안 채식문화가 일반적이었다. 소년시절의 간디 역시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면 서양인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디의 부모는 경건한 힌두교도로 육식을 멀리했다. 간디는 부모 몰래 친구들과 육식을 한 것 때문에 양심의 고통을 느꼈던 경험을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근대문명은 고기를 전 세계의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공장식 축산과 도살은 근대문명에 필수적인 하나의 구성요소가 되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 건강해질 수 없고,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믿음이 지배한다. 채식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생각과 행위를 육식주의, 고기 중독이라고 부른다. 육식이 몸에 좋고 더 맛있다는 것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미각의 쾌락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관음증적 포르노에 가까운 먹방 마다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등장하고 그것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우리를 보면 육식주의가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육식은 비린 것, 채식은 향기로운 것?

그렇다면 붓다는 육식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불교는 육식을 금한다는 우리의 통념과 달리 붓다는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걸식으로 음식을 구한 고대 인도의 불교 수행승들은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붓다가 금지한 것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폭력과 살생이었지 육식이 아니었다. 세 가지 경우에 육식이 금지되었다.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거나, 자신을 위해 죽였다고 듣거나, 자신에게 먹이기 위해 죽인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는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주어진 음식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이런 불교 수행승들의 음식문화는 육식과 기름진 음식을 엄격하게 금지하던 수행자들로부터 의혹을 샀다. 『숫타니파타』에는 대놓고 붓다의 육식을 문제 삼는 대화가 등장한다. 히말라야산에서 야생수수, 풀씨, 야생 콩, 나무열매와 같은 수수하고 거친 음식만을 먹으며 금욕하던 아마간다라는 고행자가 있었다. 그는 육식을 비린 것,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간다는 붓다가 물고기나 동물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알고 붓다를 찾아가 비난 섞인 질문을 던진다.

 

하느님의 친척인 그대는 새의 고기를 훌륭하게 요리해서 쌀밥과 함께 즐기면서도, 나는 비린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뜻을 그대에게 묻건대 그대가 말한 비린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아마간다의 물음에 붓다는 무엇이라고 답했을까? 붓다의 대답은 명확했다.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말과 행위,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고 비천하게 행동하는 것이 비린 것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육식이냐 채식이냐를 가지고 비린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려 하지 말고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답이었다.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붓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무엇을 살펴야 하는 지 놓치고 있는 아마간다의 허를 찔렀다. 붓다는 매일같이 고행하고 경전을 외우고 철마다 수련하는 루틴에 철저하다고 하여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고 그 조건을 잘 살펴 의혹에서 떠나는 것이다. 청정한 삶은 어떤 금기나 계율을 묵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는 것, 즉 지혜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붓다는 식사초대를 받아 훌륭한 음식이 나오면 거절하지도 물리치지도 않았다. 어떤 음식이든 감사히 먹었다. 붓다의 위대함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붓다의 위대함은 음식의 맛에 탐닉하거나 매혹되지 않는 데 있었다. 식사 초대에 응하여 음식을 먹을 때 붓다는 다음에도 이렇게 좋은 음식을 대접받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미각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렸기 때문이다.(『맛지마니까야』 『지바까의 경』) 육식이냐, 채식이냐가 아니라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요구한 일상의 윤리이자 태도였다. 비린 것은 육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괴로움을 낳는 탐·진·치인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붓다는 당시의 고행주의자들과 달리 금욕과 고행을 절대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쾌락주의는 눈먼 욕망을 따르는 것이요, 고행주의는 욕망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붓다의 관심은 육식이냐 채식이냐, 쾌락이냐 고행이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붓다가 감각적 쾌락과 미식을 즐긴다고 오해받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한편 이와 반대로 붓다가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바라문 우다인은 제자들이 붓다를 존경하고 따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 했다. 그는 붓다가 ‘식사를 적게 하고, 어떠한 옷으로도 만족하고, 어떠한 음식으로도 만족하고, 어떠한 처소로도 만족하고, 고요한 숲속에서 멀리 여읨을 닦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붓다를 찾아가 그런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붓다는 그의 믿음에 어긋나는 대답을 했다. 자신은 때때로 양껏 배부르게 먹기도 하며, 좋은 옷감으로 만든 멋진 옷을 입기도 하고, 고급요리를 먹기도 하며, 럭셔리한 인테리어가 된 누각에서 지내기도 하고, 재가자, 대신들, 왕들, 이교도들과 어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제자들이 자신을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금욕 때문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지혜를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답한 것이다.(『맛지마니까야』 『훌륭한 가문의 우다인에 대한 큰 경』)

 

붓다의 대답은 ‘나의 가르침은 고행이나 금욕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반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간다의 물음에 대해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한 대답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붓다가 누구보다도 당시에 성행했던, 제사를 빙자한 무의미한 동물 살육에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고, 잔인하고, 공격적이고, 무례한 것이야말로 비린 것이다. 비린 것은 우리 자신을 괴로움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타자들 또한 괴로움에 빠뜨리는 말과 행동과 생각이다.

 

우리는 더 이상 붓다가 비판했던 동물희생제의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고기가 되기 위해 사육되고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수는 당시의 동물희생제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나라에서만 2020년 한 해에 도살된 전체 가축 수가 11억 마리가 넘는다.(이중 10억 마리가 닭이다.) 전 지구적인 범위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매년 100억 마리 이상의 가축이 도살되고 있다. 만일 지금 우리의 세상에 붓다가 함께 살고 있다면 아마간다의 질문에 대해 붓다는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

 

 

나는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니다’라는 붓다의 대답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는 붓다의 대답은 피비린내와 악취가 진동하는 육식의 현실에 대한 외면도 도피도 체념도 합리화도 아니다. 붓다의 대답은 육식은 나쁘고 채식은 좋다는 선악 판단이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나아가 그 대답은 비린 것의 근본을 탐색하게 한다. 더 맛있는 것을 원하고 미각의 쾌락을 좇고, 그리고 생명 보다 자본과 이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욕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마간다는 ‘당신이 생각하는 비린 것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붓다는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붓다의 대답을 듣고 아마간다는 그동안 자신이 옳다고 고수했던 고행과 금욕을 버리고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한편으로는 동물들을 오직 인간을 위한 고기로만 취급하는 공장식 축산의 현실에 분노하고, 다른 한편 종종 육식과 채식 사이에서 번뇌에 빠지곤 하는 우리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 사이 그리고 아마간다와 붓다 사이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일까? 나는 언제쯤이면 붓다를 따라 담담하게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까?

 

 

 

 

 

댓글 10
  • 2022-01-17 10:35

    미각의 쾌락~ 딱 요즘 맛집전성시대 문화네요. 전 어디선가 본 이 말을 자주 떠올리는데요, 맛을 탐닉할수록 멋을 상실한다는..멋을 찾고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 멋진 세상에 대한 성찰로 읽혔어요^^

  • 2022-01-17 10:40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ㅋㅋ... 요요님의 글을 읽으면서 예전에 동아시아 근대성 공부할 때 읽었던 <메이로쿠자시>(明六雜誌)가 떠올랐어요. 그 잡지는 메이지초기 계몽학술잡지였어요.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만들었던 최초의 근대잡지이죠. 그런데 그 잡지에 '소고기' 이야기가 엄청 나와요. '소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근대 일본 지식인들의 엄청난 이슈였죠. 단발이나 양복 못지 않게 소고기를 먹는 문제가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가, 아닌가의 바로미터였으니까요. 결국 1872년(메이지 5년) 천황은 고기반찬을 들이라 명합니다. 근대화가 공식적으로 천명된 것이지요.

    그런데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오랫동안 육식을 해왔지요.세종대왕이 엄청 육식을 즐겼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당뇨?! ㅋㅋㅋ)  왜 전근대 일본사회는 육식을 하지 않았는데 조선은 육식을 했을까? 자기수양-성리학적 주체인 조선 사대부들은 육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 이런 궁금증이 듭니다.

    갑자기 육식에 대한 문화적 해석, 고고학적 접근을 해보고 싶어졌어요^^ 

  • 2022-01-17 10:55

    최근 <Seaspiracy>와 <Cowspiracy>라는 다큐를 보고... 식구들과 먹거리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고민이 깊어졌더랬지요.

    부다의 가르침에 대한 선생님의 글이 참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무엇이 비린것이고, 탐진치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고민으로부터 해탈하는 지혜!

    탐나네요^^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 2022-01-17 11:20

     "육식이냐, 채식이냐가 아니라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요구한 일상의 윤리이자 태도였다. 비린 것은 육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괴로움을 낳는 탐·진·치인 것이다."

    요즘 여러가지 이유로 채식을 해야하나 고민중이었는데 샘 글을 읽으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오네요^^

    감사합니다~~

     

  • 2022-01-17 11:25

    너무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1-17 12:44

    무엇이 비린 것인가...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채식모임하면서 고민했던 부분이라 깊이 와닿았습니다

    요요샘,  감사합니다~~

     

  • 2022-01-17 18:23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일 수 있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1-18 09:54

    주말에 만난 아낫님은 비건이세요. 아낫님은 공장삭축산과 도살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위험성을 말씀하시더라구요. 사람다운 일을 하기 어려운 세상이네요....잘 읽었습니다.

  • 2022-01-19 18:11

    오랜 질문을 여러 결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2-06 11:23

    먹는 걸 좋아하는 자신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들어온 한 구절은 이거에요.

     “붓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무엇을 살펴야 하는 지 놓치고 있는 아마간다의 허를 찔렀다.”

     

봄날의 주역이야기
  인생은 참아야 할 일투성이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거나 변화하려고 한다. 새해 첫 일출을 보러 산으로, 바다로 가기도 하고, 새로 산 일기장에 정성들여 첫 줄을 쓴다. 작심삼일이 될 것이 뻔한 계획을 또 잡는다. 그런 새해의 다짐을 지키는 데는 크든 작든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술이나 담배를 끊는다던가, 매일 운동을 한다던가,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를 한다던가 하는 일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 실행에는 또 크든 작든 ‘절제’가 요구된다. 술이나 담배를 끊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금단증상처럼 견디기 힘든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운동이나 공부도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억누르거나 견뎌내야 한다. 운동을 하려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어하는 내 몸을 다스려야 하고, 공부도 가령 졸음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고, 견디고, 억눌러야 하는 일투성이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에서 늘 절제심을 시험받는다. 주역에도 이런 ‘절제’에 관한 괘가 있다. 60번째 수택절(水澤節)괘는 괘 자체가 60이라는 한 주기를 매듭짓는 자리에 위치해 있기도 하고, 인간사에서 중요한 절제를 다루는 괘이기도 하다. 절(節)은 수목의 마디, 뼈의 마디, 음절의 곡조, 사물의 한 단락, 규칙, 절제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절(節)이라는 글자에 대나무 죽(竹)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대나무가 마디 하나를 키우고 또 다른 마디 키우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인간을 비롯한 자연 속의 생명들은 그런 방식으로 삶을 펼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절제이다. 마디를 매듭짓고 마디를 새로 시작할 때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가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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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2.01.26 | 조회 667
지난 연재 읽기 길드다 아젠다
  대선이 이슈다. 이 말을 하는 나 자신도 어색하다. 그만큼 나는 대선에 관심이 없고, 정치나 시사 이슈들에 어둡다. 그런 내가 대선에 관한 글을 쓰게 되다니 너무 어이가 없지만, 그런 김에 내가 왜 이렇게 정치에 관심이 없는지, 내 주변의 20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해볼까 한다.     내 삶이랑 정치랑 무슨 상관인데        난 정치 자체에 비관적이라기보다는 정치와 내 삶이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느낀다. 파란색 정권일 때나 빨간색 정권일 때나 내 삶에서 체감한 차이는 없었다. 물론 알게 모르게 정책에 따른 혜택과 불이익을 받은 적도 있었겠지만, 그걸 정권의 영향으로 연결 지어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다. 법을 잘 지키며 살아온 것도 아니고(나는 무단횡단을 자주 한다), 오히려 법을 이용하면서 군대도 면제받았으니(중졸 학력으로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았는데, 그마저도 장기 대기자로 면제처리를 받았다), 국가 입장에서 보면 나쁜 놈이려나? 아니면 자기들 밥그릇 챙기려는 정책을 펼쳐도 관심 없는 호구?      반면 내가 처한 환경은 좀 특이하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문탁 주변 사람들은 왼쪽 성향이 강한데, 내가 자주 보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고향 친구들은 완전 오른쪽이다. 진보, 보수 같은 키워드만으로 두 집단을 설명할 순 없지만, 어쨌든 대략적으로는 그런 느낌이다. 그리고 내가 봐온 왼쪽은 ‘다 함께 잘 사는 삶’을 추구하지만,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그냥 이념적으로만 추구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반면 오른쪽은 모두가 잘사는 삶보다는 주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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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현(코코팰리 혹은 김왈리)
2022.01.23 | 조회 40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 (2005)>       1. 퇴물 카우보이, 어머니를 찾아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두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휴대폰을 사적공간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다른 입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부 혹은 가족이라면 남과는 다른 정도로 공유해야 한다는 사람과 휴대폰을 본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까지, 여섯 명의 생각에서 차이들이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이 몸의 일부인 젊은 세대라면 당연히 사적공간이라는 쪽이 강하겠지만, 전제가 부부나 가족이 되면 그 경계에 대해 모호한 입장들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만큼 어떤 잘못도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달콤한 말이 여러 매체의 형태로 재생산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 만큼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의 오프닝은 인상적이다. 검은 화면에 난 두 개의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것이 주인공의 두 눈과 매우 닮아있음을 알게 된다. 광활한 서부에서 말을 타고 사라지는 인물의 모습에 정통 서부극인가 할 찰나에 볼품없고 작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삶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 (2005)>       1. 퇴물 카우보이, 어머니를 찾아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두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휴대폰을 사적공간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다른 입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부 혹은 가족이라면 남과는 다른 정도로 공유해야 한다는 사람과 휴대폰을 본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까지, 여섯 명의 생각에서 차이들이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휴대폰이 몸의 일부인 젊은 세대라면 당연히 사적공간이라는 쪽이 강하겠지만, 전제가 부부나 가족이 되면 그 경계에 대해 모호한 입장들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만큼 어떤 잘못도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달콤한 말이 여러 매체의 형태로 재생산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 만큼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의 오프닝은 인상적이다. 검은 화면에 난 두 개의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것이 주인공의 두 눈과 매우 닮아있음을 알게 된다. 광활한 서부에서 말을 타고 사라지는 인물의 모습에 정통 서부극인가 할 찰나에 볼품없고 작은...
띠우
2022.01.17 | 조회 320
요요와 불교산책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요요
2022.01.16 | 조회 44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카메라로 드러나는 질문의 태도 |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 | 롤랑 조페 감독 | 1984             영화 <킬링필드>는 1973년 캄보디아에서 시작합니다. 인접한 베트남에서 전쟁에 패한 미국이 막 철수할 무렵이었죠. 그로 인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캄보디아 ‘론 놀’정권의 세력도 약해지고, 론 놀 역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즈’가 무정부 상태의 캄보디아를 장악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즈의 기자 시드니(샘 워터스톤)는 급박한 캄보디아의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수도 프놈펜으로 날아갑니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 현지통역인 겸 기자인 프란(행 S. 응고르)은 비행기가 연착되고, 지프차들이 어디론가 급하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합니다. 그의 예상대로 그날, 크메르 루즈군을 섬멸하기 위한 폭격이 미국의 잘못으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폭탄이 투하되고 수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왼쪽이 시드니, 오른쪽이 프란   다음 날 두 사람은 함께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려하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군의 방해로 미군 헬기를 이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기자라고, 기자!!” 물론 소용없습니다.시드니는 미군 대령에게도, 프란에게도...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카메라로 드러나는 질문의 태도 |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 | 롤랑 조페 감독 | 1984             영화 <킬링필드>는 1973년 캄보디아에서 시작합니다. 인접한 베트남에서 전쟁에 패한 미국이 막 철수할 무렵이었죠. 그로 인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캄보디아 ‘론 놀’정권의 세력도 약해지고, 론 놀 역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즈’가 무정부 상태의 캄보디아를 장악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즈의 기자 시드니(샘 워터스톤)는 급박한 캄보디아의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수도 프놈펜으로 날아갑니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 현지통역인 겸 기자인 프란(행 S. 응고르)은 비행기가 연착되고, 지프차들이 어디론가 급하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합니다. 그의 예상대로 그날, 크메르 루즈군을 섬멸하기 위한 폭격이 미국의 잘못으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폭탄이 투하되고 수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왼쪽이 시드니, 오른쪽이 프란   다음 날 두 사람은 함께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려하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군의 방해로 미군 헬기를 이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기자라고, 기자!!” 물론 소용없습니다.시드니는 미군 대령에게도, 프란에게도...
청량리
2022.01.03 | 조회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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