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 읽기 길드다 아젠다
차명식     2018년, 길드다가 ‘청년 인문학 스타트업’을 표방하며 첫 기치를 올렸다.    2020년, 길드다의 목소리로서 ‘아젠다’의 첫 호가 발간됐다.     그리고 길드다 5년 차, 아젠다 3년 차인 올해 길드다와 아젠다는 함께 그 첫 장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작에 임한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자면 길드다는 ‘청년’, ‘인문학’, ‘자립’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행한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의 토양이었다. 이 표현은 꽤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길드다를 만들 당시의 소개 글을 살펴보면 “길드다는 대학도 회사도 아니지만 우정으로 맺어진 일과 지식의 네트워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제도 교육)과는 다른 형태로 함께 공부하는’ 네트워크이자 ‘회사와는 다른 형태로 함께 일하며 자립을 추구하는’ 네트워크라는 뜻이다. 즉 학문의 탐구와 물질적 삶의 조건들(물론 후자는 경제적 측면을 포함한다)을 한데 추구하되 이미 널리 알려지고 확립되어 있는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는 않겠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길드다는 모든 면에서 실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문학으로 돈을 어떻게 벌 것인지, 번 돈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모자라는 수입은 어떻게 채울 것인지, 업무를 어떻게 분담하고 또 협업할 것인지……무엇보다 그 모든 것에 앞서 ‘무엇을 할 것인지’도.     ‘보통 다 그렇게 한다’가 근거가 될 수 없는 시도들이었기에 길드다의 활동은 항상 예상치 못했던 기쁨의 순간들과 그보다 좀 더 많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을 맞닥뜨렸다. 마지막으로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활동을 되새기면서 길드다-아젠다 1.0을 마무리해 보고자 한다.        2019...
차명식     2018년, 길드다가 ‘청년 인문학 스타트업’을 표방하며 첫 기치를 올렸다.    2020년, 길드다의 목소리로서 ‘아젠다’의 첫 호가 발간됐다.     그리고 길드다 5년 차, 아젠다 3년 차인 올해 길드다와 아젠다는 함께 그 첫 장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작에 임한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자면 길드다는 ‘청년’, ‘인문학’, ‘자립’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행한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의 토양이었다. 이 표현은 꽤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길드다를 만들 당시의 소개 글을 살펴보면 “길드다는 대학도 회사도 아니지만 우정으로 맺어진 일과 지식의 네트워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제도 교육)과는 다른 형태로 함께 공부하는’ 네트워크이자 ‘회사와는 다른 형태로 함께 일하며 자립을 추구하는’ 네트워크라는 뜻이다. 즉 학문의 탐구와 물질적 삶의 조건들(물론 후자는 경제적 측면을 포함한다)을 한데 추구하되 이미 널리 알려지고 확립되어 있는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는 않겠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길드다는 모든 면에서 실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문학으로 돈을 어떻게 벌 것인지, 번 돈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모자라는 수입은 어떻게 채울 것인지, 업무를 어떻게 분담하고 또 협업할 것인지……무엇보다 그 모든 것에 앞서 ‘무엇을 할 것인지’도.     ‘보통 다 그렇게 한다’가 근거가 될 수 없는 시도들이었기에 길드다의 활동은 항상 예상치 못했던 기쁨의 순간들과 그보다 좀 더 많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을 맞닥뜨렸다. 마지막으로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활동을 되새기면서 길드다-아젠다 1.0을 마무리해 보고자 한다.        2019...
문탁
2022.03.25 | 조회 225
지난 연재 읽기 길드다 아젠다
재빵        <길드다>가 출범한 이후로 텍스트랩과 공산품에 참여하는 동안 나는 친구들에게 일요일마다 길드다에 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 재영아 일요일에 뭐 하니 시간 되면 잠깐 볼까? - 아 나 일요일마다 하는 세미나가 있어 - 아 맞다 너 ‘문탁’ 가지      분명히 내가 ‘길드다’라는 단어를 몇 년간 사용해왔음에도 여전히 친구들의 인식 속에서는 ‘길드다’가 ‘문탁’의 대체 단어가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탁’이라는 단어가 시간상 더 오랜 기간 입력된 단어였고, 공간적인 의미로도 ‘문탁’이라는 단어가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혹 친구들이 수지구 수풍로 131번길 5*에 찾아올 일이 있는 경우에 나는 매번 지도 어플에서 ‘문탁네트워크’를 검색하고 오라고 설명해 주었다(지금 알았는데 ‘길드다’도 어플에 검색하니 나온다!). 그리고 소신 발언을 하자면 ‘문탁’이라는 단어가 ‘길드다’라는 단어보다는 부르기에도 외우기에도 편한 것 같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리매김에 실패한 가장 큰 까닭은 내가 ‘길드다’라는 공간 혹은 네트워크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지금 다시 설명해 보라고 해도 나는 온전히 설명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청년’, ‘생존’, ‘다름’, ‘같이’, ‘회사’, ‘공동체’라는 단어들을 섞어 애매모호하게 설명했던 것 같다. 실제로 특정 상황 속에서 길드다 멤버들이 길드다에 대해서 소개할 때 그들도 ‘음... 어떻게 얘기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를 앞에 깔아두고 설명을 이어나가는 걸 본 적이 몇 번 있다.      그렇게 나는 <길드다>가 어떤...
재빵        <길드다>가 출범한 이후로 텍스트랩과 공산품에 참여하는 동안 나는 친구들에게 일요일마다 길드다에 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 재영아 일요일에 뭐 하니 시간 되면 잠깐 볼까? - 아 나 일요일마다 하는 세미나가 있어 - 아 맞다 너 ‘문탁’ 가지      분명히 내가 ‘길드다’라는 단어를 몇 년간 사용해왔음에도 여전히 친구들의 인식 속에서는 ‘길드다’가 ‘문탁’의 대체 단어가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탁’이라는 단어가 시간상 더 오랜 기간 입력된 단어였고, 공간적인 의미로도 ‘문탁’이라는 단어가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혹 친구들이 수지구 수풍로 131번길 5*에 찾아올 일이 있는 경우에 나는 매번 지도 어플에서 ‘문탁네트워크’를 검색하고 오라고 설명해 주었다(지금 알았는데 ‘길드다’도 어플에 검색하니 나온다!). 그리고 소신 발언을 하자면 ‘문탁’이라는 단어가 ‘길드다’라는 단어보다는 부르기에도 외우기에도 편한 것 같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리매김에 실패한 가장 큰 까닭은 내가 ‘길드다’라는 공간 혹은 네트워크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지금 다시 설명해 보라고 해도 나는 온전히 설명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청년’, ‘생존’, ‘다름’, ‘같이’, ‘회사’, ‘공동체’라는 단어들을 섞어 애매모호하게 설명했던 것 같다. 실제로 특정 상황 속에서 길드다 멤버들이 길드다에 대해서 소개할 때 그들도 ‘음... 어떻게 얘기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를 앞에 깔아두고 설명을 이어나가는 걸 본 적이 몇 번 있다.      그렇게 나는 <길드다>가 어떤...
문탁
2022.03.25 | 조회 201
요요와 불교산책
나는 멈추었다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맛지마니까야』 86, 『앙굴리말라의 경』)   앙굴리말라 이야기 초기 경전 『앙굴리말라의 경』에는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앙굴리말라의 어릴 적 이름은 비폭력이라는 뜻의 아힘사카(Ahimsaka)였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인 후 손가락을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탁발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한 후 앙굴리말라가 출몰하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마다 그 길은 위험하다고 붓다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묵묵히 그저 길을 갈 뿐이었다. 멀리서 붓다가 오는 것을 본 앙굴리말라는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을 갖추고 붓다에게 다가갔다.   나는 붓다가 어떤 방법으로 사나운 앙굴리말라를 상대할지 궁금했다. 내가 기대한 시나리오는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다 결국 지쳐 떨어져 항복하거나, 활을 쏘고 날카로운 무기를 던져도 붓다를 맞히지 못하는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초인적인 신통력이 아니고서는 앙굴리말라를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를 보면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경전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무장한 장정들 수십 명이 몰려가도 속절없이 앙굴리말라에게 당하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혈혈단신 홀로 앙굴리말라를 향해 걸어오는 수행자 한 사람. 그는 앙굴리말라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벌벌 떨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태연자약했다. 그 수행자에게서...
나는 멈추었다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맛지마니까야』 86, 『앙굴리말라의 경』)   앙굴리말라 이야기 초기 경전 『앙굴리말라의 경』에는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앙굴리말라의 어릴 적 이름은 비폭력이라는 뜻의 아힘사카(Ahimsaka)였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인 후 손가락을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탁발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한 후 앙굴리말라가 출몰하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마다 그 길은 위험하다고 붓다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묵묵히 그저 길을 갈 뿐이었다. 멀리서 붓다가 오는 것을 본 앙굴리말라는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을 갖추고 붓다에게 다가갔다.   나는 붓다가 어떤 방법으로 사나운 앙굴리말라를 상대할지 궁금했다. 내가 기대한 시나리오는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다 결국 지쳐 떨어져 항복하거나, 활을 쏘고 날카로운 무기를 던져도 붓다를 맞히지 못하는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초인적인 신통력이 아니고서는 앙굴리말라를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를 보면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경전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무장한 장정들 수십 명이 몰려가도 속절없이 앙굴리말라에게 당하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혈혈단신 홀로 앙굴리말라를 향해 걸어오는 수행자 한 사람. 그는 앙굴리말라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벌벌 떨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태연자약했다. 그 수행자에게서...
요요
2022.03.18 | 조회 44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덧없는 죽음의 시대 이장호의 <바보선언(1983)>   1. 절망에서 실험정신이 피어나다   1960년대 활발한 르네상스 시기를 보냈던 한국영화는 1972년 유신헌법 선포를 전후로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져갔다.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과는 반대로 영화소재는 제한되었고, 반공영화나 정책선전 영화들이 대거 만들어져 국가정책 홍보에 앞장섰다. 이 시기 상업영화로는 하이틴물이나 에로영화가 대량으로 만들어졌으며 영화제작도 허가없이는 불가능해졌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서 연출을 시작했던 이장호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한국문화예술계를 뒤흔들었던 대마초사건(1975)에 연루된다. 이를 계기로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연스레 의식화 과정을 겪는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들을 이어서 선보이면서 197,80년대를 관통해 한국영화의 전통과 현대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던 영화감독을 자리매김한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영화적 실험이 돋보였던 작품이 바로 <바보선언(1983)>이다.     <바보선언>에서 그가 온갖 영화적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있다. 이장호는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정권에서도 혹독한 검열을 경험한다. 내놓는 시나리오마다 거부당했던 그는 제작사와의 계약조건 때문에 고소 직전에 이르렀다. 어떤 영화든 찍어야 했던 상황에서 엉망으로 쓴 시나리오로 우선 검열에 통과한다. <바보선언>이라는 제목도 당시 문화관광부 직원과 말하다 우연히 정해졌고, 시나리오를 무시한 채 떠오르는 대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덧없는 죽음의 시대 이장호의 <바보선언(1983)>   1. 절망에서 실험정신이 피어나다   1960년대 활발한 르네상스 시기를 보냈던 한국영화는 1972년 유신헌법 선포를 전후로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져갔다.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과는 반대로 영화소재는 제한되었고, 반공영화나 정책선전 영화들이 대거 만들어져 국가정책 홍보에 앞장섰다. 이 시기 상업영화로는 하이틴물이나 에로영화가 대량으로 만들어졌으며 영화제작도 허가없이는 불가능해졌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서 연출을 시작했던 이장호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한국문화예술계를 뒤흔들었던 대마초사건(1975)에 연루된다. 이를 계기로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연스레 의식화 과정을 겪는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들을 이어서 선보이면서 197,80년대를 관통해 한국영화의 전통과 현대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던 영화감독을 자리매김한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영화적 실험이 돋보였던 작품이 바로 <바보선언(1983)>이다.     <바보선언>에서 그가 온갖 영화적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있다. 이장호는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정권에서도 혹독한 검열을 경험한다. 내놓는 시나리오마다 거부당했던 그는 제작사와의 계약조건 때문에 고소 직전에 이르렀다. 어떤 영화든 찍어야 했던 상황에서 엉망으로 쓴 시나리오로 우선 검열에 통과한다. <바보선언>이라는 제목도 당시 문화관광부 직원과 말하다 우연히 정해졌고, 시나리오를 무시한 채 떠오르는 대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띠우
2022.03.14 | 조회 239
여울아의 알지만 모르는
고전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똑같은 책인데 새로울 게 무어냐고 묻는다. 그렇다. 고전은 어디 가서 아는 척 하기도 어렵다. 웬만하면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읽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내가 아는 줄 알았지만 몰랐던 이야기'를 하나둘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이 글은 내가 아직 덜 소화시켰더라도 그 낯설음이 내게 주었던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함이다. <여울아의 알지만 모르는>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자의 이야기이다.   청출어람 구출작전   순자의 청출어람을 아십니까? 작년 제자백가 세미나에서 『순자』를 읽었다. 토용과 함께 진행하려고 야심차게 준비했던 고전학교가 신청이 저조해서 폐강한 직후였다. 세미나를 열고도 전전긍긍했다. 얼마나 사람이 모일까. 아무래도 동양고전은 내리막길인 모양이라고 푸념을 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 신청자가 늘어날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세미나를 이어가던 어느 여름 날,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순자의 청출어람을 발견했다. 어라, 청출어람이 순자의 말이었나? 나는 순자를 다시 읽은 지 8년 만에 “왜 사람들은 청출어람을 스승보다 나은 제자라고 풀이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이밀(李謐)이라는 제자가 어릴 적부터 자신의 스승 공번(孔磻)을 모시고 글을 배웠다. 어느 날 스승 공번은 자신을 능가하는 수준에 이른 제자에게 “나는 더 이상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 이제부터 네가 나의 스승이 되어라.”라고 말했다. 당시 사람들은 뒤바뀐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일컬어, 순자의 권학편 문장(靑取之於藍, 而靑於藍)을 줄여서 청출어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전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똑같은 책인데 새로울 게 무어냐고 묻는다. 그렇다. 고전은 어디 가서 아는 척 하기도 어렵다. 웬만하면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읽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내가 아는 줄 알았지만 몰랐던 이야기'를 하나둘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이 글은 내가 아직 덜 소화시켰더라도 그 낯설음이 내게 주었던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함이다. <여울아의 알지만 모르는>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자의 이야기이다.   청출어람 구출작전   순자의 청출어람을 아십니까? 작년 제자백가 세미나에서 『순자』를 읽었다. 토용과 함께 진행하려고 야심차게 준비했던 고전학교가 신청이 저조해서 폐강한 직후였다. 세미나를 열고도 전전긍긍했다. 얼마나 사람이 모일까. 아무래도 동양고전은 내리막길인 모양이라고 푸념을 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 신청자가 늘어날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세미나를 이어가던 어느 여름 날,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순자의 청출어람을 발견했다. 어라, 청출어람이 순자의 말이었나? 나는 순자를 다시 읽은 지 8년 만에 “왜 사람들은 청출어람을 스승보다 나은 제자라고 풀이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이밀(李謐)이라는 제자가 어릴 적부터 자신의 스승 공번(孔磻)을 모시고 글을 배웠다. 어느 날 스승 공번은 자신을 능가하는 수준에 이른 제자에게 “나는 더 이상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 이제부터 네가 나의 스승이 되어라.”라고 말했다. 당시 사람들은 뒤바뀐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일컬어, 순자의 권학편 문장(靑取之於藍, 而靑於藍)을 줄여서 청출어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울아
2022.03.06 | 조회 565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