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32회]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디 아워스>(2002)

띠우
2024-02-19 02:10
301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울림이 있지만, 리처드로 인해 인간 보편의 문제로 시선을 돌리게 되다. 사실 이들 모두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고, 삶의 환경도 크게 불안정하지 않고, 사람들의 사랑과 돌봄 속에서 살고 있다. 자기 내면과의 부딪힘으로 버거워하는 이들의 불안이나 갈등을 보면서 누군가는 배부른 고민이라고 할지 모른다. 먹고 살 만하면서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1941년과 1923, 외치다 죽다

1941년을 보여주는 오프닝에서 버지니아는 죽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1923년 어느 하루, 신경증을 앓고 있는 그녀는 건강을 위해 런던을 떠나 시골마을인 리치몬드에 머물고 있다. 남편 레너드는 그녀를 위해 집을 옮기고 출판사를 차려 글쓰기도 돕는다. 그런데 막상 버지니아가 글을 쓰는 동안에 그 흐름은 계속해서 방해받는다. 약을 챙겨주고 같이 밥을 먹고 싶어하는 남편이나 집안일에 신경쓰기를 바라는 하녀들의 불만이 그녀의 귓가를 맴돌기 때문이다. 무료한 시골 생활이 싫은 버지니아는 격렬한 런던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러한 결정권이 없다. 당시 사회는 버지니아를 환자로 규정하고, 의사의 처방하에 보호자의 울타리에 가둬둔다.

 

 

오후가 되자 불안한 걸음걸이로 집을 나선 버지니아는 기차역으로 향한다. 그녀의 부재를 깨달은 레너드는 달려나간다. 버지니아는 플랫폼에서 기차를 타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떨고 있었다. 레너드는 발작, 감정기복, 기억상실, 환청에 시달리는 버지니아를 위해 자신이 해온 일들을 나열하며 ‘배은망덕’이란 말을 입에 올려버린다. 버지니아도 외친다. 런던으로 가고 싶다고. 자신은 지금 어둠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고, 자기 상태는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여기에 레너드가 말한다. 상태를 안다면 런던에 갈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버지니아는 환자도 인간으로서 권리가 있다고 말하며 리치몬드에서 사는 삶과 죽음 중 선택해야 한다면 죽겠다고 한다. 결국 레너드는 런던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만, 뒤이어 시장하니 우선 뭘 좀 먹자며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삶을 언제나 똑바로 마주하고, 삶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며,

마침내 그것을 깨달으며,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그런 후에야 접는 거에요.

우리가 영원히 함께 한 시간을요. 영원히 함께 한 시간을요.”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가자면, 1923년으로부터 18년 후에 리치몬드보다 더 시골인 서섹스에서 버지니아는 물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남편 레너드와 언니 바네사에게 유서를 남긴 채 주머니에는 돌멩이를 가득 넣고 말이다.

 

1951, 읽다 떠나다

1951년이 보여주는 하루는 임신 상태의 로라가 맞이한 남편 댄의 생일날이다. 댄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인물로, 그들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는 말 그대로 우쭈쭈였다. 댄은 전쟁에서 돌아와 로라에게 곧바로 청혼했는데, 로라는 마땅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결혼하였다. 그는 자기 생일에 로라에게 꽃을 선물하는 사람이다. 마치 꽃처럼 로라를 대하고 보살핀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여성의 삶, 꽃병의 꽃으로 살아라.

 

 

영화는 1950년대 미국의 풍요롭고 여유로운 중산층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완벽한 아내이자 어머니’로 그려진 여성들의 삶 이면에는 신경안정제의 복용이나 불륜, 외도의 증가라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 시대가 만든 꽃 같은 여성상에 내몰린 이들 중에서 일부는 자기존재에 대한 무기력증에 한없이 시달리기도 했다. 버지니아가 글을 쓰며 자신의 삶을 그 속에 투영했다면, 로라는 버지니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자신의 불안을 누르고 있었다. 즉, 로라는 마음을 숨기고 있지만 꽃이 되고 싶지 않다.

로라는 학창시절부터 동성 친구인 키티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둘 다 결혼하고 여전히 한 동네에 살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반면 로라가 책(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것을 보고 독특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키티는 시대 분위기에 순응해 살아가는 인물을 상징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질서는 이성애 중심으로 자리잡았고, 거기서 소외된 이들은 자리할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해 누군가는 자기 파괴적인 길을 걷고 잘린 꽃들이 시들 듯 삶이 스러져갔다. 그런데 이날 몸이 아파 병원에 간다는 키티에게 로라는 순간적으로 키스를 한다.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격한 감정을 표현했지만 키티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응한다. 그 행위를 인정하면 사회 속에서 배제당할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욕망을 이제껏 감춰왔던 로라는 이 순간에 절망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로라는 호텔로 가서 마지막 순간에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다. 그때 침대가 물에 잠기는 환각을 경험하며 죽음을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둘째가 태어나자마자 아침을 잘 차려놓고 집을 떠나버린다. 그녀의 아들 리처드는 이 모든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2001, 울다 살다

클라리사가 보여주는 하루는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 파티를 준비하는 날이다. 클라리사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며 동성파트너인 샐리와 10년이 넘게 잘 살고 있다. 누군지 모르는 남자에게 정자를 받아 낳은 딸 줄리아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 거기에 헤어졌지만 에이즈에 걸린 첫사랑 리처드를 돌보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있다. 클라리사의 감정은 앞의 두 인물보다 더 복합적으로 보인다. 흔들리는 시선만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전체 얼굴의 움직임, 대화할 때의 손짓이나 몸짓이 불안한 심리를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메릴 스트립의 섬세한 연기는 단순한 음으로 반복되는 음악과 맞물려 불안이라는 리듬감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클라리사의 삶은 버지니아와 로라가 죽음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을 정면으로 헤쳐나가고 있다. 사회에서 전문직업을 가지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고, 이성애가 아니라고 해도 별 문제가 없어보인다. 삶을 자기주도적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런데 이상하게 리처드와 관계된 일만 만나면 좌불안석이다. 리처드와는 과거 아름다운 기억이 있고, 각자의 파트너를 인정하고 현재는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리처드의 과거 파트너였던 루이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알게 된다. 루이스의 등장만으로 클라리사의 불안은 팽팽해진다. 불현듯 울먹이는 클라리사에게 루이스는 리처드를 떠나 너무나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안도하는 클라리사다. 뒤이은 줄리아와의 대화에서 불안의 원인은 분명해진다.

 

“어느 날 아침,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뭔가 될 거 같았어. 그런 느낌 아니?

이런 생각이 들었지. 이제부터 계속 행복할 거야. 이건 시작이고 더 큰 행복이 올 거야!

다 헛된 기대였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순간이 행복했고 바로 그 순간이 전부였던 거야.”

 

클라리사는 리처드와 하룻밤을 보낸 18세의 그 아침, 눈을 뜬 리처드에게 ‘굿모닝,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린다. 그 순간을 클라리사는 가장 행복한 때로 기억하는 것이다. 리처드가 있으면 살아있는 기분이고 그렇지 않으면 바보 같아진다는 클라리사. 줄리아가 어이없어하며 샐리는? 이라고 묻자 ‘전부 거짓된 위안’이라 대답한다. 클라리사는 리처드 옆에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 리처드는 클라리사 앞에서 자살한다.

 

디 아워스, 마주하다

자살에 성공한 두 인물, 버지니아와 리처드는 레너드와 클라리사에게 자신들이 행복했다고 전한다. 이들이 죽은 이유는 삶을 부정해서가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시골로 내몰린 버지니아는 사회구조의 틀 안에서 결국 벗어날 수 없었고 삶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된다. 리처드는 엄마를 소설 속에서 죽이지만 엄마에게서 평생 벗어날 수 없었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동성애로, 작가로의 삶을 살지만 약물에 의존하며 자기삶을 마주하지 못 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과의 시간에 갇혀있는 클라리사를 보는 것도 고통이었을 것이다. 삶이 고통뿐이었던 인물들의 선택을 두고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후회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참 좋겠죠, 후련할 거고요.

하지만 무슨 소용이에요? 감내해야죠. 죽음 속에서 난 삶을 택했어요."

 

반면, 로라는 꽃이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 자식을 버린 것은 엄마로서 나쁜 행위이지만, 후회보다는 감내하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로라는 이성애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비로소 살 수 있었다. 이제 리처드를 보낸 후 클라리사는 어떠한 삶을 살게 될까. 아마 버지니아의 세상과 로라의 세상, 그리고 리처드와 클라리사의 세상처럼 이 영화를 본 관객의 상황도 다 다를 것이다. 사회환경이나 구조는 시대별로 변화해가지만, 그 안에서 구체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굴레는 저마다 여전히 존재할 테니 말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어떤 일에 불안을 겪고 삶이 고통스러운지 돌아보게 한다. 또한 어떤 일에 행복을 느끼는지도. 결국 나란 존재와 마주하는 시간을 던져준다.

 

"삶과의 투쟁없이는 평화도 없어요."

 

나는 이 영화를 개봉한 지 20여 년 만에 ‘동네영화관 파지사유’에서 보았다. 그날의 공기를 여전히 기억한다. 누군가의 오열과 누군가의 멍함, 그걸 다 이해하지 못한 누군가의 한마디가 섞여든 공기 말이다. 이 한 편의 영화가 던져 놓은 이질적인 공기의 흐름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죽음 속에서 선택한 삶이란 어떤 것이냐고. 너의 삶을 들여다보라고. 이렇듯 어떤 영화는 함께 보는 것만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시간들’을 마주하게 만든다.

댓글 8
  • 2024-02-19 09:55

    삶과 투쟁없이는 평화도 없다니 넘 멋있네여..
    파지사유에서 함께 보는 동안 각자 자신과 마주하는 그 시간은 이 영화를 계기로 만들어졌다니요 ~ 당장 영화 인문학 신청해야겠다~!

  • 2024-02-19 13:24

    오래된 영화인데, 볼 때마다 긴장감이 있어요. 불안이 조성하는 긴장감일까요? 다시 한 번 봐볼까 하는 마음이 드네요.

  • 2024-02-19 15:27

    이 영화가 너무 어려워서 두 번 볼 엄두를 못냄 ㅋ 이 글을 읽으니 '불안'을 키워드로 다시 도전해보고 싶네요 ^^ㅋ 연재재개를 축하^^

  • 2024-02-19 15:37

    그! 날, 함께 못봐서 혼자서 봤는데
    같이 보는 경험도 하고 싶어집니다.

  • 2024-02-20 15:19

    내가 넘 좋아하는 영화에유^^
    주제 뿐 아니라 편집, 연출, 음악... 영화적으로 넘 훌륭^^
    게다가, 와우, 니콜 키드먼.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죠.

  • 2024-02-22 10:56

    저에게 큰 때림을 주었던 디아워스!
    시간이 흐른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지금을 다시 보네요. 영화를 통해..
    다시 보면 어떨까??

  • 2024-02-24 15:39

    마스크가 흠뻑 젖도록 울었던 유샘. 느티샘.
    어려워서 멍하기만 했던 토토로.
    띠우샘 글 읽으니 그날이 상기되네요.

    클라리사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이긴해요.
    오랜만에 올라온 띠우샘 글. 잘 읽었어요.

  • 2024-02-25 11:07

    저도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왠지 미루고만 있던 영화, 띠우샘 덕분에 용기내 봐야겠어요^^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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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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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59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0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200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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