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34회] 파괴가 곧 창조다/<도니 다코>(2001)

띠우
2024-03-31 20:01
212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꽤 오랜 시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 이어지는 ‘Wake Up’ 소리와 함께 불이 켜지는 이층의 방,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일어선 도니는 자신을 부르는 곳으로 향한다. 집 밖으로 나와 마주친 것은 토끼탈을 쓴 괴물 프랭크, 그는 도니에게 ‘28일 6시 42분 12초 후면 세상은 멸망한다’고 말한다. 장면이 바뀌고 온 집안을 뒤흔드는 굉음이 터지면서 암전, 다음 날 도니는 동네 골프장에서 깨어났다. 자기 방에는 비행기 엔진이 떨어져 있다. 어젯밤 침대에서 잠을 잤다면 도니는 죽었을 것이다. 원인불명의 사고 앞에서 도니 부모는 고교 동창 중에 프랭크를 떠올린다. 고등학교 졸업 파티 때 사고로 죽었는데, 그때도 세상의 종말 같았다고.

 

다음 무대는 학교다. 진보적인 카렌 선생은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파괴자들>을 수업 시간에 다룬다. 이 작품은 15세의 아이들이 미저리란 사람의 집을 파괴하는 내용을 다룬 13쪽짜리 단편소설이다. 카렌이 이런 파괴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자, 도니는 이렇게 답한다. “파괴는 창조이기 때문이죠··· 그애들은 파괴 후의 모습을 보고 싶었고, 변화를 원했어요”. <파괴자들>, 소설 속 아이들이 보여주는 방황은 부조리한 세상을 처음 마주한 인간에게 불가피해 보인다.  감독 리처드 켈리(당시 27세)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강렬하게 다가왔고 첫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

 

어떤 것이 파괴됨으로써 생성되는 가능성, 그렇게 보면 이 영화는 ‘28일 6시 42분 12초 후면, 창조될 세상’에 대한 이야기겠다. 다소 황당무계한 이 영화를 조금 더 따라가 보자.

 

돌고 도는 인생사

 

도니는 토끼 괴물 프랭크를 만날 때마다 일을 저지른다. 두 번째로 만난 날, 도니는 도끼를 들고 학교에 가서 남자 탈의실 수도관을 깨버린다. 학교는 임시 휴업 상태가 되고 이를 계기로 전학 온 그레첸과 가까워진다. 세 번째 만남에서 프랭크는 이런 말을 하였다.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그들은 위험해”. 여기서 ‘그들’은 파머 선생과 짐 커닝햄(감정교육강사)이다. 둘은 세상 모든 문제의 답을 이분법(사랑과 두려움, 긍정과 부정) 안에서 찾는다. 수업 때마다 오직 ‘사랑과 긍정’만이 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그들을 향해 도니는 욕을 하고 비아냥대다 쫓겨난다. 파머와 짐은 영화가 흘러갈수록 자신들이 하는 말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 그들은 사랑도 긍정도 없이, 사랑과 긍정이란 말만을 함으로써 자기기만을 저지르고 있었다. 둘 다 어떤 두려움에 빠진 상태로.

 

"죽을 때는 누구나 혼자야"  귓속말하는 로버타

 

멸망 20일 전, 프랭크에게 “너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어”라는 말을 들은 후 도니는 과학선생으로부터 <시간 여행의 철학>이란 책을 선물받는다. 저자는 로버타 스패로우, 마을에서 ‘죽음의 할머니’라 불리는 존재다. 할머니는 멍한 눈빛으로 집과 길가의 우체통을 오가는데, 그 길을 달리던 자동차들이 그녀를 뒤늦게 발견해 피하는 일이 반복되어왔다. 로버타는 그 길에서 만난 도니에게 “죽을 때는 누구나 혼자야”라는 귓속말을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로버타가 과거에 갇혀버린 시간 여행자이며, 어떤 변화도 없이 같은 행위를 반복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한 것이 <시간 여행의 철학>인 것이다.

 

<시간 여행의 철학> 속 상황은 도니에게도 일어난다. 가슴에서 물풍선이 흘러나오는 환각을 보고 따라가다가 총을 발견한다. 그레첸과 극장에 갔다가 또 프랭크를 만난 도니, 토끼탈을 벗어버린 프랭크의 눈 한쪽이 푹 패어있다. 잠든 그레첸을 두고 도니는 극장을 나와 (다음날 아동성애자로 밝혀지는) 짐의 집에 불을 지른다. 도니가 벌이는 사건은 점점 쌓여가고,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도니는 도대체 왜 이럴까. 그러나 과거 방화 사건을 저질러 감옥에도 다녀왔다는 이야기 외에 다른 설명은 영화 안에 없었다. 그저 정신과 담당의 서먼에 의해 ‘위협적인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이 되었다’란 설명만 듣는다. 이대로 도니 역시 로버타처럼 자신의 시간여행 속에 갇혀버릴 것인가. 

 

 

<시간 여행의 철학>에 나오는 물풍선

 

인간에게 멸망의 때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혼자 죽는 것,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인 두려움이다. 인간은 안정적인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틀을 깨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로버타가 혼자 죽는 것을 두려워하며 집과 우체통을 오가는 행위와 유사하다. 그 시간 여행을 통해 로버타는 죽음을 유예해 왔다. 또 파머나 짐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어떤 질문에나 같은 답을 하는 모습 역시 자기틀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정말 강력한 충격이나 각성이 오지 않는 한 우리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안정을 추구한다.

 

서먼과의 최면 상담에서 도니는 타임머신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서먼이 어떻게 시간 여행이 가능하냐고 묻자, 곧 멸망의 때가 오고 하늘이 열릴 것이라는 프랭크의 말을 전한다. 도니는 자신이 저지른 사건들 때문에 곧 경찰에 잡힐 것이고, 프랭크만이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서먼은 두려움에 떨며 울먹이는 도니에게 성심껏 말했다. “하늘이 갑자기 열리면 법도 규칙도 필요 없어, 남는 건 너 자신과 기억뿐이야. 네가 경험한 것과 만나 온 사람들에 대한 기억, 그게 종말이라면 그때는 너와 그만이 남는 거야, 나머진 없어.”

 

10월 29일 멸망 1일 전, 하버드에 합격한 누나의 축하 파티를 열었다. 그레첸도 오고 누나의 친구인 ‘프랭크도 왔다가 맥주를 사러 갔다’(는 메모가 보였다). 다시 환상이 보이기 시작한 도니는 멸망의 시간이 다가옴을 느낀다. 이제 멸망까지 6시간 남았다. 도니는 이를 막아보고자 친구들과 로버타의 집으로 향한다. 그러다 만난 2인조 강도, 멀리 자동차 불빛이 보이는데 도니는 이번에도 자신은 살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차는 우체통을 향해 걷던 로버타를 피하다 그레첸을 치여 죽인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할로윈 코스프레로 토끼탈을 쓴, 맥주를 사러 갔던 ‘프랭크’였다. 총으로 프랭크의 눈을 쏴버리는 도니 다코, 파국이다.

 

도니 다코, 파괴의 날

 

도니는 죽은 그레첸을 차에 태우고 산속 언덕으로 향한다. 멀리 검은 기운들이 보이고 엄마와 여동생이 탄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다. 누나는 사랑하는 프랭크를 잃었다. 이때 들려오는 목소리, “과거로 돌아가서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간과 기억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도니는 1988년 10월 2일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그때는 프랭크가 도니를 집 밖으로 불러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 “28일 6시간 42분 12초, 집으로 가”. 도니가 집으로 간다면 비행기 엔진에 맞아 죽을 것이다. 불현듯 첫 장면에서 보여주었던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도니는 계속 사건을 일으키면서도 늘 살아남았다. 그 미소는 반복해서 살아남은 자의 미소였다. 혼자 죽기 싫다는 두려움, 도니는 그 두려움에 잠식된 나머지 살아남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고 있었다. 이번에도 도니는 시간 여행에 성공한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할머니, 로버타가 기다리던 편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도니가 로버타에게 쓴 편지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로버타가 기다린 편지의 주인공은 바로 도니였다. “로버타 스패로우, 당신 책을 읽었는데 궁금한 게 많아요··· 차라리 세상이 끝난다면 좋겠어요. 그럼 안심할 수 있을 거에요. 뭔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이 편지에 이어 다시 <파괴자들>이 떠오른다. “파괴는 창조이기 때문이죠··· 그애들은 파괴 후의 모습을 보고 싶었고, 변화를 원했어요”.

 

세상은 기억과 기록을 반복하며 지탱되어왔다. 만약 매일매일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했다면, 인간은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세상에서 진리나 확신으로 굳어지면, 불합리함과 부조리가 생겨난다. 생각해보면, 요즘은 몇 달 차이로 태어나도 서로의 다름을 느낀다고 하니 말이다. 과거의 상식이 오늘의 부조리가 된다. 그러니 세상은 변화를 거부하고 싶어도 계속해서 변할 수밖에 없다. 도니처럼 외부 자극에 의해서 혹은 혼자 하는 사유 안에서도 변한다. 문제는 기를 쓰고 변하지 않으려고 무언가를 놓지 않을 때다. 그걸 놓아 버린 날, 똑같은 패턴으로 시간 여행을 반복했던 도니의 삶에 균열이 생긴다.

 

나 이제 죽을 수 있어~~

 

자신이 아끼던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도니는 혼자 죽는 두려움을 털어낸다. 심지어 죽음을 앞두고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자신이 부여잡았던 두려움을 파괴함으로써 생성될 변화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만약 도니가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딴지를 건다면, 이 죽음이 현실이 아닌 머릿속 세계에서 벌어진 비유라고 주장해 보련다). 아마도 이번엔 로버타도 편지를 받을 것이다. 그걸 받은 로버타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진다. <도니 다코>는 인간이란 존재가 변화에 저항해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변화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다. 파괴가 곧 창조로 이어진다는 면에서 말이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댓글 2
  • 2024-04-01 09:26

    스스로 죽기란 참 어렵지만 죽어야 새로워진다는 메세지가 영화속에서도 어렵게 펼쳐지고 있네요. ㅋ 잘 읽었습니다~~

  • 2024-04-13 18:43

    파괴가 곧 창조라는 면에서..
    라는 말이 참 오묘하니 여러생각을 들게 하네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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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79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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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70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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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3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2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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