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우현
2024-04-09 18:02
212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전문가주의를 이용한 각종 도구의 차용, 전문적이고 난해한 언어사용, 방법론에 대한 물신화 등등.. 그 결과 사회학은 인간 존재의 삶으로부터 동떨어지고 고립되었다는 게 바우만의 주장이다. 그는 정보만을 전달하는 사회학은 쓸모없다고 말하며, 사회학이 권력에 팔려간다면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사회 구조와 인간의 행위를 분석하는 사회학은 권력과 만나면 정치와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우만이 정의하는, 그가 추구하는 사회학은 무엇일까?

 바우만은 사회학을 ‘인간 경험과의 대화’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인간 경험’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인간 경험은)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 모두를 의미합니다. ... ‘경험’은 우리가 세계와 교류하면서 ‘나에게 생기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체험’은 우리가 세계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살면서 내가 겪는 일’을 의미합니다. 즉 체험은 일어난 일에 대한 지각과, 일어난 일을 흡수하고 이해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합동으로 빚어낸 산물입니다. ‘경험’은 경험의 객관적인 상태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체험’은 분명하고도 명시적으로 주관적입니다.

『사회학의 쓸모』, 지그문트 바우만, 서해문집, 26p.

 

 

 굳이 그가 ‘인간 경험’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 것은 앞서 얘기한 사회학의 방향성 때문이다. 그가 보는 사회학에는 이른바 ‘사실’이라고 부르는 ‘경험’적 측면도 필요하지만, 사회학의 행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문제되고 있는 사실’, 즉 ‘체험’의 영역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경험’은 사건이나 사회 구조를 분석하고 그 상태나 환경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과학’에 가까워질 수 있고, 반대로 ‘체험’은 사건에 대해 문제라고 생각하는 ‘개인적인 의견’이 개입된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는다.(‘객관적’, 혹은 ‘중립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하지만 ‘체험’이 없다면 ‘경험’ 역시 단순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바우만은 인간 존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문이 사회학이라면, 두 가지 층위의 ‘인간 경험’을 토대로 한 대화를 연구하고, 그 대화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게 사회학이 가져야 할 목표라고 주장한다.

 

 

 

 

사회학을 왜, 어떻게 하는가?

 바우만은 자신의 연구가 왜 사회학이어야 했는지, 사회학이 자신에게 왜그렇게 소중한지를 설명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처음 시작했지만,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사회학은 일종의 습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가 사회학에 대해 갖는 자부심은 엄청나다. 그가 말했듯, “사회학을 시작하도록 만들었던 동기는 여전히 시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어떤 상황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그리고 이로부터 ‘권력’이 가진 힘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선택’의 가능성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어떠한 ‘권력’도 ‘선택’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아우슈비츠도, 전쟁도, 지금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우만은 ‘선택’으로서 인간의 사유와 행동의 의미를 분석하는 게 사회학이라면, 그 방법론으로서 ‘사람들이 처한 사회적으로 형성된 조건을 눈여겨 봐야한다’고(100) 주장한다. 인간의 행동을 거창하게 의미론적이거나 언어학적으로 볼 게 아니라, 사회학적을 수단을 통해 인간의 현실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이 ‘사회학적 해석학’이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행위로서, ‘평범한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가치들을 미약한 제 능력의 한도 내에서라도 구체화해 드러내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일반적 가치’의 뒷면을 드러내고, 그들이 하는 ‘선택’의 의미를 전달하며, 나아가 대안적 선택까지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학적 해석학’은 기존의 ‘권력자’들이 대중을 제어하는데 망설임이나 죄책감을 덜게 해주는 ‘통계적 코드화’에 집요하게 저항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순 없다. 특히나 사회를 해석하고 대안을 이야기하는 사회학자와, 현실을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은 매번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바우만은 아도르노를 인용하면서 계속해서 ‘병 속에 든 메시지’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고 표현한다. 이는 병에 담아 멀리 보낼 가치가 있는, 누군가가 꺼내 보았을 때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이해할만한 정도의 가치가 있는 고민거리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이며, 동시대인들에게 전혀 읽힐 준비가 되지 않았더라도, 그 무시를 견디고 살아남아 메시지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전하는 행위이다. 그런 시도 끝에 사회학자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으며, 현실과 분리되어 있는 관찰자가 적극적인 참여자만큼이나 사회세계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바우만은 대담 전반에 걸쳐 현실 속 ‘무기력’에 대해 저항할 것을 요청한다. 그것이 사회학이 할 수 있는 일이자, 해야하는 일이라며 말이다. 사회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때 ‘~ 때문에’ 유형의 논증을 사용하곤 한다. 바우만은 이를 사회의 현실에 대해 의문이나 의심을 품지 않고 ‘세상은 원래 그래’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습관이라고 보고 있다. ‘무기력’의 세계관은 이러한 태도에서부터 나오며,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항복’(29)해버리는 ‘자발적 복종’과 다름없다. 바우만이 보기에 “사회학이 맞닥뜨리고 있는 것은 어떤 특정한 가치 체계가 아니라, 마거릿 대처에 의해 널리 퍼진 ‘대안 따위는 없다’와 같은 태도”(136)이다.

 바우만이 꼬집는 현대인들의 ‘무기력’은 내게도 낯설지 않다. 특히 세월호 사건, 이태원 참사, 전장연 시위, 페미니즘과 관련된 사회적인 문제들을 생각할 때 그렇다. 나는 위 사건들에 대해 분명 ‘뭔가 잘못됐다’라고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활동에 참여하기가 꺼려졌다. 뿐만 아니라 직접 연대활동에 뛰어드는 건 고사하고, 위 문제들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온라인 공간에서 나의 성향이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것 조차 어려웠다. 그 기저에는 연대와 운동을 통해 사회가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문탁을 통해 유가족분들도 만나고 시위에도 참여하는 등 연대를 이어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한구석에는 ‘이게 될까?’라는 생각이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바우만은 마치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일침을 놓는다.

 

 

우리는 정신없이 이어지는 정보의 회오리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경고하고 있는 사건 그 자체의 상태,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책임까지도 진지하게 취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정보의 홍수와 그로 인한 ‘이차적인 무지’(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도해서 발생하는), 나아가 ‘무기력’(파국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뒤집을 능력이 없다고 느끼는)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지 않나요? 그래서 우리는 확고한 태도를 취하지도 못하고, 장기간 끈질기게 주장하지도 못하고 있지 않나요? ... 우리가 언급했던 많은 요소들이 아마도 ‘훈련된 무능력’에 기여할지도 모릅니다.

『사회학의 쓸모』, 지그문트 바우만, 서해문집, 197p.

 

 

 바우만은 빠르게 변화하며 순식간에 지나가는 사회적 이슈들을 보며 현대 사회가 ‘유동성’을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긍정적인 일이든 부정적인 일이든 빠르게 잊고 다음 이슈를 포착하고 소비하는 게 ‘최상위 가치meta-value’인 것처럼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현대의 ‘유동성’도, 의심없이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인식하는 사고도, 모두 ‘무기력’을 유발하는 원인이라고 강조한다. 바우만은 ‘사회학’이 ‘사회의 현실과 인간 행위자의 역할을 포착하고 기록하고 이해하는 최전선에 위치’(197)하고 있다고 말하며, 지속해서 ‘병 속에 든 메시지’를 던짐으로서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회학’의 목표이자, ‘사회학’을 하는 이유이자, ‘사회학’의 방법론이다.

 

 

 

 

바닷가에 들어서기

 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논의하는 일은 ‘당연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회 문제에 대해 잘 분석하고, 의미있으면서도 재밌는(혹은 신선한) 관점을 제시하는 글을 ‘이상적인’ 글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다양한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런 관점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해도 내 글에는 ‘뭔가’가 빠져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단순히 공부가 부족해서일까? 실은 내가 이런 글을 굳이 쓰고 싶지는 않았던 게 아닐까? 이에 대해 바우만은 나의 가슴 깊이 새겨진 ‘무기력’을 짚어주었다. ‘대안은 없다’는 무기력, 그리고 ‘바뀔 수 없다’는 무기력. 닿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병’을 던지는 것, 그리고 그 병 안에는 ‘경험’과 ‘체험’ 사이의 치열한 사유 끝에 나온 메시지를 새기는 것. 그 ‘치열함’과 ‘희망’이 ‘사회학’의, 나아가 우리가 하는 모든 공부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지금 당장 ‘병 속에 든 메시지’를 던질 순 없지만, 적어도 내 발걸음을 바닷가로 향하고 싶다는 확신이 생겼다. 언젠가 바닷가에 도착한다면, 떳떳하게 나의 전공을 ‘사회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댓글 3
  • 2024-04-10 23:53

    글을 읽으니 사회학과 동양고전 공부가 뭔가 비슷하다는 인상이 듭니다. 급 관심이 생기는군요.

  • 2024-04-11 05:59

    지속적으로 병속에 든 메시지 보내기! 바우만의 표현은 참 멋지네요~

  • 2024-04-12 18:28

    우현이 현장과 가까운 사회학자가 된다면 멋질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79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70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2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2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