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인문약방 2022.01.02 조회 189
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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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인문약방 2022.01.02 조회 160
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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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인문약방 2022.01.02 조회 150
나는 조금 독특한 9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천재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그런 아이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지리도 예민하고, 울음을 달고 사는, 그리고 사회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아이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기저기 검사도 많이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지능 상위 1%, 사회성 하위 1%. 한 가지를 좋아하면 몇 년 동안 좋아하는 터라, 지금은 유니코드 문자표에 푹 빠져있다. 아이는 눈 뜨자마자 생각난 듯 나에게 묻는다. “엄마, 에스페란토라는 문자를 아세요? 인공어 중에 하난데요. 제이 위에 이런 삿갓 모양이 그려져 있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든 게 괴상하게 그려놓은 꼬부랑 글씨 같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해도, 사실 나도 힘들다. 거기에 사람들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쉽게 알아채지 못해서,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보니,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를 다니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 왜 온종일 이상한 세계 여러 나라 문자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똥을 누는 것 같은 당연한 생리 현상을 그토록 무서워하는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아이 ‘되기’는 가능하기나 할까.         흰 눈 잉꼬 같은 아이를 알아간다는 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엔 아이...
나는 조금 독특한 9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천재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그런 아이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지리도 예민하고, 울음을 달고 사는, 그리고 사회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아이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기저기 검사도 많이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지능 상위 1%, 사회성 하위 1%. 한 가지를 좋아하면 몇 년 동안 좋아하는 터라, 지금은 유니코드 문자표에 푹 빠져있다. 아이는 눈 뜨자마자 생각난 듯 나에게 묻는다. “엄마, 에스페란토라는 문자를 아세요? 인공어 중에 하난데요. 제이 위에 이런 삿갓 모양이 그려져 있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든 게 괴상하게 그려놓은 꼬부랑 글씨 같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해도, 사실 나도 힘들다. 거기에 사람들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쉽게 알아채지 못해서,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보니,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를 다니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 왜 온종일 이상한 세계 여러 나라 문자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똥을 누는 것 같은 당연한 생리 현상을 그토록 무서워하는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아이 ‘되기’는 가능하기나 할까.         흰 눈 잉꼬 같은 아이를 알아간다는 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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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김지연 2021.12.06 조회 284
페미니즘, 그런 거였어?   2020년 겨울, 우리 회사 모(母)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35살의 최연소 여성 임원이 탄생했다. 2021년 여름, 그녀는 부하 직원에게 막말을 퍼부었다는 짧은 논란을 끝으로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경질되었다. 갑이 을에게 횡포를 저질렀고, 그에 따른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문득 내 시선에 다른 문제가 겹쳐 보인다. 남성 임원이 막말 따위(?)로 경질되는 건 본 적이 없다. 폭력이나 성추행 정도는 돼야 문책받는다. 특히 이 문제가 기사화되면서 여성 임원 할당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공정한 평가로 선발하지 않고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사람을 뽑아 올리니 이런 문제가 생긴단다. 그동안 여성을 위한 자리는 특별히(?) 배제되었다는 점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에서 정희진의 책을 다루던 날이었다. 모두가 사회 문제를 속 시원한 글솜씨로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녀의 글에 홀딱 반해서 왁자지껄 토론하던 중이었다. 학인 한 명이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아들을 키우다 보니 남자가 여자보다 불리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함께 노는 아이들 사이에 때리는 여아와 맞는 남아의 불공평(?)도 존재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데, 소수의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고 푸념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다른 학인의 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당하는 시대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고착된 남녀 구조가 이제 막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불편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페미니즘, 그런 거였어?   2020년 겨울, 우리 회사 모(母)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35살의 최연소 여성 임원이 탄생했다. 2021년 여름, 그녀는 부하 직원에게 막말을 퍼부었다는 짧은 논란을 끝으로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경질되었다. 갑이 을에게 횡포를 저질렀고, 그에 따른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문득 내 시선에 다른 문제가 겹쳐 보인다. 남성 임원이 막말 따위(?)로 경질되는 건 본 적이 없다. 폭력이나 성추행 정도는 돼야 문책받는다. 특히 이 문제가 기사화되면서 여성 임원 할당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공정한 평가로 선발하지 않고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사람을 뽑아 올리니 이런 문제가 생긴단다. 그동안 여성을 위한 자리는 특별히(?) 배제되었다는 점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에서 정희진의 책을 다루던 날이었다. 모두가 사회 문제를 속 시원한 글솜씨로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녀의 글에 홀딱 반해서 왁자지껄 토론하던 중이었다. 학인 한 명이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아들을 키우다 보니 남자가 여자보다 불리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함께 노는 아이들 사이에 때리는 여아와 맞는 남아의 불공평(?)도 존재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데, 소수의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고 푸념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다른 학인의 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당하는 시대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고착된 남녀 구조가 이제 막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불편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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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김현지 2021.12.06 조회 210
아버지와 나 사이에 가능성이 생겼다   “이 가을이 내 마지막 가을이겠네.” 엄마는 10월의 단풍을 보고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그 후 엄마의 시간은 우리와 다르게 흘렀다. 엄마에게 건넨 말에 대한 응답이 한참 뒤에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엄마 혼자 가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엄마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매일 집안의 곳곳을 쓸고 닦았다. 가끔씩 우릴 만나러 오는 엄마를 조금이라도 깨끗한 공간에 머물게 하고 싶어서. 그게 막을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무렇게나 쌓인 그릇을 모두 꺼내 크기별로 종류별로 정리하고 있던 어느 날, 거실에서 엄마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태희 엄마, 우리 죽어서도 꼭 다시 만나세.”   애써 눌러도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지 못해 아버지는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말에 꼭 그러자고 대답했다. 뼈만 남은 몸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사력을 다해 약속했다. 저물어 가는 여자와 저물고 싶은 남자가 그렇게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 장면에 나는 딴지를 걸고 싶었다. 나는 잊지 못했다. 어릴 적 엄마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뱉던 아버지의 모습을. 엄마를 향해 고성과 욕설이 날아든 밤들을. 그리고 아주 가끔, 그런 밤이 지나고 나서 엄마의 팔뚝에 든 시퍼런 멍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존심 강한 엄마가 깜깜한 주방에서 남몰래 울던 모습을. 좋은 아빠였을진 몰라도 확실히 좋은...
아버지와 나 사이에 가능성이 생겼다   “이 가을이 내 마지막 가을이겠네.” 엄마는 10월의 단풍을 보고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그 후 엄마의 시간은 우리와 다르게 흘렀다. 엄마에게 건넨 말에 대한 응답이 한참 뒤에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엄마 혼자 가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엄마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매일 집안의 곳곳을 쓸고 닦았다. 가끔씩 우릴 만나러 오는 엄마를 조금이라도 깨끗한 공간에 머물게 하고 싶어서. 그게 막을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무렇게나 쌓인 그릇을 모두 꺼내 크기별로 종류별로 정리하고 있던 어느 날, 거실에서 엄마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태희 엄마, 우리 죽어서도 꼭 다시 만나세.”   애써 눌러도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지 못해 아버지는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말에 꼭 그러자고 대답했다. 뼈만 남은 몸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사력을 다해 약속했다. 저물어 가는 여자와 저물고 싶은 남자가 그렇게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 장면에 나는 딴지를 걸고 싶었다. 나는 잊지 못했다. 어릴 적 엄마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뱉던 아버지의 모습을. 엄마를 향해 고성과 욕설이 날아든 밤들을. 그리고 아주 가끔, 그런 밤이 지나고 나서 엄마의 팔뚝에 든 시퍼런 멍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존심 강한 엄마가 깜깜한 주방에서 남몰래 울던 모습을. 좋은 아빠였을진 몰라도 확실히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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