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35회 우리가 흔들릴 차례 / <아들>(2002)

청량리
2024-04-14 16:01
172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다른 버전으로 바꿔보기도 한다. 대사가 들어가는 건 배우의 움직임과 디테일들이 살아난 이후다. 그래서 다르덴 형제 영화의 ‘리얼리즘’은 배우들의 ‘몸’을 통해 드러난다. 카메라는 올리비에의 사소한 동작을, 예를 들어 도시락 통을 행주로 닦아내거나 담배를 신발에 비벼 끄는 모습들을 일부러 쫓으며 보여준다.

 

올리비에 구르메, 극중 이름도 '올리비에'를 사용한다. 다르덴 형제의 페르소나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한 줄의 줄거리나 포스터라도 본 관객들은 올리비에가 ‘5년 전, 아들을 죽인 그 아이를 훈련센터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올리비에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그래서인지 영화 초반, 빵을 자르기 위해 칼을 집어든 올리비에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건너편의 그 아이를 쫓는 장면을 ‘살인의 충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 올리비에의 설정은 ‘목수’가 아니라 ‘요리사’였다. 하지만 칼을 집을 때마다 ‘복수’의 행위가 연상되는 걸 피하기 위해 목수로 바꿨다고 한다. 즉 다르덴 형제는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 끊임없이 불안한 자신을 마주하는 올리비에에 좀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르덴 형제의 연출방식처럼 배우의 사소한 ‘몸짓’을, 그 중에서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올리비에의 ‘흡연 장면’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첫 번째 장면은 올리비에가 명단에서 아들을 죽인 ‘그 아이’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이다. “아니요, 저는 벌써 네 명이나 가르치고 있다고요. 그 아이를 맡을 수 없어요.” 소년원에서 나온 새로운 아이를 목공반에서 맡아 볼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올리비에는 거절한다.

 

그 아이가 정말 맞을까? 그냥 이름이 같은 다른 녀석일까? 올리비에는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1.담배를 피우며 머뭇거리는 올리비에. 잠깐만, 이름만 같지 그 아이가 아닐 수도 있잖아? 우선 얼굴을 확인해 봐야겠어. 그는 급하게 사무실로 올라간다. 카메라는 관객이 올리비에의 시선을 좀 더 느낄 수 있도록 바짝 그의 뒤를 쫓는다. 그러나 창문에 가려서, 출입구를 지나쳐 버려서 올리비에는 계속 그 아이를 놓친다.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올리비에 부부는 이혼까지 하게 된다. 올리비에가 명단에서 ‘그 아이’의 이름을 발견했던 날, 헤어진 아내 마갈리(이사벨라 소우파르트)가 찾아온다. “나, 재혼하려고. 진작 말하려고 했는데, 나 임신했어.” 조심스럽게 아이가 생겼음을 올리비에에게 전한다. 그 아이를 본 거 같아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전처는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니 올리비에는 폭발한다. “도대체, 뭐 하러, 왜 하필 오늘 왔냐고!!!” 지금 누구한테 성질을 내는 거지? 올리비에는 #2.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센터 사무실로 전화한다. “그 아이 용접반에 적응 잘 해요? 혹시 제가 맡아도 될까요?”

다르덴 형제는 올리비에가 그 아이, ‘프란시스’(모르강 마린)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을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영화 시작 후 20 여분이 지난 후에야 올리비에는 용접반 탈의실 의자에 쭈그려 잠들어 있는 ‘프란시스’를 마주한다. 그 아이가 확실하다. 복수가 목적이라면 지금이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에는 프란시스를 깨운다. 똑,똑,똑 “일어나, 짐 챙겨. 오늘부터 목공반에서 수업하기로 됐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일단 그 아이를 만날 방법은 목공수업을 듣게 하는 것 밖에는 없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났다. 그러나 영화 <아들>에는 죽은 아들에 대한 ‘회상’이나 ‘프레퐁’에서 일어난 사건장면의 ‘재현’ 같은 건 없다. 흐름이나 배경에 대한 ‘설명’도 전혀 없다. 그러니 관객들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하나씩 양파 까듯이 계속 새로운 사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자, 아직까지 우리는 프란시스와 올리비에의 관계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프란시스가 올리비에의 아들을 죽였는지 아닌지도 여전히 불확실하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다르덴형제의 영화를 다큐멘터리보다 더 다큐처럼 보이도록 한다.

시인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들을 전혀 다르게, 낯설게 사용하여 시를 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여름 한낮에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 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영화 <시>(2010) 중 ‘아네스의 노래’에서) 다르덴 형제도 찍고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접근방법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거나 혹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 방식을 선택적으로 취한다. 이를 ‘시적 표현’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올리비에의 허리벨트가 끊어진 것을 고치는 장면이나, 바게뜨 빵을 한입씩 베어 먹는 장면, 일부러 자물쇠가 없는 사물함을 프란시스에게 주는 장면 등 올리비에의 사소한 행동이나 디테일들을 천천히 보여준다. 하지만 관객은 올리비에가 어떤 내면의 상태인지, 무엇으로 혹은 어떻게 변화가 생기고 있는지 언뜻 알기는 어렵다.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은 그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나, 돋보기 너머 그의 눈빛은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 그래서 곱씹어 봐야 알 수 있다.

 

허리의 통증 때문에 보호대를 착용하는 올리비에. 얼핏 극 흐름과 상관없어 보이는 장면들을 꼼꼼히 보여준다.

 

 

목공수업이 끝나고 올리비에는 프란시스의 뒤를 쫓는다. 어디에 사는 지 알아내고 나서 전처인 마갈리가 일하고 있는 주유소로 향한다. 차 안에서 #3.담배 한 대를 피면서 정리 좀 해보자. 이제 모든 게 분명하고 확실해 졌다. 마갈리한테는 뭐라고 이야기하지? “아들을 죽인 프란시스, 기억나? 오늘 센터에서 만났어. 목공반에 오려고 했는데, 되돌려 보냈지.”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결국 그녀에게 프란시스와 함께 있는 걸 들킨 올리비에. “미쳤어? 누구도 당신처럼은 안 해!!” “나도 알아” “근데 왜?” “나도 모르겠어”

 

이제 확실해졌다. 마갈리에겐 무어라 말하는 게 좋을까? 어쩌면 마갈리의 태도를 보고 결정하자고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올리비에는 프란시스에게 목재를 가지러 도심 외각에 있는 ‘제재소’에 같이 가자고 요청하는데, 관객은 이유 없이 불안해 진다. 다음 날, 올리비에는 팔뚝에 밧줄을 천천히 감아 정리하고, 트렁크에는 비닐 방수포를 챙긴다. 잠시 들른 식당 화장실에서 올리비에는 천천히 손을 닦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밖으로 나와 모퉁이에서 #4.담배에 불을 붙이고 돌아서는 올리비에에게 프란시스는 말한다. “저도 한 대만 주실래요? 월요일에 갚을게요.” 올리비에는 제재소로 가는 차 안에서 프란시스에게 11살 때 저지른 살인을 말하도록 윽박지른다. “네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그 꼬마아이는 죽지 않았어!!!”

 

이제 제재소에 거의 다 와 간다. 프란시스를 바라보는 올리비에의 마음은 복잡하다.

 

 

 

관객은 시작 후 1시간20분이 지나서야 프란시스가 올리비에의 아들을 죽였고, 5년이 지나 소년원 출소 후 올리비에의 목공반에 들어오게 된 ‘퍼즐’을 명확하게 맞추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올리비에가 과연 ‘방아쇠’를 당길 것이냐가 아니라 그 ‘방아쇠’ 뒤에 서 있는 올리비에의 흔들리는 ‘형상’을 그리고 있다. 때문에 숲 속으로 도망치는 프란시스를 붙잡아 목을 조르던 올리비에의 손이 풀렸다고 해서, 그것을 ‘용서’로 읽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목에 아직도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는 프란시스가 목재를 운반하는 올리비에 옆으로 다가온다. 프란시스를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면 올리비에 대신 이제는 우리가 흔들릴 차례다.

 

 

 

 

 

댓글 3
  • 2024-04-15 08:12

    용서가 아닌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니 영화가 보고싶어네여 ..!

  • 2024-04-15 08:48

    불안을 부르는 청량리의 영화이야기군요.

  • 2024-04-16 08:01

    전 <살아남은 아이>를 봤을 때, 다르덴의 이 영화가 많이 떠올랐었어요.
    올리비에가 목수인 것처럼, 최무성은 도배사인 것도,
    가해자를 데리고 가르친다는 것도,
    비슷한 설정이 많잖아요?
    물론 <살아남은 아이>는 포스트세월호 이야기라고 불리지만 (진실, 용기 등)....

    어쨌든, 가해 아이를 상대로 피해 부모가 복수도, 용서도 하기 쉽지 않은 현실을
    올리비에 뒷모습 표정으로만으로도 잡아내는 다르덴의 카메라는, 물론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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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79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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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70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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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3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2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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