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 읽기
루쉰과 청년
스승, 후지노 겐쿠로 - 애닯고 아득한 청춘의 모퉁이, 그곳에 늘 서 있는 스승들(1) - 글 : 문탁 나도 무지에서 홀로 방황한다 1909년 29세의 루쉰은 약 8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딱히 내세울만한 성과는 없었다. 3년 전 의대를 때려 치고 문학으로 방향을 틀었었다. 중국인의 병은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어리석고 겁약한” 정신이기 때문에, 생리학이 아니라 문학이 그들의 병을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잡지를 만드는 일도 문예운동을 펼치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현실을 돌파하는 것은, 바람만으로는, 희망으로만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무게가 그를 귀국시켰다. 그리고 그는 교사로 취직한다. 그 시기, 일본, 중국, 조선의 사정은 엇비슷했다. 유학파들이 귀국하여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만만한 것 중의 하나가 ‘교사’였다. 물론 그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계몽의 파토스에 불탔던 많은 청년들, 예를 들어 조선의 이광수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루쉰의 경우, 그것은 밥벌이였다. 그렇다고 그가 불성실한 교사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첫 직장이었던 저쟝의 2급 사범학당에서 그는 자기가 맡은 화학과 생리학을 충실히 가르쳤다. 삽화를 포함시킨 교재, 요점이 분명한 설명으로 학생들의 신뢰도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루쉰 자신은 “죽을 만큼 황량”하다고 말한다. 식물학을 가르치는 동료를 도와 열심히 식물채집을 하러 다녔고, 당나라 때의 백과사전(類書) 등을 뒤적이며 옛날 소설들을 모아 편집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스승, 후지노 겐쿠로 - 애닯고 아득한 청춘의 모퉁이, 그곳에 늘 서 있는 스승들(1) - 글 : 문탁 나도 무지에서 홀로 방황한다 1909년 29세의 루쉰은 약 8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딱히 내세울만한 성과는 없었다. 3년 전 의대를 때려 치고 문학으로 방향을 틀었었다. 중국인의 병은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어리석고 겁약한” 정신이기 때문에, 생리학이 아니라 문학이 그들의 병을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잡지를 만드는 일도 문예운동을 펼치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현실을 돌파하는 것은, 바람만으로는, 희망으로만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무게가 그를 귀국시켰다. 그리고 그는 교사로 취직한다. 그 시기, 일본, 중국, 조선의 사정은 엇비슷했다. 유학파들이 귀국하여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만만한 것 중의 하나가 ‘교사’였다. 물론 그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계몽의 파토스에 불탔던 많은 청년들, 예를 들어 조선의 이광수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루쉰의 경우, 그것은 밥벌이였다. 그렇다고 그가 불성실한 교사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첫 직장이었던 저쟝의 2급 사범학당에서 그는 자기가 맡은 화학과 생리학을 충실히 가르쳤다. 삽화를 포함시킨 교재, 요점이 분명한 설명으로 학생들의 신뢰도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루쉰 자신은 “죽을 만큼 황량”하다고 말한다. 식물학을 가르치는 동료를 도와 열심히 식물채집을 하러 다녔고, 당나라 때의 백과사전(類書) 등을 뒤적이며 옛날 소설들을 모아 편집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