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 읽기 감자전의 만화展
감자전
2018.09.21 | 조회 338
지난 연재 읽기 차명식의 책읽습니다
    일요일 2시 중학생들과  책 읽습니다 ⑦  아버지라는 ‘두려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커, 『오이대왕』                    글 : 차명식 (청년길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볼프강은 수학은 서투르지만 수영 하나는 자신 있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그런데 어느 날, 볼프강의 집에 느닷없이 왕을 자칭하는 자그마한 오이 모양의 괴물 하나가 나타난다. 그가 말하길 자신은 ‘오이대왕’으로, 볼프강네 집 지하에 사는 쿠미-오리란 정령들의 왕인데, 발칙하게도 그들이 자신을 쫓아냈으므로 볼프강네 집에 정치적인 망명을 하러 왔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고, 흉측한데다, 무엇보다도 거만하고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볼프강네 식구들 모두가 오이대왕을 내키지 않아 한다. 할아버지도 엄마도 누나도 볼프강도 마찬가지다. 아직 어린 막내 닉은 별다른 생각이 없다. 다만 단 한 사람, 오직 볼프강의 아버지만이 별다른 까닭도 없이 마치 오이대왕이 자신의 왕인 것처럼 떠받들고 아낀다. 결국 아버지 한 사람 때문에 볼프강네 식구들은 오이대왕과의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이미 알아차린...
    일요일 2시 중학생들과  책 읽습니다 ⑦  아버지라는 ‘두려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커, 『오이대왕』                    글 : 차명식 (청년길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볼프강은 수학은 서투르지만 수영 하나는 자신 있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그런데 어느 날, 볼프강의 집에 느닷없이 왕을 자칭하는 자그마한 오이 모양의 괴물 하나가 나타난다. 그가 말하길 자신은 ‘오이대왕’으로, 볼프강네 집 지하에 사는 쿠미-오리란 정령들의 왕인데, 발칙하게도 그들이 자신을 쫓아냈으므로 볼프강네 집에 정치적인 망명을 하러 왔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고, 흉측한데다, 무엇보다도 거만하고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볼프강네 식구들 모두가 오이대왕을 내키지 않아 한다. 할아버지도 엄마도 누나도 볼프강도 마찬가지다. 아직 어린 막내 닉은 별다른 생각이 없다. 다만 단 한 사람, 오직 볼프강의 아버지만이 별다른 까닭도 없이 마치 오이대왕이 자신의 왕인 것처럼 떠받들고 아낀다. 결국 아버지 한 사람 때문에 볼프강네 식구들은 오이대왕과의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이미 알아차린...
차명식
2018.09.18 | 조회 530
지난 연재 읽기 감자전의 만화展
감자전
2018.09.12 | 조회 389
지난 연재 읽기 다른 20대의 탄생
다른 20대의 탄생     대학을 안 가고, 못 가고, 자퇴한 우리들의 이야기. 학교를 관두라는 말, 직장을 관두라는 말은 많지만 어떻게 살라는 말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다른 20대의 탄생’은 세 명의 20대가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 질문들을 던지고 길을 찾아가는 구체적인 과정을 담은 글이다.       다른 20대의 탄생 #11 나는 친구가 많다              글 : 김고은 (길드;다)    똑똑이가 되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헛똑똑이가 되지 않기 위해 공부한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그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공부한다.                 * 이 글에 나오는 이름은 ‘명식’을 제외하곤 모두 가명입니다.                  문탁 네트워크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다. 10~20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대부분이 40~50대이다. 선생님들과 친구처럼 지낼 때도 있지만, 또래 친구와 완전히 같지는 않다. 가끔 나이의 차이가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선생님들이 자식이나 친정 이야기를 하실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피부로 와 닿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반대로 내가 애인이나 또래친구에 대한 고민이 생겼을 때 선생님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역시 젊군”과 같은 감탄사나 조언의 말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같이 머리를 쥐어 싸고 고민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기도 하다. 한 일 년 동안 또래 친구가 있었으면...
다른 20대의 탄생     대학을 안 가고, 못 가고, 자퇴한 우리들의 이야기. 학교를 관두라는 말, 직장을 관두라는 말은 많지만 어떻게 살라는 말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다른 20대의 탄생’은 세 명의 20대가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 질문들을 던지고 길을 찾아가는 구체적인 과정을 담은 글이다.       다른 20대의 탄생 #11 나는 친구가 많다              글 : 김고은 (길드;다)    똑똑이가 되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헛똑똑이가 되지 않기 위해 공부한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그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공부한다.                 * 이 글에 나오는 이름은 ‘명식’을 제외하곤 모두 가명입니다.                  문탁 네트워크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다. 10~20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대부분이 40~50대이다. 선생님들과 친구처럼 지낼 때도 있지만, 또래 친구와 완전히 같지는 않다. 가끔 나이의 차이가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선생님들이 자식이나 친정 이야기를 하실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피부로 와 닿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반대로 내가 애인이나 또래친구에 대한 고민이 생겼을 때 선생님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역시 젊군”과 같은 감탄사나 조언의 말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같이 머리를 쥐어 싸고 고민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기도 하다. 한 일 년 동안 또래 친구가 있었으면...
김고은
2018.09.11 | 조회 673
지난 연재 읽기 루쉰과 청년
    스승, 후지노 겐쿠로  - 애닯고 아득한 청춘의 모퉁이, 그곳에 늘 서 있는 스승들(1) -           글 : 문탁           나도 무지에서 홀로 방황한다     1909년 29세의 루쉰은 약 8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딱히 내세울만한 성과는 없었다. 3년 전 의대를 때려 치고 문학으로 방향을 틀었었다. 중국인의 병은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어리석고 겁약한” 정신이기 때문에, 생리학이 아니라 문학이 그들의 병을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잡지를 만드는 일도 문예운동을 펼치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현실을 돌파하는 것은, 바람만으로는, 희망으로만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무게가 그를 귀국시켰다. 그리고 그는 교사로 취직한다.    그 시기, 일본, 중국, 조선의 사정은 엇비슷했다. 유학파들이 귀국하여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만만한 것 중의 하나가 ‘교사’였다. 물론 그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계몽의 파토스에 불탔던 많은 청년들, 예를 들어 조선의 이광수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루쉰의 경우, 그것은 밥벌이였다. 그렇다고 그가 불성실한 교사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첫 직장이었던 저쟝의 2급 사범학당에서 그는 자기가 맡은 화학과 생리학을 충실히 가르쳤다. 삽화를 포함시킨 교재, 요점이 분명한 설명으로 학생들의 신뢰도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루쉰 자신은 “죽을 만큼 황량”하다고 말한다. 식물학을 가르치는 동료를 도와 열심히 식물채집을 하러 다녔고, 당나라 때의 백과사전(類書) 등을 뒤적이며 옛날 소설들을 모아 편집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스승, 후지노 겐쿠로  - 애닯고 아득한 청춘의 모퉁이, 그곳에 늘 서 있는 스승들(1) -           글 : 문탁           나도 무지에서 홀로 방황한다     1909년 29세의 루쉰은 약 8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딱히 내세울만한 성과는 없었다. 3년 전 의대를 때려 치고 문학으로 방향을 틀었었다. 중국인의 병은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어리석고 겁약한” 정신이기 때문에, 생리학이 아니라 문학이 그들의 병을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잡지를 만드는 일도 문예운동을 펼치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현실을 돌파하는 것은, 바람만으로는, 희망으로만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무게가 그를 귀국시켰다. 그리고 그는 교사로 취직한다.    그 시기, 일본, 중국, 조선의 사정은 엇비슷했다. 유학파들이 귀국하여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만만한 것 중의 하나가 ‘교사’였다. 물론 그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계몽의 파토스에 불탔던 많은 청년들, 예를 들어 조선의 이광수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루쉰의 경우, 그것은 밥벌이였다. 그렇다고 그가 불성실한 교사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첫 직장이었던 저쟝의 2급 사범학당에서 그는 자기가 맡은 화학과 생리학을 충실히 가르쳤다. 삽화를 포함시킨 교재, 요점이 분명한 설명으로 학생들의 신뢰도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루쉰 자신은 “죽을 만큼 황량”하다고 말한다. 식물학을 가르치는 동료를 도와 열심히 식물채집을 하러 다녔고, 당나라 때의 백과사전(類書) 등을 뒤적이며 옛날 소설들을 모아 편집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문탁
2018.09.11 | 조회 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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