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4회] 무엇이 비린 것인가?

요요
2022-01-16 17:08
444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현실을 웅변한다.

 

새벽이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니 더더욱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집단 사육하고 그렇게 생산된 고기를 먹는 삶의 방식에 대해 회의가 커진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면서 고심 끝에 나름의 윤리적 결정으로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육식 권하는 사회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고기 권하는 사회이다. 육식문화는 튼튼한 몸과 강인한 체력을 강조하는 건강담론, 위생담론과 함께 사회 진보와 경제 성장의 상징이 되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의 길을 간 일본을 보자. 일본은 7세기 이후 1000년이 넘도록 이런 저런 이유로 네발달린 짐승을 먹는 것이 금지된 나라였다. 그런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의 정책으로 육식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몸집이 왜소한 것도 나라가 부강하지 않은 것도 육식을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와규가 맛있고 비싼 고급 쇠고기로 등극하고 쓰끼야끼와 같은 음식이 일본의 대표음식이 된 것은 채 150년이 되지 않는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불교문화마저 바꾸어버렸다. 그때부터 승려들의 육식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개화된 문명인으로 살려면 육식을 좋아해야 했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인도도 오랫동안 채식문화가 일반적이었다. 소년시절의 간디 역시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면 서양인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디의 부모는 경건한 힌두교도로 육식을 멀리했다. 간디는 부모 몰래 친구들과 육식을 한 것 때문에 양심의 고통을 느꼈던 경험을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근대문명은 고기를 전 세계의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공장식 축산과 도살은 근대문명에 필수적인 하나의 구성요소가 되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 건강해질 수 없고,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믿음이 지배한다. 채식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생각과 행위를 육식주의, 고기 중독이라고 부른다. 육식이 몸에 좋고 더 맛있다는 것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미각의 쾌락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관음증적 포르노에 가까운 먹방 마다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등장하고 그것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우리를 보면 육식주의가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육식은 비린 것, 채식은 향기로운 것?

그렇다면 붓다는 육식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불교는 육식을 금한다는 우리의 통념과 달리 붓다는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걸식으로 음식을 구한 고대 인도의 불교 수행승들은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붓다가 금지한 것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폭력과 살생이었지 육식이 아니었다. 세 가지 경우에 육식이 금지되었다.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거나, 자신을 위해 죽였다고 듣거나, 자신에게 먹이기 위해 죽인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는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주어진 음식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이런 불교 수행승들의 음식문화는 육식과 기름진 음식을 엄격하게 금지하던 수행자들로부터 의혹을 샀다. 『숫타니파타』에는 대놓고 붓다의 육식을 문제 삼는 대화가 등장한다. 히말라야산에서 야생수수, 풀씨, 야생 콩, 나무열매와 같은 수수하고 거친 음식만을 먹으며 금욕하던 아마간다라는 고행자가 있었다. 그는 육식을 비린 것,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간다는 붓다가 물고기나 동물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알고 붓다를 찾아가 비난 섞인 질문을 던진다.

 

하느님의 친척인 그대는 새의 고기를 훌륭하게 요리해서 쌀밥과 함께 즐기면서도, 나는 비린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뜻을 그대에게 묻건대 그대가 말한 비린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아마간다의 물음에 붓다는 무엇이라고 답했을까? 붓다의 대답은 명확했다.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말과 행위,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고 비천하게 행동하는 것이 비린 것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육식이냐 채식이냐를 가지고 비린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려 하지 말고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답이었다.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붓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무엇을 살펴야 하는 지 놓치고 있는 아마간다의 허를 찔렀다. 붓다는 매일같이 고행하고 경전을 외우고 철마다 수련하는 루틴에 철저하다고 하여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고 그 조건을 잘 살펴 의혹에서 떠나는 것이다. 청정한 삶은 어떤 금기나 계율을 묵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는 것, 즉 지혜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붓다는 식사초대를 받아 훌륭한 음식이 나오면 거절하지도 물리치지도 않았다. 어떤 음식이든 감사히 먹었다. 붓다의 위대함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붓다의 위대함은 음식의 맛에 탐닉하거나 매혹되지 않는 데 있었다. 식사 초대에 응하여 음식을 먹을 때 붓다는 다음에도 이렇게 좋은 음식을 대접받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미각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렸기 때문이다.(『맛지마니까야』 『지바까의 경』) 육식이냐, 채식이냐가 아니라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요구한 일상의 윤리이자 태도였다. 비린 것은 육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괴로움을 낳는 탐·진·치인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붓다는 당시의 고행주의자들과 달리 금욕과 고행을 절대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쾌락주의는 눈먼 욕망을 따르는 것이요, 고행주의는 욕망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붓다의 관심은 육식이냐 채식이냐, 쾌락이냐 고행이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붓다가 감각적 쾌락과 미식을 즐긴다고 오해받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한편 이와 반대로 붓다가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바라문 우다인은 제자들이 붓다를 존경하고 따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 했다. 그는 붓다가 ‘식사를 적게 하고, 어떠한 옷으로도 만족하고, 어떠한 음식으로도 만족하고, 어떠한 처소로도 만족하고, 고요한 숲속에서 멀리 여읨을 닦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붓다를 찾아가 그런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붓다는 그의 믿음에 어긋나는 대답을 했다. 자신은 때때로 양껏 배부르게 먹기도 하며, 좋은 옷감으로 만든 멋진 옷을 입기도 하고, 고급요리를 먹기도 하며, 럭셔리한 인테리어가 된 누각에서 지내기도 하고, 재가자, 대신들, 왕들, 이교도들과 어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제자들이 자신을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금욕 때문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지혜를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답한 것이다.(『맛지마니까야』 『훌륭한 가문의 우다인에 대한 큰 경』)

 

붓다의 대답은 ‘나의 가르침은 고행이나 금욕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반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간다의 물음에 대해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한 대답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붓다가 누구보다도 당시에 성행했던, 제사를 빙자한 무의미한 동물 살육에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고, 잔인하고, 공격적이고, 무례한 것이야말로 비린 것이다. 비린 것은 우리 자신을 괴로움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타자들 또한 괴로움에 빠뜨리는 말과 행동과 생각이다.

 

우리는 더 이상 붓다가 비판했던 동물희생제의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고기가 되기 위해 사육되고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수는 당시의 동물희생제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나라에서만 2020년 한 해에 도살된 전체 가축 수가 11억 마리가 넘는다.(이중 10억 마리가 닭이다.) 전 지구적인 범위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매년 100억 마리 이상의 가축이 도살되고 있다. 만일 지금 우리의 세상에 붓다가 함께 살고 있다면 아마간다의 질문에 대해 붓다는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

 

 

나는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니다’라는 붓다의 대답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는 붓다의 대답은 피비린내와 악취가 진동하는 육식의 현실에 대한 외면도 도피도 체념도 합리화도 아니다. 붓다의 대답은 육식은 나쁘고 채식은 좋다는 선악 판단이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나아가 그 대답은 비린 것의 근본을 탐색하게 한다. 더 맛있는 것을 원하고 미각의 쾌락을 좇고, 그리고 생명 보다 자본과 이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욕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마간다는 ‘당신이 생각하는 비린 것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붓다는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붓다의 대답을 듣고 아마간다는 그동안 자신이 옳다고 고수했던 고행과 금욕을 버리고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한편으로는 동물들을 오직 인간을 위한 고기로만 취급하는 공장식 축산의 현실에 분노하고, 다른 한편 종종 육식과 채식 사이에서 번뇌에 빠지곤 하는 우리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 사이 그리고 아마간다와 붓다 사이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일까? 나는 언제쯤이면 붓다를 따라 담담하게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까?

 

 

 

 

 

댓글 10
  • 2022-01-17 10:35

    미각의 쾌락~ 딱 요즘 맛집전성시대 문화네요. 전 어디선가 본 이 말을 자주 떠올리는데요, 맛을 탐닉할수록 멋을 상실한다는..멋을 찾고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 멋진 세상에 대한 성찰로 읽혔어요^^

  • 2022-01-17 10:40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ㅋㅋ... 요요님의 글을 읽으면서 예전에 동아시아 근대성 공부할 때 읽었던 <메이로쿠자시>(明六雜誌)가 떠올랐어요. 그 잡지는 메이지초기 계몽학술잡지였어요.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만들었던 최초의 근대잡지이죠. 그런데 그 잡지에 '소고기' 이야기가 엄청 나와요. '소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근대 일본 지식인들의 엄청난 이슈였죠. 단발이나 양복 못지 않게 소고기를 먹는 문제가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가, 아닌가의 바로미터였으니까요. 결국 1872년(메이지 5년) 천황은 고기반찬을 들이라 명합니다. 근대화가 공식적으로 천명된 것이지요.

    그런데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오랫동안 육식을 해왔지요.세종대왕이 엄청 육식을 즐겼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당뇨?! ㅋㅋㅋ)  왜 전근대 일본사회는 육식을 하지 않았는데 조선은 육식을 했을까? 자기수양-성리학적 주체인 조선 사대부들은 육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 이런 궁금증이 듭니다.

    갑자기 육식에 대한 문화적 해석, 고고학적 접근을 해보고 싶어졌어요^^ 

  • 2022-01-17 10:55

    최근 <Seaspiracy>와 <Cowspiracy>라는 다큐를 보고... 식구들과 먹거리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고민이 깊어졌더랬지요.

    부다의 가르침에 대한 선생님의 글이 참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무엇이 비린것이고, 탐진치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고민으로부터 해탈하는 지혜!

    탐나네요^^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 2022-01-17 11:20

     "육식이냐, 채식이냐가 아니라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요구한 일상의 윤리이자 태도였다. 비린 것은 육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괴로움을 낳는 탐·진·치인 것이다."

    요즘 여러가지 이유로 채식을 해야하나 고민중이었는데 샘 글을 읽으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오네요^^

    감사합니다~~

     

  • 2022-01-17 11:25

    너무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1-17 12:44

    무엇이 비린 것인가...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채식모임하면서 고민했던 부분이라 깊이 와닿았습니다

    요요샘,  감사합니다~~

     

  • 2022-01-17 18:23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일 수 있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1-18 09:54

    주말에 만난 아낫님은 비건이세요. 아낫님은 공장삭축산과 도살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위험성을 말씀하시더라구요. 사람다운 일을 하기 어려운 세상이네요....잘 읽었습니다.

  • 2022-01-19 18:11

    오랜 질문을 여러 결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2-06 11:23

    먹는 걸 좋아하는 자신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들어온 한 구절은 이거에요.

     “붓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무엇을 살펴야 하는 지 놓치고 있는 아마간다의 허를 찔렀다.”

     

요요와 불교산책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22:94)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깊은 산에 있는 사찰은 본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문들 중 첫 번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기둥 하나로 지붕을 받치고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한다. 일주문의 현판에는 보통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쓰여 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랜 절에 가보면 일주문에 앞서 사찰의 존재를 알리는 돌기둥이 있다.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다. 본래는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높이 솟은 당간이 세워져 있었다. 당간이란 당(幢)이라고도 하고 번(幡)이라고도 하는 깃발을 거는 기둥이다. 당간지주의 용도는 당간을 양옆에서 지지하는 것이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당간에 깃발을 걸어 행사를 알렸다고 한다.   일주문   당간지주   선(禪) 수행자들을 위해 화두 48개를 모아 놓은 『무문관』 29칙에 이 깃발과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인 혜능이 주인공이다. 당간지주에 매달린 깃발이 흔들리는 보고 두 스님이 다투고 있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모든 시비가 그렇듯이 두 스님은 꽤 열을 올리며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요란하게 다투었던 모양이다. 그 절에 왔던 혜능이 한 마디 던졌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다툼이 멈추었다.   움직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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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2.05.08 | 조회 373
요요와 불교산책
나는 멈추었다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맛지마니까야』 86, 『앙굴리말라의 경』)   앙굴리말라 이야기 초기 경전 『앙굴리말라의 경』에는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앙굴리말라의 어릴 적 이름은 비폭력이라는 뜻의 아힘사카(Ahimsaka)였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인 후 손가락을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탁발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한 후 앙굴리말라가 출몰하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마다 그 길은 위험하다고 붓다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묵묵히 그저 길을 갈 뿐이었다. 멀리서 붓다가 오는 것을 본 앙굴리말라는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을 갖추고 붓다에게 다가갔다.   나는 붓다가 어떤 방법으로 사나운 앙굴리말라를 상대할지 궁금했다. 내가 기대한 시나리오는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다 결국 지쳐 떨어져 항복하거나, 활을 쏘고 날카로운 무기를 던져도 붓다를 맞히지 못하는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초인적인 신통력이 아니고서는 앙굴리말라를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를 보면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경전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무장한 장정들 수십 명이 몰려가도 속절없이 앙굴리말라에게 당하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혈혈단신 홀로 앙굴리말라를 향해 걸어오는 수행자 한 사람. 그는 앙굴리말라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벌벌 떨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태연자약했다. 그 수행자에게서...
나는 멈추었다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맛지마니까야』 86, 『앙굴리말라의 경』)   앙굴리말라 이야기 초기 경전 『앙굴리말라의 경』에는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앙굴리말라의 어릴 적 이름은 비폭력이라는 뜻의 아힘사카(Ahimsaka)였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인 후 손가락을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탁발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한 후 앙굴리말라가 출몰하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마다 그 길은 위험하다고 붓다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묵묵히 그저 길을 갈 뿐이었다. 멀리서 붓다가 오는 것을 본 앙굴리말라는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을 갖추고 붓다에게 다가갔다.   나는 붓다가 어떤 방법으로 사나운 앙굴리말라를 상대할지 궁금했다. 내가 기대한 시나리오는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다 결국 지쳐 떨어져 항복하거나, 활을 쏘고 날카로운 무기를 던져도 붓다를 맞히지 못하는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초인적인 신통력이 아니고서는 앙굴리말라를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를 보면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경전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무장한 장정들 수십 명이 몰려가도 속절없이 앙굴리말라에게 당하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혈혈단신 홀로 앙굴리말라를 향해 걸어오는 수행자 한 사람. 그는 앙굴리말라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벌벌 떨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태연자약했다. 그 수행자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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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8 | 조회 428
요요와 불교산책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요요
2022.01.16 | 조회 444
요요와 불교산책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요요
2021.10.20 | 조회 617
요요와 불교산책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요요
2021.09.08 | 조회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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