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 2회] 두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요요
2021-09-0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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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안락한 왕궁을 떠나 출가한 것도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람들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 마주침을 통해 그는 삶이란 괴로움이고 그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예리하게 직시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 수행자가 되었고 마침내 깨달은 자 붓다가 되어 고통이 종식되었음을 선언했다. 그가 성취한 괴로움의 종식이란 어떤 상태일까. 깨달은 자가 되면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일까? 이 문제를 주제로 붓다 자신이 제자들에게 직접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일반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도 느끼고, 괴로운 느낌도 느끼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지혜로운 사람들도 역시 즐거운 느낌도 느끼고, 괴로운 느낌도 느끼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일반 사람들과 지혜로운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붓다에 따르면 깨달은 자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 느낌이란 무엇일까? 신경생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뇌』에서 느낌이란 우리 신경계의 자동적 항상성 조절 기제라고 설명한다. 그는 느낌을 좀 더 세분하여 정서와 느낌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정서는 신경계의 작용인 신체적 표상이고, 느낌은 신체적 표상(정서)에 대응하는 심적 표상이다. 즉 느낌은 특정한 신체상태에 대한 관념 혹은 지각이다.

 

우리는 붓다가 말하는 느낌을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정의하는 정서와 느낌을 통칭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그 기반은 외부와 접촉하면서 생겨나는 몸의 반응과 그것에 대한 심적 표상이다. 신체의 상태에 따라 우리는 즐거운 느낌을 갖거나 괴로운 느낌을 갖게 된다. 몸에 열이 나면 괴로운 느낌을 갖게 되고, 열이 떨어지면 즐거운 느낌을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니 보통사람이든 붓다든 자기 신체 상태에 대한 지각으로서 느낌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비록 느낌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느낌이 일어날 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는 완전히 다르다.

 

일반 사람들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슬퍼하고, 비탄하고, 비통해 하고, 가슴을 치며 울고, 착란에 빠진다. 그들은 두 가지 종류의 고통, 즉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느낀다.(…) 지혜로운 사람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슬퍼하지 않고, 비탄하지 않고, 비통해하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지 않고, 착란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의 고통, 즉 신체적인 고통은 느끼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보통 사람들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신체적 고통에 더해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그것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에서 멈춘다. 붓다는 괴로운 느낌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을 첫 번째 화살에, 신체적 고통에 덧붙여지는 정신적 고통을 두 번째 화살에 비유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첫 번째 화살만을 맞는 것에 비해 보통 사람들은 첫 번째 화살에 이어 두 번째 화살을 맞는다는 것이다.

 

 

정신적 고통의 뿌리, ··치 삼독

 

살아있는 한 첫 번째 화살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와 달리 두 번째 화살은 겪을 수도 있고 겪지 않을 수도 있는 정신적 고통이다. 두 번째 화살은 신체적인 느낌에 덧붙여지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들이다. 불교는 이와 같이 정신적 고통을 낳는 마음의 작용을 특별히 번뇌라고 부른다. 번뇌는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수동적이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고, 생산적 역량을 감소시킨다. 두 번째 화살은 바로 그러한 번뇌들이다. 번뇌에 붙들려 버릴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 번째 화살로 인한 괴로움을 겪게 된다.

 

일반 사람은 (…) 괴로운 느낌에 접촉되면 분노를 품게 된다. 그가 분노를 품게 될 때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그에게 잠재된다. (…) 그가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찾을 때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경향이 그에게 잠재된다.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발생과 소멸, 유혹과 위험, 그리고 여읨에 관하여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할 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지의 잠재적 경향이 그에게 잠재된다.(『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두 번째 화살은 탐욕, 분노 그리고 무지(어리석음)로 인한 괴로움이다. 이것을 탐(貪)·진(瞋)·치(癡) 삼독이라고 부른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때 보통 사람들은 그 느낌들에 대해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잠재적 경향, 즉 번뇌의 습기를 쌓아 나간다. 잠재적 경향은 습관과 패턴으로 반복된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분노를 품고, 분노를 키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갈애를 느끼고, 갈망을 키운다. 느낌들은 무상하다. 조건이 갖추어지면 느낌도 생겨나고 조건이 사라지면 느낌도 사라진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게 일어난 무상한 느낌들을, 무상한 느낌들에 대한 습의 반복을 아무런 반성적 성찰 없이 곧바로 ‘나’라고, ‘나의 것’이라고 집착한다. 그럴 때 여지없이 우리는 스스로 불러들인 두 번째 화살에 맞는다.

 

부모님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처럼 비통해 하고, 세상에 ‘나’보다 더 가여운 사람이 없다는 듯이 자기연민에 빠지고,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나’의 처지를 한탄하고, ‘나‘의 수고로움을 몰라주는 주변사람들을 원망했다. 갈팡질팡하는 ‘나’의 무능력을 탓하고 자책했다. 그러니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두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두 번째 화살은 이렇게 우리를 정신적 고통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해있는 조건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살피지 못하게 한다. 한마디로 우리를 착란에 빠뜨려서 내 생각과 감정 외에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는 사람이 되게 한다. 상상이나 망상에 가까운 부적합한 관념과 그로 인한 정신적 괴로움의 노예가 된다. 두 번째 화살의 비유는 그런 속박된 마음의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두 번째 화살은 공부와 수행의 영역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으려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와, 이미 번뇌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멈출 수 있는 수행이 필요하다. 수행과 지혜를 길러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죽은 나무토막 같은 존재가 되거나 감정이 메마른 냉정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물들을 명징하게 인식하고 온갖 생명체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더 예민한 감각을 갖고 풍부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의 마음의 평화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 화살을 맞았지만 두 번째 화살로부터 자유로웠던 붓다를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다.

 

80세의 노쇠한 붓다는 금세공사 쭌다가 공양한 음식을 먹고 혈변이 섞인 설사증세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붓다 역시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라는 첫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강한 선정과 삼매의 힘으로 평정을 유지했다. 붓다는 쭌다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쭌다가 자신에게 공양한 일로 괴로워하거나 남들로부터 비난받을까 염려했다. 그는 쭌다를 위해 “열반 직전의 붓다에 대한 공양만큼 공덕이 큰 것은 없다”는 자비의 말을 남겼다.

 

사람이 모인 곳이다 보니 붓다를 따르는 수행자 공동체에서도 갈등과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붓다라 해도 공동체적 삶 속에서 생겨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언젠가 우안거 중에 꼬삼비의 수행자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이 화장실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 사사건건 서로를 비난하고 저주했다. 분노에 사로잡힌 이들의 귀에는 화합하라는 붓다의 조언이 들리지도 않았다. 붓다는 자신의 견해에 완고하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았다. 그는 꼬삼비를 떠나 홀로 숲으로 갔다. 붓다가 아니라 서로 내가 옳다며 다투는 수행자들에게 더 쉽게 감정이입이 되는 나는 이런 상황에서 숲에서 붓다가 누렸을 평정과 고요를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첫 번째 화살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는 괴로움을 삶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파악한다. 첫 번째 화살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의 영역에 속한다면 두 번째 화살은 우리가 하기에 따라 피할 수도 있는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두 번째 화살은 공부와 수행의 영역이다. 공부와 수행을 통해 우리는 첫 번째 화살의 필연성을 직시함으로써 두 번째 화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붓다는 어떤 고통도 없는 삶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는 우리의 관점과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고통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두 번째 화살을 맞고 괴로워하고 있다 해도 다행인 것은 이 괴로움이 우리를 영원히 얽매는 족쇄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족쇄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풀 수 있는 족쇄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 족쇄를 완전히 풀지 못한다 해도 그 괴로움이 탐·진·치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고통인 번뇌라는 것을 알고 지혜를 키우는 공부와 수행을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두 번째 화살을 뽑을 희망도 있지 않겠는가.

 

지혜로운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에서 그것을 느낀다. 그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에서 그것을 느낀다.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로 그것을 느낀다. 이들을 태어남, 늙음, 죽음에서 여읜 자,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불쾌와 절망에서 여읜 자, 괴로움에서 여읜 자라고 한다.(『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댓글 11
  • 2021-09-08 11:02

    지난 해 올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이런 생각도 두 번째 화살이겠죠? 두 번째 화살 피하기 어렵네요.....

  • 2021-09-08 11:58

    저를 지나쳐 날아가는 화살도 가져다가 제 몸에 꽂아넣는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글이었습니다. ㅠ

  • 2021-09-08 12:05

    요양원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귀가 안들리시니 급하게 연락할 일이 아니면 전화를 잘 하지 않게 되니 한참 연락없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참다참다 전화를 하신 듯.ㅎㅎ 요 며칠 새 기침이 심하고 몸도 안 좋은데 꿈자리도 안좋다고, 자식 걱정에 전화하신 거였어요. 그런데 일단 아버지가 내 말도 잘 못들으시니까 당신이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하고...그러려면 왜 전화를 하셨나 싶을 정도로 우린 불통이었어요. 고함을 지르듯 해야 겨우 한 두 마디 알아들으시니 그냥 듣고 있지만 '기침이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만 열댓번 하는 아버지와의 통화는 짜증이 났지요. 그러다 요요샘의 이 글이 생각났어요. '아, 아흔이 넘은 아버지가 저렇게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만도 어디냐, 꿈자리가 나쁘다고 자식걱정을 하는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게 어디냐'하는 생각에 미치자, 오히려 행복한 느낌이 밀려오네요. 이 건에 대해서는 두번 째 화살을 피한 것 같습니다.ㅎㅎ

    • 2021-09-08 12:09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1-09-08 12:08

    傷!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onebyone.gif?action_id=68dae09acacd7acb36a918266dd2100!!

    버뜨 나는.... ㅠㅠ

  • 2021-09-08 12:55

    첫번째 화살을 맞으면 마치 자동문이 열리는 것처럼 우리는 두번째 화살을 가슴에 박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이건 두번째 화살이니까 괴로워할 필요없어 하고 생각할 때,우리는 이미 그 화살을 끌어안아버리고 있죠

    저는 그 첫번째 화살을 온전히 맞아버리는 능력 또는 힘에 두번째 화살을 피할수 있는 열쇠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능력은 요요샘 글에도 있듯이 수행,성찰, 공부..이런 것들이겠죠~

    요요샘~오랜만에 ..너무 잘 읽었습니다!

     

  • 2021-09-08 13:09

    첫번째 화살의 필연성을 알게되면 피할수 있는 두번째 화살

    관점과 태도의 변화로 자유로울 수 있다

    그건 다른 누가 하는게 아니라 바로 내가 하는 것이다

    두번째 화살이라도 피해가보자 고 생각은 하나...



     

  • 2021-09-08 19:44

    공부와 수행을 통해 우리는 첫 번째 화살의 필연성을 직시함으로써 두 번째 화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_라는 요요샘의 글이 허둥되는 저에게 와서 두들겨 주셨습니다~^^ 글이 너무 좋아요^^

  • 2021-09-09 20:36

    샘^^ 잘 읽었습니다^^ 

  • 2021-09-09 22:09

    저도 잘 읽었습니다

    총알에 화살에 정신없는하루입니다

  • 2021-09-30 13:18

    어찌 이리 글을 맛깔나게 잘쓰시는지..감동 ㅠㅠ

요요와 불교산책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22:94)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깊은 산에 있는 사찰은 본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문들 중 첫 번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기둥 하나로 지붕을 받치고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한다. 일주문의 현판에는 보통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쓰여 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랜 절에 가보면 일주문에 앞서 사찰의 존재를 알리는 돌기둥이 있다.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다. 본래는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높이 솟은 당간이 세워져 있었다. 당간이란 당(幢)이라고도 하고 번(幡)이라고도 하는 깃발을 거는 기둥이다. 당간지주의 용도는 당간을 양옆에서 지지하는 것이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당간에 깃발을 걸어 행사를 알렸다고 한다.   일주문   당간지주   선(禪) 수행자들을 위해 화두 48개를 모아 놓은 『무문관』 29칙에 이 깃발과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인 혜능이 주인공이다. 당간지주에 매달린 깃발이 흔들리는 보고 두 스님이 다투고 있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모든 시비가 그렇듯이 두 스님은 꽤 열을 올리며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요란하게 다투었던 모양이다. 그 절에 왔던 혜능이 한 마디 던졌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다툼이 멈추었다.   움직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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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2.05.08 | 조회 373
요요와 불교산책
나는 멈추었다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 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맛지마니까야』 86, 『앙굴리말라의 경』)   앙굴리말라 이야기 초기 경전 『앙굴리말라의 경』에는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앙굴리말라의 어릴 적 이름은 비폭력이라는 뜻의 아힘사카(Ahimsaka)였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인 후 손가락을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붓다는 탁발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한 후 앙굴리말라가 출몰하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마다 그 길은 위험하다고 붓다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묵묵히 그저 길을 갈 뿐이었다. 멀리서 붓다가 오는 것을 본 앙굴리말라는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을 갖추고 붓다에게 다가갔다.   나는 붓다가 어떤 방법으로 사나운 앙굴리말라를 상대할지 궁금했다. 내가 기대한 시나리오는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다 결국 지쳐 떨어져 항복하거나, 활을 쏘고 날카로운 무기를 던져도 붓다를 맞히지 못하는 중국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이었다. 초인적인 신통력이 아니고서는 앙굴리말라를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를 보면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경전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무장한 장정들 수십 명이 몰려가도 속절없이 앙굴리말라에게 당하던 형국이었다. 그런데 혈혈단신 홀로 앙굴리말라를 향해 걸어오는 수행자 한 사람. 그는 앙굴리말라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벌벌 떨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태연자약했다. 그 수행자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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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8 | 조회 428
요요와 불교산책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요요
2022.01.16 | 조회 443
요요와 불교산책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71)   『무소의 뿔 경』 전체를 읽어본 적이 없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구절은 독립, 자유, 결단, 마이 웨이와 같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라, 이런저런 주위의 시선과 기대 따위 훌훌 털어 버리고 네 식대로 살아도 좋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일 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제 살 길 외에는 관심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얽히고설켜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도 모자랄 판인데 불교마저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이해들은 다소간 오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를 감행하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제 갈 길 가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라, 라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익숙한 습속을 떠나라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출가사문들을 향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가사문이란, 붓다의 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에 고대인도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비판적이고 이단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온 성스러운 『베다』의 가르침과 제식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이 주관하는, 수많은 희생동물을 바치는 거대한 제사가...
요요
2021.10.20 | 조회 617
요요와 불교산책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요요
2021.09.08 | 조회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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