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2023-09-11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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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1. 빛나는 정지된 순간

   몇 년 전 여울아쌤과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받았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탕누어가 다양한 주제로 소개하는 한자들을 경험하며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영감과 자극 덕분에 한자로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이 닳도록 한자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한문이 예술>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재미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알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너무 짧고 얕고 좁아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한자의 풍경>은 탕누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자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조사의 기록, 시대적 배경과 흐름, 최근까지 계속 달라지고 있는 담론을 소개하면서 비교적 추상적이고 짐작되는 내용보다는 실재적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한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생각됐지만 저자는 동시에 한자가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는다.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빛나는 정지된 순간을 만나게 된다. (6)

 

  저자는 형태에 의미가 남아있는 한자의 특성상 문자가 만들어진 순간을 파헤치다 보면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경외심을 느낄 수 있다고 전한다. 그 경외심은 그가 포착해 낸 어떤 장면이 탁월한 형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세상을 사유하는 은유와 상상의 과정을 경험할 때 느껴진다. 밝을 명明은 단순히 해와 달이 더해져 ‘밝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밤, 창틀에 달빛이 내린 장면을 담은 문자이고, 성인 성聖은 보는 것보다 듣고耳 말하는 것口을 더 훌륭한 덕목으로 여긴 고대 사람들의 신념을 담은 문자다. 고대의 사고방식과 시선으로 포착된 세상은 한자에 박제되어 흘러간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히 빛나고 있다. … 이 감동을 다른 사람에게도 잘 전달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재미있고 흥미롭기만 한 영역이 아니라 조금 더 면밀하게, 한자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다각도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내용을 기대하며 <한자의 풍경>을 읽어나갔다.

 

 

 

2. 한자의 탄생은 언제?

 

  한자의 기원은 흔히 갑골문이라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갑골문은 상당히 완성된 체계를 가진 문자로 처음부터 짠!!하고 갑골문의 형태를 갖춰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자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체계적인 문자가 된 것일까? 책에서는 다양한 가설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문구 문화의 도문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듯하다. 대문구 도문이란 신석기 앙소 문화보다 후기인 산둥성 태안현(泰安縣) 대문구(大汶口)의 신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도자기에 새겨져 있던 도상을 의미한다. 이 도상은 이전 시기에 발견된 다른 도상에 비해 구체적이면서도, 이후 시기의 산, 해의 갑골문과 비슷한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같은 도상이 넓은 지역에서 다량으로 발견되었으니 우연히 만들어진 기호도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오랜 세월동안, 이 대문구 도문이 한자의 기원으로 여겨졌다.

 

  나 또한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에서 이 도상을 본 적이 있다. 탕누어의 책에서는 이 도상이 후에 아침 단旦으로 발전되어 ‘산 위에 해가 뜨는 것으로 보아 이 한자가 만들어진 지역은 동쪽에 산이 많았을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후에 산인 줄 알았던 형태가 산이 아니라 장강 하류에 있던 양저문화의 제단이라는 설이 제시되면서 한자의 기원이 대문구 도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고 한다.  

 

 

 

 

  한자의 기원을 파헤치는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최근에는 기원전 6000년 전의 정공촌 정공 도문이 발견된 것을 두고 누군가는 이것이 대문구 도문에서 갑골문으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라 바라보기도 하고, 다른 부족이 사용하던 글자일 수도 있다고 본다. 이보다 더 앞서서 다양한 도상이 담긴 암각화도 한자의 기원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바라보기도 한다. 물론 그 암각화에는 의미가 담겨있지만, 언어와 얼마나 연관되었는지 알기 어렵고, 대부분 부호와 상징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이 한자의 기원과 얼마나 연관되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다양한 요소들이 한자 형성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연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한자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확실한 건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의 글자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자의 발전이 단선적인 과정을 겪은 것이 아니라 생성과 변형, 그리고 도태가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복합적인 과정을 겪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인류가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농경사회가 시작된 시대적 배경이 문자의 생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바라본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잉여 자원들을 다른 자원들과 교환하는 교역이 이루어졌고, 그 내용을 기록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구체적인 상형 형태는 점점 단순한 기호로 바뀌고 간단히 보관할 수 있는 기록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쐐기의 형태로 사용된 수메르 문자가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수메르 문자와 비슷한 시기에 사용되던 갑골문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갑골문이 만들어진 상나라는 본격적인 농경 사회로 진입했지만, 아직 고대 국가의 단계는 아니었다. 왕은 다양한 씨족 세력을 통솔하는 수준이었으며 주변 세력에 왕족을 파견하는 느슨한 네트워크의 상태에 더 가까웠다. 구속력이 약했기 때문에 통치자에게는 절대적인 권위가 필요했다. 갑골문은 신과 소통하기 위한 점복 제의를 위해 만들어지고 사용되었으며 제정일치를 위한 주술적인 용도가 훨씬 강했다. 그들은 절대적 권위를 확인하기 위한 용도로 갑골문을 사용했으며, 갑골문을 천상의 권위를 자신의 통치 권력으로 바꾸는 도구로 사용했다. 

 

 

 

3. 정체성의 공통 분모가 된 한자

 

  마음 심心은  갑골문이 얼마나 주술적인 지배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한자다. 오늘날 사랑愛이나 염려念, 미움惡처럼 감정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心과 달리 갑골문에서 사용되는 心은 단순한 인간의 신체 기관을 의미하는 한자였다. 저자는 갑골문을 사용하던 상나라 시기에는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고 능동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신석기가 지난 청동기 시기에 쓰였던 금문에서도 心으로 구성된 글자는 20여 자가 전부다. 

 

 

 

 

  그런데 상나라로부터 1000년이 지난 한나라에 쓰인 <설문해자>를 살펴보면 心자를 부수로 하는 한자가 250개가 넘는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신에게 의지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차이를 알 수 있는 건 중국이 한자라는 같은 형식의 문자를 오랜 시간 동안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 중국은 계속해서 같은 형식의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상나라가 망하고 씨족 연합 중 하나였던 주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는 과정에 있다고 바라본다.

 

  상나라는 국가형식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문자 체계와 강력한 제정일치 사회로서 상당히 발전된 문명이었다. 주나라 건국 세력은 이런 상을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명분을 만들어 내야 했다. 주나라는 그 명분으로 이전과는 다른 국가이념을 만들어 낸다. 상나라 시절에는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운 인격신이었던 帝(제, 상제)를 주술로 달래고 두려워하며 의존하는 수동적인 관습을 유지해야 했는데, 이와 결별하기 위해 천명天命사상을 창안한 것이다. 천명은 인간의 도덕적인 의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반영된 것으로 주나라 초기에 개발되어 춘추 전국 시대 여러 사상가에 의해 체계적 구조를 갖춘 철학으로 완성된다. 저자는 <주역周易>이 이런 상황을 반영해 주 문명이 새롭게 구성한 세계의 과학적 원리를 정리한 책이라고 바라본다. 상나라 시대의 점복은 절대자인 신(帝)의 막연한 의지를 확인하는 제의였다. 하지만 주역은 64개의 기호로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법칙을 탐구해 하나의 정돈된 세계관을 형성한다. <주역>으로 종교적인 상징에서 인문적인 해석으로 전환하는 과정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천天은 이런 제를 대신할 새로운 권위로 보다 추상적이고 탈인간적인 형태의 지배 원리였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한자가 계속 중국의 역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나라가 새로운 문자를 채택하지 않고 상나라의 문자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문자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과거의 왕조와 문화적 차별성을 강조하고, 단일 문명권이 지속되는 계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같은 문자이지만 다른 사상으로 사용하다 보니 갑골문은 서서히 그 성격과 역할이 바뀌게 된다. 문자를 소수의 사제와 왕이 독점하기보다 인간 중심의 보편적 사용이 강조되어 널리 퍼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면서 한자의 확산은 더욱 빨라졌다. 心의 용법이 달라진 것만 보아도 그들의 인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냥 쓴다’라는, 어쩌면 단순하고 특별해 보이지 않은 선택이 이후 몇천 년 동안 중국 문화권이 유지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느슨한 네트워크였던 씨족 연합에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가 이상비상한거다) 단순히 생각해 봐도 과거와 결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자보다도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니 말이다. 이후로 한자는 몇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용되면서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 현대까지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화하華夏라는 단일민족이라 여기는 민족주의를 갖고 있는데, 이 단일민족을 유전적 계통으로 구분 짓는 것은 허상에 가깝기에 한족이라는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자 사용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어에는 알파벳이 도입되기도 하고, 자형의 변화나 많은 간략화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한자는 정체성의 공통 분모로서 작동하고 있다.

 

 

 

화이사상과 중화사상은 화하민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

 

 

4. 상상은 어떻게 현실이 되나

 

  “여러분과 한자를 공부하면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상상력이에요. 한자는 주변을 그림으로 옮기며 시작된 문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雨나 해日, 물水이나 불火같은 한자를 만들면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상상력을 가지고 그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어렵지 않게 고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을 거에요.”

 

  처음 <한문이 예술>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한자를 통한 상상력을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수업을 이끌고 가면 좋을 것 같다는 동료 선생님의 제안이 있었고(땡큐), 나 역시도 ‘이거다!’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자형의 다양함과 한자의 구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을 바탕으로 고대를 상상하고, 두려움 없이 자의적인 해석을 해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했다. 상상력은 아이들이 독창적이고 충격(?)적인 해석을 제시할 수 있게 해줬고, 고대 사람들이 했던 상상의 과정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줬다. 나는 한자 공부에서 그 즐거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즐거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최근에는 단순히 갑골문의 형태와 구조만으로 분석할 때 드러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와 해석의 한계가 두렵기도 하다. <한자의 풍경> 저자도 형태나 속성에 매몰되지 않고 상상력을 통해 발상을 전환하고 표현하는 상상력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시대적 배경과 사료로 한자를 설명하려는 것에 더욱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책을 읽으면서 한자를 통한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대의 현장성을 발견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글로 다 담지는 못하지만, 하夏나라나 상商나라같이 궁금했던 나라 이름 한자나, 몇 년 동안 동양고전 공부를 하면서도 단박에 잘 정리가 안됐던 시대상들, 역사적 흐름이 한자를 키워드로 하니 훨씬 이해가 수월하기도 했다. 막연한 생각들이 여러 단서들을 통해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기존에 느꼈던 즐거움과는 다른 즐거움이었다. 이후에 나에게 필요한 공부가 이런 것이 아닐까?! <한자의 풍경>은 나에게 조금 더 통찰력 있게 자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한자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론을 알려준 책이었다.

 

댓글 1
  • 2023-09-13 10:37

    동은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잘 읽혀지네요.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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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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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3.09.18 | 조회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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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09.17 | 조회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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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1 | 조회 307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진달래
2023.09.11 | 조회 189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정군
2023.09.11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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