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흐름으로서의 세계

진달래
2023-09-11 14:33
189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1.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투쟁을 접고 호남의 석선산에 은거 한다. 은거 후에는 교육과 저술 활동에만 매달렸다고 하는데 왕부지는 역사와 철학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經)과 사(史), 문예 등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왕부지의 사상은 명나라의 멸망의 원인을 사색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으며 특히 그는 북송의 장재(張載:1020~1077)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계승하여 주자학이나 양명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현대 중국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유물론자로 평가 받고 있다.

『운행과 창조』는 왕부지의 『주역내전』을 통해 ‘운행사상’을 풀어내고 있다. 즉, 『주역』으로 동양의 사유체계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동양사상이라고 하면 유학(儒學), 혹은 유교(儒敎)를 떠올리지만 실제 동양사상에서 가장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주역』의 역(易), 즉 ‘변화’에 대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주역』이 오래된 텍스트인 만큼 『주역』에 대한 주석서도 많다. 문탁에서도 우응순선생님과 『주역전의(周易傳義)』를 읽었다. 『주역전의』는 정이의 『이천역전』과 주희의 『주역본의』가 합쳐진 것으로 철학서와 점서(占書)의 두 측면을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가장 기본적으로 읽어야하는 주석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보니 줄리앙은 왜 많은 『주역』의 주석서들 중에 왕부지의 『주역내전』을 선택했을까?

 

“그의 저술은 정통유가사(正統儒家史)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지만 분명 그의 저술은 중국사상의 탐구의 각별한 적소(適所)로서 중국 사상의 전개 방식을 가장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사상에 실린 여러 입장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성화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저술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은 일련의 주장들이나 체계화된 하나의 교의가 아니라 유가의 직관에 담긴 잠재성이 어떻게 철저하게 표출되며 엄격함과 명석함을 통한 가장 강도 높은 노력으로서의 사유가 그 준거인 정신적 틀에 대해 어떻게 항상 능동성을 견지하는가 하는 점이다.”p19

 

줄리앙은 『운행과 창조』를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먼저 ‘운행’에 대한 고찰을, 두 번째는 유가 사상에 나타난 ‘비가시’와 ‘초월’의 위상에 대하여, 세 번째는 운행 사상이 어떻게 윤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는 시(詩)를 통해 예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운행’과 ‘창조’를 서로 비교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왜 왕부지의 사상을 통해서 운행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왕부지 초상 - 바이두

 

  1. 이롭고도 규칙적인 운행

 

『주역』은 음·양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운행과 창조』에서는 이를 “태초에 교대가 있었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교대의 예로 낮과 밤, 가시와 비가시, 수축과 팽창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왕부지는 사실 대립이 아니라 시간적 대조일 뿐이고 현동(現動)과 잠재(潛在)의 연쇄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교대의 순환논리를 따르면서도 척박한 반복과는 상반된다. 교대가 있기에 흐름이 펼쳐지며 운행도 나아가게 된다.”(p37)

 

교대는 반복이 아니라 상호 자극과 조절에 의한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며 흐름으로 펼쳐진다. 낮과 밤은 분절이 아니라 흐름이다. 이들은 연속적이고 규칙적으로 ‘운행’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운행을 ‘흐름’으로 본다는 것이다. 왕부지는 장재를 이어받아 이 세계를 기의 흐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장재는 이 세계는 기로 꽉 차 있으며 이 기가 응축되거나 분산되면서 변화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왕부지는 음(陰)과 양(陽)을 기의 본체로 보는데 이 두 기의 인(絪)·온(縕)운동으로 세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줄리앙은 왕부지가 말한 음·양의 운동을 ‘감응을 통한 영향(感通)’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으로 존재의 발생기원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즉 모든 실재는 상호감응(相感)으로서 음·양의 작용에 의해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 때 상호감응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갖추어져야 한다. 존재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야 하며 한편,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공통된 토대를 가져야한다. 즉, 같음은 다름(非同則不能異)을 다름은 같음(非異則不能同)을 상정한다.

왕부지는 다른 신유학자들과 달리 태극(太極)과 같은 하나의 근원에서 음·양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고, 음·양 자체가 태극이라고 본다. 즉 음·양이라는 이원성을 근원적인 것으로 본다. 왕부지는 『주역』에서도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를 다른 괘들과 분리해서 본다. 이 두 괘를 가장 기본적인 괘라고 보는데 음과 양이 그 자체로 태극이 된다면 이 두 괘 사이에는 어느 것이 먼저라거나 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건(하늘)과 곤(땅)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이 두 괘는 교대를 통해서 변화를 만들어내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분절적이지 않고 운행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1. 잠재성의 세계

 

왕부지는 신유학자들이 사용하는 태극의 개념과 헷갈리지 않도록 장재가 말한 태허(太虛)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우주 전체에는 기(氣)가 꽉 차있으나 이는 비가시의 상태로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부지에게 있어서 가시와 비가시의 상태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변화로서의 운행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왕부지는 비가시의 상태를 주목하여 이러한 빔(虛) 속에 무한한 잠재성을 부여하며 실재 안에 흐름을 내재시켰다.

 

“가시에 대한 비가시의 관계는 현동에 대한 잠재의 관계이다. 우리가 운행의 논리에 따라 아무런 동인의 개입이 없는 이행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잠재상태의) 비가시가 운행의 본체이며 비가시의 현동이 운행의 작용을 형성한다는 이 유일한 사실에 의해서이다. 본체와 작용은 불가분하다. 내재라는 것은 반드시 펼쳐지게 마련이다.” p123

 

이 책이 ‘운행’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창조’와 달리 운행에는 외부적인 간섭이나 외적 규범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조물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물주가 ‘창조’하는 세계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흐름’인 운행은 어떤 의도를 지니게 할 수 없다.

왕부지가 설명하는 『주역』이 다른 주석가들과 다른 점은 왕부지는 하나의 괘(卦)가 여섯 개의 효(爻)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효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 고려하여 열두 개의 효(爻)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비가시의 영역까지 고려한 것이다.

흔히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의 영역은 신비주의로 치부되면서 신(神)적인 것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가시와 비가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모든 현동(現動)은 잠재(潛在)를 품고 있다. 줄리앙은 이러한 비가시의 영역을 동양사상의 핵심이라고 본다. 전통사회에서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을 비극적으로 보지 않는 것도 세계를 ‘변화의 흐름’으로 보기 때문이다. 산자의 정신(神)과 죽은 자의 혼(鬼)을 이어주는 것도 바로 이 잠재와 현동 혹은 음양 개념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조상과 후손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여기게 되었다.

 

 

동양 사상에서 운행의 논리는 도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의 덕성은 세계의 운행과 유사 관계 속에서 고찰되고 있기 때문이다. 흐름으로 인식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도덕 행위는 늘 조절해야 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조절 행위는 신이나 신성한 중개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할 수 있으며 쉼 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비가시의 세계는 흐름과 같다. 흐름 안에서 ‘비편파성(中)’은 운행이 어긋나거나 정체되지 않도록 조절한다. ‘비편파성’은 단지 어디에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따라 고정되지 않는 것이다. 운행의 순간에 언제나 완벽하게 부응하는 것이다. 운행에 잠재하는 바탕처럼 현자(賢者)는 자기 안에 잠재하는 모든 덕성을 지닌다. 현자는 완벽한 중(中) 속에 머무른다.(隨時而得中) 이 때 필요한 것은 운행의 흐름과 분리됨이 없이 나가는 ‘수행력’이다.

 

  1. 윤리적 삶의 가능성

 

줄리앙은 가시에서 비가시에 이르기 위해서는 중간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유가에서는 이 중간단계를 특히 강조한다고 보았다. 이 단계를 섬세함, 혹은 미묘함의 단계로 보는데 ‘전조’단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단계의 설정은 초월이나 신비주의 없이 가시와 비가시를 연결하고 이를 분리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 전통의 조물주 사상은 우주 창조론적 상상만으로 가득한 것도, 또한 원동인에 대한 철학적 필요성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다음 두 사항이 이 사상에 근본적으로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한편으로는 유일함과 동시에 의지의 요체로서의 주체-행위자의 범주를 인류학적으로 부각시켰던 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물주와 창조물간의 근본적 위상의 차이를 이념적으로 부각시켰던 점이다.” p103

 

흐름 안에서는 위계를 정할 수 없다. 게다가 흐름 속에서 실재들은 서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주역』은 이러한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하나의 괘(卦)를 이루고 있는 여섯 개의 효(爻)를 통해 다양한 배치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왕부지는 이 여섯 개의 효 중에 2와 5의 자리에 있는 두 개의 효가 중심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중심이 하나라면 구조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중심은 대립, 보완하면서 밀고 당기기 때문에 연속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줄리앙은 이런 변화가 윤리적인 차원을 포함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용(中庸)이다. 중용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비편파성’에서 본 것처럼 변화, 즉 흐름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것이다. 이를 때로는 ‘순응(順應)한다’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보면 현자는 어떤 경우에도 도드라지지 않고 심지어는 무미건조해 보기이기까지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자의 가르침에는 말이 없다. 또 여기에는 가시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가시의 영역이 늘 포함된다. 예악(禮樂)은 가시의 영역에서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흐름에 딱 맞을 때 느껴지는 조화로움은 비가시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조화로움은 만물을 감화시키고 확산한다.

 

 

사실 운행이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던가, 『주역』이 이를 이야기하고 있는 텍스트라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왜 낯선 왕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운행만 이야기한다면 굳이 왕부지를 소환할 필요가 없겠지만 가시와 비가시의 세계가 한 흐름 안에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신유학자들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무시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태극이라는 근원에서 음과 양이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음·양 자체가 근원이며 태극은 그것이 뒤섞여 있는 상태일 뿐이라는 왕부지의 주장이 색다르게 보였다. 게다가 중심이 두 개일 수도 있다니. 읽는 동안 스피노자도 생각나고 들뢰즈도 생각이 났다. 좀 더 공부하게 되면 왕부지가 말한 것들과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댓글 1
  • 2023-09-13 18:20

    왕양명 이후 왕가의 등장이네요. 왕부지. . 다소 우습게도 들리는 이름은 들뢰즈가 말하는 식별불가능성과 차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아 흥미롭습니다.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아직 그쪽으로 운행 중이라고 말하는 수밖에요. . ㅎㅎ 잘 읽었습니다.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인디언
2023.09.18 | 조회 426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2023), 이주희     감정사회학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왔던 현타는 ‘지금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자발적이고 은밀한 나만의 본질같은 것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연출된다는 것.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바로 그런 ‘감정’과 ‘구조’의 은밀한 콜라보에 ‘차별’이라는 다소 버거운 주제를 함께 이야기 한다.         처음엔 ‘차별’이라는 주제에 오히려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별받으며 혹은 차별하며 살아온 사람일까?’라는 물음에 이내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며, 차별이 식상한 주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미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은 식상하다는 이 느낌은 아마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더뎌지고 희미해지고 무산되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꼈던 익숙한 실망감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어마한 주제에 대한 무기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급하기엔 좀 불가능하지만 ‘감정’, ‘구조’, ‘차별’ 이라는 어마무시한 삼총사를 1234를 통해 ‘아무튼’ 만나 보았다.     차별은 ‘구조’와 맞물려 있다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차별에 둔감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성향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조 속에 숨어 들어간 차별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은 차별하는 이나 차별당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국가, 그리고 여러 신념체계가 복합적으로...
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2023), 이주희     감정사회학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왔던 현타는 ‘지금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자발적이고 은밀한 나만의 본질같은 것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연출된다는 것.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바로 그런 ‘감정’과 ‘구조’의 은밀한 콜라보에 ‘차별’이라는 다소 버거운 주제를 함께 이야기 한다.         처음엔 ‘차별’이라는 주제에 오히려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별받으며 혹은 차별하며 살아온 사람일까?’라는 물음에 이내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며, 차별이 식상한 주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미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은 식상하다는 이 느낌은 아마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더뎌지고 희미해지고 무산되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꼈던 익숙한 실망감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어마한 주제에 대한 무기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급하기엔 좀 불가능하지만 ‘감정’, ‘구조’, ‘차별’ 이라는 어마무시한 삼총사를 1234를 통해 ‘아무튼’ 만나 보았다.     차별은 ‘구조’와 맞물려 있다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차별에 둔감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성향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조 속에 숨어 들어간 차별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은 차별하는 이나 차별당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국가, 그리고 여러 신념체계가 복합적으로...
스르륵
2023.09.17 | 조회 377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1. 빛나는 정지된 순간    몇 년 전 여울아쌤과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받았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탕누어가 다양한 주제로 소개하는 한자들을 경험하며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영감과 자극 덕분에 한자로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이 닳도록 한자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한문이 예술>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재미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알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너무 짧고 얕고 좁아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한자의 풍경>은 탕누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자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조사의 기록, 시대적 배경과 흐름, 최근까지 계속 달라지고 있는 담론을 소개하면서 비교적 추상적이고 짐작되는 내용보다는 실재적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한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생각됐지만 저자는 동시에 한자가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는다.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빛나는 정지된 순간을 만나게 된다. (6)     저자는 형태에 의미가 남아있는 한자의 특성상 문자가 만들어진 순간을 파헤치다 보면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경외심을 느낄 수...
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1. 빛나는 정지된 순간    몇 년 전 여울아쌤과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받았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탕누어가 다양한 주제로 소개하는 한자들을 경험하며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영감과 자극 덕분에 한자로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이 닳도록 한자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한문이 예술>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재미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알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너무 짧고 얕고 좁아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한자의 풍경>은 탕누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자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조사의 기록, 시대적 배경과 흐름, 최근까지 계속 달라지고 있는 담론을 소개하면서 비교적 추상적이고 짐작되는 내용보다는 실재적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한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생각됐지만 저자는 동시에 한자가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는다.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빛나는 정지된 순간을 만나게 된다. (6)     저자는 형태에 의미가 남아있는 한자의 특성상 문자가 만들어진 순간을 파헤치다 보면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경외심을 느낄 수...
동은
2023.09.11 | 조회 306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진달래
2023.09.11 | 조회 189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정군
2023.09.11 | 조회 210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