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삼아 걷기-20 일상의 걷기와 수행의 걷기

느티나무
2022-05-3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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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의 열무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수요일 장터에 팔았어야 딱 맞았는데 바쁜 일정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텃밭 열무김치 담그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초록과 토토로와 고마리와 나 그리고 마지막에 뭉친 스르륵까지

토요일 저녁 무렵 시작된 김치담그기 일정이 일요일 저녁 6시 경에 끝이 났다. 

 

계획은 이랬다.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일삼아 걷고 들어와 글을 올리고 잔다.'

하지만 저녁을 먹고 나자 몸이 늘어졌고

김치 맛있어야 하는데....양치해야 하는데... 걸어야 하는데...  걸어야 하는데....

엄마...  엄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꼭 엄마랑 같이 본다고 본방도 안 보고 기다렸던 딸의 외침도  잠을 이길 수는 없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아직 창밖이 어둡다.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어스름하게 밖이 밝아와 주섬주섬 길을 나섰다.

해가 뜨기 전 망초는 이렇게 동글동글 꽃잎을 말고 해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오랫만에 동백호수 공원길을 걸었다. 아침 출근 전이라 한산한 길에 바쁜 이들이 있다.

가마우지는 날개를 펴서 가만히 앉아 깃털을 말리고 오늘 처음 인사하는 흰 오리(거위인가...)는 세수에 한창이다. 

지금 쯤이면 대구의 어머니는 책상앞에 앉아 사경을 할 것이고, 친구 고마리는 텃밭에 나가 흙에서 난 친구들을 살필 것이고

딸아이는 출근 준비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이렇게 모두 하루의 일상을 시작하고 있구나.

 

매년 농사철이 끝나고 친구와 둘이서 여행을 갔다. 

1박 2일의 짧은 시간이지만 벌써 4년 째 이어오는 소중한 연중 행사이다. 

여행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걷는다. 

동네를 일삼아 걸을 때와는 사뭇 다른 여행의 걷기다. 

통영의 섬 한 곳을 통째로 한 바퀴, 부여의 유적지를 모두, 임실의 산골길을, 선유도와 무녀도를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거의 걷는 셈이다. 

여행의 걷기는 일상과 단절 된 자유와 낯 섬이라는 묘한 설레임이 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낯설다. 

침묵과 걷기...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 지도, 도중에 무엇을 만나게 될 지도 얼마나 걸어야 하는 지도 알 수 없는 걷기는

그래서 내가 타자가 되어서 나와 만나는 시간이다. 

신영복 선생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라고 하셨다.

다시 걷기와 여행을 생각해 본다. 

어떻게 하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걷기를 할 수 있을까... ...

 

일삼아 걷기를 막 시작할 즈음 팽목항을 가자고,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 로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으로의 걷기를 하자는 공지를 보았다. 

그리고 일삼아 걷기가 끝나고 한 주 뒤 팽목항을 시작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 되는 걷기에 동참해 보려 한다. 

"순례라는 여행은 무언가를 찾아가는 여행이고, 순례에서 걷는다는 것은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한 노동이다. 그 무언가 중에는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도 포함될 수 있다."

"여기서 traver(여행)의 어원이 travail(노동, 고통, 출산)이라는 점을 떠올려볼 수도 있다. 순례자들은 중세부터 신발을 신지 않거나 신발에 돌덩이를 매달거나 단식을 하거나 특수한 참회용 의복을 입은 채로 여행했다."(걷기의 인문학 83p)

 

이후 우리의 걷기는 어떻게 어디로 이어질까...

 

댓글 6
  • 2022-05-30 18:25

    느티샘의 마지막 글이네요. 열무김치로 시작해 팽목항까지 많은 얘기를 담고 있네요. 일삼아 걷기 공생자행성 프로젝트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셔요.. ㅋㅋ 원하심 더 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 2022-05-30 20:42

    해가 나지 않은 흐린 날씨 때문에 낮인데도 꽃잎을 말고 있는 개망초 꽃들에 눈길이 갔습니다.^^

     

  • 2022-05-31 11:04

    요즘 많이 바쁘신 느티샘~

    그 와중에 늦게라도 꼭 걷고, 일지 올리고..

    고생하셨습니다. 일지마다 느티샘 특유의 '갬성'이 느껴졌어요. 작년에 영화 인문학 셈나에서 스스로를 감성적인 사람이라 말하곤 했던 기억이....ㅎㅎㅎㅎㅎ

  • 2022-05-31 15:20

    이른 아침의 개망초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군요~~

    부지런한 사람이 볼 수 있는 광경은 올빼미가 보는 광경과 너무 다르네요 ㅋㅋ

    앞으로도 종종 걷고 만난 모습들 공유해 주셔요~

     

  • 2022-05-31 17:01

    저도 아침의 망초는 기억에 없었는데. 저랬군요.

    쌤과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앞으로도 쭉~ 같이 공부하고 걸으면서 살아봅시다!

  • 2022-06-01 23:19

    출근길이 40여분이라고 하시니

    앞으로도 느티샘의 걷기 일지를 가끔 보고 싶어요~
    어쩌다 한 번씩 올라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