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31회]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청량리
2024-02-19 01:24
200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이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처드를 중심으로 영화를 읽어나가면 영화의 제목이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라 왜 ‘디 아워스(hours)’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흐름을 바꿔 읽어보면 어떨까? 시간 순서대로 흐르는 ‘버지니아 – 로라 – 클라리사 – 버지니아’의 구조에서, 앞부분을 연결되는 맨 뒤로 배치하면 로라 클라리사 버지니아의 흐름이 된다.

 

 

01 로라 × 리처드

신해철의 노래가사처럼 로라는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나에게 쓰는 편지, 1991)’을 모두 갖춘 미국 중산층 집안의 아내이다. ‘남편들은 그런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 속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나, 그녀는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혼자 속으로 삭인다.

누군가와의 어떤 관계 속에서 ‘착하다’는 것이 꼭 ‘좋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몸이 안 좋은 로라 대신 아들의 아침을 챙기는 ‘착한’ 남편 댄은 그런 의미에서 ‘악하진’ 않지만, 로라에게는 ‘나쁜’ 사람인지도 모른다. 댄은 로라가 읽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서 공감하지 않거나 못한다. 화목한 가정이 목표인 댄은 ‘악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것이 왜 로라의 숨통을 조이는지, 그래서 자살이나 가출로 이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착함’은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나쁨’이 되기도 한다.

 

 

여하튼 로라 역시 남편의 생일파티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구색을 갖추려고 그저 생일 케이크를 굽는 것뿐이다. 눈치가 빤한 아들 리처드도 이미 알고 있다. 사실 엄마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계획도 없다는 걸. 그리고 둘째를 임신 중이지만, 엄마는 이웃집에 사는 부인 ‘키티’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도 리처드는 알고 있다. 남편이 출근 후, 키티가 로라를 찾아온다. 로라, 우리집 개 밥 좀 줘. 그 말 하려고 왔어? 음....사실 자궁에서 뭔가 자라고 있대. 로라는 걱정마라며, 괜찮다고 키티를 안아주며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키티가 병원으로 떠나고, 리처드는 거실에서 불안한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 뭐, 왜? 어쩌라고?? 로라는 리처드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쏘아붙이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한참을 누워 있던 로라는 불현듯 일어나 수면제를 모두 챙기고는 리처드에게 말한다. 우리 다시 케이크 만들자.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거야. 아빠가 오기 전에 할 일이 생겼어. 리처드는 엄마의 변덕을 이해할 순 없지만, 로라가 하고 싶은 걸 같이 하기 위해 식탁으로 온다.

케이크를 다 만들고 나서, 잠깐 있다 올 것처럼 옆집 아줌마에게 리처드를 맡기고 떠나는 로라. 그런데 엄마가 흐느끼는 모습에 리처드는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엄마!!!! 엄마!!!! 뒤늦게 리처드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쫓아가지만 로라의 차는 그대로 멀어진다. 리처드는 엄마에게 버림받았음을 직감한다.

 

 

영화는 로라의 모습을 버지니아 혹은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으로 이어지도록 여러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오버랩’시키면서 보여준다. 버지니아가 자신의 세계 혹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로라 역시 버지니아와 댈러웨이 부인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그들과 ‘공명’한다.

로라는 급하게 차를 몰고 어느 호텔방으로 들어간다. 약을 꺼내놓고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가 로라는 침대에 눕는다. 영화의 첫 장면, 버지니아의 몸이 강물에 잠겨 흘러가듯, 로라가 누운 침대 주변으로 순식간에 (강)물이 차오르며 로라를 집어 삼킨다.

바로 다음 장면, 버지니아는 소설을 구상하며 혼자 중얼거린다. 그래, 그녀가 죽을 필요는 없겠어. 대신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할 것 같아. 그러자 로라는 마치 소설의 주인공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울부짖는다. “안 돼, 도저히 못 하겠어!!” 결국 로라는 집으로 돌아간다. 둘째가 태어나면 집을 나가겠다고 다짐하면서.

 

 

02 클라리사 × 리처드

리처드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차로 떠났던 그 시간에 갇혀 살고있다. 게다가 리처드의 동성애적 성향 역시 엄마로부터 영향 받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처드는 에이즈에 걸렸고, 그의 남자친구는 떠난 지 오래다. 뉴욕의 허름한 건물 꼭대기 자신의 방에 갇혀 사는 리처드를 방문하는 유일한 사람은 옛 연인 클라리사다. 허나 클라리사도 이제는 자신의 여자친구와 동거 중이다.

오늘은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가 있는 날이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처럼 “직접 꽃을 사와야겠어”라고 클라리사는 말했다. 소설의 주인공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이름이 같은 클라리사 본의 별명은 그래서 ‘댈러웨이 부인’이다.

오래 전 리처드와 하룻밤을 보낸 해변의 어느 아침, 리처드가 클라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인사한다. “안녕, 댈러웨이 부인” 클라리사는 고백한다. 그때 이후로 리처드에게 갇혀 있었다고. 리처드는 엄마가 떠났던 시간에 붙잡혀 있고, 클라리사는 리처드와 함께 했던 어느 아침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한다. 나에게 커다란 고통(리처드) 또는 행복의 전부인 시간(클라리사) 속에 그들은 멈춰 있다.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이지만, 실상 우리의 시간은 째깍째깍 초침을 따라 흐르지 않는다.

 

 

리처드가 자살하기 전 흘리는 눈물은 엄마 로라에게 갇혀 지낸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를 떠나야만 했던 엄마를 뒤늦게 이해하게 된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였을까? 클라리사가 자신에게 묶여있지 않기를 바라는 리처드는 결국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려고 한다. “당신은 늘 자부심과 용기를 가장하며, 침묵을 덮으려고 항상 파티를 열지. 내가 죽으면 당신은 행복해 할까?" 리처드는 클라리사에게 묻는다.

“글도 제대로 못 쓰는 내 꼴 좀 봐요. 그동안 내 삶과 행복을 지켜주느라 그댄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참아내며 모두가 날 떠나도 끝까지 내 곁을 지켜준 당신. 이제 당신을 놔줘야 할 것 같군요. 그래도 우리 두 사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잖아요.” 이건 극 중 버지니아가 남편 레너드에게 쓴 편지 내용 중 일부다. 그러나 리처드가 클라리사에게 남기는 글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03 버지니아 × 리처드

영화 속에서 리처드는 버지니아와 함께 결국 자살에 이르는 인물로 등장한다. “나도 알아요. 내가 당신 삶을 망치고 있다는 걸. 내 인생의 행복은 당신 덕분이지만, 살아가며 더 이상 당신 삶을 망칠 수 없어요.” 당신 덕분에 나는 살아가지만, 나의 존재로 당신이 계속 불행해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버지니아와 리처드를 보면 결국 삶의 부조리는 외부적 조건들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마주하게 되는 걸까?

 

 

버지니아의 남편 레너드가 어느 날 묻는다. 왜 당신의 소설에서는 누군가 꼭 죽어야 하냐고. 그러자 버지니아는 그래야 나머지 사람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고, 그래서 시인이 먼저 죽는다고 말한다. 1941년 남편과 언니 앞으로 유서를 남기고 버지니아는 우즈 강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유서에서 버지니아는 이렇게 고백한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삶의 부조리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시인은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시인의 시간(hours)은 죽음으로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이들에게 질문으로 남는다. 때문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부조리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자살은 단 하나의 철학적 문제”인지도 모른다.

 

리처드는 말한다. “클라리사, 당신 삶의 의미를 나한테서 찾진 말아요.” 버지니아의 죽음이 로라에게 흐르듯,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죽음을 통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일종의 ‘의식의 시간(hours)’을 갖게 된다. 그것은 버지니아가 말하는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알게 되는 삶의 의미를 찾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죽은 시인의 ‘해방일지’는 지금도 계속 써지고 있다.

 

댓글 5
  • 2024-02-19 09:59

    '죽은 시인'이 들어가면 명작이 되나봐요
    띠우샘과 읽었을 때는 자신을 마주하라고,
    청량리샘의 글을 함께 읽으니 마주하고서 과감이 싸워가라
    처럼 느껴지네용

  • 2024-02-19 15:31

    삶의 부조리를 견디지 못하고 선택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됨요, 둘이 한 영화에 대해 쓰는데 다른 문장들로 엮이네요~~ 신박한 기획^^ 연재 재개를 응원~~

  • 2024-02-19 15:47

    머무르는 시간으로
    알게되는 것이 있는거 같네요.
    오늘은 ‘하나의 영화, 두개의 시선’에
    잠시 머물러볼께요. 고맙습니다.

  • 2024-02-20 15:31

    the hours, the years
    모두 자막에서는 '세월'로 번역되었을거에요.
    원소설이 처음 우리나라에 번역되었을때도 <세월>이었대요.

    누군가는 버티고, 누군가는 사랑하고, 누군가는 삶대신 죽음을 택하고, 누군가는 죽음 속에서 삶을 택하고....
    결국엔 그 시간들이 세월이 우리를 삼키겠죠. 별 수 없어요. 최선을 다해 존재의 그 아가리를, 심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수밖에^^

    하나의 영화, 두개의 시선. 기획 좋네요

  • 2024-02-25 13:44

    리처드를 중심에 놓고 보다니!! 생각해 본 적 없는 시선이라서 놀랐어요.ㅎ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20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한국영화시리즈 마지막 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예술론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4·19혁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을 겪으며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1965년, 그는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UCLA 영화과에 진학하였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뽑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났다. 당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연출했던 아서 펜의 조감독으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는 형이 있었다. 해외에서 병역기피자가 되어 형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1970년에 강제소환된다. 베트남전과 68혁명의 영향으로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이 휘몰아치던 시기의 미국을 떠나 귀국하면서 보게 된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길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검열뿐만 아니라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검열 제도가 있었고, 해외파에...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한국영화시리즈 마지막 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예술론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4·19혁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을 겪으며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1965년, 그는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UCLA 영화과에 진학하였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뽑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났다. 당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연출했던 아서 펜의 조감독으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는 형이 있었다. 해외에서 병역기피자가 되어 형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1970년에 강제소환된다. 베트남전과 68혁명의 영향으로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이 휘몰아치던 시기의 미국을 떠나 귀국하면서 보게 된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길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검열뿐만 아니라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검열 제도가 있었고, 해외파에...
띠우
2023.05.28 | 조회 33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겨우 잡았는데, 이토록 허망하다니 <짝코>(1983) | 감독 : 임권택 , 주연 : 김희라, 최윤석 | 103분            어느 날, 노숙자 한 명이 '갱생원'으로 들어온다. 갱생원이란 “오고 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밥도 주고 잠도 재워 주는” 곳이지만, 실상은 ‘사회복지’보단 “속세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자들의 ‘사회적 청소’개념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노숙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보고 깜짝 놀란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살고 싶었으나 망실공비(사망, 실종 또는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공비)로 떠도는 빨치산 ‘백공산, 일명 짝코(김희라)’와 한평생 그를 잡기 위해 뒤를 쫓는 토벌대 경사 ‘송기열(최윤석)’은 30년 만에 서울의 ‘갱생원’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송기열은 단번에 짝코, 백공산을 알아본다. 아닌 척하지만 백공산 역시 그를 알아보고 식은땀을 흘린다.     영화 <짝코>(1983)는 지리산을 시작으로, 갱생원까지 오게 된 두 사람의 시간을 ‘플래시백 기법(회상장면으로 넘어간 시점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진행하는 기법)’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러한 전개에선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왜 그토록 송기열이 백공산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백공산과 송기열은 이미 사회에서 잊힌,...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겨우 잡았는데, 이토록 허망하다니 <짝코>(1983) | 감독 : 임권택 , 주연 : 김희라, 최윤석 | 103분            어느 날, 노숙자 한 명이 '갱생원'으로 들어온다. 갱생원이란 “오고 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밥도 주고 잠도 재워 주는” 곳이지만, 실상은 ‘사회복지’보단 “속세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자들의 ‘사회적 청소’개념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노숙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보고 깜짝 놀란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살고 싶었으나 망실공비(사망, 실종 또는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공비)로 떠도는 빨치산 ‘백공산, 일명 짝코(김희라)’와 한평생 그를 잡기 위해 뒤를 쫓는 토벌대 경사 ‘송기열(최윤석)’은 30년 만에 서울의 ‘갱생원’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송기열은 단번에 짝코, 백공산을 알아본다. 아닌 척하지만 백공산 역시 그를 알아보고 식은땀을 흘린다.     영화 <짝코>(1983)는 지리산을 시작으로, 갱생원까지 오게 된 두 사람의 시간을 ‘플래시백 기법(회상장면으로 넘어간 시점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진행하는 기법)’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러한 전개에선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왜 그토록 송기열이 백공산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백공산과 송기열은 이미 사회에서 잊힌,...
청량리
2023.05.02 | 조회 37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불온함의 불온함     -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37년 만에 발견된 미개봉작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난 뭐라고 했었지? 우선은 학교에 가고 상태가 계속 안 좋으면 다시 집으로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은 가라고. 그런데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다정하게 말했다는 이만희 감독, 그는 나에게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로 먼저 기억되는 사람이다. 도회적이고 자유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반항적이고 불온하게 보였던 이혜영을 통해 알게 된 이만희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데뷔작 <주마등(1961)>을 시작으로 1975년 간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총 52편의 영화를 남겼다. 이만희 감독은 1931년생으로 한국전쟁과 해방을 거쳐 4·19 혁명의 환희 속에서 30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던 그의 영화세계는 그 시대 어느 감독보다 폭넓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60년대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대중문화예술이 미치는 영향력을 간파했고 차츰 예술작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갔다.   1968년은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 제작된 해다. 기록에 따르면 <휴일>은 “주체성과 예술성이 없다”, “주체성은 있는데 예술성이 없다”, “이런 작품은 되도록 안 만드는 것이 좋다”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차례차례 반려되었다. 심의 당국으로부터 시나리오의 결말을 고치면 개봉을...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불온함의 불온함     -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37년 만에 발견된 미개봉작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난 뭐라고 했었지? 우선은 학교에 가고 상태가 계속 안 좋으면 다시 집으로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은 가라고. 그런데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다정하게 말했다는 이만희 감독, 그는 나에게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로 먼저 기억되는 사람이다. 도회적이고 자유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반항적이고 불온하게 보였던 이혜영을 통해 알게 된 이만희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데뷔작 <주마등(1961)>을 시작으로 1975년 간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총 52편의 영화를 남겼다. 이만희 감독은 1931년생으로 한국전쟁과 해방을 거쳐 4·19 혁명의 환희 속에서 30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던 그의 영화세계는 그 시대 어느 감독보다 폭넓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60년대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대중문화예술이 미치는 영향력을 간파했고 차츰 예술작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갔다.   1968년은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 제작된 해다. 기록에 따르면 <휴일>은 “주체성과 예술성이 없다”, “주체성은 있는데 예술성이 없다”, “이런 작품은 되도록 안 만드는 것이 좋다”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차례차례 반려되었다. 심의 당국으로부터 시나리오의 결말을 고치면 개봉을...
띠우
2023.04.23 | 조회 38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충치 같은 지리멸렬한 삶 <오발탄>(1961) | 감독 : 유현목 , 주연 : 김진규, 최무룡 | 107분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는”   영화 <오발탄>(1961)은 어느 가족에 대한 짧은 이야기지만, 오랫동안 암울함이 지속됐던 당시의 사회모습을 짜임새 있게 보여준 유현목(1925~2009) 감독의 수작이다. 영화 <오발탄>이 한국 고전영화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건, 동명의 원작소설을 뛰어넘는 유현목 감독의 진지하고 풍부한 디테일이 잘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빈곤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실주의적인 관점이 잘 드러난 영상미는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도둑>(1948)에도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불린다. 허나 대부분 멜로드라마와 스릴러, 액션영화 등이 스크린을 채우고 있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발탄>은 촬영기법이나 내용, 장르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영화의 제작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개봉됐다가 이듬해 5·16 군사정권 하에서 3년 간 상영이 금지된 바 있다. 노모가 가자는 곳이 ‘북’이라는 이유다. 제작비가 없어서 당시 조명감독이었던 김성춘이 사비를 털어 겨우겨우 필름을 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60년대 초, 당시 전후 한국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충치 같은 지리멸렬한 삶 <오발탄>(1961) | 감독 : 유현목 , 주연 : 김진규, 최무룡 | 107분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는”   영화 <오발탄>(1961)은 어느 가족에 대한 짧은 이야기지만, 오랫동안 암울함이 지속됐던 당시의 사회모습을 짜임새 있게 보여준 유현목(1925~2009) 감독의 수작이다. 영화 <오발탄>이 한국 고전영화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건, 동명의 원작소설을 뛰어넘는 유현목 감독의 진지하고 풍부한 디테일이 잘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빈곤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실주의적인 관점이 잘 드러난 영상미는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도둑>(1948)에도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불린다. 허나 대부분 멜로드라마와 스릴러, 액션영화 등이 스크린을 채우고 있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발탄>은 촬영기법이나 내용, 장르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영화의 제작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개봉됐다가 이듬해 5·16 군사정권 하에서 3년 간 상영이 금지된 바 있다. 노모가 가자는 곳이 ‘북’이라는 이유다. 제작비가 없어서 당시 조명감독이었던 김성춘이 사비를 털어 겨우겨우 필름을 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60년대 초, 당시 전후 한국은...
청량리
2023.04.09 | 조회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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