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22회] 몽타주, 시각적 사유의 창조/ <라쇼몽(1950)>

띠우
2022-12-04 21:59
512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흑백영화를 보러갔다! 3부작 중 2편

 

몽타주, 시각적 사유의 창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羅生門(1950)>

 

 

"인간은 그 자신에 대해 정직해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얘기할 때면 언제나 각색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인간, 즉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 <라쇼몽> 연출의도

 

아이들이 세 살 무렵에 거짓말을 시작해 여섯 살 무렵이면 95% 정도가 거짓말을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말을 배우면서부터 바로 거짓말을 하는 것인데, 보통은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시작된다. 나이가 들면서는 자신이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장착한다. 차츰 거짓말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인식이나 기억은 스스로 설정해 놓은 틀을 중심으로 사실을 누락하거나 덧붙인다. 그러다 필요에 따라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는 기묘한 존재들이 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건에 대해 사회적 압력이 한쪽으로 강하게 형성되면, 각각의 진술이 한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지기도 한다.

 

 

동일한 사건임에도 그것을 관찰하고 경험하는 주체에 따라 달리 인식하거나 해석하는 경우를 ‘라쇼몽 효과’라고 말한다. 사람들마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다르다 할지라도, 각각은 개연성에 따른 기억의 주관성에 의지하고 있다. 이러한 ‘라쇼몽 효과’는 1950년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발표한 영화 <라쇼몽>에서 유래되었다.

 

 

플래시백 속으로 사라진 진실

 

영화 <라쇼몽>의 소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소설 <라쇼몽(1915)>과 <덤불 속(1922)>이었다. 때는 헤이안 시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에 스님과 나무꾼, 행인이 비를 피하기 위해 라쇼몽 밑에 모여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님과 나무꾼은 며칠 전 숲에서 발생한 사무라이 살인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건의 진상 파악을 위해 시체를 발견한 나무꾼과 산적 타조마루, 죽은 사무라이의 아내와 무당에 접신한 사무라이의 혼령이 법정에서 진술한다. 그런데 각기 다른 진술을 함으로써 사건은 미궁에 빠져버렸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인물들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혹은 믿고 싶은 대로 말하기 때문이다.

 

 

먼저 산적 타조마루는 자신이 사무라이의 아내 마사코를 겁탈했지만, 사무라이와는 정당한 결투 끝에 그를 죽였다고 떠벌린다. 하지만 마사코의 진술은 다르다. 겁탈 당한 자신을 경멸하는 남편의 눈빛에 제정신을 잃고 자기가 남편을 죽였다고 한다. 무당과 접신한 사무라이는 또 다른 진술을 한다. 마사코의 배신은 사실이지만, 자신은 불명예를 견디지 못해 자결했다는 것이다. 네 명이 진술하는 과거의 기억은 모두 다르다. 구로사와 감독은 각각의 플래시백을 통해 인간이 갖고 있는 이기주의와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회상을 통한 과거이야기는 주관적 진실의 영화적 재구성으로 하나의 진실은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모든 인물들의 태도가 미심쩍다. 짐작해보자면, 산적과 사무라이는 남자로서의 권위와 힘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마사코는 권위적인 남편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결국 두 남자에게 모두 버림받아 살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지만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나무꾼은 시체를 발견한 일만 말한다. 차례대로 각각 원하는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리하여 영화가 끝나도 우리는 누가 사무라이를 죽였는지 알 수가 없다.

 

몽타주, 시간의 가시화

 

구로사와 아키라는 화가를 꿈꾸었던 사람이다. 서양화가 경력도 있는데, 그래서인지 흑백영화에서조차 회화적인 색채감과 인물들의 역동감이 드러난다. 장면마다 배치된 숲의 자연물들도 움직임이나 구성에 따라 인물의 성격, 내면심리의 변화, 상황에 따른 분위기를 생성한다. 여기에는 촬영감독 미야가와 카즈오의 역할이 컸다. 그는 미조구치 겐지의 <우게츠 이야기(1953)>, 오즈 야스지로의 <부초(1959)>의 촬영감독으로도 유명한데, 그 시작에 <라쇼몽>이 있었다.

 

 

 

미야가와는 숲 속의 빛을 촬영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노출계를 사용했다. 빛의 양이 변화하기 쉬운 숲속 촬영에 대비했던 것이다. 거기에 ‘거울조명’을 고안했다. 나무 사이로 새어나오는 태양빛을 8장의 큰 거울로 반사시켜 빛을 비추는 기법이었다. 또 숲에 네트도 설치해 그 위에 나뭇잎을 흩뿌리면서 인물 얼굴에 비치는 나뭇잎 그림자를 조절하였다. 당시에는 태양을 직접 찍으면 필름이 상한다고 금기시되었는데, <라쇼몽>에서는 작렬하는 빛의 효과를 위해 카메라가 여러 차례 태양을 향한다. 이렇게 창조된 이미지들은 더운 여름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인물의 미묘한 정신 상태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었다.

           

미야가와는 구로사와 감독에게 <라쇼몽>을 ‘회색은 없이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가 강한 그림처럼 찍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영화 속 법정은 흰색으로, 라쇼몽은 검은색으로, 숲속은 흰색과 검은색으로 표현되었다. 법정은 단정한 빛이 강조되었고 라쇼몽은 음울한 분위기가 나타났다. 그리고 햇빛의 강렬한 명암을 통해 숲 속은 한여름의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이 영화는 장면에 따라 영화의 시간 구성도 배치하였다. 폭우가 내리치는 라쇼몽 아래는 현재이다. 살인이 일어났던 숲속은 과거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법정의 시간이 흐른다. 카메라는 플래시백을 이용해 죽은 시간을 살려내고 가시화한다. 영화예술이 탄생하기 이전에 시간은 인식되거나 의식으로 존재할 뿐이었지 이미지가 아니었다. 몽타주는 편집을 통해 영화를 시간 예술로 창조해갔다.

 

의미생성의 영화기호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사무라이의 시체’가 있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누가 사무라이를 죽였는가’라는 미스터리 형식을 취하지만, 감독의 목적은 범인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시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각 인물들은 어째서 진실을 숨기고 있을까.

 

 

찰스 샌더스 퍼스에 따르면, 인간에게 기호란 어떤 방식으로든 대상의 규정된 개념을 소통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의 기호학은 커뮤니케이션의 기호학이며 의미작용을 다룬다. 이때 기호는 표상체, 대상체, 해석체가 결합한 삼항 구조를 갖는다. 우선 대상체는 말 그대로 기호가 지칭하는 실제 대상, 영화 속 ‘사무라이의 시체’를 의미한다. 표상체란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진술로 대상체에 대한 새로운 의미생성을 낳고 이것은 해석체로 연결된다. 이 해석체는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마다 발생되는 의미생성이기도 한데, 이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지배적 이데올로기나 사회구조의 토대에 영향을 받는다. 이로 인해 대상에 규정된 개념이 환기된다.

 

다른 예를 들자면, 영화 속에서 사라진 사무라이의 단도(대상체)를 떠올려보자. 이 단도를 기억하는 인물들의 진술(표상체)은 다 다르다(해석체). 산적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으로, 사무라이는 명예를 위한 것으로, 마사코는 정절을 잃은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나무꾼은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건이 일어났던 숲 속에서 보였던 행동들과 법정에서의 진술이 어긋나는 이유는 사회 안에서 내면화된 것들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물에게 시대가 부여해준 자리의 기호로서 영화를 읽게 되면, 각각의 진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다.

 

영화에서 원작 소설과는 달리 많은 변화가 있는 인물은 나무꾼이다. 나무꾼은 소설에서는 그저 시체를 발견하는 역할이었지만, 영화에서는 주요 목격자로서 관객의 판단에 큰 영향을 준다. 우리는 영화 초반부터 ‘알 수 없다’고 주절대는 그가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다. 결국 나무꾼은 다른 사람들의 진술이 거짓임을 밝히지만, 그 역시 행인에 의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들통난다. 심술궂은 행인이 나무꾼이 단도를 훔쳤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승려는 인간들의 비정함에 치를 떤다. 마치 배신당한 관객인 듯이.

 

<라쇼몽>은 카메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시도했다. 서로 다른 진술들을 결합시킨 플래시백과 편집의 몽타주를 통해서 말이다. 몽타주는 시간을 가로질러 신분, 계급, 성별이라는 사회적 틀에 갇힌 각각의 인물의 내면을 이미지로 만들어 우리 앞에 보여주었다. 인간이 이토록 비정하고 이기적이며 자기 합리화의 존재라는 것은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은 문제의식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볼 때마다 새로운 이유는 시대를 넘나들며 열리는 기호들의 의미생성 때문일 것이다.

 

열린 결말,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

 

원작 소설에서 아쿠타가와는 어떠한 희망도 남겨놓지 않았다. 소설은 죽은 사람의 머리털을 뽑아 모으는 노파를 통해 잔혹한 이기심과 자기 합리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에 화가 난 행인이 그 논리 그대로 노파의 옷을 빼앗아버리면서 끝난다. 암울한 현실만을 보여주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 버렸는데, 불행히도 아쿠타가와는 1927년에 자살하고 말았다. 구로사와 감독은 원작과는 다른 결말을 가져온다. 나무꾼이 단도를 훔치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스님과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고 떠드는 행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해도 얼굴을 들지 못하는 나무꾼 사이로 갑작스럽게 갓난아기의 울음이 파고든다.

 

 

"흔히 인간을 믿지 못한다고 말들 하지만 인간을 믿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을 나는 <라쇼몽>에서 말하고 싶었다. 관계를 끊고 싶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문학적으로는 흥미로운 것이겠지만 말이다. 만약 인간을 믿을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죽어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구로사와 아키라의 인터뷰 중에서

 

사실 갓난아기의 등장은 너무나 작위적이다. 인간을 믿을 수 없어 죽는 것 보다는 좀 더 나은 인간을 기대하는 감독의 마음이 엿보인다. 나무꾼이 죄를 뉘우치며 아기를 안고 떠나면서 승려가 인간에 대한 믿음을 되찾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미 아이가 여섯이고, 궁핍하여 단도를 훔칠 수밖에 없었던 나무꾼이 그 모든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여기에 인간애의 회복이라거나 휴머니즘으로 희망을 말하는 이들의 성급함이 다소 아쉽다. 사회전체의 문제이며 고통과 성찰이 필요한 순간임에도 인간이란 존재를 너무 쉽게 긍정해 버리고 있다.

 

참혹한 사건을 마주하면 우리는 서둘러 결론을 지어버리려 한다. 산 사람들이라도 다시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마치 영화 속에서 나무꾼이 아기를 데려갔다고 희망으로 마무리하는 것과 같다. <라쇼몽>을 보다 보니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슬프고 참혹한 사건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사람들은 너무나 성급하게 목소리를 높여가며 결론지으려 한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더라도 고통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함께 생각해가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조차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고통의 시간에 갇혀버린 사람들이 존재한다.

 

평론가 타다 미치타로(多田道太郎1924~2007)에 따르면,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 최초로 영화예술 안에 구체적인 개인을 끌어들인 작가다. 헤이안 시대의 암흑같은 어두운 현실을 배경으로 자기만이 밝게 비춰지기를 바라는 인물들을 차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면은 지금과는 조금 다르다 할지라도, 이기심에 빠져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요즘 세상이 더할 것이다. <라쇼몽>은 일본문화의 시대적 성격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날 사회를 관통하는 인간의 보편적 문제로 파고든다는 점에서 현재에도 의미가 있다.

 

 

 

* 羅生門(라쇼몽),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이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나생문’ 대신 일본원음 ‘라쇼몽’으로 표기. 전염병과 대기근의 헤이안 시대, 도시 외곽문인 라쇼몽은 시체나 사생아를 버리는 장소가 되면서 난세(亂世)의 상징적인 장소.

댓글 6
  • 2022-12-05 11:49

    라쇼몽의 촬영과 색조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니.. 한편의 영화 안에 얼마나 많은 계열들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계열들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고 공명하는가.. 그런데, 내가 보는 것은 또 얼마나 제한적인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그저 스토리 중심으로 라쇼몽을 볼 때도 감탄, 또 감탄하면서 보았고, 두 번 보았지만 볼 때마다 달랐는데.. 그 속에는 내가 읽어내지 못한 참으로 많은 것들이 서로 부딪치며 충돌하고 있군요. 라쇼몽은 우리의 삶의 비밀을 엿보게 하는 영화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 2022-12-05 19:44

    기호들의 의미생성 속에 각자의 진실들이 있겠지요. 하지만 거기엔 파렴치함이나 거짓도 있을 겁니다. 우리의 윤리는 거기에 머물러서 서두르지 않고 각자의 입장을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나서야 구성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2022-12-06 08:27

    아, 구로사와 아키라!!
    전후 일본의 패전과 원폭의 경험 속에서 생겨난 어떤(그러니까,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
    그걸 독특한 자신만의 이미지 언어로 창조해낸 스타일리스트!
    그 자체로 어떤 지층!!
    그러니까 구로사와 아키라는 쭉~다~ 봐야해!! 내년에 우리 구로사와 아키라 작품 전체를 쭉~~~ 보는 건 어떨까요?

  • 2022-12-08 15:23

    언제였던가 파지사유에서 흥미진진하게 봤던 라쇼몽이 기억나네요.
    흑백영화임이 분명한데 머리 속에 남아있는 라쇼몽은 컬러풀한 이미지라서 뭔가 싶었는데
    쵤영기법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나 역시 내 기억하고 싶은대로 대상체를 해석하고 있는걸까요?
    띠우쌤의 생생하고 풍부한 비평 덕분에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드네요^^

  • 2022-12-08 22:31

    라쇼몽
    말로만 여러번 들었는데 꼭 봐야겠단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띠우님 글 읽으니 보고싶어지네요
    언제 시네마드파지에서 상영 가능할까요??

  • 2022-12-09 07:02

    2년전 인가요? 이 영화를 같이 본때가.
    이 영화 재밌을 거라는 띠우님 말에 수수님이 '역시 재미는 상대적인거구나!'라고 귀여운 디스를 했던 기억이...ㅋㅋㅋ(아...그때 넘 재밌었는데...)

    암튼.
    이번 띠우님 글 읽으니
    수수님도 그렇지만, 저도 <라쇼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진짜 그냥' 봤구나 싶어요.
    좋은 영화를 골라줘도 뭐가 좋은 건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루하다고 투덜댔구나 라는...

    띠우님 글을 읽으니
    그 지루하고 거칠었던 영화가 살아나는 기분입니다. 심지어 다시 보고 싶어질 정도 입니다 ㅎㅎㅎ
    잘 읽었어요.

    (와...근데 퍼스의 기호학은 언제 그리 공부를 하셨대요? )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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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2.19 | 조회 183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한국영화시리즈 마지막 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예술론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4·19혁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을 겪으며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1965년, 그는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UCLA 영화과에 진학하였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뽑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났다. 당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연출했던 아서 펜의 조감독으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는 형이 있었다. 해외에서 병역기피자가 되어 형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1970년에 강제소환된다. 베트남전과 68혁명의 영향으로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이 휘몰아치던 시기의 미국을 떠나 귀국하면서 보게 된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길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검열뿐만 아니라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검열 제도가 있었고, 해외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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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3.05.28 | 조회 32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겨우 잡았는데, 이토록 허망하다니 <짝코>(1983) | 감독 : 임권택 , 주연 : 김희라, 최윤석 | 103분            어느 날, 노숙자 한 명이 '갱생원'으로 들어온다. 갱생원이란 “오고 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밥도 주고 잠도 재워 주는” 곳이지만, 실상은 ‘사회복지’보단 “속세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자들의 ‘사회적 청소’개념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노숙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보고 깜짝 놀란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살고 싶었으나 망실공비(사망, 실종 또는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공비)로 떠도는 빨치산 ‘백공산, 일명 짝코(김희라)’와 한평생 그를 잡기 위해 뒤를 쫓는 토벌대 경사 ‘송기열(최윤석)’은 30년 만에 서울의 ‘갱생원’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송기열은 단번에 짝코, 백공산을 알아본다. 아닌 척하지만 백공산 역시 그를 알아보고 식은땀을 흘린다.     영화 <짝코>(1983)는 지리산을 시작으로, 갱생원까지 오게 된 두 사람의 시간을 ‘플래시백 기법(회상장면으로 넘어간 시점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진행하는 기법)’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러한 전개에선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왜 그토록 송기열이 백공산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백공산과 송기열은 이미 사회에서 잊힌,...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겨우 잡았는데, 이토록 허망하다니 <짝코>(1983) | 감독 : 임권택 , 주연 : 김희라, 최윤석 | 103분            어느 날, 노숙자 한 명이 '갱생원'으로 들어온다. 갱생원이란 “오고 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밥도 주고 잠도 재워 주는” 곳이지만, 실상은 ‘사회복지’보단 “속세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자들의 ‘사회적 청소’개념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노숙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보고 깜짝 놀란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살고 싶었으나 망실공비(사망, 실종 또는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공비)로 떠도는 빨치산 ‘백공산, 일명 짝코(김희라)’와 한평생 그를 잡기 위해 뒤를 쫓는 토벌대 경사 ‘송기열(최윤석)’은 30년 만에 서울의 ‘갱생원’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송기열은 단번에 짝코, 백공산을 알아본다. 아닌 척하지만 백공산 역시 그를 알아보고 식은땀을 흘린다.     영화 <짝코>(1983)는 지리산을 시작으로, 갱생원까지 오게 된 두 사람의 시간을 ‘플래시백 기법(회상장면으로 넘어간 시점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진행하는 기법)’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러한 전개에선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왜 그토록 송기열이 백공산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백공산과 송기열은 이미 사회에서 잊힌,...
청량리
2023.05.02 | 조회 363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불온함의 불온함     -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37년 만에 발견된 미개봉작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난 뭐라고 했었지? 우선은 학교에 가고 상태가 계속 안 좋으면 다시 집으로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은 가라고. 그런데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다정하게 말했다는 이만희 감독, 그는 나에게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로 먼저 기억되는 사람이다. 도회적이고 자유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반항적이고 불온하게 보였던 이혜영을 통해 알게 된 이만희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데뷔작 <주마등(1961)>을 시작으로 1975년 간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총 52편의 영화를 남겼다. 이만희 감독은 1931년생으로 한국전쟁과 해방을 거쳐 4·19 혁명의 환희 속에서 30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던 그의 영화세계는 그 시대 어느 감독보다 폭넓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60년대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대중문화예술이 미치는 영향력을 간파했고 차츰 예술작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갔다.   1968년은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 제작된 해다. 기록에 따르면 <휴일>은 “주체성과 예술성이 없다”, “주체성은 있는데 예술성이 없다”, “이런 작품은 되도록 안 만드는 것이 좋다”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차례차례 반려되었다. 심의 당국으로부터 시나리오의 결말을 고치면 개봉을...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불온함의 불온함     -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37년 만에 발견된 미개봉작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난 뭐라고 했었지? 우선은 학교에 가고 상태가 계속 안 좋으면 다시 집으로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은 가라고. 그런데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다정하게 말했다는 이만희 감독, 그는 나에게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로 먼저 기억되는 사람이다. 도회적이고 자유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반항적이고 불온하게 보였던 이혜영을 통해 알게 된 이만희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데뷔작 <주마등(1961)>을 시작으로 1975년 간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총 52편의 영화를 남겼다. 이만희 감독은 1931년생으로 한국전쟁과 해방을 거쳐 4·19 혁명의 환희 속에서 30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던 그의 영화세계는 그 시대 어느 감독보다 폭넓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60년대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대중문화예술이 미치는 영향력을 간파했고 차츰 예술작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갔다.   1968년은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 제작된 해다. 기록에 따르면 <휴일>은 “주체성과 예술성이 없다”, “주체성은 있는데 예술성이 없다”, “이런 작품은 되도록 안 만드는 것이 좋다”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차례차례 반려되었다. 심의 당국으로부터 시나리오의 결말을 고치면 개봉을...
띠우
2023.04.23 | 조회 373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충치 같은 지리멸렬한 삶 <오발탄>(1961) | 감독 : 유현목 , 주연 : 김진규, 최무룡 | 107분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는”   영화 <오발탄>(1961)은 어느 가족에 대한 짧은 이야기지만, 오랫동안 암울함이 지속됐던 당시의 사회모습을 짜임새 있게 보여준 유현목(1925~2009) 감독의 수작이다. 영화 <오발탄>이 한국 고전영화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건, 동명의 원작소설을 뛰어넘는 유현목 감독의 진지하고 풍부한 디테일이 잘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빈곤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실주의적인 관점이 잘 드러난 영상미는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도둑>(1948)에도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불린다. 허나 대부분 멜로드라마와 스릴러, 액션영화 등이 스크린을 채우고 있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발탄>은 촬영기법이나 내용, 장르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영화의 제작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개봉됐다가 이듬해 5·16 군사정권 하에서 3년 간 상영이 금지된 바 있다. 노모가 가자는 곳이 ‘북’이라는 이유다. 제작비가 없어서 당시 조명감독이었던 김성춘이 사비를 털어 겨우겨우 필름을 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60년대 초, 당시 전후 한국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충치 같은 지리멸렬한 삶 <오발탄>(1961) | 감독 : 유현목 , 주연 : 김진규, 최무룡 | 107분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는”   영화 <오발탄>(1961)은 어느 가족에 대한 짧은 이야기지만, 오랫동안 암울함이 지속됐던 당시의 사회모습을 짜임새 있게 보여준 유현목(1925~2009) 감독의 수작이다. 영화 <오발탄>이 한국 고전영화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건, 동명의 원작소설을 뛰어넘는 유현목 감독의 진지하고 풍부한 디테일이 잘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빈곤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실주의적인 관점이 잘 드러난 영상미는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도둑>(1948)에도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불린다. 허나 대부분 멜로드라마와 스릴러, 액션영화 등이 스크린을 채우고 있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발탄>은 촬영기법이나 내용, 장르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영화의 제작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개봉됐다가 이듬해 5·16 군사정권 하에서 3년 간 상영이 금지된 바 있다. 노모가 가자는 곳이 ‘북’이라는 이유다. 제작비가 없어서 당시 조명감독이었던 김성춘이 사비를 털어 겨우겨우 필름을 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60년대 초, 당시 전후 한국은...
청량리
2023.04.09 | 조회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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