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10회] 계손씨는 뭘 잘못했을까

진달래
2023-02-02 06:51
332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그런데 대부인 계씨가 자기 집에서 팔일무를 췄다는 것은 당시 그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논어』에는 계씨를 비롯한 삼환이 벌였던 이런 비슷한 일들이 더 등장한다. 자기 집안 제사에 천자의 제사에서나 쓸 수 있는 제사 음악을 연주하고, 천자가 지내는 태산 제사를 계씨가 지내려고 한 일 등이다.

 

군주도 어쩌지 못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삼환, 노나라의 군주들은 삼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일들을 꾸준히 벌였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14년이라는 기간을 떠돌아 다녀야 했던 것도 정공(定公)을 도와 삼환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노나라는 전국시대 초(楚)나라에게 멸망할 때까지 삼환의 세력을 떨쳐내지 못했다.

 

사마천은 「노주공세가」 말미에 노나라의 도가 쇠약해진 원인 중에 하나로 삼환을 들었고, 특히 이들이 신하임에도 소공(昭公)을 공격하여 내쫓은 일을 꼽았다. 소공이 노나라에서 쫓겨난 이 일은 30대의 공자가 쫓겨나는 소공을 따라 제나라에 가서 제 경공을 만난 일로도 유명하다. 이 때 공자는 제 경공을 만나서 그 유명한 정명(正名)을 이야기했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君君臣臣父父子子)’ 아마도 이 말은 노나라에서 계씨에 의해 쫓겨난 소공의 일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듯하다.

 

소공이 노나라에서 쫓겨나게 된 일은 사실 ‘대부가 군주를 몰아낸 일’이라고 간단히 보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이 당시 노나라의 여러 대부들은 너무 막강한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계씨에게 불만이 많았다. 마침 닭싸움을 계기로 계씨와 후씨(后氏)가 다투게 되었고, 싸움이 크게 번지자, 소공은 이를 이용하여 평소에 계씨에게 불만이 많았던 대부들과 함께 계씨를 공격하려고 했다. 막 계씨를 정벌하려고 진격하려하는데 그 사이, 삼환 중 하나인 숙손씨가 “계씨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중에 무엇이 나은가?”라며 맹손씨와 함께 거꾸로 소공을 공격하였다. 이에 놀란 소공은 제나라로 달아났고, 7년 동안 노나라는 군주가 없는 상태로 있었다. 소공은 여러 번 노나라로 돌아오려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국경 근처 제나라 땅에서 죽었다.

 

계손씨를 위한 변명

 

『논어』에는 공자가 직접적으로 삼환이나 계손씨에 대해서 무도(無道)하다는 표현을 쓴 적은 없다. 그렇지만 앞에서 본 대로 공자는 계씨가 예를 어기는 행동을 비판했고, 정공에 의해 대사구에 등용 되었을 때는 세 대부 집안의 성곽을 허물어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공자의 14년간의 주유는 이를 눈치 챈 계씨에 의해 노나라에서 추방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삼환 중 계씨는 특히 공자와 적대적인 인물로 ‘무도한’ 인물로 평가 받았다.

 

그렇다면 삼환, 그 중에 계손씨는 어떻게 노나라에서 이렇게 큰 세력을 갖게 되었을까? 이는 거슬러 환공의 아들인 장공(莊公) 때로 올라간다. 장공이 죽고, 후계 문제로 동생들인 경보(慶父), 숙아(叔牙), 계우(季友)가 다투게 되었고, 천신만고 끝에 계우가 장공의 아들, 즉 희공(釐公)을 즉위시킴으로써 사건이 종결되게 된다. 희공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삼촌인 계우에게 비 땅을 봉해준다. 이 곳이 바로 『논어』에도 종종 등장하는 계손씨의 근거지인 비(費) 땅이다.

 

그 손자뻘인 계문자(季文子) 때에도 이와 비슷한 후계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이 때도 계문자가 공을 세웠다. 「노주공세가」에는 계문자가 죽고 그의 집에 비단 옷을 입은 아내가 없었고, 마구간에는 곡식을 먹는 말이 없었으며, 창고에는 금과 구슬이 없었다고 했으며, 이런 그를 사람들은 ‘의리 있는 충신’이라고 칭송했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노나라에서 명망까지 얻은 계손씨는 후대로 가면 갈수록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공자가 살던 당대의 계손씨는 어떨까? 이들이 했던 일들도 그 때의 다른 제후국들의 대부들과 비교해서 그렇게 나쁜 일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공자는 계씨가 천자의 예를 쓴 것을 크게 비난했는데 노나라는 주(周)나라를 대신해서 태산에 제사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군주의 역할을 대신했던 계씨가 이를 주관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소공을 쫓아낸 후, 군주가 없는데도 7년 동안 노나라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단지 계씨의 권력이 강했기 때문이라고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세가」를 보면 소공에게 공격을 받기 전 계씨는 일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음을 눈치 채고, 이에 소공에게 자기를 비 땅에 감금하거나 망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소공이 청을 받아주지 않자, 신하 중 한 명이 소공에게 이를 받아주라고 조언했다. 너무 강경하게 대처하면 오히려 분노를 사게 되고, 결국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소공은 이 조언을 무시했다. 이런 소공의 태도를 보고 계씨를 공격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들에게 불리함을 깨달은 숙손씨와 맹손씨가 계손씨의 손을 잡고 거꾸로 소공을 공격한 것이다. 이를 보자면 소공은 진중한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제나라로 쫓겨난 이후에도 신하들의 간언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러니까 소공을 쫓아낸 일에 대해서 오로지 계손씨의 잘못이 있었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소공이 쫓겨나 죽기까지 7년여의 시간 동안 노나라에는 군주가 없었다. 그럼에도 노나라에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계씨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이렇게 군주가 쫓겨나면 여러 공자들이 후계 다툼을 벌이거나, 나라에 난이 일어나기 일쑤인데 말이다. 소공이 죽고 진(晉)나라 대부인 조간자가 사관(史官)에게 어째서 계씨가 소공을 내쳤는데도 아무 일도 없는지 물었다. 그 때 사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계우가 노나라에 큰 공을 세워 비 땅을 받고 상경이 되었고 문자, 무자에 이르러 대대로 그 업적이 늘어났습니다. … 계씨가 정군을 잡은 후 지금까지 네 명의 군주가 지나갔습니다. 백성들이 군주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나라를 장악하겠습니까?”「노주공세가」

 

계손씨에게 부족한 한 가지

 

『논어』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단 한 줄의 기록으로 평가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렇게 보자면 계씨의 경우에는 - 물론 한 사람은 아니지만 - 『논어』에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과 공자의 대화를 살펴보면 많은 부분 공자가 노나라 군주와 주고받았던 내용과 비슷하다.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는지, 공자의 제자들 중에는 누구에게 정치를 맡기면 잘 할 수 있을지 등등, 계씨는 노나라 안에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만큼 정치를 잘 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이들의 이런 노력은 당시 다른 나라들 대부들이 벌이는 일들과 비교해 보면 매우 바람직해 보이기까지 하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 말기는 가히 ‘대부(大夫)’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나라 천자의 힘이 약해진지는 오래 되었고, 능력 없는 제후를 대신해 부상하는 대부들의 수는 점점 늘었다. 이들의 약진은 대외관계에서도 드러나는 데 국제회담의 중심에도 각 나라의 대부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앞서 보았던 제나라의 안자, 정나라의 자산 그리고 진나라의 숙향, 조간자 등등, 이들은 군주의 최측근으로 때로는 군주를 넘는 권력을 행사하며 세계의 질서를 좌지우지 하고 있었다.대부들이 권력을 잡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군주를 갈아치우는 일도 일어났다. 제나라의 경우 대부가 군주를 시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결국 군주의 자리는 강(姜)씨에서 전(田)씨로 넘어갔다. 진(晉)나라의 경우에도 나중에 대부 집안들 사이에 싸움으로 나라가 조(趙), 위(魏), 한(韓)의 셋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흐름 속에서 보자면 노나라의 계씨 혹은 삼환은 군주를 멋대로 갈아치운 적도 없고, 오히려 제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공자의 제자들을 적극 기용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등. 노나라를 위해 한 일도 꽤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계씨가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린 무도한 자의 대표처럼 된 것은 아마도 일정부분 그가 공자와 같은 나라에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그의 행적이 『논어』에 남았고, 공자가 직접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씨의 입장에서 보자면 소공을 쫓아낸 것도 그냥 시대에 흐름에 따른 것이고 특별히 더 많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팔일무 추고, 태산에 제사를 지내려고 했던 무도(無道)한 모습만 부각되는 것이 좀 억울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치는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대가 바름으로 이끌면, 누가 감히 바르게 하지 않겠습니까?” (季康子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 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 「안연,17」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는(問政) 계씨는 공자의 이런 대답을 듣고 정말 정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공자가 계씨의 잘못으로 비판했던 일들은 대체로 당시 군주들이나 권력자들이 행했던 일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이 특별히 더 나쁜 일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지 않았을까?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거나, 그에 따라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만났던 권력자들은 거의 모두 정치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정치의 방법(術)’이 아니라 ‘어떤 정치를 하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이지 않았을까. 아마도 이것이 계씨에게 부족했던  한 가지가 아닐까 싶다.

댓글 2
  • 2023-02-06 10:59

    주나라 예법은 봉건체제를 공고히 하는 질서이므로 공자는 그 질서가 무너짐을 안타까워했겠지요. 그러나 시대는 이미 대부의 권력이 강해지는 때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어찌 계손을 탓할수 있을까요.
    잘 읽었습니다.

  • 2023-02-06 12:06

    잘 읽었습니다.
    잘 알면 비판도 많이 받지요^^
    오랜시간 권력을 잡았다는 건 뭔가 있었을 것도 같은데...
    대부의 시대라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공자님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기도 하네요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진달래
2023.02.02 | 조회 332
논어 카메오 열전
나루터는 어디 있는가   장저와 걸익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께서 그곳을 지나가다 자로에게 나루터를 묻게 하셨다. 장저가 말했다. “저 수레에서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공구이십니다.” 장저가 말했다. “저 분이 노나라 공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장저가 말했다. “그 분은 나루터를 알 것이다.” 자로가 걸익에게 나루터를 물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중유라고 합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노나라 공구의 제자인가?” 자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걸익이 말했다. “강물이 도도히 흘러가듯 천하가 모두 그러하다. 누가 그것을 바꾸겠는가? 또한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곰방메로 흙 덮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 이 일을 말씀드렸다. 공자께서 실망스러운 듯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과는 함께 무리를 지을 수 없다. 내가 사람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논어』「미자,6」   초(楚)나라를 떠나 제자들과 위(衛)나라로 돌아가던 공자 일행은 길을 잃었다. 공자는 하는 수 없이 근처 밭을 갈고 있던 농부들에게 길을 묻기로 했다. 자로가 농부들에게 다가가 나루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멀리...
나루터는 어디 있는가   장저와 걸익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께서 그곳을 지나가다 자로에게 나루터를 묻게 하셨다. 장저가 말했다. “저 수레에서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공구이십니다.” 장저가 말했다. “저 분이 노나라 공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장저가 말했다. “그 분은 나루터를 알 것이다.” 자로가 걸익에게 나루터를 물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자로가 말했다. “중유라고 합니다.” 걸익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노나라 공구의 제자인가?” 자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걸익이 말했다. “강물이 도도히 흘러가듯 천하가 모두 그러하다. 누가 그것을 바꾸겠는가? 또한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곰방메로 흙 덮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 이 일을 말씀드렸다. 공자께서 실망스러운 듯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과는 함께 무리를 지을 수 없다. 내가 사람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논어』「미자,6」   초(楚)나라를 떠나 제자들과 위(衛)나라로 돌아가던 공자 일행은 길을 잃었다. 공자는 하는 수 없이 근처 밭을 갈고 있던 농부들에게 길을 묻기로 했다. 자로가 농부들에게 다가가 나루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멀리...
진달래
2022.11.18 | 조회 334
논어 카메오 열전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 일을 증언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줍니다. 정직은 바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논어』 「자로」18   마지막 유랑지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쫓겨난 후 자기를 등용해줄 군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주유했다. 첫 번째로 도착한 위(衛)나라에 잠깐 희망을 가졌으나, 곧 후계 계승 문제로 시끄러워지자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陳)나라와 채(蔡)를 지나며 공자는 초(楚)나라 소왕(昭王)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초나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공자는 섭공을 만났다. 섭공은 『논어』에 세 번 등장한다. 한 번은 자로에게 공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다음엔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섭공이 공자와 ‘정직(直)’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 ‘정직(直)’에 대한 공자와 섭공의 이 대화는 이후 『논어(論語)』 안에서도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섭공과 만난 공자는 그 길로 초나라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초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 초 소왕이 전투 중에 갑자기 죽었고 이후 초나라 정세가 급격히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공자는 다시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공자의 그의 제자들은 위나라로 가던 중에 노나라에서 돌아와도 좋다는 명을 받고, 14년의 긴 유랑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공자는 긴 유랑 생활 중에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굽힌 적이 없었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 일을 증언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줍니다. 정직은 바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논어』 「자로」18   마지막 유랑지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쫓겨난 후 자기를 등용해줄 군주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주유했다. 첫 번째로 도착한 위(衛)나라에 잠깐 희망을 가졌으나, 곧 후계 계승 문제로 시끄러워지자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陳)나라와 채(蔡)를 지나며 공자는 초(楚)나라 소왕(昭王)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초나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공자는 섭공을 만났다. 섭공은 『논어』에 세 번 등장한다. 한 번은 자로에게 공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다음엔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섭공이 공자와 ‘정직(直)’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 ‘정직(直)’에 대한 공자와 섭공의 이 대화는 이후 『논어(論語)』 안에서도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섭공과 만난 공자는 그 길로 초나라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초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 초 소왕이 전투 중에 갑자기 죽었고 이후 초나라 정세가 급격히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공자는 다시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공자의 그의 제자들은 위나라로 가던 중에 노나라에서 돌아와도 좋다는 명을 받고, 14년의 긴 유랑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공자는 긴 유랑 생활 중에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굽힌 적이 없었다....
진달래
2022.09.18 | 조회 741
논어 카메오 열전
남자(南子)와 공자의 만남   공자께서 남자(위영공의 부인)를 만나자, 자로가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맹세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옹야,26)   남자(南子)는 위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으로 송(宋)나라 사람이다. 춘추시대 군주의 부인을 부를 때는 자기 나라의 성을 붙여서 불렀는데 예를 들어 애강(哀姜)의 강(姜)은 제(齊)나라의 성으로 제나라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남자(南子)의 자(子)는 송나라 성(姓)이다. 위(衛)나라는 『논어』에서 노(魯)나라 만큼이나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으로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14년간의 주유 생활 중 거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공자가 머물렀을 당시 위나라 영공은 나이가 많았다. 영공의 후비였던 남자(南子)는 노쇠한 남편을 대신해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군주만큼 권력을 가진 남자(南子)가 위나라에서 등용되기를 원하는 공자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벼슬을 구하는 사(士)라면 당연히 그 나라에 힘 있는 귀족에게 줄을 대어 군주를 만났기 때문이다. 공자가 영공을 만난 것과 남자(南子)를 만난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를 자로가 싫어했다고 하고, 거기다 공자가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予所否者 天厭之)”라고 했다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다. 공자 후대의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논어』에 남은 이 한 문장은 이후 수많은 추측들을 불러 일으켰고, 그렇게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은 공자 일생에 가장 흥미로운 스캔들이 되었다.   영화 <공자> 중에서   자로가...
남자(南子)와 공자의 만남   공자께서 남자(위영공의 부인)를 만나자, 자로가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맹세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옹야,26)   남자(南子)는 위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으로 송(宋)나라 사람이다. 춘추시대 군주의 부인을 부를 때는 자기 나라의 성을 붙여서 불렀는데 예를 들어 애강(哀姜)의 강(姜)은 제(齊)나라의 성으로 제나라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남자(南子)의 자(子)는 송나라 성(姓)이다. 위(衛)나라는 『논어』에서 노(魯)나라 만큼이나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으로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14년간의 주유 생활 중 거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공자가 머물렀을 당시 위나라 영공은 나이가 많았다. 영공의 후비였던 남자(南子)는 노쇠한 남편을 대신해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군주만큼 권력을 가진 남자(南子)가 위나라에서 등용되기를 원하는 공자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벼슬을 구하는 사(士)라면 당연히 그 나라에 힘 있는 귀족에게 줄을 대어 군주를 만났기 때문이다. 공자가 영공을 만난 것과 남자(南子)를 만난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를 자로가 싫어했다고 하고, 거기다 공자가 “내가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予所否者 天厭之)”라고 했다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다. 공자 후대의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논어』에 남은 이 한 문장은 이후 수많은 추측들을 불러 일으켰고, 그렇게 공자와 남자(南子)의 만남은 공자 일생에 가장 흥미로운 스캔들이 되었다.   영화 <공자> 중에서   자로가...
진달래
2022.07.26 | 조회 547
논어 카메오 열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루는 번지가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라고 알려 주었다. 번지는 다시 안다는 것(知)은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사람을 아는 것(知人)’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번지의 얼굴을 얼핏 보니, 자기가 해 준 말이 무슨 말인지 영 감을 못 잡은 듯하였다. 공자는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사람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말해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번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 지나가고 있던 자하를 불러 물어보았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물었더니 스승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 그 말을 듣고 자하가 말했다.   “훌륭한 말씀이군요!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리실 때 많은 사람 중에 선발하여 고요를 등용하시니 어질지 못한 사람이 멀리 사라졌습니다. 탕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많은 사람 중에 선발하여 이윤을 등용하시니 어질지 못한 사람이 멀리 사라졌습니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 曰 鄕也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논어』 「안연,22」   번지가 안다는 것(知)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사람을 안다는 것(知人)’은 『논어』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1편인 「학이(學而)」에는 첫 장에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人不知而不慍)”라는 문장이, 마지막 장에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다른...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루는 번지가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라고 알려 주었다. 번지는 다시 안다는 것(知)은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사람을 아는 것(知人)’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번지의 얼굴을 얼핏 보니, 자기가 해 준 말이 무슨 말인지 영 감을 못 잡은 듯하였다. 공자는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사람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말해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번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 지나가고 있던 자하를 불러 물어보았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물었더니 스승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 그 말을 듣고 자하가 말했다.   “훌륭한 말씀이군요!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리실 때 많은 사람 중에 선발하여 고요를 등용하시니 어질지 못한 사람이 멀리 사라졌습니다. 탕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많은 사람 중에 선발하여 이윤을 등용하시니 어질지 못한 사람이 멀리 사라졌습니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 曰 鄕也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논어』 「안연,22」   번지가 안다는 것(知)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사람을 안다는 것(知人)’은 『논어』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1편인 「학이(學而)」에는 첫 장에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人不知而不慍)”라는 문장이, 마지막 장에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다른...
진달래
2022.05.29 | 조회 318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