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길을 달려왔다(윤아)

윤아
2023-08-29 11:25
234

 

  따스함과 자유

  『먼길로 돌아갈까?』(게일 콜드웰, 문학동네, 2023)는 게일 콜드웰이 마흔 둘에 폐암으로 죽은 캐럴라인 냅과의 우정을 기억하며 쓴 책이다. 그들은 우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말도 추가하고 싶다. 이들의 사랑은 희생, 인내, 고통 보다 자기 긍정, 성장, 자유와 연결된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5,6년이었다. 둘 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았으며,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들이 만들어낸 사랑과 우정의 경이로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게일은 친밀한 관계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자연스러운 관계가 주는 따스함과 오롯한 자유로움 둘 다를 원했던 그녀는 따스한 관계가 만족되면 자유를 잃었고, 자유를 얻었다 싶으면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처리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캐럴라인도 게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자신의 자율을 침해 받는 것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따스함과 자유가 공존하는 관계를 구현해낸다.

 

 

  게일과 캐럴라인은 닮은꼴이다. 게일은 소아마비를 이겨냈고, 캐럴라인은 거식증의 물살을 헤쳐 나왔다. 두 여성은 알코올중독이라는 자기 파괴의 늪에서도 과감하게 살아나와 존재를 파산시키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개를 통해서 터득하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공통적으로 술이든 사람이든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과 자립을 지켜내기 위해, 그런 힘을 지니기 위해 분투했던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이 공유한 명제는 삶은 고되고 때로 가장 치열한 싸움은 고독하게 치러야 하지만, 두려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상처를 입고 나올지라도 여전히 숨을 쉴 수 있다는 믿음”(119)이었다.

 

 

  이런 삶에서 습득한 결단력과 집요함은 가혹한 내면의 감독관이 되어 가끔은 도가 지나치게 자신들을 몰아붙이곤 했는데, 서로에게는 훨씬 관대했다. 서로에 대한 관대함은 자신들이 선택한 삶에 대한 회의, 그러니까 둘 다 사람보다 개가 더 편한 침울한 내향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들이 친구가 되어가던 어느 날 캐럴라인은 유레카를 외치듯 자신을 ‘명랑한 은둔자’로 게일은 ‘쾌활한 우울증 환자’로 명명한다. 양가감정에서 벗어나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게일은 캐럴라인의 삶과 나란히 놓여있을 때 내 삶이 너무 분명하게 이해되었다.”(16쪽) 말한다. 그녀들의 우정은 혼자일 때보다 둘인 관계에서 더 강하거나 더 관대해지도록 만들어주는 견제와 균형 같은 것이었다. 서로를 신뢰했고, 상대방의 자율을 배려했으며,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레 서로에게 기대게 된다. 게일은 둘의 깊은 유대와 일상 속에서 피어난 우정을 ‘장미에게 자리를 내 주는 격자 울타리’ 같은 관계로 표현한다.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버팀목 같은 존재. 고립과 은둔을 스스로 택했던 두 여성은 서로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인간의 허기 가장 깊은 근원 그 빈방

  게일은 고향에 갔다가 눈보라에 발이 묶여 며칠만에 돌아와서는 자신이 캐럴라인과 반려견 클레멘타인에게 ‘애착의 볼모’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이런 자각은 이전의 관계들에서라면 매우 착잡했겠지만 이번에는 편안한 위안이 된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은 늘 관계에서 도망쳤다고 고백한다. 자유롭고도 따스한 관계가 주는 안정 속에서 이전의 관계를 조망할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리라. 이어서 캐럴라인과 나는 서로의 내면의 무엇을 잠잠히 다스려준 덕분에 밖으로 나가 더 넓은 세상에 발을 담글 수 있었던 거 같다(184쪽)고 말한다. 그들의 내면에 있다는, 서로 다스려주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게일이 중독의 본질이라고 말하던 가슴 속 그 빈방(73쪽)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게일의 ‘가슴 속 빈방’은 캐럴라인 냅이 죽기 몇 달 전에 완성한 책 『욕구들』(북하우스, 2021)에서 이야기하는 ‘인간 허기의 가장 깊은 근원’으로 독해할 수 있다. 캐럴라인은 그 안에 ‘연결과 사랑’의 욕구가 있다고 말한다. ‘사랑 –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안고 안기고자 하는’ 욕구. 사랑은 모든 허기에 항상 붙어 있는 상수이며 음식을, 섹스를,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노력 뒤에 있는 ‘필요와 간절함의 끊임없는 박동’이라는 것이다. 이 광막한 느낌은 어머니의 사랑을 갈망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일종의 영적 갈망의 형태일 수도 있다.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기도 한 이 허기는 끈질기게 지속된다.(『욕구들』, 357쪽)

 

 

 

 

 

 

  그러나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그 친밀함의 결핍과 요구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 캐럴라인의 진단이다. 그 빈방을 채우는 것은 ‘여자들 특유의 불안, 죄책감, 수치심, 슬픔의 혼합물’이다. 여성들의 욕망은 늘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소녀 적부터 억누르는 방식으로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성의 욕구는 죄책감에 눌려서, 대상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기보다 오히려 대상을 피해 빙 둘러가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오히려 여성들 마음속에 깔린 주된 욕구는 ‘욕구에 대한 욕구’ 즉 자신의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밝힐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전하고 안정되었다고 느끼고 싶고, 그 욕구를 만족시킬 충분한 자격과 힘을 갖추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욕구들』,41쪽)이라는 것이다. 게일과 캐럴라인이 삶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얻으려했던 것은 이 자격과 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독립심은 의존성을 꺾고 억제할 때가 아니라 충분히 채워줄 때 자연적으로 발생한다.”(토머스 루이스 등, 『사랑을 위한 과학』, 사이언스 북스, 2011, 281쪽) 게일과 캐럴라인은 서로에게서 내면의 빈방을 채워주는, 욕구의 허기가 충족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들은 서두르지 않았고 상대방의 자율을 분명하게 배려한 덕분에 두려움 없이 안도하며 서로를 받아들였고, 기댈 수 있었으며, 지지와 신뢰를 통해 상대방을 밝은 바깥으로 나오도록 이끈다. 이들에게 자유와 의존은 이분법적 관계가 아니었다. 의존 속에서 더욱 자유로워지는 역설. 이것이 사랑이 아닐까?

 

 

  사이먼 메이는 사랑을 우리 안에서 존재론적 정착의 경험이나 희망을 일깨우는 사람들(혹은 사물들)에게 우리가 느끼는 황홀(『사랑의 탄생』(문학동네, 2016 435쪽)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존재의 터전과 결합하겠다는 요구, 우리 삶이 무너뜨릴 수 없이 안정적이고, 생기 있으며, 닻을 내리고 있다고 느끼고자 하는 요구, 고향을 찾았다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대상이 우리의 가장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수용하고, 인정해주고, 메아리쳐주고, 든든한 정박지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내가 굳이 게일과 캐럴라인의 우정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들은 서로에게 이런 느낌을 선사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많은 사람들은 그 빈방을 다스릴, 근원적 허기를 채워 줄 대상으로 연인이나 가족에게 기대를 품는다. 더 협소하게는 핵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한정한다. 우리가 따듯한 자유로움이 아니라, 외롭고 구속되었다고 느끼는 이유는 ‘가슴 속 빈 방’을 채울 권한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과 연인의 테두리로 한정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제도적 관계 밖에서 서로의 내면의 허기까지 채우는 것은 과한 일이라고 은연중에 결정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끈질기게 지속되는 이 허기를, 자신이 설정한 울타리 안에서 채우고자 노력했으나 결코 그럴 수 없음에 절망해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지친 우리는 쇼핑 중독, 미디어 중독, 알콜 중독에 빠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은 일정부분 우리에게 안정의 울타리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불타는 사랑이든, 관습적 부부관계든 그들의 배타성은 상대를 자유롭게 하는 데는 걸림돌이 된다. 젠더적 관습은 여전히 여성들에게 가족 또는 관계 안에서 헌신과 희생을 강요하고, 여성들은 주고 또 주기만 해서 생긴 분노 서린 피로’, 제 목소리를 찾아내어 귀 기울이려는 외로운 노력(『욕구들』,12쪽)을 탈진할 때 까지 시도한다. 게다가 우리 삶의 배경이 되는 자본주의는 가족과 연인 사이에도 예외 없이 스며들어 있어서, 배타적 소유욕은 애착과 집착 사이를 오가며 상대방을 구속하고 착취적 관계가 되기도 한다.

 

 

  게일도 전통적인 젠더 논리의 연장선에서 필요를 사랑으로, 사랑을 희생으로 혼동했다. 그녀가 “기품과 자율, 그리고 과하게 내주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에 대한 교훈”(125)이 명확해진 것은 캐럴라인과 개들을 데리고 간 숲 속에서였다. 형편없는 관계들 때문에 신뢰가 흔들렸던 그녀는 그 숲에서 쓰러진 신뢰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연인관계에서는 얻지 못했던 ‘기품과 자율’의 관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있잖아 이 만큼 오고 보니까 다시는 어떤 남자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 같아.”(129)라고 말하는 게일을 보면,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얼마나 젠더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어려운가를 알 수 있다.

 

 

  캐럴라인과 게일은 그런 정형화된 관계에서 벗어난다. 그녀들은 레즈비언도 아니고, 함께 살지도 않는다. 떨어져 있지만 서로를 돌보고, 서로에게 의존을 허락한다. 그들은 우리가 가족관계에서 상상하는 헌신을 가족 바깥의 대상에게 약속하고 실천했다. 물론 그녀들이 개를 키우면서 습득한 사랑의 기술은 그녀들의 관계 맺기에 큰 도움을 된다. 헌신과 희생도 사랑이다. 온전히 내가 보호해야 할 존재를 사랑하는 법. 게일이 그녀의 개 시베리안 허스키를 길들이는 방법은, 힘으로 제압하기보다 확실하게 안아주는 방식이었다. 힘을 행사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개화하도록 지켜보고 기다리는, 대결하기 보다는 투항하는 방식의 사랑. 그러나 감정 교류뿐만 아니라 지적교류도 가능한 존재를 만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기쁨이었음에 틀림없다. 친구이자 스승이 되는, 우정의 닮은 사랑.

 

 

 

  새로운 모색

  나는 매주 일요일 고속도로를 달려 학습 공동체에 간다. 우리는 함께 책 읽고, 토론하고, 글 쓰고, 피드백을 나눈다. 한 걸음이라고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고심하여 글을 쓰고, 학우들의 진심어린 조언을 듣는다. 자본의 논리도 가족 이기주의도 성애적 집착도 없다. 따듯하지만 자유롭다. 우리의 관계는 우정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다. 나는 그 자리에서만큼은 가족과 사회에서 강요되는 젠더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유일무이한 하나의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모든 존재가 그렇듯이 인간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게일과 캐럴라인이 그랬듯 좋은 삶을 사는 데는 친밀하고 꾸준한 관계가 필요하다. 그녀들이 그랬듯 나도 이제 또 다른 정형화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상상한다. 그것은 완성된 모양으로 내 앞에 나타나진 않을 것이다. 함께 가꾸고 만들어 가는 형태일 것이다. 따스함과 자유가 공존하고, 기품과 자율을 잃지 않는 관계, 깊은 유대와 안정 속에서 더 자유로워지는 관계말이다.

 

 

   앞으로 내가 맺는 우정과 사랑의 관계는 어떤 형태일까?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나에게는 새로운 길들이 열린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먼 길을 달려 왔다. 캐럴라인은 매우 운이 좋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욕구의 허기를 채우고, 충족되었다는 느낌, ‘바로 이거야’, ‘여긴 내 집이야’라고 느낀다고 말한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찾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확보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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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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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2023.08.31 | 조회 509
인문약방 에세이
    따스함과 자유   『먼길로 돌아갈까?』(게일 콜드웰, 문학동네, 2023)는 게일 콜드웰이 마흔 둘에 폐암으로 죽은 캐럴라인 냅과의 우정을 기억하며 쓴 책이다. 그들은 우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말도 추가하고 싶다. 이들의 사랑은 희생, 인내, 고통 보다 자기 긍정, 성장, 자유와 연결된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5,6년이었다. 둘 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았으며,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들이 만들어낸 사랑과 우정의 경이로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게일은 친밀한 관계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자연스러운 관계가 주는 따스함과 오롯한 자유로움 둘 다를 원했던 그녀는 따스한 관계가 만족되면 자유를 잃었고, 자유를 얻었다 싶으면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처리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캐럴라인도 게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자신의 자율을 침해 받는 것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따스함과 자유가 공존하는 관계를 구현해낸다.       게일과 캐럴라인은 닮은꼴이다. 게일은 소아마비를 이겨냈고, 캐럴라인은 거식증의 물살을 헤쳐 나왔다. 두 여성은 알코올중독이라는 자기 파괴의 늪에서도 과감하게 살아나와 존재를 파산시키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개를 통해서 터득하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공통적으로 술이든 사람이든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과 자립을 지켜내기 위해, 그런 힘을 지니기 위해 분투했던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이 공유한 명제는 “삶은 고되고 때로 가장 치열한 싸움은 고독하게 치러야 하지만, 두려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상처를 입고 나올지라도 여전히 숨을 쉴 수 있다는 믿음”(119쪽)이었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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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
2023.08.29 | 조회 234
인문약방 에세이
    “ 난 난파선을 탐색하러 내려왔다/ 단어들이 목적이다 /단어들이 지도이다/ 난 이미 행해진 파괴의 정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보물들을 보러왔다/<중략> 내가 찾으러 왔던 것/ 그것은 잔해이지 잔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체일뿐 그것을 둘러싼 신화가 아니다”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6쪽)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는 그녀의 작품 활동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다. 1960년대 서구 가부장제 사회를 ‘난파선’으로 명명하며 위험한 심해에 들어가 그녀가 응시하고자 한 ‘잔해’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 속의 자아는 불편한 잠수복을 입고 산소마스크를 달고 내려가 검은색으로 변한 바다 속으로 몸을 옯겨 놓는다. 그곳에는 중력이 없고 산소가 없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권력이 없고 너와 내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스트레스를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익사자의 시체, 고장난 나침반, 물먹은 일지. 그곳에서는 이 모두가 그녀 자신이며, 우리이다. 여기에서 길어올린 ‘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레즈비언이며 가부장제에 부역한 이혼녀이고 세 아이의 엄마였던 미국여성 시인인 그녀의 글속에서 자유롭게 횡단하고 있다. 그녀의 에세이 <뿌리에서 갈라지다>와 <피,빵 그리고 시>에서는 자신을 손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 제치는 그녀의 소심함과 용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유대인이면서 미국 주류 사회의 토큰이 되고자 했던 그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수치스럽지만 꼭 써야만 하는 의무감으로 표현된다. “내가 유대인인 것은 기독교인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까”(288쪽) , “유대인으로서 나의 양가감정이 대체 어디서...
    “ 난 난파선을 탐색하러 내려왔다/ 단어들이 목적이다 /단어들이 지도이다/ 난 이미 행해진 파괴의 정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보물들을 보러왔다/<중략> 내가 찾으러 왔던 것/ 그것은 잔해이지 잔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체일뿐 그것을 둘러싼 신화가 아니다”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6쪽)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는 그녀의 작품 활동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다. 1960년대 서구 가부장제 사회를 ‘난파선’으로 명명하며 위험한 심해에 들어가 그녀가 응시하고자 한 ‘잔해’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 속의 자아는 불편한 잠수복을 입고 산소마스크를 달고 내려가 검은색으로 변한 바다 속으로 몸을 옯겨 놓는다. 그곳에는 중력이 없고 산소가 없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권력이 없고 너와 내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스트레스를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익사자의 시체, 고장난 나침반, 물먹은 일지. 그곳에서는 이 모두가 그녀 자신이며, 우리이다. 여기에서 길어올린 ‘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레즈비언이며 가부장제에 부역한 이혼녀이고 세 아이의 엄마였던 미국여성 시인인 그녀의 글속에서 자유롭게 횡단하고 있다. 그녀의 에세이 <뿌리에서 갈라지다>와 <피,빵 그리고 시>에서는 자신을 손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 제치는 그녀의 소심함과 용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유대인이면서 미국 주류 사회의 토큰이 되고자 했던 그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수치스럽지만 꼭 써야만 하는 의무감으로 표현된다. “내가 유대인인 것은 기독교인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까”(288쪽) , “유대인으로서 나의 양가감정이 대체 어디서...
꿈틀이
2023.08.29 | 조회 115
인문약방 에세이
      지난 시간 세미나에서 현모양처와 관련된 나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셨다. 그때는 단순히 현모양처가 아이 옷을 잘 입히는 게 아니지 않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난 우리 아이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엄마이고 애를 자율적으로 키웠다고 자부하고 살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내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난 왜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을까? 노력도 안 하면서 왜 그토록 줄기차게 애기하고 다닐까?       난 기억력이 안 좋은 편임에도 기억나는 몇 가지들은 음식에 대한 것이 많다. 엄마 심부름으로 아빠 드릴 보신탕을 사러 심부름 하던 기억. 비린 것을 싫어하는 엄마가 생선을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해주시던 생선조림. 가족이 많다 보니 항상 음식은 부족했고 엄마음식은 너무 맛있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엥겔지수는 상당했을 것이다. 애들은 서로서로 같이 잘 켰고 엄마는 때에 맞춰서 밥을 해주는 것으로도 엄마의 소임을 다 하신건데 거기다 돈까지 벌어오셨다. 물론 엄마의 고단한 생활은 어린 자식들에게 폭발한 적이 많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명절에도 엄마의 주방은 빛을 발한다. 육형제의 장남인 아버지 형제들과 그 가족까지 모두 모이면 30명은 족히 되는 대가족의 음식준비의 대장인 엄마는 작은 엄마들을 지휘하며 요리를 만드시고 그 모든 행사가 끝나시면 그것으로 아빠에게 유세를 하셨다. 나이가 9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엄마는 아빠의 밥을 챙겨주시는 것으로 아내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신다. 배우자가 정말 원하는 게 무언지 궁금하지도 묻지도 않으신다. 엄마에게는 가족을 위해 차리는...
      지난 시간 세미나에서 현모양처와 관련된 나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셨다. 그때는 단순히 현모양처가 아이 옷을 잘 입히는 게 아니지 않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난 우리 아이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엄마이고 애를 자율적으로 키웠다고 자부하고 살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내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난 왜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을까? 노력도 안 하면서 왜 그토록 줄기차게 애기하고 다닐까?       난 기억력이 안 좋은 편임에도 기억나는 몇 가지들은 음식에 대한 것이 많다. 엄마 심부름으로 아빠 드릴 보신탕을 사러 심부름 하던 기억. 비린 것을 싫어하는 엄마가 생선을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해주시던 생선조림. 가족이 많다 보니 항상 음식은 부족했고 엄마음식은 너무 맛있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엥겔지수는 상당했을 것이다. 애들은 서로서로 같이 잘 켰고 엄마는 때에 맞춰서 밥을 해주는 것으로도 엄마의 소임을 다 하신건데 거기다 돈까지 벌어오셨다. 물론 엄마의 고단한 생활은 어린 자식들에게 폭발한 적이 많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명절에도 엄마의 주방은 빛을 발한다. 육형제의 장남인 아버지 형제들과 그 가족까지 모두 모이면 30명은 족히 되는 대가족의 음식준비의 대장인 엄마는 작은 엄마들을 지휘하며 요리를 만드시고 그 모든 행사가 끝나시면 그것으로 아빠에게 유세를 하셨다. 나이가 9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엄마는 아빠의 밥을 챙겨주시는 것으로 아내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신다. 배우자가 정말 원하는 게 무언지 궁금하지도 묻지도 않으신다. 엄마에게는 가족을 위해 차리는...
시소
2023.08.29 | 조회 126
인문약방 에세이
    출생의 비밀 잠결에 엄마와 외할머니의 말소리를 들었다. “남의 자식 키우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억울하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곧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잠결이지만 나는 놀랐다. ‘이런 일이 우리 집에? 나에게?’ 나와 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가 가출을 했다. 언니네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고, 엄마에게 “계모라서 애한테 너무 신경 안 쓴 거 아니냐고” 모진 소리를 하고 갔다. 살기 바빠서 내 새끼고 남의 새끼고 간에 건사하지 못한 건 맞지만, 본인 또래의 여자에게 계모소리 들은 것을 엄마는 분해했다. “지가 뭐라고!” 언니는 가출청소년이 되었고, 우리 집은 문제아가 있는 문제 가정이 되었다. 당시는 밤 9시만 되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청소년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라는 ‘계몽적’ 멘트가 나왔던 시절이다. 뉴스에서는 ‘문제 청소년은 문제 가정에서 나온다’는 캠페인을 자주 내보냈다. 나는 우리 집의 문제가 걱정스러웠지만, 그것보다는 이걸 사람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우선이었다.     언니의 가출은 계모 때문일까? 아니라고는 말 못 한다. 그러나 언니네 담임선생님 말고 언니의 가출을 엄마와 연관 지어 생각한 사람은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계모라서가 아니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 언니는 가출했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이다. 가난과 돌봄의 공백은 이어진 문제이고,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언니는 격렬하게 맨몸으로 겪어냈다. 언니의 가출은 두 달 정도 지속되었다. 돌아왔지만 우리와 살지 않고 혼자 사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거기서 학교에 다녔는데, 몇...
    출생의 비밀 잠결에 엄마와 외할머니의 말소리를 들었다. “남의 자식 키우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억울하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곧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잠결이지만 나는 놀랐다. ‘이런 일이 우리 집에? 나에게?’ 나와 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가 가출을 했다. 언니네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고, 엄마에게 “계모라서 애한테 너무 신경 안 쓴 거 아니냐고” 모진 소리를 하고 갔다. 살기 바빠서 내 새끼고 남의 새끼고 간에 건사하지 못한 건 맞지만, 본인 또래의 여자에게 계모소리 들은 것을 엄마는 분해했다. “지가 뭐라고!” 언니는 가출청소년이 되었고, 우리 집은 문제아가 있는 문제 가정이 되었다. 당시는 밤 9시만 되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청소년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라는 ‘계몽적’ 멘트가 나왔던 시절이다. 뉴스에서는 ‘문제 청소년은 문제 가정에서 나온다’는 캠페인을 자주 내보냈다. 나는 우리 집의 문제가 걱정스러웠지만, 그것보다는 이걸 사람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우선이었다.     언니의 가출은 계모 때문일까? 아니라고는 말 못 한다. 그러나 언니네 담임선생님 말고 언니의 가출을 엄마와 연관 지어 생각한 사람은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계모라서가 아니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 언니는 가출했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이다. 가난과 돌봄의 공백은 이어진 문제이고,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언니는 격렬하게 맨몸으로 겪어냈다. 언니의 가출은 두 달 정도 지속되었다. 돌아왔지만 우리와 살지 않고 혼자 사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거기서 학교에 다녔는데, 몇...
겸목
2023.08.29 | 조회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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